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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목길에 서서 총을 아직 손에 쥔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입 사이로 얼음같이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든다.
마지막으로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일까.
어쩌면 없지 않을까...이렇게 밤하늘을 올려볼만큼의 여유가 없는 인생이었으니까.
그러고보니 별 빛은 몇광년 너머의 먼 우주에서부터 온다고 읽은 적이 있다,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는, 오래전에 수명이 다해버린 별이 발한 빛도 시공을 넘어 이렇게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꽤나 낭만적이지 않은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고 계시나요? 저거 진짜 하늘이 아니랍니다."
내 등에 붙어있던 메아가 어느새 내 앞에 서서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는다.
뭐...라고?
“아시겠지만 [피라미드]의 내부는 층계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보통이라면 천장이 존재하는 장소에는 밤낮이 없는 게 정상이겠지만 각 층계의 천장에 박혀있는 [엑시즈 크리스탈]이 빛을 발하는 사이클에 따라 밤낮 처럼 보이는 거죠. 지금 빛나고 있는 ‘별’들은 전부 ‘낮에’ 빛을 뿜어내고 쉬고 있는 [엑시즈 크리스탈]들이랍니다.”
...
“반대로 낮에는...어라, 나나쨩씨? 저 뭔가 해선 안될 말을 한걸까요? 고개를 돌리지 말아주세요!”
새벽 감성에 잠겨 천장을 보고 뻘 생각을 하고 있던 자신이 죽을만큼 부끄럽다..
“나나쨩씨? 어째서 제 얼굴을 피하는 거죠?!”
내 고개를 따라 이동하는 메아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들어올린다.
“!”
탕 탕 탕
세 발, 망설임 없이 박아넣는다.
칫, 놓쳤나.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듯 메아의 팔을 잡고 방금의 전투로 무너진 벽의 잔해에 몸을 숨긴다.
우리가 잔해의 뒤에 쓰러짐과 동시에 총성이 울린다.
“골목의 끝에 적이 2명. 아마 아까 분수에 있던 3인조중 2명이겠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아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나머지 1명은 잠복중인가. 아니면 술집 근처에서 대기중인가.
“하지만 몬스터가 먼저 기습을 걸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다. 저들은 [듀얼리스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하나, 둘, 셋 하면 뛰쳐나간다.”
“예...”
“하나...둘...셋!”
우리들이 벽의 파편에서 모습을 들어냄과 동시에 내 왼손의 팔목에 채워진 군용 듀얼디스크 Zexal-13이 빛난다.
그 빛을 목표 삼아 골목 끝의 두명이 총알을 퍼붓는다.
하지만 늦다.
우리 둘의 앞에 등장한 거구의 요원이 총알을 전부 튕겨냈다.
“해버려! ...죽지 않을 정도로.”
그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치 큰 점프를 앞둔 리듬체조 선수처럼 넓은 발걸음으로 몇 번 뛰더니 마치 순간이동 한 듯 골목의 저편에서 등장한다.
정장을 입은 녀석들은 순간 반응도 하지 못한 채 [터프니스]가 휘두른 팔에 쓸려 골목의 저편까지 날아가 그대로 벽을 반쯤 무너뜨리며 쳐박힌다.
뼈 몇개 부러진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숨이야 아마 붙어있겠지만.
골목을 빠져나와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달린다.
동시에 [SPYRAL - 드론]을 2기 공중에 날린다.
상점가 주변의 정보가 순식간에 모인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추격자는 없는 모양이다.
“하아...하아...나나쨩씨, [엑시즈 크리스탈]의 잔량에는...신경써주세요.”
메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나는 총기류의 취급이 전문이라 듀얼디스크에 자세하진 않지만 군용 듀얼디스크는 [엑시즈 크리스탈]의 작은 조각을 동력으로 작동한다.
기존의 에너지로는 이정도의 실체화를 휴대용 기기로 실현시키는 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엑시즈 크리스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몬스터의 실체화는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듀얼리스트 4명이 듀얼을 하는 상황이라면 서로의 엑시즈 크리스탈이 공명해서 장기간 몬스터를 소환하고 있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듀얼 도중이 아닐 때에는 몬스터를 소환해서 부릴 수 있는 시간은 극히 한정되어있는 것이다.
남은 에너지의 잔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 걸 확인하고 듀얼디스크를 대기 모드로 전환한다.
그리고 체력적으로 그녀도 슬슬 한계다.
[피라미드]에 와서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가...
아마 평생 살면서 가장 긴 것 같은 하루가 아닐까.
발걸음을 멈춘 순간 뺨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익숙한 감각을 느낀다.
“비...?”
어이, 천장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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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늦어...늦다고!”
조바심을 억제하며 허름한 모텔방의 침대 옆에 놓여있는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새벽 2시 15분.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온다면서 나나쨩이 나간지 벌써 2시간 반이 넘은 것이다!
‘금방 돌아오겠지’ 하고 불을 끄고 잠을 청하길 몇 번, 결국 걱정이 되어서 잠에 들지 못했다.
역시 술집 같은데서 술에 쩔어 쓰러져있거나 한 거겠지? 아침이 되면 들어오겠지?
“어째서 내가 사내 자식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기왕 누군가를 걱정하는 거면 미소녀를 걱정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주먹을 꽉 쥐며 항의하듯 침대에서 일어선다.
정했다. 찾으러 간다! 미소녀는 아니지만 동료니까! 친구니까!
의자 근처에 대충 던져둔 잠바를 입고 모텔방을 나설려는 순간 방문이 갑자기 열린다.
“...유우토. 아직도 깨있던 거냐.”
나나쨩이다. 금방 쓰러질듯한 피곤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니, 지금 그것보다...
“너 술취해서 어디 풀장에라도 빠졌냐? 완전 물에 빠진 생쥐꼴이잖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의 옷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모텔방의 20년도 더 되어보이는 카페트가 가뭄 뒤에 내린 비를 빨아들이는 토지처럼 물기를 흡수한다.
“갑자기 내려서 말이야.”
녀석이 그대로 신발도 벗지 않고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온다.
여자의 손을 꽉 잡고서.
아까 둘이서 이 방을 잡았을 때 신발은 입구에 벗어놓자고 합의 해놓고! 어떻게 더러운 신발을 신고 안까지 막 들어오지?
잠깐...응...?
