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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0. 개화(開花).
“그림은, 보아주는 사람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
“유진 씨? 방금 전 연기, 어떠셨나요?”
“……….”
“유진 씨?”
“아, 어, 응. 연기 말이지?”
“……듣고 계셨던 거 맞죠?”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율이를 보며 그저 손사래만을 반복했다.
“이 장면은 누군가의 발언을 히로인이 언급하는, 그런 장면이지? 율아?”
“아, 네. 과거 은인의 말을 주인공에게 말해주는, 인용하는 장면이네요.”
“그런데 뭐랄까, 방금 전 율이의 연기는 인용의 대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조언하는 듯 느낌을 받았어. 어떤 이야기인지 알겠니?”
“……흐응, 제대로 듣고 계셨군요.……그나저나 또 어긋나 버리고 말았네요.”
“감정은 어긋나, 빗나가 버렸지만 연기는 좋았다고 생각하니까……열심히 해봐.”
“네! 항상 감사드려요.”
율이는 앉은 상태에서 꾸벅 인사하더니, 대본을 다시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앉은 상태에서 발성하는 것만으로 숙직실을 울릴 수준의 성량을 보이는 율이가, 세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총장에게 직접 연락하여 모종의 계약을 끝낸지 일주일이 지나가는 이 시간. 평소보다 미묘한 긴장상태가 몸에 익어버린 일요일의 낮 시간. 단지 고요하고 평화로운, 월화수목금토 와 같은 일요일의 낮 2시.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선율이의 연기를 듣고 여러 가지 조언이나 연습 방향……또는 쓸데없는 잡소리를 시끄럽게 늘어놓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그 쓸데없이 장황한 설명을 두 눈 빛내며 듣고 있는 율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리를 크게 키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사운드로 시끌벅적하던가, 내 목소리나 율이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평소의 숙직실은 상상 이상으로 침착한 분위기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사족이지만, 나는 율이에게 실없는 조언을 해 주는 도중에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과 대화할 때 눈을 맞추는 것을 중요히 여기는 내 케이스로 하여금,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내 시선은 화판 위에 올려진 스케치북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오른손은 쉴 새 없이 4H 경도의 연필을 슥삭 거리며 기분 좋은 소음을 만들고 있었고, 스케치북은 흑연의 길을 선명히 새겨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율이는 많은 것을 묻지 않는다. 이런 나를 배려하여.
서로 말하지 않아도 발휘되는 배려에, 말하지 않고도 서로 이해했다는 작은 사실에 눈이 가늘게 뜨여진다.
“무얼 그리고 계신가요……?”
인기척 없이 몰래, 또 조심스레, 내 옆자리에 스며들어온 율이가 묻는다.
“이 시간의 피사체는 항상 너라고?”
“헤……? 저 말씀이신가요?”
놀라면서도 호기심에 스케치북을 바라보는 율이의 얼굴에는, 희미하지만 웃음이 띄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그려진다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약간의 설렘, 기쁨이라는 감정의 경쟁에서…기쁨이 주도권을 가져온 듯싶었다.
……사실 이 스케치북의 내용물은 귀여운 율이의 모습이 잔뜩 그려져 있었는데, 항상 이 시간에 적절한 피사체가 되어주는 본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조금은 호기심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드무시네요.”
“……드물다는 말, 저번 주 금요일에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아, 네. 그도 그러실 것이…월요일부터 계속 스케치북을 붙들고 계셨으니…”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드물 정도가 되었었구나……”
“예에, 뭐……그 전까지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을 직접 뵌 기억이 드물었으니까요.”
“미안. 조용히 이러고만 있으니 재미없었을라나.”
“아, 아뇨! 그저 그……무언가에 집중하는 유진 씨의 모습이…뭐랄…까……굉장히 멋있으셔서…”
“유진 씨가 제 모습을 쫒으셨을 때, 이런 기분이셨을까 생각했답니다.”
“자……잠깐! 그 때 이야기는 금지! 낮 뜨거워지니까 금지!”
율이는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맞대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귀엽게 쳐다보면서도 “금지! 금지!” 거리며 허공에 연필을 휘적이고 있을 뿐이었고.
확실히 나는 그 일요일 밤 이후로도, 계속 그림을 그렸었던 것 같다.
아마 그 날 이후로 정해진 내 마음에 솔직해, 그림을 그린다는……종이에 모양을, 무언가를 새긴다는 그 행위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결의.
한 발이라도 전진하기 위한 일주일 전의 결의와 계획.
율이의 대견함과 귀여움에 확 껴안고 싶어지는 욕망을 곱게 압축하여, 비단과 같은 부드러움을 자랑하는 율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회상한다.
총장 장아연에게 결의를 전한 이후, 다음날인 월요일에 그녀와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의 전말을, 그 계획의 시작을.
또 하나의 금빛벚꽃 계획의 시작을.
◇◆◇◆◇◆◇◆◇◆◇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성주대학교 교수연구동 3층.
익숙해져버린, 1회밖에 걸어본 적 없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 공간에, 나는 그저 걷고 있을 뿐.
그리고 내 옆에는……방학 첫날부터, 낮 시간부터 숙직실을 찾았던 선율이가 있었다.
일요일에 버려졌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려 따라온 것 같은데…솔직히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역시 억지로 따라와 버린 걸 까요?”
“괜찮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저 밖에서 서 있겠다고 약속했지?”
“……정말, 동행해선 안 되는 건가요?”
“같이 있어서 좋을 건 없어. 게다가………”
무서웠다.
총장이 나에게 어떤 도발을 걸어올지에 대해서.
총장이 나에게 어떤 말을 꺼내, 내 성격을 시험하려 들지, 내 끓는 온도를 시험하려 들지 말이다.
그리고 그 때 보이는 표정을, 그 심하고 악독한 표정을, 내 옆의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에.
“ㅇ……유진 씨?”
아, 너무 율이를 빤히 쳐다본 것 같았다. 게다가 올라가던 계단도 덩그러니 멈춰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는 율이에게 다가가, 그저 머리를 쓰다듬으며 층계를 밟았다.
