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단편소설을 읽기 전에 럭스 코믹 4편부터 읽으시길 권합니다.
단편소설: 여파
앤서니 레이놀즈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xinzhao-aftermath-story/
새벽 첫 햇살이 위대한 도시 위를 비추자 하얀색 돌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바람 한 점 없는 동쪽 성채의 상부 정원 테라스에서는 잔잔한 새소리와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소음이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신 짜오는 돌로 된 연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그 위에 올려 둔 창에 손을 얹은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원 계단 아래와 흉벽, 데마시아의 수도 너머로 펼쳐진 땅을 바라봤다. 제2의 고향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언제나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신 짜오의 망토는 새카맣게 탄 채 붉게 물들어 있었고 움푹 들어간 갑옷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상투에서 삐져나와 얼굴 위로 드리웠다. 젊은 시절,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지금은 진회색으로 세어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목욕을 하고 피와 땀, 탄내를 씻어낸 뒤 대장장이에게 갑옷 수리를 맡기고 새 망토를 입었을 것이다. 데마시아에서 의관을 정제하는 일은 중요했다. 왕가의 호위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국왕이 서거했기 때문이었다.
신 짜오는 왕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고결한 인간이었다. 신 짜오는 왕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지만, 정작 가장 필요할 때엔 곁에 있지 못했다.
신 짜오는 괴로움에 한숨을 쉬었다.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전날 마법사들이 불시에 일으킨 반란에 도시 전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 짜오는 왕궁으로 돌아오던 중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째 홀로 앉아 뼛속에 사무치는 돌바닥의 냉기와 슬픔, 수치심, 죄책감을 받아들였다. 공격에서 살아남은 왕궁의 경비병들도 홀로 어두운 계단식 정원에 앉아 슬픔에 잠겨 있는 신 짜오를 방해하지 않았다. 신 짜오는 그런 작은 배려가 고마웠다. 비난 어린 그들의 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해가 정원에 비추었다. 심판의 빛이었다. 신 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한숨을 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던 정원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돌아서서 왕궁을 향해 걸어갔다.
오래전 신 짜오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신 짜오는 공허함을 느꼈다. 마치 죽은 자리를 떠도는 귀신이 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적어도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신 짜오는 갑작스럽게 생기를 잃어버린 왕궁 회랑을 걸어갔다. 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하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흩어졌다. 슬픈 표정의 경비병들이 경례했지만, 신 짜오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신 짜오는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손이 떨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면서 그는 떡갈나무로 만든 문을 두드린 후, 차려자세로 서서 창 자루로 바닥을 짚었다. 발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신 짜오는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모퉁이를 돌아 나온 왕궁 경비병 두 명이 갑옷을 쩔그럭거리며 지나갔다. 신 짜오는 부끄러움에 그들을 못 본 체했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집사님, 크라운가드 대원수님께서는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왕궁 북쪽에 계실 겁니다." 한 경비병이 말했다.
신 짜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경비병이 말했다. "누구도 집사님 탓으로 생각하지—"
"고맙네, 병사." 신 짜오가 병사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동정 따위는 원치 않았다. 경비병들은 경례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신 짜오는 경비병들이 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려 왕궁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가 자리에 없다고 해서 형 집행이 취소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미뤄질 뿐이었다.
깃발과 문장이 걸려 있는 홀을 지나던 중, 신 짜오는 잠시 멈췄다. 파란색 배경에 날개 달린 데마시아의 검이 그려진 깃발이 보였다. 왕대비가 살아생전 시녀들과 함께 짠 작품이었다. 3분의 1이 불에 탄 상태였지만,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여전히 돋보였다. 소금가시 언덕 전투에서 적에게 빼앗겼지만, 자르반 국왕이 직접 신 짜오와 함께 다시 깃발을 탈환했다. 두 사람은 털가죽 갑옷을 입은 프렐요드 광전사 수백 명을 돌파했고, 결국 신 짜오가 불에 그을린 깃발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로 인해 전세가 역전됐고, 데마시아군은 불리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왕궁으로 돌아온 자르반 국왕은 불타버린 깃발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했다. 깃발을 보고 그날의 역사를 모두가 기억하길 바랐다.
