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은 짧았다. 메이브가 말한 해결책을 실행에 옮기느라 나흘. 그리고 한 달 중 남은 날을 내일 죽을 것처럼 쾌락에 빠져 사는 것으로 보내고 나니 어느덧 집행일.
아벨란트는 자신의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일정한 지위에 오르고 난 후 이런 잡다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긴 터라 수십 년 만에 하는 일이었다. 수십 년 만에 하는 일인지라 조금 헤매긴 했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점검만 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은 오래 걸렸는데 겹쳐진 세계에서는 결코 구하지 못하는 필수품들을 전부 챙겼으니 당연했다. 여담이지만 짐 중에는 도색서적도 있었다.
등짐을 전부 확인한 후 아벨란트는 제일 중요한 것을 확인했다. 도색ㅅ……아, 아니. 검.
아벨란트는 도색서적을 다시 배낭에 넣고 ‘검’을 뽑았다.
검으로 인류의 정점에 선 자가, 십만 자루의 검을 잡아본 자가, 200년 넘게 검을 잡아온 자가, 검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자가, 검으로 초월자가 된 자가, 아벨란트 씨아이 디하이거가 고르고 고른 검이었다.
그것은 ‘검’이었다.
무언가를 베고 찌르고 깎고 절단하기 위한 도구. 그것뿐이다. 그리고 그 자체였다.
주인의 생명을 먹으며 막대한 힘을 주는 검도 아니었다.
그 칼날에 베이면 끝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검도 아니었다.
정령들을 강제로 복속 시키는 검도 아니었다.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검도 아니었다.
마법을 쓰는 살아있는 검도 아니었다.
인과를 역전시키는 검도 아니었다.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쌍둥이 검도 아니었다.
괴물들에게 쫓기는 낙인을 찍는 검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베고 찌르고 깎고 절단하기 위한 도구. 그 무언가에 어떠한 예외도 없는 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완성된 검. 검이라는 개념이 실체화된 검이었다.
아벨란트는 만족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란 건 이거면 충분하다. 다른 기능은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벨란트는 배낭을 메고 검을 찬 후 집행장으로 걸어갔다.
집행장은 완벽하게 탐사가 끝난 미궁. 현 세계와 겹쳐진 세계간의 경계가 흐릿한 곳. 그곳에는 황제의 집행관과 병사들, 집행을 도와줄 마법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행관은 아벨란트가 도착하자 황제의 권위를 대행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외쳤다.
“아벨란트 씨아“거 시끄럽네.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간단히 끝내자. 응?”네.”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여전히 가차 없었다.
“여기에 서십시오, 각하.”
마법사가 아벨란트를 인도했다. 아벨란트는 마법사가 말한 자리에 섰다. 그러자 무언가가 보였다. 굴곡이 다양한 유리를 통해서 건너편을 보는 것처럼 왜곡감이 느껴졌다. 약간 각도를 바꾸면 그것은 사라졌지만 제대로 된 자리에서 제대로 된 각도로 보면 그 왜곡감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벨란트의 앞에 창을 든 병사들이 섰다. 현 세계와 겹쳐진 세계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현 세계로 넘어오는 괴물을 막기 위한 병사들이었다. 아벨란트는 그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야. 됐다. 괜히 죽어나가지 말고 비켜. 뭔가 튀어나오면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하지만 각하.”
“내 손에 뒤 질래?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나한테 칼 맞고 싶냐? 방해 되니까 비켜.”
병사들은 즉시 아벨란트의 앞에서 비켰다.
집행관은 주도권을 잡지 못하자 김이 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벨란트가 ‘생각해보니까 奀같네. 야 시발 때려쳐!’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해.”
아벨란트의 말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손짓을 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내는 소리가 겹치면서 그 소리는 전혀 다른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왜곡감도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것 같더니 하나의 점으로 수축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서서히 커지면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것은 안과 밖이 구분이 되지 않는 구였다. 가로세로높이까지만 있는 차원에서는 결코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그것이 지금 사람들 앞에 있었다. 그 구가 현 세계와 겹쳐진 세계간의 통로였다.