“괜찮아.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너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가 가야 할 공간은 층계를 밟아,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존재했다.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 했지만, 그것을 떨쳐내듯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려 지체하지 않고 돌렸다.
“망설이지 않아.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별 것 아닌 일이야” 라고 말하듯.
“착한 아이처럼 기대라고 있으렴. 엿듣지 말고.”
“아……안 그럴 거예요!”
피식 웃으며, 교수연구동 4 – F, 약속한 그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나무문의 무게감이 벌써부터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위작(僞作)을 그리겠다고……? 금앵추상의?”
오늘은 혼자가 아닌, 적어도 2배는 늙어 보이는 노년신사를 대동한 그녀는 내 말에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장아연. 오늘 나를 만나기로 했던 성주대의 총장……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말이었으니.
그럴 것이……
“유진이는 알고 있는 거지? 위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른 사람의 것을 흉내내어 비슷하게 만드는 일. 또는 작품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 틀린가요?”
“하품이 나올 정도의 정론이니까 하는 말이야. 말 그대로 다른 작가의 작품을 네가 그렸을 때 위작이라는 단어가 효험을 발휘하는 거야.”
솔직한 정론이었다. 내 말이건 그녀의 말이건. 맞받아칠 곳이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것을 위작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럴 일도 거의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 설명은 아직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누락되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네. 하지만 위작일겁니다. 지금부터 그릴 녀석은 가짜지만, 어디까지나 진짜로써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테니까.”
“그럼 진짜 너의 금앵추상은……”
“네. 언제까지나 영원히 ‘저의 금앵추상’입니다.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딱 잘라 말했다.
미술 준비실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금앵추상을 다시금 세상 밖에 내놓을 생각은 없다고.
그렇다면, 대신 보일 물건을 만들면 된다.
내가 너무 어리석고 약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하고 나약한 생각을…….
단지 그 약했던 자신의 생각을 인정하고, 고쳐나가면 된다. 그리고 조치를 취하면 된다.
“금앵추상은 당신이 어디에서 구한건지 모를 그 사진을 제외하면 고화질의 사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진마저 위작 제작에 참고할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찍혀있지 않죠. 제가 원작을 공개하지 않는 한 위작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진이 자세하지 않다는 것은……사진만으로 진품가품 판별이 원활하지 않기에 구별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수긍의 표현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위작을 만들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만들어 버리겠다고?”
나는 다시 수긍의 표현으로 끄덕. 아연의 추리에 긍정했다.
“저는 위작이라 생각하며 그릴 겁니다. 어디까지나 한유진이 그린 금앵추상이 아닌, 누군가가 위작한 금앵추상으로 그려……계속 전해질 테니까요.”
“그렇기에, 안작(贋作) 따위가 아닌, 위작(僞作)입니다.”
담담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러자 아연은, 참지 못할 것 같은 폭소로 방 안을 채워갔다.
“………아하하하하하!! 당신 최고야!! 자신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 하면서 그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고?”
“……아연아.”
그녀와 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노년신사는 중후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아연은 그 노년신사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인지 웃음을 참아 방 안의 소리를 정돈했다.
“좋아. 조금 이해가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네 자신이 얼마나 예술가 한유진의 죽음을 원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알았어.”
예술가 한유진의 죽음……이라고, 그녀는 일부러 또박또박 발음하며 이야기한다.
그것은 총장의 말마따나 내가 너무나도 바라고 있던, 추구하던 것이었을 게 분명했지만…왠지 모르게 망설이게 된다.
“그래. 그러면 내가 해줄 것이 뭐가 남았지? 요구사항을 숨김없이 말해봐. 불가능하거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아니라면 전부 들어줄게.”
“원본 금앵추상급 특대 캔버스, 유화염료, 붓 수십개, 펜촉, 목탄, 잉크, 펜대……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겸허하네. 돈이나 승용차나, 그런 것들을 말해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생각이었는데.”
총장은 장난스레 말했지만, 아마 진심이었겠지. 그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하나 질문해도 괜찮니?”
“언제부터 제 동의를 구하셨다고…….”
“대체 한유진 네가 금앵추상이란 작품을 그렇게 아끼고,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네가……그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원인이 대체 뭐야? 그 원인은 누구에게 있지?”
총장은 마치 그 때와 같이, 처음 나와 대화를 나눈 그 당시와 같이,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어 질문한다.
말하려면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고하듯 말하려면 수십 수백 번을 길게 늘어뜨려 설명하고 싶었다.
나의 팬이라고 말했던 저 사람에게, 한유진이라는 예술가가 얼마나 한심하고 별볼일 없는 존재인지……비참한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심을 꾹 참아 간단히 이야기한다.
“저는 제 생각 이상으로 한심했고, 제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 뿐이기에 그런겁니다.”
“주변 사람들……말이지.”
내 말을 들은 아연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흐렸다. 이후 의문인 듯 나에게 억양을 바꿔 물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면………누군가가 평가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본래 금앵추상이 가진 생각과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발상은 최선이라 생각하고 감탄도 했어.”
“………!!”
그녀는 내 속셈을 알고 있던 듯……아니, 확실히 꿰뚫어보고 말했다.
“하지만 위작뿐이 밖에 노출되어 돌아다닌다는 사실 또한, 한 사람의 작가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들 사실 아닌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정도로 당신이 형편없는 인간이고, 그 정도로 주변 사람들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나? 한 없이 빛날 수도 있을 예술가 한유진의 이름을 버리고서라도, 당신은 지금의 생활이 행복한 건가?”
진심으로 의문을 표하는 그녀에게, 나는 조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다.
“‘그림을 다시 그려도, 저들이 주변에 있어만 준다면 괜찮지 않을까’ 라며 혹하게 될 정도로, 저에겐 과분한 안식처입니다.”
태훈, 선율, 하나, 화연, 소연, 대학 동기들과………유라의 얼굴을 떠올려보며 살짝은, 미소를 머금었다.
