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처럼 아름답다, 정준호가 말하는 ‘린 더 라이트브링어’
남녀가 인연을 찾을 때 으레 외모부터 보듯 게이머도 신작을 접하면 가장 먼저 원화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특히 게임을 하는 동안 직접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거나 상호작용하는 캐릭터의 원화는 그 의미가 각별하다. 덕분에 개발팀에서도 원화가는 PD에 버금갈 정도로 뭇 유저의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 직군으로 통한다. 90년대부터 급성장한 국산 게임 산업에도 이처럼 스타 일러스트레이터라 할만한 인물이 몇 있는데, 舊소프트맥스 ‘창세기전 3’로 명성을 떨친 김형태와 엔씨소프트 ‘리니지 2’를 통해 확고한 입지를 점한 정준호가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 정상급 원화가이자 오랜 절친이기도 한 두 사람이 최근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형태는 2014년 전 직장을 퇴사하고 시프트업을 설립, 자체 개발한 모바일 RPG ‘데스티니 차일드’를 선보인 바 있다. 김형태 특유의 감각적인 작화와 성인 지향 컨셉이 시너지를 일으킨 ‘데스티니 차일드’는 수개월간 양대 마켓 매출 최상위권을 지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정준호 역시 2014년 기존 직함을 내려놓고 펄사 크리에이티브 대표로 영전하여 수년간 모바일 RPG ‘린 더 라이트브링어’ 개발에 박차를 가해왔다.
스타 일러스트레이터 정준호의 홀로서기, 모바일 RPG '린 더 라이트브링어'.
이러한 모바일 RPG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수집의 대상인 캐릭터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원화가 출신 대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여타 스타트업이 도달하기 힘든 최상의 품질을 뽑아낼 수 있다. 과연 정준호 대표는 절친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 오는 3월 14일(목) ‘린 더 라이트브링어’ 양대 마켓 출시를 앞두고 판교에 자리한 펄사 크리에이티브에서 그를 만났다.
● 엔씨소프트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였는데 5년 전 돌연 퇴사했다
: 어려서부터 콘솔 게임을 즐기며 자란 ‘닌텐도 키드’인 내가 90년대 후반 게임 업계에 들어와 ‘리니지 2’를 만난 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었다. 당시 시장이 PC 패키지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봤고 MMORPG가 등장하며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과정도 직접 경험했으니까. 이제 그 거대한 흐름이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며 굉장한 기회라 여기던 차에 공동 창업 제안을 받고 수락하게 됐다.
닌텐도 키드이자 MMORPG 전성기의 산증인이기도 한 펄사 크리에이티브 정준호 대표.
● 한 발 앞서 독립한 시프트업 김형태 대표와 절친인데, 뭔가 조언을 해주던가
: 워낙 오래 알고 가까운 사이라 새삼스레 조언이라기는 그렇고, 직접 게임을 개발하고 서비스하며 겪은 우여곡절 경험담을 많이 들어왔다. 최근에는 ‘린 더 라이트브링어’ 막바지 작업 때문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지인들보다는 자주 연락하는 편이다.
● 2015년 창업했는데 ‘린 더 라이트브링어’ 출시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 당초 계획은 지금보다 훨씬 작은 게임이었다. 그런데 근 몇 년간 모바일 게임의 제작 규모가 훌쩍 커지면서 시장의 논높이도 그만큼 높아지지 않았나. 과연 이걸로 유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1년 반 정도 개발해온 프로토타입을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다시금 방향성을 다잡고 완성한 작품이 지금의 ‘린 더 라이트브링어’다.
● 첫 작품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장르와 플랫폼 선택에 고민이 많았겠다
: 일단 모바일로 즐기는 RPG라는 대전제가 있었다. 다만 5년 전까지만 해도 모바일 MMORPG는 제대로 된 레퍼런스도 없었고 스타트업이 감당할 수 있는 제작 규모도 아니었다. 반면 수집형 RPG는 ‘서머너즈 워’, ‘세븐나이츠’ 같은 견조한 흥행작이 있었고, 우리가 중시하는 글로벌 테이스트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린 더 라이트브링어'는 모바일 게임 시장의 스테디셀러 장르인 수집형 RPG로 개발됐다.
