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1차 여요전쟁을 계기로 송과 단교하고 거란, 그러니까 요의 책봉을 받았거든?
근데 여기서 변화가 생기는건 대략 고려 문종대 부터야.
고려 문종대에는 송과 고려가 다시 국교를 맺었고, 이 즈음부터 요는 당시 성장하기 시작한 금에 밀리기 시작했어.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는 고려 예종대 가장 극에 달했지.
이때 각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을 이야기해보자면
고려 예종은 요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여요간 최대 영토 분쟁지역이었던 내원성, 포주를 회복했어.
송은 문종대 회복한 고려와의 우호관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려 시도했고, 동시에 금과 연계해서 요를 공략하려고 시도했지.
금은 1115년에 완안 아골타의 칭제가 있었고, 반대로 요는 점점 약화되면서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어. 이건 전술한 고려의 요 연호 사용 정지가 잘 드러내고 있지.
한마디로 요의 쇠퇴와 금의 성장, 그리고 이 상황을 틈타 송은 금과 고려에게 우호정책을 펴서 요에게 복수하려고 한거지.
고려는 이시기 송의 적극적인 친고려 정책을 이용해서 송 및 중국대륙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을 도입해왔고, 외방 문제를 겪지 않는 동안 국가 운영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지.
동시에 금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었는데, 이건 고려가 요에게서 영토를 회복하는 사건에 대해 금은 구두로 동의했다는 거야. 즉 금은 이때 고려와 우호, 최소 중립적인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는 거지.
한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이때 고려는 어디와도 책봉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는 건데, 이건 후술하도록 하고.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건 이때 송이 고려에 보낸 사절단에 대한 얘기야. 물론 문종대 국교가 회복된 이후에도 여러차례 사절교류가 있었지만, 예종의 훙거를 명분으로 송이 보낸 사절단의 규모는 굉장히 대규모였어.
여기에 대한 이유는 방금 이야기 한 책봉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
당시 고려는 요 연호 사용을 멈추면서 책봉관계도 단절됐어. 송은? 문종대 국교를 회복하긴 했지만 책봉관계는 맺지 않았지.
송 입장에서는 고려를 책봉국으로 삼고 싶었을거야. 그래야 고려와의 관계가 더 강해지고 대요정책에 도움이 될 테니까. 송은 이때 고려에 여러차례 군사적, 물자적 지원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항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거든.
그래서 송은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고려에 송의 국력이 건재하며 이를 통해서 외교관계에서 우위를 잡으려고 한 걸로 추정돼.
물론 고려라고 가만히 있진 않겠지. 송과 우호관계를 맺는건 좋은 일이지만 굳이 외교적으로 기어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송의 대규모 사절단에 대해서 고려는 굉장히 치밀한 영접 준비를 했어.
영접에 대해서 더 자세히 써보도록 할게.
사절단이 올 때 기본적 과정은 송에서 지첩사를 보내서 통지를 하고, 이를 받은 고려는 사절을 맞이할 여러 준비를 했어.
우선 고려 경내로 사절단이 들어오면 이들을 맞이할 인사를 배치했는데, 이를 계수관, 접반사라고 불러.
계수관과 접반사는 대체로 송에 사절 경험이 있거나 학문이 뛰어난 인사들을 배치해. 이때 배치된 인사들 중 이름이 익숙한 사람이 있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지. 이들은 송 사절이 고려 경내에 진입하면 입국 수속, 환영 절차 등을 담당하는 인물들이었어.
접반사는 군산도부터 개경에 도착할 때 까지 송 사절들을 수호하고 이동간에 생기는 여러 절차, 업무를 담당했어. 주로 정3품 상서, 정4품 시랑이 접반사에 임명됐지.
계수관은 사행로에 지나가는 주목에서 이들을 환영하는 절차를 담당했고.
접반사와 계수관이 이렇게 사절단을 수행해서 예성강에 도착하면 고려 조정에서는 관반사를 임명해.
이들은 사절단이 개경에 들어온 후 이들을 수행하는 역할이야. 특히 관반사는 사절단 숙소 근처에 거처하면서 영접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이들이 궐내 궁궐의례를 행하는 과정에서도 사절단을 보좌했어.
특히 관반사는 외교 사안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이른바 외교 실무자들이 배치됐기. 그렇기 때문에 주로 사행 경험이 있는 고위관원들이 임명됐어. 고위관원이라고 하면 종2품 재상, 정4품 시랑(경우에 따라 종4품 전중소감, 승선)을 얘기하기. 특히 종2품 재상은 고려사 관직체계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재추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굉장히 높은 관직이지.
고려의 이런 접반사.관반사 체제는 송의 영향을 크게 받은 걸로 보여.
차이가 있다면 송은 외교 사절의 지위, 외교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서 영접단의 지위에 차등을 두었지만 고려는 일관되게 운용했다는 차이가 있지.
일단 여기까지.
밥먹고 이 다음 내용 정리해야지.
(IP보기클릭)121.140.***.***
(IP보기클릭)168.188.***.***
으아아 컵라면 먹으면서 쓰라는 거구나 | 24.04.18 13:1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