“……언젠가 그들에게 당신이 넘어가 버려서, 그림을……예술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네.”
아연은 팔을 괸 채로 빙긋 웃었다.
그녀에겐 보기 드문 광경이라, 보기 드문 풍경이라 생각했다.
‘뭐야, 저런 표정으로도 웃을 수 있잖아’ 같은 생각을 해 버려, 낮 뜨거움에 못 이겨 뺨을 긁었다.
◇◆◇◆◇◆◇◆◇◆◇
눈앞에 보이는 염료들의 상자. 튜브의 겉부분에 띠처럼 새겨진 염료의 색구분들이 정겹게만 느껴졌다.
‘아,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여기까지 오는데 참으로 오래 걸려버렸다.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금앵추상이……금빛 벚꽃이 서 있었다.
그 길다란 캔버스, 거체를 대지에 세우며…금빛 벚꽃은 태어난 장소로 돌아왔다. 마치 연어처럼.
태훈과 총장이 준비해 준, 유화도구들의 일렬과 순백의 거대한 캔버스. 그리고 정진정명의 금앵추상이 대지에 서 있는 이곳은 금앵추상이 태어난 장소이자 내 추억의 장소, 주성 초등학교의 뒤뜰이었다.
아직도 남아있어 웅웅거리는 기계음을 내는 우유냉장고, 여전히 이 경치의 일부가 된 교원들의 담배꽁초, 그때보다 조금은 커진 뒷마당의 작았던 은행나무.
조금씩 바뀌고, 조금씩 사라지고, 조금씩 어색해지던 이 장소에…특별히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존재가 나타난다.
작고 호리호리한 역광의 그림자가 자신을 숨길 마음 따위 없는 듯 나타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간밤에 평안하신지요. 유진 씨.”
율이는 웃으면서 인사한다.
“질렸다……분명 바래다 준 뒤에도 오늘은 연락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거늘.”
“어머, 그렇네요. 10분만 더 교내를 헤맨 대음에 인사드렸으면 아무런 꾸중도 듣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우유냉장고 위의 전자시계를 보며 말했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꼐.
우유냉장고 위의 전자시계는 황혼의 어둠 안에서도 불구하고, 붉은색 글씨로 [23:49] 라 띄우며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이 살짝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위험하게 늦은 밤 돌아다니고, 뭘 하는 거야.”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일주일 전의 그 때도 꽤나 늦은 시간이었답니다?”
“그 때건 지금이건 내 의지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결과인 것 같은데.”
“오히려 이런 새벽이 사람이 적어 안전할 것 같지 않나요? 기분도 좋고.”
율이는 오늘 여기까지 걸어온 인적이 없는 거리를 음미하듯 얇은 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이야기했다.
그 기분은 내 자신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건만, 저 작은 체구를 가진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와 어울리는 풍경이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안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논리였고.
“……뭐, 됐어.”
그럼에도……이상하게도……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 자신과 금앵추상. 이제 곧 금앵추상이 될 순백의 캔버스와 익숙한 유화도구.
그 속에 존재하는 한선율이라는 존재를, 내 뇌는 자연스럽다 판단하고 있었다.
뻔한 어른의 정론으로 그녀를 내쫒기에는……그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명분이 부족했고, 의지가 부족했다.
그런 내 의견을 정리하기 전에 율이가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목소리는 치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누구보다 침착했다.
“저 한선율은 유진 씨와 함께 하겠습니다.”
“………단지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유진 씨가 어떤 그림을 그리실까에 대해서.”
“잠깐잠깐잠깐, 나는 그림을 그릴 거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오늘 그릴 거라는 말도 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림에 관심이 적고 드무셨던 유진 씨가 갑자기 집중해서 연필을 놓지 않으시고, 아침에 숙직실에 들리기 전 보였던 금앵추상의 위치가 문하고 가까워져 있었답니다. 이 이상의 추론 요소가 필요한가요?”
“윽……”
정면으로 논파당해, 힘이 빠진다.
“게다가 꽤 용기가 필요한 대사도 했는데 무시라니……너무하세요.”
“그 ‘너무해요’ 같은 건 하지 말자. 누구 생각날 것 같으니까.”
“에……어떤 분이 생각나시는 건가요? 여성분이신가요?”
조금 눈을 무섭게 뜨는 율이의 시선을 피해 노 코멘트. 나는 애꽃은 금앵추상의 천막을 걷어 어께 의에 들춰메었다.
율이는 드러난 금앵추상에 시선을 옮겨, 입을 닫는다───그녀의 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율이의 앞에 서서 말했다.
평소에는 그 어른스런 언동 때문에 실감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새삼스레 느껴지는 신장의 차이에, 율이가 정말로 작고 어린 아이임을 다시 실감했다.
“돌아가라고 해도 안 돌아갈거지?”
“제가 어떤 대답을 드릴 것 같나요?”
“그런 뻔뻔한 대사를 당당히 하지 마. 것보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집에 부모님도 안 계신 몸. 저는 항상 책임감을 짊어지고 움직이고 있답니다.”
“여차했을 때, 책임은 내가 지게 된다는 걸 명심해줘……….”
“네. 명심하겠어요.”
나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마 무게감 없는 한숨일 것이다. 뭔가 ‘한숨을 쉴 타이밍일텐데’ 라는 반사신경에서 나온 본능적인 한숨.
무게감 없는 한숨 뒤에 고개를 들어 피식 웃는 한유진. 그리고 한선율.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와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 몇시 정도일까.
빛이라곤 달빛만이 굉장히 밝게, 태양을 모방하고 싶은 듯 빛나는 달빛만이 밝게 비춰지고 있다.
그 달빛이 기울이는 인영(人影)은 둘. 나의 큼지막한 그림자와 길고 가늘게 뻗는 소녀의 그림자 뿐.
꽤나 서늘한 공기의 여름 밤은, 두 명의 예술가를 지면에 남긴 채 날짜를 바꾸고 있었다.
핸드폰에서 12시가 지나는, 하루가 지나가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고……마치 그에 반응하듯 율이가 먼저 입을 떼었다.
