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곰의 요수의 거목도 분지르는 손톱이 센라를 강하게 내려친다. 그 일격을 센라는 한 팔로 간단하게 막았고, 그 틈을 노려 비어있는 옆구리를 향해 멧돼지의 요수가 어금니를 앞세워 돌진해 왔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새의 요수가 주먹을 내질려 온다.
그러나 공격을 막느라 허술해진 몸을 노린 두 회심의 일격은 오니가 아닌, 느닷없이 균형을 잃고 아래로 쏠린 곰의 요수의 몸에 직격했다. 동시에 가해진 두 일격에 곰의 요수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멧돼지와 새, 두 요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의 공격으로 쓰러진 곰의 요수를 내려다봤다. 분명, 오니에게 명중했어야 할 공격이 동료에게 명중된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중하기 직전에 센라가 순간적으로 곰의 요수의 팔을 잡아당겨 체중을 이동 시킨 것을 그 둘은 알아채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만한 거체를 당겨 방패막이 삼았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직후, 센라는 두 요수의 사각으로 모습을 감췄다. 멧돼지의 요수와 새의 요수는 사라진 센라의 종적을 쫓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새의 요수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뒤늦게 센라의 모습을 발견한 멧돼지의 요수는 귀를 찢는 듯한 큰 소리를 내지르며 센라에게 달려들었다. 어떠한 장애물도 기세를 죽이지 못할 맹렬한 돌진이었다. 그러나 센라는 그 저돌적인 돌진을 양손으로 받아냈다. 두 손으로 멧돼지의 요수의 어금니를 단단히 붙잡고, 기세를 죽인 센라는 자신의 몸을 축으로 삼아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 거대한 회전은 덮쳐오던 요수들을 튕겨내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회전하는 멧돼지의 요수에 겁없이 달려들던 승냥이의 요수가 튕겨 나갔다.
튕겨나간 승냥이의 요수는 일직선으로 날아가다 몇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리고 난 뒤에서 겨우 멈춰 섰다. 그러고는 죽은 것인지 움직임이 없었다. 이어 달려든 뱀의 요수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두 요수가 재기불능이 되고 나자, 이번엔 둔기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멧돼지의 요수 차례였다.
무거운 회전으로 생겨난 원심력은 멧돼지의 요수를 무시무시한 포탄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금니에서 손을 놓자마자, 센라의 손을 떠난 멧돼지의 요수는 번개 같은 속도로 쏘아져 나갔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에 커다란 흔적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다섯 명의 요수들이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당해버리자, 남은 네 명의 요수들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게 되었는지 깨달게 되었다.
본능이 대적해서 안 될 존재라 말해오고 있다.
주변의 요괴들 보다 조금 강한 정도로 맹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가. 늦은 깨달음으로 그들은 어느새 사나운 맹수에서 겁에 질린 강아지가 되어갔다.
"제길! 그 새끼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덩치는 요수들 중에 가장 큰 12척이 넘는 거구인 말의 요수가 뒤늦은 후회를 담아 절규했다. 승산은커녕 꼬리 말고 꽁무니를 뺀다고 해도 살아날 수 있다는 보증이 없는 상황. 이 모든 게 자신들을 세치의 혀로 꼬드긴 퇴마사의 탓이었다. 요수들에게서 퇴마사를 향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그 인간놈. 오니가 저런 괴물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어!"
"분명 싸웠다고 하지 않았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리여서 우리 힘을 빌린다고 했는데!"
"거짓말인 게 당연하잖은가. 허약한 인간이 저런 괴물과 싸워서 살아 돌아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거야?"
그들 중 가슴 아래까지 흰수염을 늘어뜨린 나이 많아 보이는 요수가 침착하게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그 놈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우린 바보 같이 속아 넘어간 거지."
"제길, 역시 그 새끼가!"
말의 요수는 격렬한 분노에 이를 갈며 자신을 지금 상황에 처하게 만든 원흉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에게 긴 흰수염이 난 요수는 공허하게 웃으며
"지금은 저 위험한 괴물에게 달아날 궁리를 하는 게 현명해."
하고 내뱉은 직후였다.
순식간에, 거리 그 자체를 소멸시킨 듯이 센라가 육박해왔다. 긴 흰수염의 요수는 갑작스런 센라의 접근을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반응 보다 그의 목을 움켜쥔 센라의 손이 빨랐기에. 어쩔 줄 몰라 몸부림치던 긴 흰수염의 요수는 이내 손에 힘을 쥔 센라의 의해 목뼈가 부셔져 축 늘어진 시신이 되고 말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말의 요수는 동료의 죽음에 격노하여 죽먹에 분노를 담아 그에게 휘둘렸다. 그 강권을 센라는 일부로 피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받아냈다. 주먹과 뿔이 서로 맞부딪친다. 그리고 그 직후.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휘청거린 쪽은 말의 요수였다. 바위보다 단단한 그의 주먹이 그 보다 단단한 센라의 뿔에 의해 처참하게 부셔진 것이었다. 뼈 채로 박살이나 피로 흥건한 고깃 조각이 된 자신의 손을 붙들고 신음하는 말의 요수에게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눈이 쫒기 힘든 속도로 내질려진 주먹에 의해 가슴에 주먹 크기만 한 바람구멍이 난 말의 요수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하여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이제 생존해 있는 요수는 단 둘.
