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형. 여기 계셨어요?”
이전 행사에서 썼던 모양인 공룡 모형들과 전시케이스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창고.
그 창고의 한 쪽 벽에 기대어 김선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문을 열고 사방을 살피는 척, 한 번 두리번거린 다음 꺼져있던 불을 켰다.
어둠에 젖은 김선재의 표정을 알아보기엔 위치가 좋지 않았다.
불을 켜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선재가 갑작스런 형광등 조명에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초조해하지마.
현준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집어치워.
어쩌면 지극히 어렵고도 복잡한 난관을 뛰어넘어야할지도 몰라.
초조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안된다.
그렇게 되뇌어도 마음 한켠에서는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드는 걸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여지껏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나이 먹은 인간들의 비열하고 세련된 공방을 옆에서 수없이 지켜봤다.
흐름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뿐인 일.
스스로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했던 거라곤 그저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한 자잘한 편법들.
타고난 키를 살리려고 몸집을 불리는 운동을 한다거나 거울 앞에서서 얼굴 근육들을 컨트롤해 순진한 표정을 완전히 없애는 일.
입고 다니는 옷이나 악세서리에 신경을 쓰는 건 쉬운 축에 속한다.
클럽에서 상대한 여자들이 실제 나이를 알고는 깜짝 놀라는 적도 많았지만 그런 시덥지않은 일이 도움이 될리가 없다.
난 아직 애새끼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좀 전에 있었던 게임 커뮤니티의 공허한 게시물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노력과 재능의 정의.
어른과 애는 어떻게 정의한단 말인가.
물론 이런 주제라도 어디선가 연구를 거듭했을 것이고, 관련 논문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겠지.
그 쓰레기 같은 선비가 떠들어댔듯이 내가 모를 뿐이지 이 세상에 새로운 테마는 없다.
모르는 게 두렵다.
해 본 적이 없어서 두렵다.
하지만 선비, 넌 틀렸어.
그 어떤 연구도, 그 어떤 결론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내게 딱 맞는 연구 결과는 존재하지 않아.
내 두려움을 없애줄 단 한마디가 이 세상엔 없다.
그게 두렵다.
김선재의 첫 반응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심장이 점점 요동치기 시작한다.
진정해. 초조해하지마.
한 번 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현준은 그를 향해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웃어. 일단은 웃어라.
“현준이냐? 문 닫어.”
“네.”
“어떻게 알고 왔어?”
연기를 내뿜는 폼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현준은 창고 안에 굴러다니던 간이 등받이 의자를 하나 휙 낚아채 김선재의 맞은 편에 놓고 거꾸로 앉았다.
둘이서만 있을 때, 현준은 항상 그렇게 했다.
자신보다 키가 좀 작은 김선재가 내려다볼 수 있도록.
김선재의 턱이 조금 내려온다.
현준은 등받이 윗부분에 턱을 얹고 조금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형. 최교수랑 만난다고 했었잖아요. 이야기 잘 된 건지 궁금해서 찾아다니다 온 거죠. 형이 하시는 일이니 좋은 소식이라도 있을까 해서요.”
“좋은 일이라. 뭐, 별 거 없어. 무소식이 희소식.”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요.”
추켜올린 말에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심사위원 중 한명인 최교수와의 만남이 꽤 괜찮았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현준은 가늠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냥 쉽게 결론을 내리고 지나쳐버릴 것도 민감하게 체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거기에 잣대마저 흔들린다.
김선재는 어떤 인물인가?
모른다.
그를 한계까지 몰아가본 적은 없다.
스펙, 성격, 상대한 경험.
이놈은 이런 놈이지, 그렇게 규정한 나만의 잣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건 안정된 상황에서의 규칙들이다.
한계 상황을 상정하고 나니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수틀리면 협박까지 불사할 생각이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김선재가 어떻게 나올지는 전혀 모른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쓰레기를 상대로 협박 댓글을 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없이 많은 경우를 봐왔다.
어쩌면 김선재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쉽게 안전지대로 도피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김선재는 지성이라는 이름의 무기를 곤봉처럼 휘두르며 감춰둔 포악성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닥쳐도 솜씨 있게 그들을 요리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현준은 다시 한번 웃었다.
김선재를 향한 거짓 웃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나 약한 놈이란걸 알고나니 왠지 우스웠다.
그래. 난 그럴 수 없다.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서버실을 나설 때 이미 내린 결론이다.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난 기껏해야 어른인척 하는 급식충이다.
