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재료에서부터 요리를 시작해서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는 일입니다.
영어로는 "Making from scratch"라는 표현을 쓰는데, 만들어놓은 재료를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원재료를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양 요리의 경우, 특히 프랑스 요리 계열은 그 시작이 육수 만들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리용 국물이나 소스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육수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육수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뼈를 우려내서 만드는 스탁(Stock)과 고기를 우려내서 만드는 브로스(Broth, 프랑스어로는 부용Bouillon)이 그것입니다. 사골 육수와 고깃국물의 차이랄까요.
스탁을 만들기 위해 닭부터 해체합니다. 닭뼈가 육수의 주요 재료인데, 살 발라내고 남은 몸통만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주변에 잘 아는 정육점이 있다면 고기 부분 발라내고 남은 몸통 뼈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주변에 정육점이 없는 경우에는 닭을 서너마리 구입해서 뼈를 긁어 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육수 한 번 만드는 데 서너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닭 한 마리 분량의 뼈로는 한 두컵 정도밖에 나오질 않으니까요.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레시피에는 기본이 닭뼈 8파운드 (약 3.5kg)부터 시작하고,
실제로 실습할 때는 한 번에 120파운드(약 55kg)씩 뼈를 쏟아부어가며 대량으로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름 타협을 해서 세 마리만 잡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고기를 구워먹고, 쪄먹고, 갈아서 미트볼이나 치킨버거 패티로 만들어 냉동 보관해가며 먹을 수 있지만
통닭 여덟마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처치 불가능입니다. 일단 냉장고에 자리가 안 나오거든요.
批大卻 導大窾 因其固然
큰 틈을 벌리고 그 속에 칼을 넣는 것은 본래의 생김새에 따르는 것입니다.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그러므로 저는 힘줄이나 근육을 베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커다란 뼈다귀이겠습니까.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노련한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今臣之刀 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 若新發於硎
저는 이 칼로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아직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간 듯 합니다.
- 장자(莊子), 양생주편(養生主篇) 중에서
비록 포정의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닭 해체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 뜻에는 격하게 공감하게 됩니다.
닭을 자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기본은 언제나 뼈와 뼈 사이의 관절에 칼날을 밀어넣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덤빌 때에는 가위를 들고 한참이나 애를 써야 자를 수 있던 닭다리가,
관절 사이에 칼질 한 번만 하면 몇 초만에 부서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져 나옵니다.
다만 아직 경험치가 부족해서 뼈와 살 사이를 잘라내는 가슴살 부위는 여전히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닭다리와 가슴살은 따로 보관하고, 뼈가 많은 부분인 몸통, 목, 날개 부분만 따로 모아서 물로 깨끗하게 씻어냅니다.
핏물이나 내장 찌꺼기 등이 남아있으면 국물 맛을 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닭을 손질하고 나면 반드시 싱크대도 세재로 깨끗하게 닦아줍니다.
생닭에는 식중독을 유발하는 살모넬라균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닭이야 어차피 요리하니까 세균이 다 죽지만
혹시라도 싱크대에 튄 물에 살모넬라균이 있다면 나중에 접시나 채소에 묻어서 2차 감염을 일으킬 수 있거든요.
국물이나 소스 등에 향을 더하는 채소의 조합을 미르포아(Mirepoix)라고 합니다.
프랑스어 이름이라 왠지 뭔가 있어보이지만 양파와 당근, 샐러리를 각각 2:1:1로 조합한 게 전부지요.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주방 말단 직원이 항상 하는 일이 감자 껍질 벗기는 일 아니면 채소를 잘라 이 미르포아를 만드는 일입니다.
나름 현실을 반영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방에서 사용되는 미르포아의 양이 엄청나기 때문이지요.
앞서도 말했듯이 실습실에서 닭뼈를 55kg씩 써가며 육수를 만드는데, 이 경우에는 6~7kg의 미르포아를 필요로 합니다.
육수 사용량이 훨씬 더 많은 일반 레스토랑이라면 손질해야 하는 채소의 양도 무시무시하게 많아지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육수의 양이 워낙 적기 때문에 미르포아도 칼질 몇 번 하면 준비 끝입니다.
또 하나 육수를 만들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허브입니다. 대파에 각종 허브를 둘둘 말아서 묶는 부케 가르니나 면보자기로 주머니를 만들어서 허브를 넣는 사셰 드 에피스(Sachet d'Epice향주머니)가 주로 사용됩니다.
집에 서양 대파가 없는 관계로 부케 가르니는 포기하고, 사셰를 만듭니다.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타임(Thyme백리향) 한 줄기, 월계수 잎 한 장, 파슬리 줄기 서너 개, 마늘 한 쪽, 통후추 8알 정도가 들어갑니다.
파슬리는 이파리를 떼고 줄기만 넣고, 통후추는 칼 옆면으로 꾸욱 눌러 으깨서 주머니에 넣습니다.
찬물 10컵을 냄비에 붓고 닭뼈를 집어넣습니다.
물이 끓기 시작할때까지는 일단 강한 불로 가열하고, 물이 끓으면 불을 줄여서 거품이 조그맣게 올라오는 수준으로 끓입니다.
육수가 끓으면서 표면에 거품과 기름이 뜨는데, 수시로 걷어내서 국물맛이 탁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2시간 정도 살살 끓여주다가 준비한 미르포아와 사셰를 넣고 한 시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입니다.
서너시간 이렇게 육수를 끓이고 있노라면 집 안에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가득 퍼지지요.
완성된 육수는 체에 걸러서 조그만 고깃조각이나 야채 부스러기를 제거합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구멍이 크고 작은 두 종류의 스트레이너에 면보까지 포함해서 3중 거름망을 쓰라고 하더군요.