통로는 서서히 커지다가 일정한 크기가 되자 커지는 것을 멈췄다. 혹여 괴물이 튀어나올까 병사들을 창을 꼬나 쥐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통로에서 뭔가 튀어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가셔도 됩니다, 각하.”
통로가 안정되자 마법사 하나가 말했다. 아벨란트는 잠시 통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야, 안 가면 안 되냐?”
아벨란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벨란트의 형을 집행해야하지만 아벨란트가 형을 거부한다면 막을 능력은 없었다.
아벨란트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낄낄 웃었다.
“새끼들 얼굴 봐라.”
최후의 장난을 끝내고 아벨란트는 통로로 뛰어들었다. 집행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닫아! 닫아! 빨리! 돌아올라!”
통로에서 소리가 났다.
“새끼야 다 들었어! 내가 그렇게 奀같았냐! 너 이름이 뭐라고!?”
“닫아아아!”
통로가 닫혔다. 구는 사라지고 다시 형체가 없는 왜곡감으로 돌아왔다. 집행관과 병사들, 마법사들은 거사를 마치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쯧!”
이름을 듣기도 전에 통로가 닫히자 아벨란트는 혀를 찼다. 자기를 싫어하는 티를 내는 사람을 가만히 두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벨란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느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자신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싫어하고, 그것을 드러내면 언젠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행동은 동조자를 만들게 된다. 그러니 그런 일은 사전에 막아두자는 게 아벨란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현 세계와 겹쳐진 세계를 잇는 통로가 닫혔다. 30년이 지나서 집행이 끝날 때까지 혹은 우연히 현 세계와 겹쳐진 세계가 이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시간에 그 장소에 있지 않는 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집행관은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30년 동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할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벨란트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아벨란트를 30년 동안 혹은 영원히 볼 필요가 없어진 것에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크큭!”
대외적으로는 그렇겠지. 정말로 30년 동안 이런 곳을 방황하거나 죽지도 모를 일을 아벨란트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
아벨란트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 안에는 액체가 절반 정도 차 있는 반투명한주머니와 지름이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의 검은 구슬이 들어있었다. 메이브가 말한 해결책의 마지막 단계에 쓸 도구였다.
‘겹쳐진 세계로 넘어가면 이 구슬을 액체가 든 주머니에 넣어라. 구슬에 액체가 스며들면 현세계로 연결되는 통로가 될 거다. 구슬이 보이지 않게 되면 충분히 스며든 것이니 그 때 액체랑 함께 구슬을 삼켜. 그러면 현 세계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바로 뒤에 ‘현 세계로 돌아온 뒤에 30년 동안은 쥐 죽은 듯이 살아라. 절대로 사고치지 마.’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는 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아벨란트의 원정형 혹은 죽음에 축배를 드는 자들이 얼굴도 이름도 없는 자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일어나도 된다는 말일 것이다.
“흠.”
생각해보니 오히려 이번 기회에 평소에 아니꼽게 여긴 놈들을 손봐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벨란트와 적대적인 자들이 습격을 당했다. 그런데 유력 용의자였던 아벨란트는 원정형으로 인해 겹쳐진 세계에 가 있다. 그러면 범인은 누구지?
“흐하하핫!”
상상만 해도 유쾌했다. 형이 확정되고 형이 집행될 때까지인 요 한 달 동안 처벌을 받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었는데 그 짜증을 내던 게 바보 같았다.
아벨란트는 유쾌하게 검을 뽑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인이 그림 위에 계속해서 그림을 덧그린 듯한 난잡한 풍경. 바로 머리 위의 하늘에는 3개의 태양이 떠 있으면서 저 먼 곳은 낮과 섞이지 않은 어두운 밤.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울리는 소리, 악취인지 향기인지 알 수 없는 진득한 향기, 무릎 아래와 무릎 위와는 다른 기온.
현 세계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중첩된 세계. 겹쳐진 세계였다.
그리고 현 세계에서 온 손님을 반기듯이 어느새 겹쳐진 세계의 원주자들이 아벨란트의 주위에 몰려들고 있었다. 겹쳐진 세계에선 이들을 원주자라고 부르지만 이들이 현 세계로 넘어오면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적대적인 생명체인 ‘괴물’이라고.
