이전 글에서 접반사, 관반사에 대해서 얘기 했으니 이제 고려 내에서 사절들을 영접하는 방법에 대해 정리해봐야지
개경에 도착할 때, 송 국신사 사절단이 제일 먼저 이르는 곳은 서교정이야. 고려도경에 따르면 서교정은 선의문 밖 5리쯤에 위치해읐는데, 여기는 사절단이 개경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영접을 받는 위치이자, 귀국시에는 개경내 마지막 송별이 있는 곳이지.
특히 이 郊라는 지명은 지금으로 따지면 번화가야. 한국으로 따지면 명동같은 곳이겠네. 이런 지역을 지나면서 고려는 송 사절단에게 고려의 번화와 경제적 강함을 과시하고, 송은 역으로 대규모 사절단의 위세를 보여주면서 둘 다 서로한테 자기가 강하다는 걸 암시한 걸로 보여. 아쉽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서교정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정지을 수 없어.
서교정을 지나면 사절단은 개경 내 관사인 순천관이라는 곳에 도착해. 근데 이 순천관은 꽤 흥미로운 곳이야. 왜냐하면 순천관은 원래부터 관사가 아니라, 고려 국왕의 별궁을 개조한 곳이거든. 개경 내에는 원래 회동관/영빈관/청하관 등 외국 사절을 위한 관사가 다수 존재했어. 그런데 문종대에 송 사절단을 위해 별궁을 관사로 개축했는데, 그게 순천관이야.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두가지 정도가 있어.
먼저 전술했지만 서교정-순천관 루트는 고려 최고 번화가를 지나는 길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걸 통해서 송 사절단을 화려하게 영접하고, 동시에 고려의 위상을 자랑하려는 의도.
두 번째는 고려의 이중외교를 위해서야. 고려는 송, 여진, 거란 등 여러 나라들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맺는 다중외교 정책이었지. 그런데 이때는 요와 송이 동시에 사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어. 그런데 둘이 만나면? 난리나겠지. 그래서 고려는 사절을 보낸 국가에 따라서 서로 다른 관사에 이들을 배치했는데, 특히 송과 요의 경우에는 완전 반대 위치에 있는 관사를 제공함으로써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걸로 보여.
일단 송 사절단이 순천관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받는 대접은 불진연이라는 연회야. 불진연이라는 건 여행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연회라는 뜻이야. 이 연회는 고려 개경과 왕실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받는 첫 연회기 때문에 고려의 고위 관원들이 거의 참석해. 전 파트에서 얘기했지만, 이때 사절단을 수행하는 고려 관원을 관반사라고 불러. 잊지 않게 한번 더 쓴거야.
이후에 이어지는 의례들은 영조례, 연례, 배표례, 전별연 등이 있어. 순서대로 하나씩 정리해보자.
영조례는 고려 국왕이 송 황제의 조서를 받는 의례라는 뜻이야. 이게 행해지는 곳은 회경전이라는 곳인데 여기 얘기도 잠깐 해보자.
원래 고려 궁궐 정전은 건덕전 하나였어. 그런데 현종대 거란과의 전쟁으로 개경이 불타서 궁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회경전이라는 전각을 추가로 건축했어. 이 건덕전과 회경전은 정전인데, 왕실의 주요 업무나 행사가 치뤄지는 곳이었어. 그럼 당연히 송 황제의 조서를 받는 큰큰큰큰 행사는 여기서 행해져야겠지? 그래서 회경전에서 영조례가 이루어졌어. 그리고 이 영조례 다음 이어지는 연회가 연례(燕禮)였어.
이 이후에 사절이 개경에 체류하는 동안 파티파티파티또파티가 계속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외교 사안에 대한 교섭이 계속 이루어지겠지. 이때 주로 외교 사안은 요 공격에 대한 지원 요구, 혹은 송에게 책봉을 받으라는 요구가 있었지.
다음은 배표례야. 배표례는 영조례에서 받은 조서에 대한 고려 국왕의 답문, 즉 표문을 사절단에게 주는 의례였어. 그리고 이게 끝나면 드디어 전별연. 사절단이 집에 가는 연회를 열고 사절단은 궁에서 떠나게 돼.
이 이후에 사절단이 귀국하는 과정은 입국 역순으로 이루어 지는데, 당연히 가는 길마다 파티파티였지. 그리고 귀국 과정에서 개경 내에서는 관반사, 개경 밖에서 군산도까지는 접반사가 다시 수행했어.
디게 복잡하지? 근데 이건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였어.
우선 고려가 송과 교류를 재개한 이후, 고려 사절을 영접하는 송의 영송 체계에 영향을 받았다는 거야. 송의 영송 체계는 당연히 고려보다 화려하고 체계적이었어. 이런 영송을 경험한 고려 사절들(ex 김부식)이 고려의 영송 체계 재정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야.
그리고 동아시아 정세 얘기지만, 송, 요, 금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기 위해 고려는 굉장히 노력했지. 그게 가장 드러나는 건 외교 사절을 대하는 고려의 자세였어. 이 시기에 고려는 최대한 손해는 없이, 이득은 최대로 하는 외교를 시도했어. 그렇기에 다른 국가의 사절이 왔을때 고려를 적으로 돌리면 골치아파지는 강한 국가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선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영송 쳬계를 경험시켜 줄 필요가 있었지.
이상 지금 공부하던 송 사절에 대한 고려의 영송 과정에 대한 정리였어.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