신 짜오는 왕궁 외딴 모퉁이의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왕이 저녁 시간을 즐겨 보냈던 서재였다. 시끄러운 하인들과 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피신처이자, 신 짜오와 여러 밤을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벌꿀술을 홀짝이며 전술, 정치 그리고 지나간 젊은 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대중 앞의 자르반은 강하고 근엄한 지도자였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고 거나하게 취했을 때면, 그는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기도 하고 왕자를 향한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제 친구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신 짜오는 괴로웠다.
어느새 신 짜오는 훈련장에 다다랐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자, 가장 편안함을 느꼈던 진정한 집이었다. 이곳에서 국왕과 훈련하고 또 대련했던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국왕의 바람대로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왕자에게 검술과 창술을 가르쳤던 곳이자, 왕자가 울면 눈물을 닦아 주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주고, 또 함께 웃고 환호했던 곳이었다.
왕자를 생각하니 신 짜오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절친했던 친구를 잃었을 뿐이지만, 어린 자르반 왕자는 어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이미 그를 낳던 중 숨을 거두었으니, 이제 왕자는 혼자였다.
슬픈 마음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무딘 검으로 나무를 때리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신 짜오는 눈을 찌푸렸다.
훈련장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뱃속에서 메스꺼운 기운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 주변의 아치와 기둥 때문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기둥을 돌아 나오자 목각 인형을 향해 훈련용 검을 휘두르는 왕자가 보였다. 왕자는 땀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이며, 비통한 표정으로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신 짜오는 그림자 아래에 멈춰 섰다. 괴로워하는 왕자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아팠다. 당장에라도 다가가서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도록 위로해 주고 싶었다. 자르반 부자는 신 짜오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왕이 죽는 동안 호위무사인 자신은 살아남았다. 신 짜오는 왕자가 자신을 반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신 짜오는 머뭇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녹서스의 검투사의 날 시합에서도 그는 망설였던 적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저은 신 짜오는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렸다.
"삼촌?"
신 짜오는 머뭇거렸던 자신을 저주했다.
물론 두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20년 전 신 짜오가 친위대로 들어온 이후 왕자는 그를 삼촌으로 불렀다. 당시 왕자는 어렸기에 누구도 그 호칭의 부적절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국왕은 오히려 기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 짜오는 왕가와 더욱 가까워졌고, 그럴수록 왕자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게 됐다.
신 짜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보다 큰 왕자를 바라봤다. 소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왕자의 붉게 충혈된 눈 주위가 거무스름했다. 신 짜오와 마찬가지로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왕자님." 신 짜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궜다.
왕자는 아무 말 없이 숨을 헐떡이며 신 짜오를 내려다봤다.
"송구스럽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신 짜오가 덧붙였다.
"제 훈련을 방해해서요, 아니면 아버님을 지키지 못해서요?"
신 짜오는 왕자를 올려다봤다. 왕자는 무거운 훈련용 검을 든 채 신 짜오를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 짜오는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마침내 신 짜오는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께도, 왕자님께도."
왕자는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서서 방 안에 있던 무기 진열대 쪽으로 걸어갔다.
"일어나세요." 왕자가 명령했다.
몸을 일으키자 왕자가 검 한 자루를 던졌다. 신 짜오는 오른손에 창을 쥔 채 반사적으로 반대쪽 손에 검을 쥐었다. 묵직하고 무딘 훈련용 검이었다. 그때 자르반 왕자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신 짜오는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왕자님, 지금은 이러기엔—" 왕자가 다시 달려드는 탓에 신 짜오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는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검을 창 자루로 쳐내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왕자님—" 신 짜오는 입을 뗐지만, 왕자는 더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위, 아래로 두 번의 공격이 날아왔다. 훈련용 검이었지만, 맞으면 뼈가 부러질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신 짜오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피하며 첫 번째 공격을 창으로 쳐내고, 두 번째 공격을 훈련용 검으로 방어했다. 충격이 팔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디에 있었죠?" 왕자는 신 짜오 주위를 돌며 물었다.