여자...?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진다.
오늘 내가 하루종일 파트너를 찾아다닐 때 녀석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도움 일절 주지 않고 그저 내 옆에 서서 할 마음 없다는 듯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껏 말이 좀 통하는 예쁜 누님 2인조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더니 녀석은 남일이라는 마냥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런 녀석이...
나간지 단 두시간 반만에...
여자를...데리고 돌아왔다...
완패다.
깨끗하게 인정하마.
너는 프로다.
오늘 하루종일 녀석이 속으로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상상만 해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문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녀석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침대쪽으로 향하는 걸 묵인한다.
패배자는 떠나는 게 인지상정. 매너라는 거겠지.
근처에 술집에 가서 뒷일 생각 않고 죽을 때 까지 마셔주겠다.
혼자서 말이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참으며 신발을 신고 모텔방의 문을 연다.
둘이 행복하다면...그걸로 OK 다.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는다.
“어이, 유우토, 어디가는 거야. 아까 받아온 짐에 남는 옷이 있으면 좀 꺼내서 그녀에게 줘.”
“뭐?”
“나는 잠깐 일이 있어서 다시 나갈테니까. 만약 1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찾지 말도록. 뒤는 부탁한다.”
그렇게 말을 남긴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여전히 젖은 생쥐꼴을 하고서.
문이 닫히자 정적이 계속된다.
뭐지...? 이 상황은 대체...
“엣취!”
기침 소리가 나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순간,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마치 루비와 같이 빛나는 적안.
비에 젖어 은은한 모텔의 무드등이 반사되는 윤기있는 흑발.
어색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살릴 재치있는 첫 인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머리 속이 하얗게 되어버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저기, 유우토씨라고 했나요. 죄송한데 옷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녀가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살짝 웃음지으며 부탁했다.
뭐하고 있는 거냐 나는!
“오우, 특별 서비스다! 치마 빼고 다 있으니 뭐든지 부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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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이이이이이이’
방금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빗소리와 별개로 물소리가 들린다.
나나쨩이 데려온 그녀가 샤워를 하고 있는 소리다.
‘꿀꺽’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침이 넘어간다.
그녀는 그저 뜨거운 물로 몸을 따듯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알고 있는데...알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의식하지 않는 건 그건 그거대로 남자로서 부끄러운 짓 아닌가.
침대의 모퉁이에 소심하게 앉아서 기다리길 잠시, 갑자기 물소리가 멈춘다.
순간 동요해 전신의 근육이 멋대로 움직였다.
‘차악 차악’
젖은 발이 욕실의 타일 바닥에 접하는 소리.
‘후룩’
세면대에 놓여있는 거대한 샤워용 타올이 펼쳐지는 소리.
방금 전까지 나나쨩의 걱정 때문에 밖의 빗소리 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왜 이럴 때만 이렇게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걸까.
그리고 잠시, 욕실의 문이 열린다.
마치 티비에서 본 군대의 병사처럼 허리와 목을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상태로 앉는다.
뚜욱 뚜욱 프레임이 끊기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어때...메아쨩...오...옷은 맞는 것...같...아?”
그녀에겐 내가 입던 노란 반팔 티셔츠와 카키색 반바지를 주었다.
티셔츠의 정면에 지구의 아이들 사이에서 대유행중인 귀여운 병아리형 로보트가 그려져있다.
“예. 반바지가 조금 흘러내렸지만 건네주신 벨트 덕분에 어찌어찌...”
그녀가 다가오며 허리춤을 잡고 들어올려보였다.
벨트 역시 남성용이기에 아직 많이 헐렁해보였지만 벨트 조차 없었다면 그냥 흘러내렸겠지.
티셔츠 같은 경우야 남녀 상관없이 입으려면 입을 수 있겠지만 바지 같은 경우는 허리둘레가 너무 차이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벨트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지...
어찌...됐을지...
알몸에...티셔츠 한장...
남자들의 로망의 끝...알몸 티셔츠...!
만약 평행 차원이라는게 있다면 내가 벨트를 가지고 오지 않은 차원도 있겠지...부러운 자식.
“헛”
순간 코피가 날 것 같아 손으로 급하게 입과 코를 막는다.
너무 빠르게 손을 들어올린 탓에 손가락 뼈가 앞니에 맞아 눈물이 핑 돌았다.
“유우토씨?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나에게 다가온다.
벨트 가져오지 말 걸 후회한다고는 죽어도...말하지 못한다.
“내가 평소에 바보짓을 좀 자주 해서 하하. 그냥 이상한 녀석이구나 하고 무시해주면 쌩큐!”
“나나쨩씨도 그렇고 유우토씨도 그렇고 오늘 만나는 분들은 전부 이상한 분들 투성이네요. 지구...괜찮은 건가요?”
그녀가 장난끼 있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 자리를 빌어 솔직히 말하고 싶다.
방금 표정은 치트다 치트.
혈기 왕성한 남자가 저걸 보고 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위험하다. 이대로 그녀를 계속 의식해버리면 진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반해버릴 것 같다.
친구의 연인를 노리다니, 남자로 태어나서 그것만큼은 안된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나나쨩이랑은 오늘 아침 만났을 뿐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친구는 아니지 않을까...나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아니다. 역시 이런 건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다.
나나쨩을 배신하는 것 같은 짓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친구니까.
“그래서 나나쨩은 어디로 나갔는지 알아? 녀석,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 것이지...”
화제를 돌렸다.
“나나쨩씨는 제 지인을 찾으러 가주셨습니다. 제가 멋대로 제 지인과 헤어지는 바람에...그래도 다행히 헤어지면 만나기로 해둔 장소가 있어서 그쪽으로 가보시겠다고...”
그녀가 조금 떨어져서 침대에 앉으며 후회하듯 말했다.
“지인?”
“예. 어릴 때 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하지만 가끔 과보호 하려는 성향이 있어서...”
“흐음, 그래서 답답해진 메아쨩은 홀로 가출을?”
“못미더운 제 탓이 더 크지만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살짝 떨어져 앉아있음에도 향기로운 향이 난다. 모텔의 싸구려 샴푸가 이렇게 향기로웠나.
꽤 힘냈구나, 주인장. 나이스 JOB.
순간 무언가를 눈치 챈다.
“메아쨩, 볼에, 좀 빨간 곳이 있는데, 혹시 다친 거야?”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볼에 손을 얹는다.