“조명……이라던가, 없으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목소리에 걱정 반 스푼, 기대감 반 스푼을 섞어 말했다.
확실히 이 어두움에서는 그림 따위 그릴 수 없다. 달빛이 태양을 모방하는 듯 제아무리 밝게 빛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잇는 법이었다.
“달이 제아무리 태양을 쫒아도……인가.”
애석하지만, 태양빛 아래에서 색채를 표현하듯 하는 예술을, 달빛 아래에서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해야만 해. 이 시간에, 이 어두움에 달빛과 함께.”
“예전의 나는……”
그랬으니까.
그 때의 두 천재는, 그렇게 금빛 벚꽃을 완성시켰으니까.
한유진과 전태훈이라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두 예술가는……달빛만을 의지하며 저만한 그림을 하루만에 설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비록 유화로는 나중에 완성시켰다지만, 펜과 잉크, 포스터 물감 만으로 30명의 생각을 하나의 뿌리로 하여금 완성시켰다.
그렇기에 그는……
“……….”
나는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왼손을 꽉 쥐려 노력한다.
율이는 내 표정을 읽듯 바라보더니, 금앵추상 앞으로 다가가 시선으로 캔버스를 쓸어 담듯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작품을……이 밤에 빛나는 금빛 벚나무를, 정말로 밤에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느낌이 어때?”
“그렇네요…기대 이상으로 빛나고 있네요.”
별 볼일 없는 내 질문에, 단지 형식상 던진 질문에 율이는 제대로, 성실한 답장을 해준다.
“………역으로,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어버리는 거야.”
그런 선율이의 성실함과 따스함에 솔직하지 못하게 기뻐하면서도, 오답이라는 것을 확실시한다.
“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혼잣말.”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저 아가씨 앞에서는 혼잣말도 편히 못하겠구나’ 생각한다.
미묘하게 변한 내 표정을 바라보던 율이는 그대로 시선을 쭉 내 얼굴로 고정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율이의 시선에 얼굴을 조금 붉히며,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소녀는 “후훗” 하고 작게 웃었다.
“신비해요. 정말로.”
“신비하다니? ………금앵추상이?”
“아, 그러네요. 금앵추상도 이렇게 밤에 다시 바라보니 신비한 기분이 들지만……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은 유진 씨에 대해서예요.”
“에?”
율이는 달빛이 비스듬히 비춰지는 교정의 벽을 바라보더니, 다시 나에게 시선을 던져──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것을 이야기한다.
“내가……?”
“네. 곱씹어 생각 해 보자면, 저를 쫒던 학교의 수위 아저씨가 사실은 휴학 중인 대학생이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며, 과거엔 유명한 예술가였으며, 아버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셨고……”
율이는 액자 너머의 유리로 보호받지 못하는, 단지 캔버스 상태의 금앵추상을 상냥하게, 그리고 조금은 외로운 듯, 슬프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나이때에, 제가 사랑하다 마지 않는 이 금빛 벚꽃을 그려내신 장본인이라는 것이……그 사실에 질끈 눈을 감고 싶어지곤 해요. ‘하늘에서 내린 천재는 이런 작품을 남기기 위해 신이 창조해낸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금앵추상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당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성주대학교 학지에서 읽은 듯한 그녀.
율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수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저 숨을 죽이고……아름다운 선율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잠깐 감아─눈을 다시 뜬 율이는 나에게 시선을 향한다.
“아저씨.”
“응.”
일방적으로 때려 눕혀지듯, 끌려가듯 대답했다.
“이 작품을 구상했던 아저씨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가슴에 손을 올린, 낭독하듯 차분히 말하는 율이의 모습.
달빛을 역광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도 빛내는 율이를 그저 눈부시게 바라보며……나는 무언가에 홀려버린 듯 이야기했다.
“……아아, 대답 해 줄게.”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는 이미……약속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서늘히……천천히 불어오는 그 바람이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흔들고, 하늘하늘한 치마폭을 일렁이게 한다.
“아저씨가 구상한 금앵추상의 밤은, 금빛 벚꽃이 구슬프게 피어오른 이 밤은……”
빛나는 입술이 움직이는, 아름답고 가련한 소녀가 말하는 소리 속에는──
“……‘과거의 밤’ 인가요? 아니면 ‘미래의 밤’ 인가요?”
──가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은색의 빛나는 칼날이 숨어 매섭게 급소를 찔러온다.
날카롭고 묵직하게 소리를 울리는, 진지한 눈빛 그 자체가 달빛의 검이 되어 나를 찌르는………그런 선율이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한유진이라는 그림쟁이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입술을 뻥끗거리는 행위조차 용서받지……허락받지 못하는 것처럼.
폭력적이라 말해도 좋을………말해야 할 것 같은 아름다움을 내뿜으며, 그녀는 굳어버린 나를 향해 나지막히 말한다.
“저는 아저씨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에……?”
한 걸음 나에게 가까워지며 그 아이는 말했다. 사과해야 할 것이 있다고.
“나에게?”
“전에 말씀 드렸답니다. 금앵추상은 따스한 그림이라고……기억하시나요?”
“……응. 그 이후로는 기절해 버린 탓인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몰랐다 하더라도, 이 그림의 작가 앞에서 금앵추상이 가진 감정을 왜곡시켜 잘난 듯이 말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큰 죄를 지은 듯,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두 눈에 머금었다.
“별로 그런 얼굴을 해서까지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말했었지? 누구도 너의 생각을 틀리다고 하지 않아. 누군가와 다를 뿐의 것이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셨지만, 이 세계에는 아저씨와 같이 그런 따스한 말씀을 해 주시는 분이 많지 않다는 것을……알고 있답니다.”
나는 그녀가 다가오는 만큼,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무슨 감정에 기인한 것일까, 알 방도는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다리의 근육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제가 그런 핑계를 한 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이 올 정도로, 아저씨는 심한 얼굴을 하고 계셨답니다.”
“………지금 또한.”
“에……? 아!”