피부가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는 파충류 같은 요수와 날렵해 보이는 쥐의 요수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원흉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지금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자신들 만이라도 살아남으려면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이해한 순간 그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센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그 두 요수를 바라보며 센라는 뒤를 쫒으려다 문득, 후배의 안위가 걱정 되었다. 혹시나 후배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 아홉이나 되는 요수들을 여유 부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처리했지만, 잊고 있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수들 사이에 있었던 복수심에 불타던 희멀건 퇴마사. 그자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려보던 센라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지친 것이었다. 센라는 그런 자신에게 조금 놀라고 있었다. 약해진 자신을 느낀다. 이전이었다면 지금의 배의 힘을 썼더라도 이렇게 까지 지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후배가 안 보여.'
요수들을 피해 요령 좋게 숨어 있을 코우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 퇴마사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건? 그런 불길한 예감에 센라는 더욱 지쳐오는 것만 같았다.
*
요수들이 센라를 향해 일제히 덮쳐들던 무렵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코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기척을 느끼고는 숨을 곳을 옮기기로 했다. 적에게 사로잡혀 선배를 위기에 쳐하게 한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 그는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따라잡히지 않으려 애쓰던 코우가 센라가 있는 장소로부터 꽤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을 때였다. 자신을 쫓던 기척은 사라지고 없자, 안심한 코우는 지친 기색을 드려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순간이나, 긴장이 풀어졌던 것이 원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드려낸 독수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약삭빠른 놈! 쫓아가느라 힘들었다."
숨을 가다듬는 코우의 바로 등 뒤.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이 음험한 미소로 환희했다.
"쓸데없이 애먹게 하지 말라고."
히히히히히.
광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면서 그는 검고 질척한 감정을 드려내는 것에 개의치 않아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입술을 달싹여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발아래에서부터 하얀 빛의 뱀이 코우의 몸을 타고 올라가 코우의 몸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으앗!?"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었다. 코우는 가슴께 까지 올라온 뱀처럼 꾸물거리는 빛줄기를 걷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몸을 죄어왔다. 이윽고,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코우는 자신을 포박한 자를 돌아보며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같이 약해빠진 요괴가 어찌하여 그런 괴물의 보호를 받는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코우의 앞으로 걸어 나온 퇴마사의 얼굴엔 간악한 미소가 만면해 있었다. 그는 '흥흥'거리며 목에서 새된 소리를 울렸다.
"나에게 있어선 그저 형편 좋은 약점. 이용해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에 코우의 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코우는 자신이 약점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야 며칠 전의 일도 있었으니까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 그 때는 센라의 보호가 너무도 당연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이고 경원시 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안일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고 깨달게 된 지금의 코우에겐 퇴마사의 중얼거림은 결코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네."
체념 한 것인지, 코우의 입에서 수긍의 소리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퇴마사가 '호홍'하고 반응했다. 순순히 인정하는 코우의 말에 흥미가 생긴 퇴마사가 코우를 바라본다. 그는 시선을 코우의 입에 고정시키고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코우는 얼굴에 자조의 빛을 띠며 말했다.
"나는 힘없고 아는 것도 없는 비루한 요괴일 뿐이지. 선배에게 짐이나 되는 존재야."
"잘 알고 있군."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아니, 지금이라도 죽어야 겠지."
"하핫. 죽겠다고? 넌 그 괴물을 죽일 소중한 인질이니까, 섣불리 목숨을 끊게 놔두지 않겠다."
퇴마사는 가소롭다는 듯 자포자기한 코우를 비웃었다. 인질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 정도는 상정한 그다. 자신에게 잡힌 시점에서 그 어떤 저항도 부질없는 짓인 것이었다.
퇴마사는 코우를 묶고 있는 빛으로 된 포승줄을 잡아끌며 한창 요수와 싸우고 있을 센라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묵묵히 퇴마사의 뒤를 따르는 코우. 하지만, 그는 이대로 인질이 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나 이 상태로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가능하다 해도 그럴 각오가 없다. 이처럼 코우에게 이렇다 할 방도는 달리 없었지만, 그래도 저항의 끈은 놓지 않았다.