“...그런가요?”
그녀가 볼 근처를 더듬는다.
“아니, 조금 왼쪽, 아니 조금 아래. 너무 내려갔어.”
몇 번 말로 하려다 답답해서 그녀의 근처로 다가간다.
“여기.”
그녀의 피부에 닿지 않게 조심히 손으로 상처의 위치를 가리킨다.
“아, 방금 샤워할 때 따끔거리던 곳이네요. 이정도면 아무것도 아니겠죠, 나나쨩씨에 비하면...”
그녀가 말을 마치기 직전, 모텔방 문이 누군가 발로 차버린 듯 큰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당장 떨어져, 이 짐승!”
그렇게 외친 여성의 목소리와 동시에 무언가가 내 염색한 금발을 휘날리며 관자놀이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직후, 내 뒤의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지막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현관쪽을 보자 그곳엔 양손으로 권총을 쥐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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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터진 하룻밤 70 DP의 싸구려 모텔방에 남녀 네 명이 마주보고 있다.
적당히 잡지로 막아뒀지만 깨진 유리창 사이로 몰아치는 빗소리가 크게 들린다.
“테레사, 말했잖아, 유우토씨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봤다구요, 저 짐승이 메아에게 다가가서...”
아까부터 몇 번째 같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
아마 테레사라고 불린 그녀가 메아가 말한 ‘과보호’적인 지인이겠지.
응. 한 번에 이해했어.
그야 뭐...머리카락을 스치며 총알이 지나가면 싫어도 이해하고 말고...
방금 나 죽을 뻔 한 거지? 유리창 아작났다고 ...? 실탄...인거지?
실탄만 아니었다면 테레사라 불린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테레사쨩은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다. 살짝 하늘빛이 감도는 벽안과 잘 정돈 된 금발의 단발머리가 더욱 더 분위기를 내고 있다. 거의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이상적인 미녀가 갖추고 있어야 할 조건은 전부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그녀가 입은 어두운 회색 / 검은색 베이스의 블라우스와 정장 역시 그녀의 고급스런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메아쨩이 인형과 같은 아름다움이면 테레사쨩은 모델이라고 할까.
이 둘이 나 때문에 싸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신사니까.
“거기 미녀 두 분! 이해는 하지만 나를 두고 싸우는 건 거기까지! 나는 메아쨩도 테레사쨩도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마치 줄리엣에게 프로포즈하는 로미오처럼 포즈를 취했다.
“예?”
“뭐?”
테레사가 마치 맛있게 먹던 음식에서 구더기를 발견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리고 메아쨩, 불쌍한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만큼은 참아줘, 은근 아프게 박혀...
도와달라는 SOS를 내포한 눈빛을 나나쨩에게 수신했다.
하지만 녀석은 관심도 주지 않고 침대에 홀로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 하며 관심도 주지 않는다.
차가운 놈! 친구가 핀치라고! 생명의 위기라고!
"후우...우선은 알겠습니다. 메아의 말을 믿도록 하죠."
결국 테레사쨩이 한 수 접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기 짐승."
"네, 네엡!"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차렷 자세가 된다.
테레사쨩이 내 코앞까지 걸어와서 나를 올려다보며 메아쨩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메아에게 손끝도 닿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순간 허벅지 사이의 중요한 곳에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물건이 쑤셔진다.
나도 모르게 흐읏! 하고 신음소리가 나와버린다.
"우선 여기부터 날려버릴테니까"
진심이다.
"네...네엡...명심하겠습니다."
“지켜볼 거니까요.”
한 번 무섭게 쳐다본 후 그녀가 멀어진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테레사쨩...무섭다...
하지만 그게 매력적일지도.
“저...모두 피곤할텐데 우선 지금은 자고 아침에 이야기 하는 게 어떨까요?”
메아쨩이 테레사쨩에게 다가가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미 새벽 3시를 넘긴 시각이다.
“...그러도록 하죠. 그럼 저는 우선 로비에 가서 새로운 방을 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테레사쨩이 그렇게 말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전원 여기서 잔다. 어차피 침대도 2개니까.”
나나쨩?! 이렇게 대담한 녀석이었나. 너, 너 이 녀석 화이팅...!
걸어가던 테레사쨩이 발을 멈추고는 나나쨩을 노려보았다.
“진심인가요? 메아를 당신들과 같은 방에서 재우라고?”
“그게 안전하니까.”
“그런 거라면 걱정 없습니다. 메아는 제가 지킬테니까요.”
나나쨩이 비웃는 듯 대답했다.
“정작 중요할 때 없어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잠깐 기다려주세요, 나나쨩씨. 그건 어디까지나 제 잘못입니다.”
메아쨩이 둘의 대화에 끼어든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게 하고도 아직도 할 말이 남아있나?”
나나쨩이 그렇게 말하자 테레사쨩이 분한 듯 고개를 떨군다.
계속되는 정적.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라 끼어들 수가 없다.
정적을 깬건 메아쨩이었다.
“테레사, 나나쨩씨의 말대로 하죠. 어차피 저희, 돈도 없잖아요?”
테레사쨩이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한다.
“아, 아직 모텔방 하루 정도 빌릴 돈은 있습니다! ...살짝 흥정하면...아마”
흥정이라...모텔주인 아저씨의 다리 사이에 권총을 갖다 대고 깎아달라고 협박하는 건 아닐까 잠시 상상해버린다.
그건 그거대로...음, 포상이라고 보는 사람 (이라 쓰고 변태라 읽는다) 도 있을까.
아니, 한 번 당해본 입장에서 은근 중독될 것 같기도...테레사쨩 미인이니까...
나는 아무래도 변태인 것 같다.
“자, 그런 걸로, 오늘 밤은 여기서 묶는 걸로 하죠!”
메아쨩이 더 이상 이 이야기가 안 나오게 마무리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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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이이이이이”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이야기가 마무리된 직후 메아쨩이 테레사쨩에게 목욕하길 권했으나
메아쨩을 홀로 둘 수는 없다고 테레사쨩이 거절했다.
하지만 ‘그럼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요!’ 라며 메아쨩이 그녀를 끌고 들어간 것이다.
즉, 지금 욕실 안에는...
“메아, 제가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에이, 부끄러워하지 말아주세요 테레사. 어릴 때는 자주 같이 들어왔으면서!”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헛!”