이제와서, 몇 마디 말에 우쭐하는 김선재를 봤다고 해서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 거라고 결론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한계 상황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미 알고 있는 평상시의 규칙 위에서 싸우는 게 현명.
수틀리질 않길 바란다.
수틀렸을 때 김선재가 호구처럼 굴거란 낙관도 하지 않는다.
“예상 대로던데. 최교수는 오래 전부터 우리 팀에 손을 들어줄 작정이었나 보더라. C팀 밀고 있는 김대표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못보는 거지. 전에도 국책사업 심사에서 대판 싸웠다길래 혹시나 했더니.”
“그래도 다른 팀 말고 우리 팀에 붙게 만든 건 형 네임밸류가 커서 그런 거죠.”
“내가 그런 게 있었냐?”
“모르는 척 하시긴.”
“오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냐? 입에 발린 소리나 늘어놓게.”
틱, 하고 꽁초를 발치에 내던진 김선재가 구두 밑창으로 그걸 비벼대면서 현준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형도 김대표 될텐데, 나중에 최교수가 헷갈리면 어쩌죠? 이번 한번으로 끝날 인연은 아닐거고.”
현준의 너스레에 김선재는 몸을 굽혀가며 큭큭 웃어댔다.
“그럼 곤란한데. 아, 그럼 넌 박이사냐? 그러고보니 고등학생이 이사직 맡을 수 있나?”
“글세요. 자격제한 같은 건 없었던 거 같은데.”
“그건 뭐 닥치고 나서 생각해도 되겠지. 상 받고 돈 좀 통장에 찍히면 말야.”
김선재는 이미 상을 받은 기분임에 틀림없었다.
그건 현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현준도 잘 알고 있었다.
상을 받는 것이 팀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란 사실을.
상금과 퍼블리싱 지원 대상, 국책사업 투자 지원 대상이 된다는 것.
어떻게 보면 달콤한 이야기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던가.
퍼블리싱 대상, 투자 대상 앞에 달린 [지원] 이란 말은 정부 차원에선 금전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해주겠다는 말과 똑같다.
김선재의 말마따나 정말로 힘든 건 상을 받고 나서 통장에 돈이 찍힐 때까지다.
현재로선 현준의 아버지가 대부분의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것도 이제 곧 끝날 예정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박철승이 자식놈 놀이에 장단을 맞춰 헛 돈을 쓰고 있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상을 받고 인지도가 올라가서 추가 투자를 확정지어야 소모성 컨텐츠 제작에 들어갈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입상 사실과 [지원] 이라는 꼬리가 붙긴했어도 정부에서 인정한 좋은 게임이란 타이틀이 붙는다. 투자를 받기 위한 최소 조건인 셈이다.
요컨대 상을 받고 나서 첫 투자자가 나타날 때 까지 어떻게 버티느냐가 관건이다.
김선재로서는 답이 없다.
이미 커져버린 팀이다.
돈 줄이 막히면 사람들이 이탈한다.
게임 제작은 사람이 전부다.
팀 분위기가 나빠지면 투자 심리도 위축된다.
키는 여전히 내가 쥐고 있다.
수상 이후부터 투자금이 들어올 때까지의 공백을 메꾸는 방법은 나 말곤 없다.
결과를 낸다면 아버지는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 확신은 있다.
오히려 돈이 될 거라는 냄새를 풍기면 아버지 쪽에서 나설 것이다.
돈이 돈을 끌어들인다고 했다.
지금까진 애들 장난이었을지 몰라도 수상하고 나면 사정이 다르다.
본론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잡던 현준은 등받이를 감싸안고 있던 양팔에 힘을 주었다.
“어찌됐던 이제 애들도 정리하고 새로운 인원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외주도 빡세게 돌려야할텐데. 그거 관리할 사람도 있어야하고.......”
현준이 슬쩍 밑밥을 뿌리자 김선재가 덥썩 미끼를 물었다.
“어,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 있었는데 잘 됐네. 프로그래머 둘 충원할 생각인데 어떠냐?”
어떠냐? 라니.
반대한다 한들 김선재는 답을 찾아낼 것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떠냐고 물은 그 질문 자체가 중요하다.
김선재는 여전히 자신을 돈줄로 보고 있다.
평상시의 룰은 건재하다.
현준은 가만히 숨을 고른 다음 말했다.
“형이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기획 쪽도 좀 늘려야죠?”
“왜? 이사 직함 달고 좀 편하게 지내려고?”