● ‘린 더 라이트브링어’가 지닌 최대 무기는 역시 원화다. 디자인 컨셉을 설명해달라
: 캐주얼하면서도 글로벌 테이스트에 부합하는 디자인 컨셉을 고민한 결과, 동화야 말로 다양한 연령층과 국가에서 두루두루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판단했다. 동화라는 게 흔히 왕자가 공주를 구하러 가고, 마녀와 드래곤을 무찌르고 평화를 이루는 이야기다. 나쁘게 말하면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제대로 접근할 수만 있다면 가장 왕도적인 컨셉이기도 하다.
화풍에 있어서도 보다 개성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흔히 포토 리얼리스틱를 추구하면 사실적인 묘사에 집착하다 창작자의 개성이 도드라지기 힘들고, 논 포토 리얼리스틱으로 가게 되면 결국 미소녀 만화풍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도 극단적으로 쏠리지 않은 지점에서 ‘린 더 라이트브링어’만의 아트 스타일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 캐릭터 조형이 구체 관절 인형 같다. 색감도 화사해서 여성 유저에게 인기가 많겠다
: 국내 게임 업계의 아트 스타일은 다분히 남성향으로 편중되어 있다. 가령 여성 캐릭터의 섹슈얼리티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식이다. 따라서 보다 넓은 유저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여성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아트 스타일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현재 ‘린 더 라이트브링어’ 개발팀에는 3D 테크니컬 아트 디렉트를 비롯해 많은 여성 개발자가 함께하고 있다.
정준호 대표의 장기가 유감 없이 발휘된 개성적이고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
● 그렇다고 너무 인형 같은 캐릭터만 있어도 몰개성하지 않을까
: 오히려 ‘린 더 라이트브링어’에는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일반적인 미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노쇠한 할아버지나 육체파 여성도 있고, 피부색뿐 아니라 인종적 특징까지 살아있는 외국계 캐릭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오버워치’에서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아 우리 게임에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다.
● 원화도 훌륭하지만 그걸 3D 모델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점이 눈길을 끈다
: 사실 기술적인 난점보다 비용 문제로 잘 시도되지 않는 방식이다. 3D가 이러한 느낌을 내려면 그만큼 풍부한 덱스처가 필요한데, 원화의 품질이 높으면 높을수록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나마 콘솔 게임은 주요 캐릭터가 제한적이라 어느정도 비용 조절이 되지만 수집형 RPG에서는 쉽사리 손대기 어려울 수밖에. 다행히 ‘린 더 라이트브링어’는 대표인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원화인지라 그냥 나 자신을 갈아 넣었다(웃음).
원화의 느낌이 3D 모델링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좌측이 원화, 우측이 3D.
● 다만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지려면 원화만큼이나 스토리도 중요하다
: 앞서 언급했듯 이야기의 큰 줄기는 신비한 소녀 ‘린’을 중심으로 한 동화풍 모험담이다. 이와 더불어 ‘시간의 틈새’라는 콘텐츠가 있는데, 여러 캐릭터의 개별적인 스토리를 바로 여기서 감상할 수 있다. 가령 본편에서 A랑 B가 일행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일국의 공주인 C는 어쩌다 여행길에 올랐는지 같은 소소한 에피소드와 보상이 담겨있다.
● 캐릭터 하나에 들이는 공이 워낙 크다 보니 오히려 업데이트에 발목을 잡진 않을까
: 개인적으로 ‘정상급 원화가’라는 수식어가 굉장히 부담스럽다. 겸손 떠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시기를 잘 타고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거의 25년간 산업에서 실무를 담당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간 대비 많은 작업량을 쳐낼 수 있는 것은 맞다. 업데이트 로드맵은 사업팀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확언하기 어렵지만 유저 여러분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겠다. 참고로 론칭 스펙에는 약 120여 캐릭터가 포함된다.