신 짜오는 무기를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네." 왕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검을 고쳐 쥐며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 짜오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창을 무기 진열대에 걸었다. 왕자는 검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신 짜오를 기다렸다.
신 짜오가 훈련장 중앙에 다시 서자 왕자는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다. 분노로 인해 위력은 대단했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신 짜오는 강한 공격에 직접 맞서지 않고 옆으로 쳐내며, 왕자의 힘을 역으로 이용해 상대했다.
평소 같았으면 왕자의 형편없는 자세를 지적했을 것이다. 오직 공격에만 집중하며 반격할 빈틈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짜오는 왕자가 화풀이하도록 놔두었다. 빈틈을 파고들지도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상관없었다.
"어디에. 있었냐고. 물었어요." 자르반 왕자가 공격 사이사이에 말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어."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던 왕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격분한 왕은 한 획, 한 획을 빠르고 맹렬하게 써나갔다.
왕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폐하?" 신 짜오가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두려움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어." 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편지를 쓰던 손을 멈추고 덧붙였다. "우린 어리석었어. '내가' 어리석었지. 왕국을 지키려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버렸으니까."
신 짜오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방어했다. 뒤로 한 발 밀려날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하실 말씀 없어요?" 왕자가 집요하게 물었다.
"폐하를 지켜드려야 했습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왕자는 으르렁거리며 돌아서더니 검을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 짜오는 이걸로 끝이길 바랐지만, 왕자는 진열대에서 다른 무기를 집어 들었다.
'용기창'이었다.
단호한 표정의 왕자는 신 짜오를 향해 창을 들어 올렸다.
"창을 가져오세요."
"갑옷도 안 입으셨지 않습니까."
훈련용 무기는 뼈를 부수지만, 전투용 무기는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상관없어요."
신 짜오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왕자와 자신의 훈련용 검을 진열대에 놓고, 마지못해 창을 들고 훈련장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왕자는 말없이 공격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 짜오가 말했다.
왕은 손을 멈추고 신 짜오가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왕이 갑자기 노쇠해 보였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었고,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하얗게 세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예전 젊었던 모습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 잘못이네." 자르반 국왕이 말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은 허공을 응시했다. "그자들에게 힘을 너무 많이 실어 줬어. 예감이 안 좋았지만,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의회의 지원까지 받았으니까. 이제 알겠군. 내 예감이 옳았다는 걸 말이야. 나는 이 편지로 마력척결관들에게 체포 활동을 멈추라고 명할 걸세."
왕자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창을 조작하자 전설의 무기, 용기창이 두 배 가까이 길어지며 신 짜오의 목을 향해 치명적인 창날을 뻗었다.
신 짜오는 옆으로 피한 후 창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가 창날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공격을 쳐냈다.
신 짜오는 잔혹한 검투사의 날에서조차 용기창 같은 무기를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 무기를 다루는 법은 데마시아 왕가의 비밀이었지만, 초대 국왕 이후로 사용법이 전해지지 않았다. 미숙한 솜씨로 다뤘다간 적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기에 수 세기 동안 예식용 무기이자 왕가의 상징으로만 활용되었다. 하지만 왕자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동경해 마지않던 옛 영웅들처럼 용기창을 쥐고 싸우기를 꿈꿨고, 신 짜오는 때가 되면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로 왕자에게 약속했다.
왕자가 앞으로 도약하며 창을 아래로 휘둘렀다. 신 짜오는 옆으로 피했지만, 왕자는 곧바로 따라붙으며 공격했다. 창끝이 신 짜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왕자는 멈출 줄을 몰랐다.