코피가 나올 것 같아 한 손으로 입과 코를 막는다.
안 된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여어 나나쨩, 그래서 메아쨩들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창문 근처의 소파에 앉아있는 나나짱 쪽으로 다가가 묻는다.
“아이스크림...”
그가 한숨을 쉬면서 짧게 중얼거렸다.
“아이스크림?”
“하아...엄청 미묘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줬더니 뭔가 골치 아픈 게 엮여버렸어. 사실 전부 악몽이 아닐까...”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말이 없어졌다.
“오..오우...너도 고생이 많구나.”
소파의 반대편 끝자락에 털썩 앉았다.
“테레사?! 언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진 거죠! 이런 거 불공평합니다! 도대체 뭘 하면 이렇게 커지는 거죠?!”
“메아?! 간지럽습니다, 만지지 말아주세요!”
“으으 불공평하다구요! 에잇, 에잇! 아, 테레사, 화났나요?”
“아뇨.”
“에잇! 에잇! 화났나요?”
욕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나는 조금 늦은 시각에 [피라미드]에서의 첫날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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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터 자주 꾸던 꿈이 있다.
아버지와 어딘가의 언덕을 올라간다.
세 시간 넘게 오른 언덕의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는 멋들어진 벽에 둘러쌓인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한다.
그에게는 국왕으로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있다고.
그리고 그의 피를 잇는 자로서, 내게도 같은 의무가 있다고.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심한 현실도피다.
나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어릴 때 부터 나와 내 여동생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일 조차 드물었으니까.
그가 식탁에 남겨주고 간 돈으로 동생과 집 근처의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동생과 이것저것 신매뉴에 도전해보는 건 그거대로 즐거웠지만.
하지만 내가 아직 중학교 1학년일 때, 동생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덕분에 우리는 아이가 없었던 오사카의 친척부부에게 입양되어 살게 되었다.
친척부부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애정을 쏟아주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된 바로는 그들 부부에게는 큰 빚이 있었다, 친척이 아직 어렸을 때 저지른 실수라고.
하지만 빚이 생긴 이후, 친척은 반성하고 성실하게 일하기 시작해 수십년에 걸쳐 조금씩 갚아나고 있는 도중이었다고 한다.
동생과 나를 맡아준 은혜는 이런 걸로 갚지 못하겠지만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해 친척을 도와 조금씩 갚아나갈 생각이었다.
그 빚이 악질적인 녀석들에게 넘어가기 전 까지는...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간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방과 후가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 전부 얼굴이 창백해져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기다리길 잠시, 녀석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48시간. 그 사이 전 금액을 반환 하지 않으면 뭐...여동생을 해외의 어딘가로 팔아버리겠다는 뻔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뻔하다는 건 그만큼 효과적이란 소리다.
자신의 딸의 이런 상황도 모르고 어딘가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동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이 더욱 더 미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야 아버지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카이바 사이버네틱스의 듀얼리스트로서 [피라미드]로의 파병 지원을 끝마친 뒤였다.
그 단시간에 그정도 금액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이것밖에 없었다.
동생에게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야기 하지 않고 떠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피라미드]로 떠나기 전날, 동생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가지 말아달라고, 나까지 떠나지 말아달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동생에게는 너무나도 심한 짓을 해버렸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단 하나 남은 친가족인 나까지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것이다.
하지만...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집을 나서기 전에 동생과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겠다고.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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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들린다.
동생의 발소리다.
대학생이라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다 들어와 늦잠을 자는 나를 현역 고등학생인 그녀는 항상 아침 일찍 깨우러 온다.
아침 식탁에 앉아서 눈을 비비고 있는 나를 보고 게으르다고 미래의 부인이 불쌍하다고 항상 꾸짓는 그녀지만 그녀도 대학생이 되어보면 알 것이다.
매일같이 아침 7시 반에 일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전국의 고등학생들은 정말 대단하다.
‘오빠, 일어나.’
“15분만 더...”
‘안 일어나면 지금 침 질질 흘린 얼굴 찍어서 오빠 폰에 있는 여자 번호에 전부 뿌린다?’
어이 잠깐, 장난이 아니다. 기껏 다들 좋은 느낌인데! 특히 어제 만난 미토쨩은 말야!
“알았어, 일어난다니까!”
‘우리 딱 15분만 더 자자~꿀잠 자자~’ 하고 악마처럼 속삭이는 눈꺼풀을 무시하고 눈을 뜬다.
아직 덜 뜨인 눈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시야에 나를 깨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생이 보인다.
역시 다 꿈이었던 것이다.
[피라미드]에서 보낸 하루도, 그녀를 두고 떠나온 것도.
동생을 버럭 끌어 안는다.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서운 꿈을 꿨어...아버지처럼 너를 두고 떠나는...”
그녀를 끌어 안고 말한다.
‘변태 오빠! 이제 나도 고등학생이니까 스킨쉽은 NG야 NG! 신고해버린다?!’ 라며 항상 그렇듯 발로 차일 걸 각오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전부 악몽일 뿐이에요.”
상냥한 목소리가 들린다.
향긋한 냄새가 난다.
어디서 맡아봤더라...최근에 맡아본 향기다...
분명 모텔의...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눈이 번쩍 뜨인다.
머리 속이 하얗게 된 상태로 안고있던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아마 거울을 보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을 것이다.
“유우토씨, 안녕하세요.”
원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메아쨩이 천사처럼 웃어보인다.
다행이다, 메아쨩은 화가 난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대로 문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테라사쨩이 할 말 조차 없는 듯 팔을 괸 채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나쨩씨는 먼저 내려가셨습니다. 유우토씨만 준비 되면 저희들도 얼른 가도록 하죠!”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니라 크리스탈광을 받으며 [피라미드]에서의 둘째날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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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의 아침은 일찍이다.
여러가지 편의를 위해 인류는 [피라미드]에 와서도 24시간을 하루의 단위로 쓰고 있지만 태양도 뭣도 없는 곳에서 24시간 시스템을 고집하면 당연히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로 지금은 아침 7시인데 마치 오후 1시 수준으로 밝다. “떠 오를” 해가 없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하지만 구름은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 흐린 날도 있을까나.
“아침을 먹도록 하죠!”
