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14일 임진왜란 발발
음력 4월14일~음력 4월 15일 이틀간 부산진성 전투를 시작으로 서평포진 전투, 다대포진 전투, 동래성 전투를 끝으로
경상좌수영 및 동래부의 조선군민 전멸
그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싸운 이유는 제승방략의 작동과 다른 수군의 왜 수군 함대 요격의 시간을 끌기 위함
당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그'는 전멸하는 와중에도 지원을 요청한 경상좌수영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동하였으나,
지레 겁을 먹고 철수함
이후 주위 제장들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상우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선을 최소 70여척~ 최대 100여척을 자침시키고
병력을 해산시킴
1592년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
왜 수군이 남해로 진출하자, 그제서야 옥포를 넘겨주면 안된다고 생각한 '그'는
전라좌수영에게 구원요청
이후 전라좌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군이 지원을 오자 전선 4척만을 가지고 합류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였으며, 피해는 부상자1명이라는 대승을 거둠
이 부상자 1명은 원균의 실책으로 인해 발생함
1592년 음력 5월 29일 사천해전
'그'는 전선 3척을 이끌고 참전. 별다른 활약성은 보이지 않음
1592년 음력 6월 2일~음력 6월6일 당포해전~1차 당항포해전
전투 막바지에 적선에 올라타 왜 수급 50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대첩
7척의 전선을 이끌고 참전
이후 안골포 해전(음력 7월 10일), 장림포 해전(음력 8월 29일), 절영도-초량목-부산포 해전(음력 9월 1일), 웅포 해전(1593년 음력 2월 10일)
등에 참전하였으나 큰 전과는 눈에 띄지 않음
1597년 음력 1월 21일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을 음해함
그 결과 이순신은 파직되어 '그'가 후임 수군통제사가 됨
음력 3월 7일 거제도 기문포에서 정박해있던 적선 3척에게 선물을 주는 척 접근하여 격멸시킴
이때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휴전기간이었으며, 조정은 왜군의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됨
이후 '그'는 수군통제영 지휘실을 기루로 삼아 술만 마시고 기생을 끼고 놀기만 함
조정에서 닥달하자 '그'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핑계만 댐
조정은 기다렸단 듯이 병력 보충을 해줌
음력 6월 16일 안골포에서 적선 2척을 깨부수는 동안
보성군수 안흥국 장군이 전사
겨우 적선 2척과 아군 장수를 바꿔먹음
음력 7월 8일~9일
적선 8척을 격파하였으나 적의 반격에 지레 겁을 먹어 우왕좌왕하다가 아군 전선 20척이 격파당함
음력 7월 14일
적의 보급선단을 발견하고 추격하였으나,
무리한 추격 끝에 격군들이 탈진하여 아군 전선 12척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됨
이 10 : 32이라는 놀라운 교전비에 화가난 도원수 권율이 '그'에게 곤장을 내려침
당일 재차 출동한 '그'는 가덕도에 수군 병졸 400여명을 식수 보급을 위해 상륙시킴
왜군이 공격해오자 '그'는 400여명을 버리고 도주함
1597년 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인 정박지 경계 실패로 인해서 적선들을 함대 깊숙히 침투시킴
이후 적절한 지시를 내리지 못하여
전라우수군절도사 이억기 장군과 충청수군절도사 최호 장군이 전사하였고, 사도수군첨절제사 김완 장군이 포로로 사로잡힘
패닉에 빠진 '그'는 남은 함대에게 춘원포로 후퇴하여 배를 버리고 도주하라고 명령함
그리고 당시 전세계를 둘러봐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막강한 함대가 사라짐
우리편이라곤 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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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뒤에 있었겠지. | 19.05.21 14:2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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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아아.. 그 다구치 그 야 | 19.05.21 14:2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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