구태여 많은 비용을 들여서 죄수를, 그것도 초월자나 초월자에 근접한 강자들을 겹쳐진 세계로 보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겹쳐진 세계에 있는 원주자들을 줄여서 현 세계로 넘어오는 괴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보여주기로 넘어 온 겹쳐진 세계였지만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짬을 내서 약간의 속죄 정도는 해줄까.
아벨란트는 가장 가까이 온 원주자를 베며 외쳤다.
“덤벼! 새 끼들아!”
메이브 할러그 레자옹은 황제의 비밀 알현실에 들어섰다. 만나는 것도 숨겨야하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위한 장소에는 이미 황제가 간편한 복장으로 메이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메이브. 거기 앉게.”
비밀스러운 만남이었기에 황제도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메이브는 황제에게 목례를 하고 황제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러그 대공.”
비밀 알현실에는 황제와 메이브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라세몬토 대성사. 몇 번 서신을 주고받은 것을 제외하면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건 4년 전 성원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자하이스트교의 대성사. 자하이스트교에서 수장인 성황을 제외하면 최고위 성직자였다.
황제와 대공, 대성사가 수다를 떨기 위해서 비밀 알현장에서 만났을 리 없었다. 그들이 본론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오늘 아벨란트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집행되는 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은 없었다고 하더군.”
“아무리 씨아이 대공 그 자가 앞뒤 없이 행동하는 자라도 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 할 리 없지요.”
황제와 대성사의 말에 메이브가 ‘가끔은 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 못할 때도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친구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리에선 쓸데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벨란트는 언제 현 세계로 돌아오지?”
황제의 질문에 메이브가 대답했다.
“겹쳐진 세계에 넘어간 직후에도 돌아올 수는 있습니다만 기분이 좋으면 씀씀이가 커지는 아벨란트의 성격을 생각하면 원주자들을 처리하느라 사흘 정도 뒤에 돌아올 겁니다.”
“아벨란트가 현 세계로 돌아오면 알 수 있나?”
“제가 준 도구 중에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아벨란트가 돌아오면 알 수 있지요.”
“그가 돌아올 위치는 보냈던 위치와 같은가?”
메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외진 곳으로 오게 했습니다. 셀라스네즈 대수해의 서남부 끝자락으로 귀환할 겁니다.”
자하이스트교의 대성사인 라세몬토는 대외적으로는 비밀인 아벨란트가 원정형에 처해진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알고 있음을 넘어서 메이브에게 이번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서신을 쓴 것이 라세몬토였다. 그런 그 앞에서 황제와 메이브가 아벨란트가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라세몬토는 이에 부당함을 성토하지 않았다. 아벨란트가 처벌받는 숨겨진 이유보다 한 층 더 숨겨진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벨란트가 받는 벌은 원정형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그의 죄에 걸맞은 벌이었다.
“자신이 당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보복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 성격에.”
라세몬토의 말에 메이브는 쓰게 웃었다.
“죽이려 들겠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만에 땀 하나 자알 뺐다.”
아벨란트가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뛰고 베고 찌르고 도약하고 구른 후에 자신에게 달려들던 마지막 원주자를 베고 난 후에 뱉은 말이었다. 전투에 도가 튼 자라도 결코 버틸 수 없는 격전을 치르고 난 후였지만 아벨란트는 자신의 말대로 땀을 흘리고 먼지로 더러워졌을 뿐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반면 아벨란트의 주위에는 원주자들의 유해로 가득했다. 크기도 다르고 종도 다르고 성질도 다르지만 그 수는 얼추 일만에 근접해 있었다. 성욕에 미치고 성격도 개차반이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검으로 인류의 정점에 선 자였다.
‘자 이 정도면 충분히 속죄했겠지? 슬슬 돌아갈까.’