모텔을 나와 별 계획 없이 걷고 있던 도중 나나쨩과 나란히 앞을 걷던 메아쨩이 들뜬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7시라는 이른 시간인데도 대부분의 가계는 전부 문을 열고 손님 역시 여기저기 만석을 이루고 있는 듯 했다.
어제 나나쨩과 나를 포함한 천명이 넘는 ‘신입’들이 도착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상인들 입장에선 장사할 맛 날 것이다.
“그러도록 하죠. 메아는 뭐가 먹고 싶은가요.”
나를 감시하듯 붙어서 걷고 있는 테레사쨩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에게도 저런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는 날이 언젠가는 올까...
나도 안다, 불가능한 것 쯤은! 그래도 꿈은 꿔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팬케이크...”
앞을 걷던 나나쨩이 갑자기 작게 중얼거렸다.
“오우, 나나쨩은 팬케이크파인가. 모두 어때?”
나나쨩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메아쨩과 테레사쨩에게 물었다.
“팬케이크 좋네요! 저는 찬성입니다.”
메아쨩이 한 손을 들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뭐...메아가 좋다면야.”
테레사쨩도 불만은 없는 듯 했다.
“좋아, 그럼 렛츠고! 팬케이크!”
“멋대로 정하고 말야. 뭐, 나는 아무래도 좋지만...기왕이면 바나나 토핑이 전문인 곳으로 가지.”
녀석이 내 어깨동무를 풀며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나나쨩의 발걸음이 한결 들뜬 것 같은 건 기분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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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듀얼 디스크는 [피라미드]의 인터넷인 [링크스]에 접속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같다.
확실히 이쪽에 오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은 것 같기도...
솔직히 인류가 절멸한 세기말 폐허에 도착할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인터넷이 되냐 안되냐 따위 딱히 신경쓸 여유가 없던 것이다.
테레사쨩이 나나쨩의 듀얼디스크를 조작해 [링크스]에서 근처에서 가장 인기있는 팬케이크 집을 찾아냈다, 물론 나나쨩의 요구로 바나나 토핑이 유명한 곳으로.
중간에 길을 한 번 잃고 도착해보니 우리들을 기다린 건 30분이 넘는 대기열...
메아쨩도, 테레사쨩도, 나도 그냥 다른 곳에 가자는 분위기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나쨩이 줄에 선 탓에 기다리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 녀석 얼마나 바나나 팬케이크가 좋은 거야...
그렇게 기다리기를 한참, 드디어 테라스의 외진 곳에 있는 분위기 있는 테이블을 얻었다.
귀여운 여종업원이 가져다준 메뉴를 펼치자 과연 인기있는 가게 답게 메뉴가 다양했다.
나나쨩이 원하던 바나나 팬케이크는 물론 머쉬멜로우, 딸기크림, 피스타치오, 레몬, 허니 등등 별별 토핑과 소스가 있으며 함께 시킬 수 있는 밀크쉐이크의 종류 역시 그만큼 화려했다.
“뭘 시키실지 정하셨나요?”
메아쨩이 이미 메뉴를 내려놓고 앉아있는 나나쨩에게 물었다.
“바나나 크림 팬케이크에 바나나 밀크쉐이크...그리고 바나나 푸딩.”
녀석이 묵묵하게 말했다.
“아하하, 나나쨩씨 바나나 정말 좋아하시네요...”
아무리 상냥한 메아쨩이라도 살짝 부담스런 표정이다.
한편, 메뉴를 보고 있던 테레사쨩이 메뉴판를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밀크쉐이크 하나가...17DP...라고요?!”
그녀의 동요를 눈치 챈 메아쨩이 위로하듯 말했다.
“테레사, 어차피 저는 많이 먹는 편이 아니니 저희는 하나 시켜서 나눠먹도록 하죠. 부디 테레사가 좋아하는 걸 시켜주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메아가 원하는 걸 시키도록 하죠.”
“아뇨, 테레사가 원하는 걸 시킬 겁니다!”
내 안의 신사가 꿈틀 거린다. 이건 나서야 할 때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언제 나서는가!
“거기의 아름다운 마드모아젤 두 분, 부디 제게 두 분에게 달콤~함을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고개를 숙인 뒤 정중하게 손을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은 두 명에게 내민다.
하지만 가장 먼저 대답한 건 내 옆에 앉아있던 나나쨩이었다.
“호오, 오늘 유우토가 내는 거냐. 그럼 바나나 파이도 추가할까, 이거 비싸단 말이지..32 DP인가...”
“그거 좋네요 나나쨩씨! 저도 바나나 파이는 먹어보고 싶었어요!”
“그럼 사양 않고. 저는 치즈케이크 맛 팬케이크를 시키도록 하죠. 로얄 밀크티도.”
“저는...음...녹차라떼에 팬케이크는 정석으로 딸기로 갈까요. 아, 딸기도 종류가 여러개 있는 거군요! 전부 시켜봐도 될까요?”
어이...너네들 너무 염치없잖아?! 그리고 나나쨩은 왜 은근슬적 끼는 건데!
뭐, 말을 꺼낸건 나지만! 그렇긴 하지만!
눈물이 핑 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메아쨩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테레사, 대접받는 입장에서 감사의 인사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메아...? 저한테 지금 저 짐승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건가요?”
“고개 까지는 아니라도 미소와 함께 감사하단 말 정도는 하는게 예의 아닐까요? 그쵸, 나나쨩씨?”
메뉴에 실린 바나나 파이의 사진을 빨려들어갈 듯 쳐다보고 있던 나나쨩이 이름이 불려 정신차린다.
“뭐? 아, 음. 그정돈 당연한 예의라고 봐야겠지. 물론 예절의 기본이 되어있다는 전제지만. ”
“읏...”
테레사쨩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자, 테레사, 할 수 있습니다!”
메아쨩이 화이팅 포즈를 취했다.
순간 든 생각인데,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메아쨩 의외로 무서워?
테레사쨩과 시선이 마주친다.
붉어진 얼굴, 그녀의 아름다운 벽안에 살짝 눈물이 걸려있다.
“아, 테레사쨩, 괜찮으니까, 그냥 내가 멋대로 한 턱 쏘고 싶을 뿐이니 감사 같은 건...”
“아뇨, 말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꼭 먹어보고 싶던 메뉴가 몇개 있었으므로...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차마 눈을 마주치고는 말을 할 수 없었는지 그녀가 시선을 살짝 피한다.