쾅! 하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격렬한 싸움의 소리였다. 전신을 휘감은 빛줄기의 의해 몸부림 칠 틈도 주어지지 않는 코우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퇴마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퇴마사양반."
"응?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는 말에 코우는 다소 장난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당신 보다 훨씬 강한 인간도 날 인질로 썼는데도 실패했어."
"그래서? 소용없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맞아. 선배에게 인질 같은 건 통하지 않으니까,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떻겠어?"
"흐으응.. 흐흐흐. 그 잘난 놈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잘난 놈? 그 카기라는 퇴마사를 말하는 건가.."
"재수 없었는데, 마침 잘 죽었지."
"아무튼, 그 자가 실패한 방법이야. 묘수가 아니라고."
그때, 퇴마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크하하하핫! 날 그 자식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그랬지?"
"뭐..뭐야. 좋은 수라도 있는 거야?"
분명, 그는 그 일의 전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 중에 자신들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시중을 들었던 하녀와 홍일점 퇴마사가 그 생존자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라면 틀림없이 자초지정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질극이라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이 성공하리라는 듯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필시 카기라는 퇴마사를 뛰어넘을 만한 책략이 있다는 얘기다.
퇴마사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노기를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것도 없이 움직였다고 생각한 거냐?"
감정의 변화가 손바닥 뒤집듯이 급작스러운 사내였다. 그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분해하다가도 즐거운 듯 웃음을 흘려댔다.
"그 자식은 다 잘해놓고 한 가지 실수를 했더군. 요괴의 움직임을 봉하는 것이 퇴마의 기본이자 정수. 그건 나무랄 것도 없이 잘 해냈지. 허나, 그것만 가지고는 괴물을 쓰러뜨리기엔 부족했지. 그래서 실패하고 죽은 거다."
마치,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카기의 싸움을 냉철한 얼굴로 평가했다. 그리고 비웃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당연한 결과지. 움직임을 봉해도 치명상을 줄 수 없다면 퇴치할 수 없으니까. 강력한 봉인술도 가지지 못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자신 역시, 그와 같다고 털어놓는 퇴마사.
그럼에도 그 목소리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렇기에 나는 강구한 거다. 괴물을 죽일만한 힘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확고한 빛을 띠고 있었다. 여기까지 그의 얘기를 들은 코우는 그의 자신감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그래서? 얻은 거야?"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크크큭'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곧 알게 돼."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다시 걸음을 재개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코우는 더 없이 불길해 하며, 그가 말한 힘이 무얼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센라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위해 요괴의 힘을 빌리는 퇴마사. 수단과 방법 따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선배와 싸우고 있을 요괴들도 어쩌면.. 아니, 분명 퇴마사의 버림 말에 불과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커다란 두 인영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바람을 일으키며 멈춰 선 퇴마사와 코우를 스쳐 지나갔다. 방금 지나간 그 인영의 정체를 코우는 잘 알고 있었다.
"저건.."
"겁쟁이 같으니라고. 그러고도 맹자인가.."
퇴마사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두 인영은 다름 아닌 그와 손을 잡았던 요수였다. 제 역할도 수행 못한 채 꽁무니나 빼는 두 요수의 모습에 그는 혀를 차긴 했어도 아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마도 예상한 범주 안이었으리라.
도망친 두 요수 탓에 잠깐 멈춰 섰던 발이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센라를 습격했던 장소에 가까워져 갈 즈음, 강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살기를 담은 요력이 퇴마사에게 직격한다. 퇴마사는 마른 침을 삼키고, 성난 오니를 응시했다.
"많이 화 난 모양이구나. 당장이라도 날 찢어발기고 싶겠지"
"내 후배에게 손을 댄 이상, 그냥 넘어 갈 수 없으니까."
그곳엔 붉은 눈을 밝힌 채 퇴마사를 노려보고 있는 센라가 서 있었다. 자신을 화나게 한 이상 자비는 바라지 말라는 듯한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퇴마사는 주눅이 들었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크크.. 그렇겠지. 그 정도로 소중하지 않으면 인질로 삼은 보람이 없지."
"인질이라..."
카기라는 퇴마사에게 습격당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에 센라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곤란한 후배였다. 인질이 된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인질이라니. 어쩐지 앞으로도 이런 상황에 종종 봉착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센라는 무심결에 한숨을 토해냈다.
"음.. 그러니까, 네가 끌고 온 요괴들은 이걸 위한 시간벌이였다고 보면 되는 거지?"
"크핫. 보기와 달리 똑똑하군. 그 말대로 네놈의 발을 잠시 묶어 두기 위한 장기말이었지."