내 얼굴은 훌륭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음을 자각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그러진 얼굴을 자각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이미 한참 늦은 상태였다.
“……저 그림에 그려진 밤이 과거인가 미래인가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나는 눈만을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게 율이를 바라보며 따지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저씨에게 드리는 이 질문이……아저씨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대답을 닫고, 제 자신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성큼성큼, 내 가슴에 검지 손가락을─희고 가늘한 검지 손가락을 살랑 올린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제가 금앵추상에게 자신 솔직한 의문인걸요.”
그녀는 다시 손가락을 떼어내, 나에게서 조금은 멀어져갔다.
“아저씨가 말해 주셨던, 자기 마음의 솔직한 의견. 그 목소리인걸요.”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가볍게 웃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율이의 손가락이 가슴에 닿아, 그 부분부터 시원해지는 감각이 온 몸에 퍼져─마음속으로부터 사라지고 있던……마음 속 심해로 가라앉던 솔직함이라는 감정이 인양되는 것을 느꼈다.
그 시원함은, 내가 많이 느꼈던……싫은 기억을 잊을 때의 시원함과 같아서──그렇기에 나의 저 가벼운 웃음은, 헛웃음에 가깝다.
끄집어진 솔직함을 손바닥에 담아, 이번엔 내가 먼저 울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대답해 줄 수 없어. 미안해. 대답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건만.”
헛웃음이 아닌, 정말로 인자한 웃음을 담아 말했다.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답니다. 저는 어린 아이이고, 아저씨는 어른이시니까.”
율이는 내 웃음을 거울처럼 받아들이듯, 자신도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아직 떨리는 느낌이 없지 않아 느껴졌지만,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저 정도의 희미한 망설임은 금방 웃음에 묻힐 수 있겠지’ 라는……뿌리 없는 믿음만이 가득했다.
그 웃음에 소리를 숨겨 말한다. “나는 아직 어른 같은 게 아냐” 라고.
“그러니 적어도 답을 찾은 뒤에 이야기 해줄 수 있도록”
“……나도 할 일을 해야겠지.”
“네………!!”
나는 말했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의 맑은 소리가 교정의 뒤편에 작게 메아리쳐, 그 소리가 사라져 갈 즈음에…우리는 빈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작은 의자, 늘어져있는 유화물감, 다양한 크기의 붓과─ 유화에선 좀처럼 쓰이지 않는 펜촉과 잉크, 비상식적으로 큰 기름항아리까지 전부 총장과 태훈이 준비해 준 물건들이었다.
………캔버스 4개를 합친 듯한, 저 거대한 캔버스 또한.
“………그 약속 잊지 않으셨죠?”
“무슨 약속?”
“우으……아저씨가 붓을 다시 잡게 되면, 그걸 지켜볼……”
“아직.”
뺨을 부풀리며 이야기하는 율이를 향해 정직한, 장난기 없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직 붓을 완전히 다시 잡은 건 아냐.”
자는 지금부터 그림──또 하나의 가짜 금앵추상을 완성시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다시 회화세계에 발을 들이고 싶은 심정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그릴 금빛 벚꽃은……또 하나의 금앵추상이 아니라, 가짜 금앵추상인 것이다.
예술가 한유진이 그린 2015년의 금앵추상이 아닌, 이름 모를 예술가가 그린 가짜 금앵추상으로 태어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던, 이 그림이 어떻게 말하던.
그리고………
“그래도……반푼어치의 예술ㄱ……그림쟁이니까. 반푼어치의 약속은 지켜야겠지.”
나란히 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 있어 줘.”
“………네!”
학교에서 쓰다 버리는 목탄을, 짧아져 버릴 목탄을 주워 모은다는 태훈에게 받은 멀쩡한 목탄을 손에 쥐고, 순백의 캔버스를 멀찍이─ 금앵추상을 멀찍이 바라본다.
그것을 바라보는 선율이의 눈엔 힘이 있었고, 내 눈 또한 강함이 깃든 것 같았다.
그 강함만큼, 내 오른손엔 빛이 감도는 것 같은……특별한 힘이 깃든 것 같은 특별함을 느낀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이 그림에 대해서는…내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금빛 벚이 핀 이 밤하늘은, 과연 과거일 것인가 미래일 것인가.’
순백의 캔버스에 성큼 다가가, 흑색의 반짝이는 목탄을 살며시 갖다 대었다.
율이가 내 가슴에 손가락을 얹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 마음속을 개어내어 솔직함을 끌어올린 것처럼, 이제부터 그릴 금앵추상은……숨겨져 있는 금빛 벚꽃의 감정과 생각을 전부 끌어낼 수 있도록.
‘……찾는 거야. 천재 전태훈과 천재였던 한유진을 넘어서지 못해서는, 그 때의 생각에, 그들과 나란히 서서 생각할 수 없을 테니.’
‘해보는 거야. 왼손은 이제 없지만, 내 왼쪽에는……’
내 왼쪽에 앉아, 자신을 걷게 바라보는 선율이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보이지 않도록,
달의 커튼 속에 표정을 숨겨 미소 지었다.
그 때의 나는, 어릴 적의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떠올려 태훈과 함께 그려냈을 것인가.
무아지경으로, 본능적으로 그려냈던 내 자신은 금앵추상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 것인가.
지금의 내가 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하등 중요치 않다.
어린 시절의 천재였던 한유진이 마음 속 깊숙이 숨겨놓아,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찾아 표현한다.
그러기 위해선.
뛰어넘는다.
적어도 나란히 선다.
아이의 한유진과, 어른이 되다 만 지금의 한유진이.
──나는 4년 만에, 캔버스에 목탄을 그었다.
◇◆◇◆◇◆◇◆◇◆◇
“하아……!”
─스윽.
바보같이 큰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숨을 내쉰다.
붉은 글씨가 빛나며 보이는 시각인 [04:07].
새벽황혼의 4시가 되는 시간─금빛 벚꽃이 연성되기 시작한 시각으로부터 4시간이 지나갔다.