다행이다.
아마 눈이 마주친 상태였으면 심장이 멈춰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로! 어서 주문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며 메아쨩이 저 멀리 있는 여종업원을 향해 손을 흔든다.
“잠깐,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갑자기 나나쨩이 메뉴를 내려놓으며 메아에게 말했다.
나나쨩...너도 안 했어...
“예? 아, 정말 그렇네요...역시 나나쨩씨, 그걸 눈치 채실 줄이야.”
메아쨩도 잠깐 그녀의 적안을 마주치더니 살짝 부끄러운 듯 고개를 틀며 이야기했다.
“유우토씨,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보답해드릴 방법이 그닥 없는지라...오늘 아침 '그 일'의 계속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이 짐승!”
테레사쨩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 손을 등 뒤로 향한다.
“잠, 잠깐, 테레사쨩, 저, 저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어이, 너희들 잠깐 기다려, '그 일'? 아침의 '그 일'이 무슨 소리야?”
부끄러운 듯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메아쨩
총을 뽑기 위해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선 테레사쨩
뒷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나나쨩까지, 말 그대로 카오스다.
우리 테이블 근처까지 왔던 여종업원은 질색을 하며 발을 돌린 뒤 다시 가까워지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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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잘 먹었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저도 더 이상은...무리입니다. 이건 한동안은 메뉴 선정에 신경써야겠네요.”
“...그래도 테레사는 먹어도 영양이 ‘거기’로 가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어디로 갈지...”
“메아쨩, 부디 ‘거기’를 조금 더 자세히, 생생하게, 디테일 하게 설명을!”
“그럼 얻어 먹은 값은 하도록 할까요! 어제 밤에 욕실에서 말이죠, 테레사의 블라우스가 조금 비에 젖어 있었잖아요?”
“잠깐, 메아?! 이 짐승이...!”
우리들의 잡담을 무시한 채 나나쨩은 거침 없이 남은 바나나 파이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테레사쨩의 “거기”의 이야기보다 바나나를 우선시하다니...무서운 녀석.
마지막 조각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무리한 나나쨩이 말을 꺼냈다.
“그래서 향후의 방향 말이다만, 아침에 유우토, 네가 자고 있을 때 저 쪽 두 명과 이야기 해본 결과 이렇게 네 명이서 팀을 짜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뭐? 나는 들은 적 없는데?"
"자고 계셨으니까요 하하..."
잠깐, 팀...? 그렇다는 건 즉... 설마...
“파트너를 짜는 거야?!”
“말고 뭐가 있냐. 응원단장이라도 할 생각이었냐?”
어이! 그런 중대한 결정은 나도 깨워서 제대로 상담 후 결정...은 개뿔!
크흑...평생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나나쨩 싸부!
어제만 해도 불가능 할 것 같던 미소녀와의 파트너다!
“잠깐...그렇게 되면 나의 파트너는...”
메아쨩과 나나쨩은 뭐,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 같으니
그렇다는 건 즉...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테레사쨩에 향한다.
미인인데...정말 더 바랄 것 없을 만큼 미인인데...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매정하게 노려본다.
너무 무섭잖아...!
솔직히 파트너로서 해나갈 자신이 없다.
“네 파트너는 메아가 하기로 이야기 되었다. 물론 네가 반대하지 않는다는 전제지만.”
응?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 테레사와 유우토씨가 [링크] 하는건 무리일테니까요.”
“거기다 뭐, 전장에서 갑자기 네가 총을 맞고 죽어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아지니까.”
“아무리 저라도 전장에서 오발 사고를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만!”
전장이 아니면 있구나...
“그런 고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유우토씨.”
내 반대편에 앉아있던 메아쨩이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역시 메아쨩은 천사다.
“나, 나도! 여러모로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노력할테니까! 잘 부탁해, 메아쨩!”
“예! 함께 노력해 나가죠!”
마치 신혼부부와 같은 대화!
망상에 젖어 헤벌레 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나를 테레사쨩이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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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마치고 우리들은 가게를 빠져나와 듀얼리스트가 임무를 받으러 가는 장소인 [듀얼리스트 HQ], 통칭 [HQ]에 향했다.
참고로 약속대로 계산은 전부 내가 했다...총 지출은 172 DP...1DP = 1 달러 정도의 가치니까 계산하면 약 20만원 쯤인가.
보통 같으면 눈물이 찔끔 났겠지만 이걸로 나나쨩과 테레사쨩이 행복하다면...싼 값일 것이다.
[HQ]는 [사이버폴리스]의 중심가에 위치해있었다. 마치 커다란 돔같은 외견을 띄고 있고, 건물 앞의 광장에는 수 많은 듀얼리스트들이 보인다.
대부분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공고를 하거나 아니면 이미 파트너를 짠 듀얼리스트들끼리 파티를 구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차원이동을 통해 [피라미드]에 도착한 직후 나나쨩과 내가, 아니 나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파트너를 모집하던 그곳이다.
애초에 이미 파트너를 찾은 지금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후후.
메아쨩과 파트너...메아쨩과 파트너...
생각하는 것 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딱히 파트너가 되었다고 연인 관계가 된다던가 하는 건 아니다.
동성끼리 파트너를 짜는 경우도 잦고 이성끼리 파트너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듀얼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 경우도 수 없이 있다. 이미 연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이성끼리 파트너가 된 경우 확률적으로 관계에 진전이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다.
우선 2인1조로 전장에 목숨을 걸고 서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깊게 신용하고 믿어야 한다.
거기다 두 명의 파트너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덱]은 서로의 이해가 깊어질 수록 강해진다.
필연적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라 불리는 감성을 자극할만한 상황이 몇번쯤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 [피라미드]에 건국된 자치 국가 [유토피아]도 그렇게 이 타지에서 듀얼리스트로서 용병 생활을 하며 새로운 삶은 찾은 연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소리도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다.
고로, 듀얼리스트란 사랑인 것이다!
물론 메아쨩과 나나쨩의 관계를 생각하면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고 이 쪽도 나나쨩을 배신하는 것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티비의 아이돌을 보고 헤벌레 하는 것 정도의 감각일 뿐이다.
“...짐승.”