아벨란트는 검에 묻은 체액을 닦아낸 후 칼집에 넣고 현 세계로 돌아가는 도구를 꺼냈다. 액체가 들어있는 반투명한 주머니와 검은 구슬. 아벨란트는 주머니의 입구를 열고 그 안에 검은 구슬을 집어넣었다. 반투명한 외피 너머로 짙은 검은색이 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그 검은색은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오래지 않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벨란트는 주머니의 입구를 물고 안의 내용물을 마셨다. 액체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만 묵직한 질감이 있어서 뭔가를 먹는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줬다. 내장까지 흘러들어갔다가 서서히 풀리며 온 몸으로 번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으. 시발.”
방금 마신 액체가 퍼져나가는 곳마다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느낌이 났다. 뭐라 형용키 힘든 느낌이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아벨란트가 유달리 용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메이브가 준 것이기에 두렵지 않았다. 아벨란트는 메이브가 실수할 리 없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액체가 퍼져나가는 느낌이 목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입, 코, 눈에 도달했다.
아벨란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혼탁해졌다. 그리고 어두워졌다.
아벨란트는 바닥에 앉아서 자신의 전신을 지배하는 느낌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돌아가면 뭐부터 할까. 가까운 창관으로 가서 창 녀 열 명을 산 다음에 즐길까, 아니면 그 지방의 최고 미녀를 꼬실까,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에 인간이랑 비슷한 암컷 괴물을 잡아서 이런 저런 일을 해볼까. 요 며칠 동안 원주자들 때문에 욕구를 못 풀었더니 불끈불끈하군.’
상상 속에서 퇴폐의 궁전을 지어 넣고 끝없는 향락의 시간을 보내던 아벨란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밤, 숲 한 가운데, 흙과 나무 냄새, 서늘한 바람, 짐승들의 울음소리. 익숙한 감각.
어느새 현 세계로 돌아왔다.
아벨란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신을 싫어하던 사람들을 엿 먹인 것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벨란트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어?”
일어서려고 하던 아벨란트는 등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엉덩방아를 찍었다. 등짐이 무거웠다. 30년 동안의 원정 동안 쓸 물건들로 꽉꽉 채운 등짐은 확실히 적잖게 무겁기는 했지만 아벨란트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는 아니었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서 그런가? 아니. 그래도 너무 무거운데?’
아벨란트는 배낭을 몸에 밀착시키는 가슴 벨트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
끝내주는 감촉에 아벨란트는 잠시 당황했다. 예상하지 못한 감촉이었다. 아벨란트는 얼이 빠져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튼튼하고 유연하면서도 가벼운 옷감으로 가려지긴 했지만 아벨란트가 200년이 넘는 경험으로 갈고 닦은 눈에는 그 속에 숨겨진 이상적인 몸매가 눈에 보였다.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이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는 몸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몸 만으로도 미의 극치에 다다른 몸이었다. 아벨란트에게는 만져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몸이었기에 아벨란트는 그 몸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그 속에 녹아드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부드러운 몸이었다. 옷을 걷어내니 털 하나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가 나타났다. 아벨란트는 정신없이 그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벨란트는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뭐야 시발?”
뜻은 험악하나 그 험악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음색이 아름다운 욕설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욕설이었다.
“뭐야? 시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벨란트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벨란트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약간의 성욕에 찬 기대감을 가지고 아벨란트는 자신의 바지춤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벨란트가 가진 칭호 중 하나인 ‘아홉 검의 주인’의 어원이 된 검들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과 비교를 불허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검들이었다.
주인의 생명을 먹으며 막대한 힘을 주는 검, 그 칼날에 베이면 끝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검, 정령들을 강제로 복속 시키는 검,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검, 마법을 쓰는 살아있는 검, 인과를 역전시키는 검,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쌍둥이 검, 괴물들에게 쫓기는 낙인을 찍는 검, 검이라는 개념을 실체화 시킨 검.
제대로 된 검사가 제대로 다룬다면 전략단위의 무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검들이었다. 그러했기에 아벨란트는 이 검들을 귀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벨란트에게는 이 검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검이 있었다.
당당하게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마음껏 휘두르던 검이었다.
아벨란트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검이었다.
아벨란트가 주인이었지만 가끔은 아벨란트를 지배하며 사고를 치게 만들던 검이었다.
아벨란트에게 지고의 쾌락을 주던 검이었다.
아벨란트에게 다른 그 어떠한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검이었다.