현준의 말에 김선재가 실실 웃으면서 놀려댔다.
현준은 예정했던 수순에 따라 김선재에게 공을 던졌다.
“에이. 그런게 아니고요. 시스템기획 쪽은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컨텐츠기획 쪽은 더 있어야겠어요. 이전에도 했던 이야기잖아요.”
“뭐, 그야 그렇지. 그래. 누구 생각해둔 사람이라도 있냐?”
“아무래도 유저 대상층이 대상층이니 만큼... 저처럼 좀 어린 애가 좋지 않겠어요? 인디 게임팀이기도 하고 투자 받자마자 경력자로 막 갈아치워도 모양새 빠지기도 하고. 형이 뽑으려는 사람도 그렇지 않아요?”
“흐음. 그래도 걔들은 대학생이라고. 니가 특이한 케이스지.”
“몇 달 후면 저도 고등학생인데요. 뭐.”
“널 보면 가끔 그걸 까먹긴한다만... 그래 누군데?”
“한예원요.”
순간 김선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현준은 못본척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A팀에 기획자 있잖아요. 저랑 같은 중딩.”
“어.. 그래. 그랬나?”
“전에 이야기한 적도 있는데. 한상현 의원 딸내미. 기억나시죠?”
“아~ 걔. 알지.”
“네.”
너네들이 좀 전까지 개 년이라고 부르던 그 애 말이다.
“음... 걔 평판 별로 안 좋던데.”
“그래요? 걔 잘해요. 성격도 좋고. 배경도 좋잖아요? 잘하니까 욕먹는 거라구요. 그건 형도 마찬가진데. 형 욕하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구요. 전 그렇게 생각 안하지만요.”
“으음...”
“걔 아이디어도 톡톡 튀는 애라고요. 라이브 메인 기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현준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한 말에 그는 팔짱을 끼고 턱에 손을 갖다댄 채 생각에 잠겼다.
그래. 열심히 생각하라고.
현준은 김선재의 표정을, 그의 몸짓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려는 듯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모르는 영역은 배제한다.
이미 알고 있는 곳에서 승부한다.
내가 알고 있는 [평상시]의 김선재라면 한예원을 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다.
돈줄이, 물주의 아들이 한예원을 원한다.
일처리 하난 완벽주의자처럼 깔끔하게 해내는 그가 스스로 평판이 망가진 애새끼 기획자를 중요한 자리에 들여온다?
자신의 원칙에 어긋날 게 분명하다.
투자자들도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그건 그가 쥐새끼 둘의 평판을 신경쓰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명한 일이다.
선택의 시간이다.
그라면 한예원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자다.
쥐새끼들은 포기해라.
그건 니가 뿌린 씨다.
니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다.
한예원과 쥐새끼들을 동시에 품을 생각따윈 하지마.
똑같은 상황이 우리 팀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까.
“형? 왜 그래요?”
현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냥 김선재를 불렀다.
김선재는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벽에 기대 움직이지 않았다.
의도는 적중했다.
그는 고민중이었고 그 사실에 현준은 만족했다.
A팀의 탈락은 기정사실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번복할 수 없다.
쥐새끼들은 달궈진 덫에 밀어넣고 죽여버리고 싶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미 알아버린 사실.
제3자가 본다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그저 자그마한 균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일.
내 입장에선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가장 좋다.
자존심이 갈갈이 찢긴 한예원을 위로하는 포지션도 좋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미소를 꾸며 짓고선.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건 한예원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아... 뭐라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선재가 현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제가 못할 말을 했나 해서요.”
“아니. 그거 말고 나 욕한 놈이 누구야?”
현준은 긴장으로 굳어있던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뭐야.
그런 거나 신경쓰고 있었어?
“아뇨.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언제였는지도 기억 안나는.......”
“그래?”
“한예원 데려옵니다?”
그딴 거나 생각하고 있었던 걸 보니 별 일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굴러가겠거니 하고 현준은 쐐기를 박았다.
그건 오산이었다.
“한예원... 그래. 한예원 말이지?”
“그 이야기 중이었잖아요.”
“그건 그렇고....... 니 서버 확인하러 간다켔제?”
현준은 고개를 들어 김선재를 올려다보았다.
냉소적인 미소가 김선재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네? 그랬죠.”
“서버실 바로 옆이었제? 거 있었나?”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다 쳐 들었구만? 참 나. 이 새끼 진짜 맘에 안 드네.”
“.......”
창고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 현준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멘탈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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