내가 행복에 가득찬 미소를 차마 숨기지 못하고 걷고 있자 앞에서 나나쨩과 걷고 있던 테레사쨩이 욕하듯 내뱉었다.
“테레사?! 유우토씨를 밑도 끝도 없이 의심하는 건 좀 어떨까 생각하는데요...”
나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메아쨩이 말했다.
메아쨩이 나의 편을 들어준 건가...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더 커진다.
“읏, 보라고요 저 음흉한 표정 , 분명 무언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테레사쨩이 내 얼굴을 가리키며 분한 듯 외쳤다.
“녀석은 좀 이상한 녀석이니까 네가 이해 하라고.”
“유우토씨는 좀...별난 구석이 있는 분이니까 그건 테레사가 이해를 해주세요.”
나나쨩과 메아쨩이 동시에 말한다.
커플의 훌륭한 태그 공격.
하지만 데미지는 미미했다!
지금의 나는 무적인 것이다.
이 외진 세계가 던져주는 어떠한 시련도 극복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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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의 거대한 문을 열고 안에 도착하자 카이바 사이버네틱스의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우리를 미팅룸 비슷한 곳으로 안내했다.
길쭉한 회의용 테이블을 중심으로 의자가 여럿 놓여져있고 방의 한쪽 끝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한 10분간 기다리고 있자 갑자기 문이 열리며 괴상한 패션을 한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옷의 대부분에 해골 모양의 문양이 들어가있었고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정장 역시 붉은 색의 찢어진 듯 한 문양이 이곳 저곳에 박혀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자...해골 문양의 눈이 빛나고 있지 않아...? 기분 탓인가.
“어머, 펑크...하네요.”
“록이네.”
메아와 나나쨩이 한마디씩 감탄사를 늘어놨다.
그 소녀는 서슴치 않고 방의 중앙까지 걸어와서 우리들을 향해 어깨를 펴고 말했다.
“나야 말로 이 [사이버폴리스]의 데스가이드! 하데스양인 거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무시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내가 임무에 보낸 듀얼리스트의 생환률은 겨우 25.7%! 진정한 데스가이드가 되기 위해 생환률이 0%가 될 때 까지 노력하고 있는 거다!”
그딴 거 노력할 필요 없으니까!
“저기...그렇다는 건 이번 저희들이 맡을 임무는...”
메아쨩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거기의 여자! 히익...기분 나쁜 눈을 하고 있구만.”
하데스쨩이 잠깐 움찔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엣헴. 그래, 이번 너희들의 임무는 이 하데스양이 맡게 된 거다! 죽을 각오는 미리 해두도록! 명계 직행 버스를 태워 줄 테니까!”
“임무인 이상 죽을 각오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빨리 임무나 말하도록.”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나나쨩이 말했다.
당연한...건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흐응, 네놈 아주 맘에 들은 것이다! 이 하데스양한테 그렇게 건방지게 말을 하다니. 좋아, 생환률 극악의 임무를 주겠다!”
응? 하데스쨩?! 맘에 들었다면서!? 왜 죽이려고 드는 거야!
“자,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대충 흘려 듣도록! 그만큼 생환률이 낮아지니까 말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녀의 브리핑에 집중한다.
[발할라], [피라미드]의 제1층과 제2층 사이를 잇는 통로 앞에 세워진 도시라고 한다.
과거에는 제2층, 제3층에서 가져온 [엑시즈 크리스탈]의 정제를 하기 위한 소규모 산업 도시였지만
그건 5년 전의 이야기.
[피라미드]의 제2층에 존재하는 [유토피아 국]과 [사이버폴리스]의 관계가 틀어진 지금, 당연하지만 [발할라]는 중요한 전략지점이 되었다.
많은 [사이버폴리스]의 사설 군대와 듀얼리스트들이 배치되어 [유토피아 국]의 침공을 막고 스파이등의 유입을 억제하기 위해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 [발할라]의 외각 기지중 하나인 [발키리 3]이 최근 누군가에 의해 기습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은 모양이다.
우리들이 받은 임무는 그 기습당한 기지인 [발키리 3]으로 향해 사건을 조사하고 습격범을 생포 혹은 제거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임무의 예상 난이도는 A등급인 것이다! 너희 같은 신참 듀얼리스트가 맡는 C등급과는 차원이 다르니, 각자, 생환하지 못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데스양은 모두의 전사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아하하하하하’ 하며 기분좋게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진짜냐...갑자기 A등급 미션이라니...우리 여기에 바로 어제 도착했을 뿐이라고...?
“이건...약간 골치아픈 일이 되었네요.”
하데스쨩이 나간 후 메아쨩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뭐, [발할라]쪽에는 어차피 가봐야 했으니 이쪽도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그렇네요...거기다 그 습격범이란 것은 아마...”
그들의 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임무를 받았다는 절망감에 차마 물어볼 힘도 없었다.
이후 출발일인 이틀 후까지 우리들은 여행의 채비를 마쳤다.
[HQ]를 나올 때 임무를 위해 사용하라고 약 5000 DP를 받았다.
물론 임무 성공시에 나오는 보상과는 완전 따로라고 한다.
역시 [카이바 사이버네틱스], 통이 크다.
군용 물품을 파는 상점가에 가서 캠핑장비와 레이션등 여러가지를 준비했다.
특히 나나쨩과 테레사쨩은 총기를 농담이 아니라 정말 한 무더기 사왔다.
나에게 향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마침내 출발의 날,
[사이버폴리스]의 [제 8번 행거]에 밤 10시에 도착했다.
사이버폴리스 측에서 준비해준 군용 험비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날 뉴스 같은데서 보던 험비와 다른 점은 외견이 위장색이 아니라 [카이바 사이버네틱스]의 로고를 따른 푸른 하늘색을 띄고 있었다는 것일까.
[발할라]까지는 차로 약 8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도착하면 아침이 되어있을 것이다.
운전은 당연히 나나쨩.
나는 오토바이의 면허는 있지만 이런 큰 대형차는 살짝 자신이 없던 고로 나나쨩이 선뜻 운전대를 잡아서 안심했다.
조수석에 테레사쨩, 뒷좌석에 메아쨩과 내가 탓다.
어둠에 뒤덮인 [피라미드] 제1층의 도로를 우리들이 탄 험비가 외롭게 달린다.
출발한지 얼마나 됐을까, 살짝 졸은 모양이다.