"그건 보면 알아. 나와 한번 싸워 봤으면, 그 정도 요괴 가지고는 택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 테니까. 그래서? 내 후배를 인질로 잡은 후에 어떻게 하려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후배가 인질로 잡힌 이상, 센라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줄 정도로 그는 만만하지 않았다. 칼도 들어가지 않고 부적도 통하지 않는 오니의 몸이다. 준비가 철저했던 카기조차도 실패했던 책략을 그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퇴마사가 성공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저 퇴마사에게 자신을 상처 입힐 만한 비책이 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단순한 어리석은 자로만 보여 지지 않았기에 센라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퇴마사는 그런 센라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병을 막고 있던 마개를 이빨로 물어, 뜯어내듯 뽑아냈다. 그러자, 요괴 퇴치를 업으로 삼는 자가 지니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사이한 기운이 병 안으로부터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 일대가 순식간에 독으로 된 안개에 잠식된다. 짙은 죽음의 기운에 퇴마사가 돌연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그곳에 존재했던 무수한 생명들이 색을 잃고 사그라졌다. 초목들이 잿빛으로 바래가는 광경에 코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부 죽어가고 있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죽음을 선사하는 기운은 차츰 한 곳에 모여들어 그 형체를 갖추어 갔다. 주저앉은 퇴마사의 머리 위로 그것은 죽음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독기를 뿜어내며 공과 같은 형태로 떠 있었다.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간신히 일어선 퇴마사가 킥킥하고, 힘겹게 웃었다.
"이거라면 제 아무리 네 녀석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 할 테지."
"과연."
센라는 작게 감탄하며 찬동했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담겨져 있는 응축된 죽음의 기운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직격 당한다면 강대한 오니인 그라 할지라도 무사하지 못 할 터. 육체의 강약을 따지지 않고, 그 어떤 생명에게도 평등한 죽음을 내리는 그것은 틀림없이 센라 마저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센라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확실하게 죽일 그것을 앞에 두고 센라는 오랜만에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은 자신이 공 같은 형태의 저것을 앞에 두고 긴장을 하다니. 빈말로도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이 빼앗는 그것은 센라에게 강한 불쾌감을 주고 있었다. 그런 것이 오니에 비해 약한 인간에겐 어떨까? 기분 나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들어가는 초목처럼 점점 죽어갈 것이다. 피를 토해내고는 파리한 안색으로 간신히 서 있는 퇴마사를 보면 일목요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자신도 죽게 되는 동귀어진의 비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센라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퇴마사의 집념은 인간을 포기한 원귀의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복수귀나 다름없는 퇴마사가 일그러뜨린 얼굴로 피로 새빨개진 이를 내보였다.
"피하지 말라고. 그랬다간 이 요괴의 목숨은 없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코우를 묶고 있는 줄에 영력을 실어 보냈다. 그러자, 줄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하더니, 코우의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코우는 살이 타들어가는 통증에 신음하면서 몸부림쳤다. 퇴마사는 흐뭇한 눈으로 코우를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센라에게 돌렸다. 그리고 줄에 영력을 실는 것을 중단하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눈으로 센라를 쳐다봤다.
센라는 대답을 싸늘한 시선으로 대신했다.
"흥. 어차피 넌 아무것도 못해!"
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다는 듯, 퇴마사는 그렇게 일갈하며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그것에 명령했다.
"집어 삼켜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의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덩어리는 그의 명령에 호응하듯 꾸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던 그것은 센라의 몸에 닿기 직전.
산 전체가 터져나갈 듯한 파공음과 함께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리고 그 직후, 퇴마사와 코우에게 폭풍이 들이 닥쳤다. 사나운 바람의 폭력에 이기지 못한 퇴마사는 공중에 날려져 뒤로 몇 바퀴 굴렸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고개만 든 채 앞만 살폈다.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폭풍의 끝에는 센라의 주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천히 주먹을 내린 센라는 시시하다는 얼굴로 퇴마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닿기만 해도 죽는다면 그 전에 지워버리면 그만이지."
준비한 비장의 수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퇴마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굳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상대할 수단이 남아있지 않은 그는 이제 다 끝났다는 절망감으로 넋을 놔 버렸다.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센라는 풍압에 넘어져 있는 코우에게 걸어갔다.
퇴마사의 손에서 벗어나 영력을 잃은 줄은 평범한 밧줄에 불과했다. 빛을 잃은 줄을 뜯어내고 코우를 일으킨 센라가 먼저 물은 것은 "괜찮아?"라는 안부였다.
코우는 비틀거리면서도 "괜찮아요."하고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복수심에 불타는 퇴마사의 흉계를 이겨 냈을 때 였다.
별안간 불어온 강한 돌풍이 쓰러져 있던 퇴마사의 몸을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돌풍에 센라와 코우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그 시선의 끝엔 수도승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곧장 둘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쿠모이 이치린이라고 합니다만. 근처를 지나가다 너무나 사이한 기운이 느껴져 급히 와 보았는데, 이미 없어진 모양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두 분은 알고 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