● 실력파 성우의 목소리 연기와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 성우나 음악은 아무래도 비용과 시간에 쫓기는 스타트업이 욕심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행히 ‘린 더 라이트브링어’는 넥슨이라는 경험 많고 자본력 있는 파트너가 조력해준 덕분에 좋은 성우진은 물론 보컬 OST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목소리의 경우 메인 스토리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모든 대사를 녹음했고, 그 외에는 전투 시 필요한 음성 정도가 존재한다.
'린 더 라이트브링어' 보컬 OST, 몽환적인 게임의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 모바일 RPG이니만큼 수익화 구조(BM)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 참 민감한 부분이다. 나도 BM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소프트 론칭 때 한 달간 무과금으로 플레이하기도 했다. 현재 ‘린 더 라이트브링어’는 무과금 혹은 소과금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BM을 채택하고 있다. 다만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지고픈 욕심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그간 모바일 업계는 게임 자체의 수명을 짧게 보고 초반부터 무리한 과금을 유도하는 소위 ‘먹튀’가 횡행했다. 우리는 글로벌까지 같이 나가는 상황이니만큼 서비스를 길게 보고 유저 여러분과 보조를 맞춰 걸어가고자 한다.
● 작금의 시장은 결코 쉽지 않다. ‘린 더 라이트브링어’가 어떤 게임으로 자리잡길 바라나
: 대작과 성공작은 다르다. 대표적으로 ‘던전앤파이터’는 개발 당시 누구도 대작이라 생각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린 더 라이트브링어’도 엄밀히 말해 대작이 아니지만 꾸준히 서비스를 이어가는 스테디셀러가 되었으면 한다. 막 거품을 씌워서 유저를 홀리기 보다는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나름의 매력으로 사랑받는, 그래서 우리가 준비한 스토리와 콘텐츠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의 성과가 따랐으면 좋겠다.
준비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낼 수 있을 만큼 꾸준히 서비스를 이어가고 싶다고.
● 여담이지만 게임 제목이 ‘린’이 된 것은 대표작 ‘리니지 2’를 의식한 작명이었나
: 종종 듣는 오해다(웃음).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여주인공 린에서 따온 제목으로 달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 그로테스크한 달의 양면성이 캐릭터와 스토리에 맞닿아 있다. 사실 원래는 ‘프로젝트 린’이란 가칭이었는데 계속 쓰다 보니 입에 익어서 그대로 제목이 됐다.
● ‘린 더 라이트브링어’ 광고를 보면 어느 서양인이 그림을 그리는데, 본인 출연하지 그랬나
: 그러면 큰일난다. 딱히 넥슨에서 제안받은 바도 없지만 그랬더라도 극구 사절했을 것이다. 소중한 게임이니만큼 멋진 광고 모델이 나와야 하지 않겠나(웃음). 최근 유명 연예인에만 기댄 스타 마케팅이 범람하는 탓에 유저들도 피로감을 느낄 것 같아 원화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다.
모처럼인데 어째서 원화를 그린 본인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 마지막으로, 다시금 PC와 콘솔에서 정준호의 그림을 보고 싶어하는 게이머들이 많다
: 퇴사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더이상 게임 개발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오래 산업에 몸담기도 했고, 중국에서 저렴한 게임을 가져다 폴리싱하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개발자로서 프로젝트 시작부터 끝까지 버텨내는 것도 힘든 시대니까. 그런데 이렇게 홀로 서서 어떻게든 매듭을 하나 묶고 나니 ‘아 나는 여전히 게임 개발을 많이 좋아하는구나’하고 새삼스러운 감흥이 일더라. 비록 PC나 콘솔과는 플랫폼이 다르지만 우선 ‘린 더 라이트브링어’가 유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는 보고나서, 그때가 되어서야 새로운 목표가 생길 듯하다.
'린'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게임 개발을 좋아하는지 새삼 깨달았다는 정준호 대표.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