어깨가 살짝 뻐근하다...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옆을 돌아본다.
메아쨩의 잠자는 얼굴...
응?
순간 동요 때문에 어깨를 크게 움직일 뻔 했으나 있는 힘을 다해서 참는다.
메아쨩이 내 어께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있었다.
평온한 얼굴.
평소 같으면 호들갑을 떨며 망상을 펼쳤을 나였겠지만 이정도로 새근새근 잠들어있으면 그저 아빠미소가 나올 뿐이었다.
순간 앞좌석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슬슬 운전 바꿔드리겠습니다. 반 쯤 넘게 온 것 같으니.”
테레사쨩이다.
“필요 없어.”
“...당신은 정말 이상한 고집이 있군요.”
테레사쨩의 한숨이 들린다.
“그저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누구의 안전을 이야기 하는 거죠? 메아의? 아니면 당신의?”
“양쪽이다.”
“...”
잠시 침묵이 계속된다.
“...저는 아직 당신을 완전히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옳은 선택이다. 나도 내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니까.”
“...”
다시 한 번 침묵이 험비의 안에 돌아온다.
그대로 끝 없이 이어지는 밤길을 나아간다.
잠깐 다시 잠이 들 것 같은 순간
갑자기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안전벨트가 몸을 파고든다.
눈 앞이 빙글빙글 돈다.
“메아, 괜찮은가요!?”
“으...으음...테레사...?”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창 밖은 전부 암흑에 둘러싸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나쨩? 무슨 일이야?”
운전대를 쥔 녀석을 향해 물었다.
“방금...무언가 그림자 같은 게 차 위에 올라 탔어. 급정거를 한 덕분에 앞으로 날아간 것 같이 보였다만...”
“...그림자인가요...?”
정신을 차린 메아쨩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섀도르...일 확률이 높겠군요”
테레사쨩이 침착하게 말한다.
“섀도르? 그게 뭔데?!”
다급하게 묻는다.
“...간단하게 저주 비슷한 거라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죽은 듀얼리스트들의 시체가 멋대로 움직이는.”
옆에 앉은 메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시체...? 잠깐, 듀얼리스트의 시체라고?! 설마...”
“예...시체지만 생전과 마찬가지로 몬스터를 부릴 수 있습니다. 거기다 왜인지 엑시즈 크리스탈을 쫓는 버릇 때문에 여행중인 듀얼리스트들을 습격하거나 하죠. 아마 지금도...”
시체라는 말에 기분이 갑작스레 나빠진다. 창문 밖을 둘러봐도 역시 암흑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나쨩씨, 차는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자극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섀도르는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위험합니다.”
나나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이트만 켜둔 채로 차의 시동을 껏다.
그저 암흑과 정적만이 차의 주변을 감싼다.
침이 꿀꺽 삼켜진다.
이미 잠 같은 건 다 날아간지 오래였다.
무슨...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파트너인 메아쨩을 지킬 뿐이다.
각오를 다시 잡는다.
“우선 내리도록 하죠, 이대로 차 안에 있어봤자 앉아있는 표적이 될 뿐입니다.”
테레사쨩이 말했다.
모두가 끄덕였다.
“차의 왼쪽으로는 내리지 마. 낭떨어지니까.”
나나쨩이 말했다.
그랬었나, 전부 칠흑이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오른쪽 문으로 내려야 하면...나부터인가.
문을 열기 직전 창문 밖의 암흑을 주시한다.
순간 저편에서 무언가 사람 그림자 같은 게 움직인 기분이...
“하나 둘 셋 하면 나갑니다.”
테레사쨩이 조수석에서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끄덕이고 테레사쨩의 사인을 기다렸다.
“하나...둘...셋!”
동시에 문을 열고 험비를 나선다.
차의 밖에 나서자 마치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추위가 온몸을 덮친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 마다 추위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땅에 닿은 다리가 휘청여서 넘어질 뻔 했으나 어찌저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겨우 두 발로 서 앞을 향하는 순간 보인다.
웃고 있다.
기분나쁜 무언가가.
눈 앞에서.
죽음을 앞두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림자가 손을 뻗어온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테레사쨩의 외침과 함께 눈 앞에서 무언가가 번쩍 하고 빛나 뒤로 나자빠진다.
눈 앞의 아스팔트 도로가 폭발음과 함께 크게 파여있었다.
저게...테레사쨩의 몬스터...
“나나씨는 정면의 경계를.”
“알고 있어.”
나나쨩이 소환한 몬스터와 테레사쨩의 몬스터가 진을 치듯 우리를 둘러싼다.
“짐승, 메아를 맡깁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세요.”
테레사쨩은 그렇게 다급하게 한마디를 던지더니 주변의 경계로 돌아갔다.
차에서 내린 메아쨩을 감싸 듯 안고 나나쨩이 소환한 몬스터 뒤에 숨는다.
“2대1 상황이라 그런지 대놓고 듀얼을 피하고 있네요...역시 지성이 있는 걸까요.”
메아쨩이 추위에 덜덜 떨며 분한 듯 말했다.
지성...? 시체에...?
쓸 때 없이 그녀의 말에 신경을 팔지 않았으면 좋았다.
그러면 어쩌면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우리 뒤의 낭떠러지로 부터 조용히 뻗어나온 그 검은 그림자를.
나나쨩도, 테레사쨩도, 메아쨩도, 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그림자는 조용하게 접근해
메아짱의 허리를 물고 그대로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
“메아?!”
“제길!”
테레사쨩과 나나쨩이 반응한다.
하지만 늦다.
이미 메아쨩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저 둘은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나라면...
물론 내가 가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떨어지는 그녀를 따라잡아봤자 내게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고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달린다. 낭떠러지를 향해.
나 자신도 무엇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른다.
이대로 그녀를 쫒아서 뛰어내려봤자 사망자가 1명에서 2명이 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저 그러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은...!”
“유우토! 그만 둬!”
뒤에서 테레사쨩과 나나쨩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망설임 없이 낭떠러지를 향해 뛰어내렸다.
“메아!!”
나의 외침이 계곡의 어둠 속에 외롭게 삼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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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누군가가 복수를 하는 이야기
이것은 누군가가 사랑에 눈 뜨는 이야기
이것은 누군가가 왕이 되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제가 죽는 이야기
시작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겁니다...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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