이미 원본이 존재하기에 펜화와 스케치 작업을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던 나는 끈적한 유화염료를 캔버스에 올리기 시작한지, 기름 항아리에 붓을 담그기 시작한지 3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건강했던 오른손에도 힘이 빠지기 시작하고, 숨이 가빠지고, 턱선을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지면을 적셔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속도는 떨어뜨리지 않으려 전신에 기합을 줘 팔을 움직였다.
“……아.”
내 왼쪽 어께에, 부드럽고 가벼운 충격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미 피곤에 절어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율이의 몸이 내 어께만을 의지해, 깊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남자의 몸에 의지하기엔, 아직 너는 너무 어리다고. 하여간……”
나는 가볍게 웃으며, 4시간 내내 멈추지 않았던……멈추지 않으려 했던 오른손을 쉬게 하여 그녀를 업어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율이가 들었다면 필시 낮뜨거움에 날뛰었을 달콤한 말을,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얇은 숨소리에 구색을 맞추었다.
이불 위에 율이를 눕힌 나는 다시금 밖으로 걸어 나와 캔버스를 마주했다.
이 무게감이었다.
내가 캔버스에 압도되지 않으려 피 땀 흘린 유년기의 기억이 소생하여─그 기억은 내 몸의 자유를 빼앗기 직전까지 몰아가지만, 붓을 잡아 휘두르는 것으로 그 감각을 최대한 지우려 노력한다.
휘두른다기엔, 생각보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붓, 내 오른팔, 유화물감의 질척한 질감.
그 무거움이란 요소는 내 체력을 3시간에 걸쳐 갉아먹게 하더니, 금방 내 몸에 축적된 에너지를 고갈되게 만들었다.
붓질을 하는 속도가 느려진 것은……솔직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미 그림의 대부분은 완성이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아마 이 페이스대로라 하더라도 동이 트기 시작할 즈음엔 완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 손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계에 있어 체력이 중요한 이유는……그저 손만이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상당히 많은 양의 에너지를 잡아먹으며, 또 굉장히 중요한 행위……두뇌회전. 생각 그 자체였다.
“이야아~ 큰일 났네……뇌가 굳어가는 게 느껴지잖아……하하……”
태훈이 말할 것 같은 투의 유쾌한 혼잣말을 하며,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 웃음은 허무의 근원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던 금빛 벚꽃의 이미지.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으로 자신의 위상을 또렷하게 각인시키는 그 금빛 벚꽃이, 허탈할 정도로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초점이 흐려지는 단순한 눈의 문제가 아니었다.
완성된 금앵추상을 관찰하며, 다시 그 모습을 기억하려 해도………현실은 쓰라린 과실로 다가와 내 혀에 굴려진다.
긴 시간 움직이지 않은 붓의 첨단.
떨리는 오른손가락의 끝은, 조바심이 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기에. 캔버스의 면직과 가까워지려던 붓이 다시 멀어지고, 가까워짐을 반복했다.
굳은 유화 위에 박리제를 사용할 겨를은 없다.
이미 펴 발라진 염료 위에 아예 다른 색을 덧씌울 시간 따위도 없다. 태훈의 기법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힘을 발휘하는 기법이었다.
이런 하드하고 정신 나간 짓을 질도 했었구나. 꼬맹이 시절의 한유진은…….
………인정하고 고개 숙여야 하는가?
과거의……천재였던 한유진은 정말로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저 기만과 개인적인 과거의 트라우마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과거의 천재로는 바라만 볼 수 있는 경지인가?
과거의 나와 태훈은……그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었단 말인가?
“……안된단 말이다.”
“인정하고 힘을 빼서는, 안된단 말이다……!”
소리친다.
다짐한다.
다시 한 번 결의한다.
강하고 솔직한 의지에 몸이 반응하던 것……같지만, 현실적인 감각을 간단히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감정은 편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한 감각……실패의 그림자……. 그림자에 침식되어, 자아를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심에 더 솔직히 반응 할 것이리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차가운 감각─여름의 서늘한 바람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어릴적 내 자신은 느끼지도 못했을 불쾌한 감각─식은 콘크리트와도 같은 냉담한 기운.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안 돼. 또 이 감촉이냐.
화연과 가재백화점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축축한 감촉이, 천천히 전신을 감싸 올라가─
“──당장 내 앞에서 꺼ㅈ───!!”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 힘껏 소리 지르는 몸. 그 어께에─내 어께위로 따스한 손길이 도달했다.
격렬한 떨림으로 소리를 지르던 성대는 활동을 멈추고, 바람소리나 초목이 잎을 뒤흔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된다.
청각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 것은 선ㅇ────
“그녀가 아니라 미안하다. 아……미안 합니다?”
공허하고 차가운 눈
창백하여, 어둠 속에 묻힐 것 같은 그 흰 피부.
불지도 않는 바람에 둥실둥실, 하늘하늘 나부끼는 긴 적발.
셀로판지와 같이 투명하여, 희미한 달빛을 전부 머금어 빛나는 것 같은 적발의 포니테일.
“───너는 분명히………!”
하늘하늘한 프레피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를, 난 본 기억이 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적이 있다.
그리고 신경 써줘, 외상을 달아준 그 아이.
명찰이 필요가 없어, 누군가에게 이름을 알릴 마음조차 고갈시킨 적발의 여자아이는 이 자리의 이레귤러─초대받지 않은 일국의 공주.
“눈은 향할 곳을 잃었기에, 붓은 달릴 길을 잃었기에.”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금빛 벚이 연성되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눈은 평소의 그녀와 같아, 바뀐 점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변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편안함을 얻은 것일까. 아니면 올려진 손으로부터 받은 온기의 보은인가.
나는 그저 그녀의 말에 답했다.
“………보이지 않아. 내 눈이 바라봐야 할 벚나무가. 본디 이 붓이 달려야 할 길이.”
“………응. 그런 거구나.”
그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차가웠다.
타인에게 고하듯, 어디까지나 자신이 신경 쓰는 일이 아닌 듯.