왕자는 신 짜오가 가르치기 전에 왕의 허락을 받고 스스로 창의 사용법을 익혔다. 놀랍도록 가볍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용기창은 전성기의 장인이 만들어낸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데마시아 건국 초기 유명한 무기 제작자 오를론이 만든 이 창은 하늘 높이 치솟은 백색 성벽이나 왕관처럼 왕국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위대한 서리용 맬스트롬과 그 자손들을 무찌르기 위해 제작된 이 무기는 왕의 혈통만이 쓸 수 있었다.
수년간 신 짜오는 동이 트기 전, 용기창을 다루는 훈련을 했다. 스스로 사용법을 완벽하게 습득해야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왕자가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지만, 신 짜오는 오직 방어만 생각했다. 능숙하게 뒤로 물러서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빠르게 창을 움직이며 왕자의 공격을 쳐냈다.
왕자는 어렸을 때부터 문무를 고루 습득했다. 검술과 창술, 격투술뿐만 아니라 전쟁의 역사와 웅변술까지 익혔고, 결국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용기창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이 상처를 입으며 훈련한 끝에 마침내 자유자재로 창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왕자는 신 짜오를 맹렬하게 압박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물 흐르듯이 연속 공격을 이어갔다. 앞으로 돌진하며 위로 창을 휘두른 다음, 다리와 목을 노리며 두 번에 걸쳐 호를 그렸다. 신 짜오는 좌우로 몸을 움직이며 창으로 재빠르게 방어했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신 짜오에게 무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왕자는 더 젊고, 힘도 강했으며, 큰 키 덕분에 공격 범위도 더 넓었다. 이제 그는 의욕만 앞선 어설픈 소년이 아니라 전투와 훈련으로 단련된 전사였다. 용기창을 다루는 솜씨도 신 짜오보다 훨씬 뛰어났다. 왕자가 인정사정없이 공격을 퍼붓는 탓에 신 짜오는 계속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신 짜오는 온 힘을 다해 공격을 방어했지만,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왕은 편지를 읽으며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진작에 용기를 냈더라면 지금의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왕은 편지에 서명한 뒤, 그 옆에 왕가의 푸른색 봉랍을 붓고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그리고 입으로 바람을 불더니, 봉랍이 굳도록 편지를 흔들었다.
봉랍이 굳은 걸 확인한 왕은 편지를 둥글게 말아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흰색 원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런 다음 신 짜오에게 건넸다.
신 짜오는 고개를 돌려 왕자의 사나운 공격을 겨우 피했다. 들쭉날쭉 돋아난 용기창의 창날이 그의 뺨에 상처를 냈다.
대결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신 짜오는 왕자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남자의 아들에게 죽는 것도 어느 정도 도리에 맞는 일이었다.
왕자는 용기창의 자루로 신 짜오의 창을 옆으로 쳐낸 후 빙글 돌면서 목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완벽한 동작이었다. 신 짜오가 왕자에게 직접 가르친 기술이었다. 준비 동작의 발놀림은 절묘했고, 창을 쳐내는 힘은 이어지는 공격이 느려지지 않을 정도로 딱 적절했다.
그래도 신 짜오는 마음만 먹으면 방어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겠지만, 자신의 속도라면 비록 지쳐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싸울 의지를 잃은 신 짜오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공격이 제대로 적중하도록 턱을 살짝 들었다.
용기창의 창날이 날아들었다. 속도와 기술, 힘을 모두 갖춘 그 공격은 신 짜오를 끝장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창은 신 짜오의 목 앞에서 멈췄다. 상처가 약간 났을 뿐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대답을 안 하시죠?" 왕자가 말했다.
