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세연이의 부드러운 아랫배의 감촉과, 왠지 모르게 촉촉하게 젖은 것만 같은 발간 입술틈에서 새어나오는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그 위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이 누가 봐도 거시기하게 보일 거란 사실을 시원은 뒤늦게 깨달았다.
야, 김세연. 이상한 소리 내지마!
일부러냐?
일부러지?
“맞아.”
작은 목소리로 세연이가 말했다.
독심술도 그만해!
하여간 김세연. 이런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시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세연의 손목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상반신을 들어올려 상큼이 쪽으로 향한 다음 최대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어필을 하려했다.
“으? 음? 어?”
이상한 SE(Sound Effect)를 내면서 어찌할 줄 모르던 상큼이는 머리 위에 느낌표를 딱! 띄우더니 씨익 웃었다.
“......상큼아. 니가 뭘 생각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거 아니니까.......”
“나 오빠랑 언니랑 오랜만에 만나서 옛날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면 뭐야?”
상큼이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문을 천천히 닫기 시작했다.
“야! 뭐냐? 왜 웃어!? 문은 왜 닫아!?”
그러니까,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여자 끌어들여 야한 짓 하려다 여동생에게 들켰다.
질문 받는다.
졸지에 그런 상황에 몰려 버렸다.
“오빠, 파이팅.”
밑에 깔려있던 세연이가 무감동한 목소리로 작게 그렇게 말했다.
뭐가 얼어죽을 파이팅이야!
누구랑 싸우라고!
너도 뭐라고 좀 해라.
“난 내 방에서 게임이나 해야겠네. 헤.드.폰. 쓰고 말야.”
“안 써도 되거든!?”
“그럼 방해해서 미안. 하던 거 마저 해.”
“말싸움 하던 거 말이지?”
“응. 말싸움인지 소싸움인지 레슬링인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계속해. 오빠, 파이팅!”
탁, 하고 문이 닫혔다.
오빠, 파이팅. 그게 이 말이었군.
어이가 없어서 세연을 한 번 내려다 본 뒤,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안 해?”
세연이가 말끄러미 시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침대 옆 창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에 세연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난 너 피한 적도 없고, 10월 몇 일인지 뭔지 그 날 기억도 안나.”
“아니, 그거 말고.”
시원의 눈이, 동공이 일순 팽창했다.
어?
뭐, 뭘?
상큼이가 오해한 그거?
정말로 그거 끝까지 하자는 거야?
푸른 계통의 가디건 아래, 받쳐 입은 하얀 와이셔츠의 칼라 부분 틈으로 세연의 살이 보였다.
목 젖 밑의 자그마한 골이 부드럽게 오르내리고 있었고 좌우로 매끈한 뼈가 셔츠 밑을 달려 사라진다.
“.......괜찮아?”
어디선가 읽었던 게시물이었나 아니면 고민 상담의 댓글이었나.
이 딴걸 묻는 놈은 병신이라고 했던가.
시원은 문득 그런 걸 떠올렸다.
“응. 괜찮아. 계속 해도 돼. 계속 해줬음 해.”
세연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명료해 둘 뿐인 방 안 어디에서 들어도 놓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좋아해.”
정말?
분명 지금 거울을 보면 엄청나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겠지.
시원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좋다는 거지?
얘가 지금 그렇게 말한 거지?
정말?
좋아하느니 사귀느니 그런 건 전혀 관심도 없는 4차원인줄 알았다.
멀어지고 나서야 아, 나 세연이 좋아하는 구나. 하고 알았다.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니라고 미뤘다.
그런 것도 못했는데 다 뛰어넘고 바로 이런 거부터?
“나, 나도 좋아해. 그, 그렇지만.......”
겨우 겨우 목구멍 속을 헤집어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돼서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도 되는 거야?
“그럼 계속 해.”
“괜찮아?”
“그만 좀 물어. 바보야. 끝까지 하란 말야.”
세연이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시원은 혼란에 빠진 머릿속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그래 뭐였지? 우선 키스부터? 아니면 가슴부터?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여친이라도 만들었어야......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방 안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세연의 배에 닿아있던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밑이 딱딱해졌다.
분명히 세연이도 느꼈겠지.
그도 그럴게 닿아있었는데 모를 리가 없다.
시원은 떨리는 손 끝을 세연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세연의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편이었는데 가슴도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또래 애들보다 조금 큰 편인 시원의 한 손에 모두 들어오는 사이즈.
옷 입으면 말라보이는 타입?
딱히 감촉이 좋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감촉은 그냥 옷이 주는 감촉일 뿐이고, 부드럽긴 했지만 여자의 가슴이란 건 생각보다 탄력이 있지는 않았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순간, 세연이가 시원의 손을 홱 낚아챘다.
어? 실수했나? 역시 키스부터 해야했나?
당황한 시원이 세연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화가 났다거나 부끄러워한다거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좀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무표정.
“게임, 끝까지 만들어. 그만 두지마.”
“......뭐라구?”
에고가 블랙홀이 수축하는 빠르기로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
“게임, 끝까지 만들어. 그만 두지마.”
토시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했던 말을 반복하는 세연을 시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 안쪽을 이리저리 들쑤셔댄다.
이건... 그래.
종업식, 올해 마지막 날 등굣길에 얼어붙은 길 위로 미끌어져 자빠졌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이랑 닮았다.
충격에 놀라고, 어리벙벙해지고, 부딪힌 엉덩이와 등짝이 점점 아파온다.
