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강유진이 기억하냐?"
"아~ 알지, 알지."
"...나 있지, 걔랑..."
"내 동정 떼준 앤데 어떻게 잊겠냐? "
나는 밖으로 나와야 할 고민거리와 푸념이 갑자기 목구멍에서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방금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고 1때 너랑, 나랑 걔랑 같은 반이었잖아? 그 2학기 다 끝나고 반 애들 쫑파티 할 떄인데...아, 그때 넌 없었나?"
그랬다.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다. 고교 입학을 하면서 '이제부턴 정말 공부뿐이야'라는 마음가짐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도 멀리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나마 성격 좋고 붙임성 있어 반의 반장 노릇을 했던 친구인 그가 같이 가자고 했었지.
실은 내심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쌓아온 스트레스도 날리고, 말도 건네질 못한 애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아쉬웠던 청춘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하지만 1년 동안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터라, 이제와서 놀자고 나댄다거나 다른 애들과 친한 척 하는 건 남들이 보기엔 이기적인 처세로 보일 게 뻔했다. 분명 어색해질 게 뻔할 뻔자였다. 결국 가 봐야 쫑파티 특유의 끼리끼리 분위기에 입도 뻥긋 못하고 눈치보며 이것저것 주워 먹다 아까운 시간과 체력만 소모하게 될 것이기에 단호히 거절했었다. 그리고는...
"암튼 그 때 왠지 걔가 기분이 엄청 안좋아보여서 내가 챙겨주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둘만 남았는데 어쩌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버려서... 하~ 옛 생각 난다."
유진이와 대판 싸웠지...
유진이는 그 때 파티에 가기 싫다는 날 붙잡고 데려가려고 했었다. 순간, 그래도 소꿉친구라고 나를 신경써 주는 건 내심 고마웠다. 보통같았으면 못이기는 척 하며 같이 가는 게 일반적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붙잡는 방식이 강력한 도발형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날따라 유진이는 더욱 밉살맞았다. 평소 특유의 놀리는 듯한 어조로 날 대하는 것도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짜증났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불쌍하다느니, 청춘에 실례라느니 하며 내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까지 박박 긁어댄다면? 당연히 내 입에선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후로는, 뭐...
그 때였구나. 그 때였어...어?
'...잠깐. '그 때' 유진이는 처녀였는데?'
희망적인 생각도 잠시였다. '구라 치지 마, 이 새끼야'하며 그의 자랑 아닌 자랑에 치명적인 모순의 근거를 대려고 입을 열고자 하는 찰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내 머릿속은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정지하고 말았다.
"그때 뭐 준비된 것도 없어가지구 급하게 하느라'뒤'쪽으로 했는데..."
'뒤'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려온다. 아니, 울렁거리는 게 아니다. 시리다. 아니, 시린게 아니다. 느낌이 이상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고통이다. 마치 위 속에, 폐 속에, 심장 속에...아니, 어딘 지 모르지만 가슴 속 중요한 곳에 모난 자갈을 부어넣은 것만 같은 불쾌한 느낌이었다. 단 하나의 음절이 뭐길래 왜 이리도 속이 아픈 걸까.
메아리는 사라지지 않고 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뒤...뒤...뒤... 그가 말했던 그 뒤가 그녀가 말한 그 뒤인 걸까?
아니, 알고싶지도 않았다. 아니,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백 아닌 고백에 이 잔인한 사실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때..."
이 이유모를 아픔은 둘째치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속을 겨우 억누르고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나 걔랑 결혼해."
"걔가...?!"
그는 내 얼굴을 봤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아니...아...하하하! 착각했다,그 유진이가 아니라 신유진...이었나?...그래! 그랬..."
정말 뒤로 했던 게 맞는 것 같다. 그는 거짓말을 정말 못 한다.
그의 거짓말이 오히려 더 큰 비수가 되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는 몇마디 소리를 하다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더 이상 그의 말이 잘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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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1편입니다...소재가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