신 짜오는 침을 삼켰다. 상처 부위에서 따뜻한 통증이 일었다. "폐하 곁에 없었던 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왕자는 창을 신 짜오의 목에 댄 채 한참을 있다가 뒤로 물러섰다. 가슴속에 타오르던 분노가 갑자기 식어버린 듯했다. 남은 건 비통에 빠져 길을 잃은, 아버지를 여읜 아들뿐이었다.
"아버님의 명을 받고 갔나 보군요. 그분을 탓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왕자가 말했다.
신 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말이 맞나요?"
신 짜오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
신 짜오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눈은 왕이 내민 봉인된 편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왕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그제야 신 짜오는 편지를 받았다.
"전령에게 맡기면 되겠습니까?"
"아니. 자네가 직접 전달했으면 하네, 친구."
신 짜오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띠에 편지를 걸었다.
"누구에게 보내면 되겠습니까?"
"마력척결단장." 그리고 국왕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부하들 말고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게."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리 수색이 끝나고 탈옥수들의 행방이 확인되면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자 국왕이 말했다. "아니. 지금 당장 출발하게."
"가끔 고집을 부리실 때가 있죠." 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번 결정하신 일은 절대 무르지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제가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신 짜오가 힘없이 말했다.
왕자는 눈을 비볐다.
"국왕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요? 그건 삼촌답지 않죠. 그런데 어떤 임무였나요?"
신 짜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 자리는 폐하의 곁입니다. 저는 왕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오늘은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편지를 전하게. 더 늦기 전에 마력척결단을 통제해야 해. 지금도 이미 선을 넘었어."
"폐하, 그래도 제가 자리를 비우는 건—" 신 짜오가 입을 열자 왕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네, 집사. 당장 이 칙령을 전달하게."
"편지 배달이라..." 왕자는 힘없이 말했다. "고작 그것 때문에 삼촌을 보내신 건가요?"
신 짜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님답네요. 언제나 왕국이 먼저였죠. 제 열네 살 생일에 있었던 검 의식에도 오지 않으셨죠. 수호 의회에서 '조세 문제'를 처리하시느라 말이죠."
"저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편지는 전달했나요?"
"못 했습니다." 신 짜오는 고개를 저었다.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최대한 빨리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거리에서 곤경에 빠진 거군요." 왕자가 만신창이가 된 신 짜오의 몰골을 보며 말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마법사들이었나요?"
신 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살인자와 뜻을 함께한 다른 자들도 있었습니다."
"놈들을 전부 처형해야 했어요." 왕자가 발끈하며 말했다.
신 짜오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왕자가 그런 독설을 내뱉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마법사들에 대한 데마시아의 방침에 불만이 많았지만, 그건 지나간 일이었다.
"선왕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신 짜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놈들의 손에 '시해'당하셨죠." 왕자가 쏘아붙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신 짜오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왕자의 분노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왕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왕자는 홀로 겁에 질린 소년에 불과했다.
신 짜오는 창을 내려놓고 왕자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왕자님..."
왕자는 울음을 터트렸다. 몸을 들썩이며 괴롭게 우는 모습에 신 짜오도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은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신 짜오는 몸을 돌려 창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감정을 추슬렀다.
신 짜오가 다시 돌아서자, 어느새 차분해진 왕자는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흰색 리넨 튜닉을 입고 있었다. 앞에는 푸른 날개가 달린 검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 주어진 운명에 따라 이 나라를 '이끄셔야' 합니다." 신 짜오가 말했다.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된 왕은 없습니다. 위대한 왕들은 다 그랬죠."
"삼촌이 절 도와주셔야 해요."
그 말에 신 짜오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신 짜오는 갈등했다. 20년 동안 왕을 호위하면서 한 번도 명을 어겼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여기서 폐하를 지켜드려야 합니다."
왕은 갑자기 피곤한 듯이 눈을 비볐다.
"자네의 사명은 데마시아를 섬기는 거야."
"'폐하'께서 곧 데마시아이십니다."