동시에 발생하는 쪽팔려 죽을 것만 같은 부끄러움을 견뎌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널부러진 가방 내용물을 수습할 때 쯤이면 정말 살기 싫어진다.
아이고.
이제 이걸 어쩐다.
정말이지, 눈치 다 챘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란 말야.
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
세연이는......
처음부터 다 알고 그랬던 거다.
10월 2일에 도착한 컨테스트 탈락 통보도.
이제 게임 개발은 그만 두겠다고 결심한 내 속마음도.
자아. 일단 목부터 한 번 메고 생각해볼까.
창밖으로 들어오는 저 밝은 햇살이 눈부시구나.
여기 12층이었지?
“무슨 소리야. 그만두다니. 하하.”
시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슬그머니 세연의 위에서 내려와 책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세연을 마주보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아픔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쪽팔림은 나중에 이불킥 몇 번 하면 잊혀질테고.
물론 가슴의 감촉은 평생 잊지 않을 테다.
남는 건 뒷수습.
널부러진 가방 내용물처럼 다 드러나버린 내 속마음은 어떻게든 주워 담아야겠지.
세연이가 모르게.
“계속 만들 거야. 차기작 준비 중인데? 청산고 기숙사, 개인 컴퓨터도 들고 갈 수 있다더라. 다음엔 유니티로 하려고. 봐봐. 책도 샀는데.”
하나만 빼고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몸을 일으킨 세연은 침대 맡에 걸터 앉아 시원의 너스레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떨어진 게 뭐 대수야. 또 하면 되지. 걱정마. 이번엔 너도 깜짝 놀랄만한 게임 만들테니까. 틈틈이 준비해서 대학 붙고 나면 다시 만들 생각이거든.”
웃고 있는 얼굴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세연아.
나 실은 이제 게임 개발에 별로 관심 없어.
좋은 대학가서 그냥 내 시간 많이 가질 수 있는 좋은 직장 알아볼 거야.
전에 아는 형이 그러더라.
방송국이나 관공서 서버 관리직이 그렇게 꿀이라더라고.
페이도 쎄고 하는 일은 적고.
학벌만 좋으면 뭐든 할 수 있어.
나 지금부터라도 공부 열심히 하려고.
지금 하는 생각도 읽을 수 있다면 이제 그만 그런 소린 하지 말아주라.
예전 같았으면 게임에 관한 이야기에 거짓말 따윈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그거 누가 한 말이야? 참 나.
“거짓말.”
“정말.”
“그럼 왜 지금 여기 있어?”
“뭐?”
세연은 안쪽으로 돌려찬 손목시계를 확인한 다음 다시 시원을 바라보았다.
“CGS, 벌써 개장했어.”
시원이 너라면 새벽부터 줄서서 들어갔을 게 뻔하잖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연의 눈이.
시원은 일부러 과장된 한숨을 푸우욱 내쉬었다.
“아니. 안 가기로 했어. 생각해봐. 나도 쫀심이 있지 본선 진출한 다른 게임들 보면 속이 뒤틀릴 거 같애. 그냥 그래서 안 가는 거 뿐이야. 나 속 좁은 애라고. 몰랐어?”
정곡을 찔려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걸 숨기려 일부러 으아아아아- 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하지만 세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강연은?”
“강연?”
“내가 아는 안시원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쓸테고 신경 쓴다고 해도 좋아하는 프로그래머 강연 놓칠 사람이 아닌데.”
세연은 꼭 길게 말해야 알겠냐는 식으로 입을 삐쭉삐쭉 대었다.
맞는 말이었다.
시원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오늘 진짜 단단히 맘 먹었나보네.
시원은 생각했다.
천하의 김세연이 다섯 마디 넘어갈 만큼 떠들 줄이야.
이렇게 되면 골치 아픈데.
점점 모든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게임쇼 안 가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시원은 무심결에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서 아차 싶어 세연을 살폈다.
시원의 예상대로랄지, 아니면 예감대로랄지 세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시원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나 피하지 말든가!”
“피한 적 없어!”
“시끄러. 거짓말쟁이야.”
“거짓말 아니거든요!”
“자, 받아!”
바짝 붙어 눈싸움을 벌이던 세연이 한발짝 떨어져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뭐야?”
“티켓. 스탭용. 전부 프리.”
“CGS?”
“그래.”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란 건가? 시원은 선뜻 티켓을 받지 못하고선 망설였다.
“니 거잖아.”
실은 오래전에 이미 일반 입장 티켓을 끊어놓았다.
결국엔 가지 않기로 했지만.
“난 안가.”
“왜?”
“.......”
세연은 정식 직원도 아니니 꼭 참가할 필요는 없다.
사람 많은 곳은 절대로 가지 않는다. 그런 거겠지.
“갈 생각 없다니까? 강연은 나중에 인터넷으로 봐도 되고.”
“.......”
침묵.
5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럼 가서 내가 작업한 캐릭 열쇠고리 하나 사다줘.”
세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 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아무래도 좋았다고나 해야하나.
시원은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물론 가슴 만진 거 빼고.
“어, 으응.”
이 녀석이 나한테 뭘 해달라고 부탁한 게 얼마만이지?
초등학교 때였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왠지 이 순간 만큼은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시원은 세연이가 다시 한 번 내민 티켓을 순순히 받아들었다.
- 한예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버실을 나선 박현준. 그런 현준의 속내를 김선재는 알아챌 것인가?
다음화도 서비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