면보까지 쓰는 마당에 뭘 또 귀찮게 3중으로 걸러내나 싶어서 투덜거리곤 했는데,
막상 집에서 만들때가 되니 반사적으로 3중 거름망을 만들어서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치킨 스탁. 물을 10컵 넣었지만 중간에 증발하는 분량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8컵이 나옵니다.
이걸로 고기 요리할 때도 사용하고, 필라프나 리소토 등 쌀 요리에도 사용하고, 소스 만들 때도 쓰고...
겉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뿌연 물이지만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요리의 시작점입니다.
오랜 시간 팔팔 끓여 뼈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여내는 진한 한국식 육수 만들기에 익숙했던 까닭에
처음 육수 만들 때는 맛을 보면서 '너무 밍밍한 거 아닌가'싶기도 했지요.
그래서 셰프에게 물어봤는데, 육수는 이 자체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리의 기본이 되는 재료이기 때문에 너무 맛이 강하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졸아들면서 너무 과한 맛이 날 수 있다나요.
이런 이유로 스탁 만들 때는 재료 비율이 중요합니다. 양파가 많이 남았다고 육수 만드는 김에 왕창 집어넣었다가는 국물맛은 괜찮을 지 몰라도 최종 요리는 양파 맛밖에 안 날 수도 있으니까요.
잘 만든 육수는 그 맛이 튀지 않으면서도 혓바닥 전체에 걸쳐서 그 재료의 맛이 은은하게 번져나갑니다.
이번에 만든 육수는 제법 잘 만들어 졌습니다. 한 티스푼만 먹어봐도 별다른 맛은 안 느껴지는 주제에 여기저기서 꼬꼬댁 소리가 들립니다.
일단 절반은 밀봉해서 냉동실에 보관하고, 나머지 절반은 냉장실에 두고 다음 요리에 써먹기로 합니다.
새하얀 도화지가 준비되었으니, 이제 그 위에 뭘 그릴지 즐거운 고민에 빠지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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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많이 가고 힘들긴 한데 그래도 '진짜'가 어떤 맛인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정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요. 주변에 닭뼈 파는 정육점만 발견하면 딱 좋을텐데... 생닭 넘 비싸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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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보면서 치킨스톡 파우더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인지 한번 더 깨닫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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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도 그게 아까워서 스탁 만들고 난 고기를 따로 먹어봤는데... 재활용 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구요. 퍽퍽하고 맛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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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솨합니다. 근데 원칙적으로 셰프라고 불릴려면 아랫사람이 있어야 하더만요. 원래 셰프라는 단어의 의미가 보스, 그것도 '사장님' 이런 느낌이 아니라 '두목' 이런 느낌의 보스라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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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스톡 만들고 남은 닭은 잘게 손을 찢어서 식초랑 설탕이랑 고춧가루,간마늘에 쪽파 쫑쫑쫑쫑 썰어서 무쳐먹으면 맛있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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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솨합니다. 근데 원칙적으로 셰프라고 불릴려면 아랫사람이 있어야 하더만요. 원래 셰프라는 단어의 의미가 보스, 그것도 '사장님' 이런 느낌이 아니라 '두목' 이런 느낌의 보스라서 ㅎㅎ | 18.10.01 12: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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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좋은 지식 배워갑니다 | 18.10.07 19: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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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 명 기절하고 두 명 때려치웠습니다. ㅋㅋㅋ | 18.10.01 15: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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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힘내세요! | 18.10.01 15: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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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직접 세명을 기절시키고 두 명을 때려눕히셨다는걸로 이해했음. 사슷가 CIA | 18.10.04 1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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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많이 가고 힘들긴 한데 그래도 '진짜'가 어떤 맛인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정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요. 주변에 닭뼈 파는 정육점만 발견하면 딱 좋을텐데... 생닭 넘 비싸요 ㅠ_ㅠ | 18.10.01 15: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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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이인거 같은데. 외국은 우리나라 처럼 생닭 통으로 잘 안파나봐요? | 18.10.03 11: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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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닭은 많이 팝니다. 뼈만 따로 파는 곳이 없어서 문제지요 ㅠㅠ 친한 정육점에서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준다던데... | 18.10.03 22: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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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실습 도중에는 사진을 못 찍어서리... 집에서 따로 요리 할 시간이 잘 안나네요. ㅎㅎ | 18.10.01 16: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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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김갤 한지도 10년 넘은 거 같네요 | 18.10.01 17:06 | |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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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gwg2wregw
근데 저도 그게 아까워서 스탁 만들고 난 고기를 따로 먹어봤는데... 재활용 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구요. 퍽퍽하고 맛은 없고... | 18.10.01 1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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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75km
아 스톡 만들고 남은 닭은 잘게 손을 찢어서 식초랑 설탕이랑 고춧가루,간마늘에 쪽파 쫑쫑쫑쫑 썰어서 무쳐먹으면 맛있어영 | 18.10.03 23: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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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근섬유만 대줘라! 맛은 형들이 다 내줄게! 같은 느낌이군요 | 18.10.05 00: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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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보면서 치킨스톡 파우더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인지 한번 더 깨닫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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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소에 읽는 책들이 상황에 맞게 들러붙는 거 같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요리한다면 그 사람이 평소에 즐겨보던 책이나 영화 이야기가 섞여나오겠지요 ㅎㅎ | 18.10.03 23: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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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학기 들어갑니다 ㅎㅎ | 18.10.03 23: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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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ㅎㅎ AOS 이신가요? | 18.10.04 00: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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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만 이용해서 만드는 건 브로쓰 혹은 부용이라고 합니다. 스탁하고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데 세세한 부분에서 좀 차이가 있긴 하지요. | 18.10.03 22: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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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점! | 18.10.05 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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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요! | 18.10.05 12: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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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 | 18.10.05 13: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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