"어떤 왕도 국가보다 위대할 수 없어!" 왕은 소리를 질렀다. "두말하지 말게. 이건 명령이야."
신 짜오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하지만 국왕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에 본능을 무시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신 짜오는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오래전에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선왕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기로요."
"삼촌이 그동안 몇 번이나 아버님을 구했죠?" 갑자기 왕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와 똑 닮았다고 신 짜오는 생각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번인데, 그 외에도 더 있었잖아요."
신 짜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게 명예는 목숨과 같습니다. 맹세를 어긴 부끄러움을 안고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구한테 맹세한 거죠?"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입니다."
왕자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의 친위대가 됐을 때, 데마시아에 충성을 맹세했죠?"
"물론입니다."
"삼촌의 맹세는 아버님도, 그 누구도 아닌 데마시아에 대한 거예요.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죠."
신 짜오는 왕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제 아버지랑 똑같군.'
"하지만 대원수와 약속했습니다."
"티아나에게는 제가 이야기할게요. 우선 주어진 임무를 다해 주세요."
그제야 신 짜오는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을 섬겼듯, 제 집사가 되어 주세요."
신 짜오는 눈을 껌뻑였다. 조금 전만 해도 왕자가 자신을 처형하리라고, 그것이 정당한 처분이라고 생각했다.
신 짜오는 망설였다.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신 짜오 삼촌... 왕국은 삼촌이 필요해요. '저'도 삼촌이 필요해요. 저를 위해서라도 부탁해요."
당장이라도 왕자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는 듯이 신 짜오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자르반 4세는 신 짜오와 함께 회의실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선왕의 참모들, 아니, 자르반 4세의 참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에 병사들이 가득했다. 왕궁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소집된 데마시아 최고의 정예 부대, 불굴의 선봉대가 모든 출입구를 감시하고 있었다.
자르반 4세의 표정은 근엄했고, 자세는 당당했다. 훈련장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오직 신 짜오밖에 보지 못했다. 이제 그는 완전히 마음을 추스른 채 왕궁의 하인과 귀족, 경비병 앞에 서 있었다.
신 짜오는 생각했다. '그렇지. 국민들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두 사람이 결의에 찬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자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자르반 4세는 대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삼촌, 잠깐만요." 그는 신 짜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폐하."
"아버님께서 맡기신 편지는 어떻게 됐죠?"
"여기 있습니다." 신 짜오는 허리띠에서 편지가 담긴 가죽 통을 풀어 자르반 4세에게 건넸다.
자르반 4세는 뚜껑을 열고 말려 있던 피지를 펼치더니,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선왕이 남긴 글을 읽었다.
신 짜오는 자르반 4세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 순간 자르반 4세는 양손으로 편지를 구기고, 마치 목을 비틀듯이 쥐어짠 후 신 짜오에게 다시 건네면서 말했다.
"없애 버리세요."
신 짜오는 충격에 빠진 채 자르반 4세를 바라봤지만, 자르반 4세는 이미 돌아선 뒤였다. 그가 양쪽의 경비병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실 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란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기립해 왕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남쪽 벽의 벽난로에서 불꽃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회의실 탁자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전날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건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신 짜오가 구겨진 편지를 쥐고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자르반 4세는 탁자의 상석으로 갔다. 그리고 여전히 문간에 서 있는 신 짜오를 돌아봤다.
"집사?" 자르반 4세가 말했다.
신 짜오는 눈을 깜빡였다. 국왕의 오른쪽에서 티아나 크라운가드 대원수가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왼쪽에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국왕이 쓴 편지의 수취인인 마력척결단장이자 티아나의 남편이었다. 신 짜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그 사이에서 의아한 듯이 눈썹을 치켜뜬 자르반 4세를 바라봤다.
신 짜오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며 편지를 벽난로 안에 던졌다.
그리고 집사의 자리, 국왕의 뒤에 섰다. 문득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근심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때 자르반 4세가 말했다.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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