하지만 그 목소리도 오래가지 않아 온도가 바뀌었다. 여전히 냉탕인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유진. 그게 아니지 않아?”
“무슨……소리야.”
“바보 멍청이. 단순히 ‘복제’ 하는 일에, 생각할 필요가 있어?”
“이건 단순한 복제 따위가 아니야……!”
“유진. 그림을 잘 봐. 저 그림과 이 그림이 뭐가 다르고, 지금 유진이 붓을 덴 이 캔버스는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여 봐.”
“바보 같은 소리는 네가 하고 있ㅈ……”
“………에?”
계속 말이 끊기고 바보취급 당하는 나는, 충분히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존재였다. 그리 자각하게 된다.
단순한 복제가 아닌, 과거의 나를 뛰어넘는 수단이 될 터인 내 캔버스──연성되기 시작한 금빛 벚꽃은……과거 자신이 그렸던 금빛 벚꽃과 심히 닮아있었다……아니, 똑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의 3류 복제였다.
“유진은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야?”
“금빛 벚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해?”
“과거 자신을 뛰어넘는 안작의 금빛 벚꽃. 그를 위한 결의……”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여태 그린 이것은?”
“……위작의 금앵추상.”
침묵이 흐른다.
차가운 그녀의 소리에 맞춰 홀린 듯 꼬박꼬박 자조를 하는 내 소리도 멎은 채.
촌철살인(寸鐵殺人).
그녀의 몇 안 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부족한 내 공허를 찌르는 것 같은 소리로 돌아와─부끄러움과 수치심과 같은 값싼 감정이 아닌 결의했던 일주일 전의 내 자신에 대한 미안함, 기대하고 바라보고 기다려준 선율이에 대한 미안함.
그 감정들이 내 오른손 끝으로 전해져─내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붓의 끝이 지면으로 낙하한다.
“……안 돼.”
그녀가 속삭였다.
그리고, 내 오른손에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내 오른손을 붙잡은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머리카락이 서로 맞닿아, 그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접근을 허용한 그녀는 내 손을 들어, 다시 붓의 첨단이 캔버스의 앞에 향하게 한다.
“말했어. 내 자신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유진이 금빛 벚꽃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
“……나는………나는……”
가장 필요했던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
포기할 수 있는 용기.
하지만……그것은 ‘진짜’가 아닌 것들
내가, 그녀의 따스함이 닿기 전까지 원하지 않았던 것들.
그녀의 따스함에 어리광부리고 싶은 나약한 마음들을 걷어내어─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금빛 벚꽃을 볼 수 있다면……본다면……그 심상을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강하게 외웠다.
내가 여태까지 어리광 부리지 못 했던, 그토록 바랬지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소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던 환상을.
하나의 주문과 같이.
그리고 그녀는 강하게……무심하게 말했다.
“그릴 수 있어? 금빛 벚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아아……! 그릴 수 있겠지. 몇 십 몇 백번이고……하지만, 난 존재하지 않은 것을 보는 편한 능력 따윈 없어.”
“………그래?”
가볍게 말한 적발의 그녀는 맞잡은 내 오른손을 손의 끝으로 하여금 쓰다듬더니, 귓가에 대고 그 목소리를─뼛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를 직접 속삭인다.
“유진에게, 놀래켜버린……너의 세계에 멋대로 들어온 내가 주는 선물이야.”
“실례……아믓.”
“??!”
속삭이던 입술.
귀에 따스하면서 부드럽고 뭉클거리는 감촉이 맞닿는다.
그녀의 입술이 내 귀를 씹는 이질적이면서 소름이 돋는 감각에 몸을 떨지만, 필요 이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려───아, 이 몸이 굳는 감각은 이전 카페에서 경험한 적이 있었지.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대신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눈을 서서히 떠 앞을 바라보면, 캔버스에는 내 금빛 벚나무가………
“……없어? 없다고……?!”
캔버스는 밤하늘에 젖어있을 뿐. 구도에 뒤틀린 벚나무고 뭐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내 눈 앞에서 벌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 따위는 없다고 비꼬아버린 것에 대한 벌일까?
………아아, 그래. 그녀는 어디에, 어디에 있지?!
없는 체력으로나마 뒤를 돌아, 투명하게 빛나는 적발이 인상적인 그녀를,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를 바라봤다.
있었다. 그녀는.
보기 드문 웃는 표정을, 참으로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과 함께.
그리고─
“보여? 유진? 이것이 네, 너의 안에 있는, 지금의 네 안에 핀 금빛 벚꽃이야!”
─그녀의 뒤편으로 펼쳐진 풍경. 벚꽃길, 녹음이 우거지는 푸른 잎으로 뒤덮인 그 초목의 벚나무들은……나뭇잎을 꽃잎으로 만개시켜 금빛으로 휘황찬란(輝煌燦爛) 물들이고 있었다.
실제로 견문하는 금빛 벚꽃.
존재해서는 안 될─미쳐버려 잘못 핀 금빛과 붉은 빛이 뒤엉킨 가을의 벚은 그 자리에 뿌리를 박아 내 시선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강제로 새겨진다.
내 마음 속의, 상상 속 캔버스의 한켠으로.
강제로 새겨진다.
금빛 벚꽃에 대해 생각하던 내 뇌의 한켠에, 그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각인이.
“봐봐. 당신의 곁에는 있었지? 금빛의 벚이. 당신의 캔버스에 그려지려던 금빛 벚, 현실에 나타나 피어버린 금빛 벚이!”
웃은 얼굴의 그녀는 말해, 곧이어 돌풍을 일으키는 듯 머리카락을 나부껴, 금빛 벚잎을 흔들리게 한다.
세찬 바람. 그 바람에 흔들리는 벚나무들은 그 벚잎을 한 치도 떨구지 않고 고정시켜 강하게──
“───!!”
어디선가 날아온 벚잎 한 장이 내 눈으로 날아와, 급하게 눈을 감았다.
깜빡여, 눈을 다시 감았다 뜬 내 시선의 앞에는………단지 녹빛의 벚나무가 있었다.