그런데
그 검이
사라졌다.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씨이이이이이이이이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낭랑한 욕설이 셀라스네즈 대수해에 울려퍼졌다.
아벨란트 씨아이 디하이거. ‘검좌의 주인’, ‘모든 검사의 스승’, ‘제국의 검’, ‘씨아이 대공’, ‘칠용사의 선봉’, ‘아홉 검의 주인’, ‘겹쳐진 세계의 탐험가’, ‘재앙 종식자’, ‘악마의 종언’. 그리고 ‘제국 최악의 난봉꾼’이라고 불리던 그가. 여자가 되어버렸다.
“설마요. 여자로 바꿔버렸다고 정말로 죽이려고 달려들겠습니까?”
라세몬토는 메이브의 대답이 믿기지 않는 듯 반문했다. 메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대성사께서 아시다시피 자기 성욕을 못 이겨서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입니다. 그러고도 남지요.”
라세몬토는 ‘200년 동안 우정을 나눈 자를 이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을 보니 사실은 사이가 안 좋았던 건가?’하고 의심하며 물었다.
“할러그 대공께서 위험해지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부러 먼 곳으로 귀환하게 한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자신도 깨닫는 바가 있겠지요. 개과천선하면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개과천선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째서지요?”
“절 위험하게 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씨아이 대공이……더 이상 초월자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예.”
초월자라 함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이룩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자들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칭호가 아니었다. 그들의 능력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초월자가 아니게 만들었다는 말은 그의 능력을 앗아갔다는 말이었다.
라세몬토는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메이브는 친구이자 전우였던 자를 그렇게 전락시키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표정이었다.
“아벨란트가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원천이 그 힘입니다. 그 힘을 억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릴 수 없겠지요.”
라세몬토는 속으로 반박했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속내는 다르겠지요. 사실은 친구조차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이번 기회에 초월자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할러그 대공?’
라세몬토는 메이브에 대한 혐오감을 억눌렀다. 아벨란트의 처벌이라는 공동의 목적이 있어 한 자리에 모였지만 라세몬토와 자하이스트교의 입장에서 메이브는 아벨란트의 신성모독 따위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였다. 메이브는 신조차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는 불경스러운 자였다.
최악의 신성모독자는 독실한 종교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력은 옛날만 못하고 성격은 나쁘고 외모는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세상에 내던져졌습니다.”
메이브는 옛날 라세몬토가 메이브에게 보냈던 전갈을 라세몬토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하라.’ 아벨란트가 태도를 고쳐먹지 않으면 라세몬토 대성사께서 저에게 전갈을 보낸 대로 되겠군요.”
끝없던 욕설과 저주가 기침으로 끝이 났다. 아벨란트는 기침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초월자였던 그가 고작 고함을 길게 질렀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벨란트는 기침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더 이상은 초월자가 아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젖은 채로 아벨란트는 생각했다.
누가 이렇게 했는가? 용의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메이브 할러그 레자옹. 아벨란트의 소꿉친구이자 동료였던 자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종범은 여럿이겠지만 정범은 그 하나뿐일 것이다.
아벨란트는 다시 하늘을 향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를 향해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번에 별로 오래하지 못했다.
“콜록! 콜록!”
아벨란트의 빈약해진 성대와 폐는 더 이상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벨란트는 자신의 등짐에 기대어 누운 채 가슴을 주무르며 숨을 골랐다. 아벨란트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복수.
자신을 이런 비참한 꼴로 만든 놈에게 복수할 것이다. 아벨란트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에 대한 원한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얼마나 비용이 들든 꼭 보복했다. 그 상대가 누구든. 그리고 그 자신이 여자가 되더라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기필코 죽여주마. 메이브.”
그리고 한 가지 더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벨란트는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며 생각했다.
젖 가슴은 끝내준다. 여자가 되어도 그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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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글을 쓰지 않아서 글 쓰기 재활용으로 쓴 글인데 기존에 쓰던 글과 문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재활이 될지 모르겠군요.
더군다나 제목에는 完이라고 썼지만 장편의 프롤로그가 끝났다는 느낌이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뒷부분도 구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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