무표정하니 차가운 인상의 그녀는, 그저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유진. 이 벚을 원초적으로 거부하고 있구나. 오래 보여주기가 힘들어.”
“잠깐………방금은 대체!!”
“자, 캔버스를 봐. 다시 돌아가 버렸어. 벚꽃이.”
그녀는 내 캔버스로 손짓과 눈빛을 쏘아내고, 그녀의 정체를 추궁하던 나 또한 시선을 그녀와 함께했다.
밤하늘만이 빛나던 그 캔버스는, 아직 색이 다 입혀지지 않은 금빛 벚이 돌아와 있었다.
“대체……너는 대체 누구야!! 너는 대체 뭐냐고……!!”
외치며, 찢어지듯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았을 땐,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환상이 머물렀던 장소라고 말하듯, 미풍이 불어왔다.
“………뭐였냐고……대체.”
지면에 무릎을 박으며, 떨리는 목소리나마 한탄하고, 감동한다.
처음으로 견문한, 가만히 묵시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금빛의 벚꽃.
과거의 천재 한유진이 그린 금앵추상(金櫻秋想) 따위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실제로 보는 그 경치에 비하면……단순한 애들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금앵추상이 애들 장난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풍경을 심상에 새긴 나의 목표는 하나였다.
금앵추상은……애들 장난이다.
그 경치의 생생함을 20%밖에 살리지 못한 졸작이다.
“뭐야……뛰어넘을 자리 따위 넉넉하게 있었잖아……‘겨우 금앵추상’ 일 뿐이었잖아.”
그 금앵추상을 보고, 말했다. 생각했다. 뛰어넘을 곳은 많다.
단지 그 풍경의 25%. 30%라도 좋다. 겨우 그 정도로도 천재를 이길 수 있다.
존재할 리 없는 자신감이 붙는다.
한동안 쉰 붓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붓을 쥐는 손도, 그 붓을 고정하는 손가락도, 그들을 지탱하는 강완도 건강을 되찾았다.
‘단지 할 수 있다’ 라는 마음가짐만으로 되찾은 힘이 아니었다.
이 의욕과 힘은 반드시……내 심상 속에, 내 눈과 뇌에 각인되어버린 생생한 금빛 벚에서 하여금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벚을 바라본 시간은, 벚이 태어난 시간의 몇 분의 몇 정도일까.
대략적인 숫자로 알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왕벚나무가 존재한 800년의 긴 역사의 일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강렬한 책임감을 느꼈다.
아. 나는 800년 사이에 벌어진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목격한 그 세계를 회화로써 남기기 위해 이 자리에 존재함을 자각하며.
캔버스에 남겨진 벚잎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며, 생각한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벚꽃의 풍경은, 금빛의 벚나무가 핀 풍경은 이런 것인가.
내 자신이 목격한 풍경의 뛰어남은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내 새로운 금앵추상을 보고서도, 그들이 과연 내가 본 벚꽃이 최고라고 생각 해 줄 것인가.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보았던 그 금빛 벚이 핀 시간을 소중히 한다.
내가 그렸던 금앵추상보다, 내가 표현하는 금빛 벚이 생생함을 몸소 증명한다.
칠한다. 칠해간다.
좀처럼 사용하지 않은 작은 호수의 붓과 세필까지 써가면서.
꺾는다. 꺾여간다.
조금이라도 생생했던 그 벚을 생각하며, 진득하니 캔버스에 눌러앉은 붓의 방향을.
새긴다. 새겨간다.
펜촉과 잉크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 벚의 그림자를 뒤따라가며.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빛은 사그라들고 강렬한 태양의 빛이 지면을 덜을 것이다.
시계를 볼 겨를 따위는 없다. 마음속에 새겨가는 시간의 리미트는 어림잡아 20분.
1분 1초가 참으로 싱겁게 지나간다.
하지만, 그 어떤 시간보다 충실하게.
어둠에 휩싸인 이 시간을, 내 자신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보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달빛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에 낳을 수 있는 그림.
그 어둠에서 재련되어, 연성되기에………그 어떤 벚꽃보다 빛날 수 있는 금앵(金櫻)의 일품(一品)
“………!!”
캔버스의 가장 끄트머리가 빛으로, 떠오르는 태양이 발하는─아직은 희미한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할 때.
나는 무심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세필과 왼손에 쥐고 있던 팔레트를 지면과 충돌시키고 만다.
아아.
오랜만에 맛보는 충실감과, 과거의 쾌감, 성취감이 끝에 달해─막을 내린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내 주역들의 무대는 이 자리에서 한 차례 막을 내린다.
떨리는 가슴으로 뒷걸음질 치며, 시야에는 도저히 한 눈으로 들어오지 않던 그 거체를 눈에 담으려, 뒷걸음질 치며 느끼는 기대감과 공포의 편린.
한 걸음 뒤로, 한 걸음 뒤로 천천히……있는 힘껏 의 힘을 내어 움직이는 다리.
나란히 정렬하여, 사이좋게 어께동무를 하고 있는 두 개의 검은 캔버스가 한 눈에 들어왔을 무렵……
“─────하하…”
시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간다.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게다가 대강……이렇게 되리라 예상 또한 하고 있었다.
“뭐……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뻗은 내 손이 그저 살색의 덩어리로 보이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어, 저항의 여지가 없는 신체 또한 중력의 무자비함에 발버둥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
본관의 괘종시계에서, 장엄한 괘종 소리가 5번 들려와, 또 한 번 들려와야 할 귀종소리를 듣지 못한 채 청각이 마비된다.
─털썩
간신히 버티던 상반신도 힘을 잃어 무력하게 하염없이……하지만 희미한 미련 따위도 남기지 않는 채 나는 다시 한 번 깊은 의식의 수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의식과 비의식 사이의 경계선에 몸을 넘기며 실낱같이 맛본 그 감정은, 희미한 공포…….
그리고, 자신이 낳은 금빛 벚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욕구에 절여져 있었으리라.
~ Chapter 2 - Main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