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루리웹 애니메이션 유저 칼럼 시리즈입니다. 일정기간 동안 루리웹 애니갤러리 상단 공지로 노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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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5일, 카툰 네트워크에서 처음 방영된 어드벤처 타임은 마법과 설탕이 판치는 우대륙에서 인간인 핀과 마법 개 제이크, 2인조가 용사의 일을 수행하며 모험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유의 아기자기한 그림체와 성우들의 뛰어난 노래 실력, 그리고 기승전병, 때론 기병병병과 같은 예상을 벗어나고, 아스트랄한 전개 방식으로 201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카툰 네트워크 코리아에 따르면 대한민국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니,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까지 인기몰이를 한다는 점에서 소년과 개의 모험이 가진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죠. 미국에서는 인디 만화가들이 고용된 어드벤처 타임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후 업계에서 경력이 적은 사람들을 찾는 애니메이션 판 골드 러시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또한 어드벤처 타임 전의 미국 애니메이션이 남성 중심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성향이 강하게 내포되었다면 그 이후의 애니메이션들은 다채로운 등장인물들과 말하는 동물들이 함께 하는 판타지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드벤처 타임이 201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류를 만들어낸 것이죠.
하지만 이 글에서 쓰고자 하는 글은 어드벤처 타임의 인기나 애니메이션계에서 갖는 영향력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캐릭터들과 개그들로 아동층을 휘어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포칼립스적인 세계관, 마셀린과 아이스 킹(사이먼)과 같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인물들로 청소년과 성인층을 팬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한, 전 연령층을 사로잡은 이 애니메이션이 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제가 진정 궁금히 여겼던 것이고 또 이 글을 쓰는 목적입니다. 기실 언뜻 보면 교훈은 없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 같아 보입니다. 대부분의 편들-특히 이 작품이 입소문을 타게 된 시즌 1,2-에서 등장인물들이 하는 정신 나간 행위는 정신 나간 결과로 이어지고 그렇게 끝납니다. 이야기에 주제가 없더라도 애니메이션은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심미안적 관점이 작품의 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또 초창기에는 제작진 측에서도 이를 의도한 측면이 없지는 않아 보이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지한 분위기가 강해지고 등장인물들도 사자에상 시공에 갇혀 성장이 그때 그때 방영되는 편마다 초기화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성장을 거치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작품은 말 그대로 정신 나간 모험에서 캐릭터들의 고뇌, 그들이 겪는 시련, 성공 혹은 좌절을 묘사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둡니다.
그리고 후반부 시즌 7과 시즌 8,-그리고 카툰 네트워크가 일방적으로 분류한 것에 따르면 시즌 9-에 걸쳐 진행되는 3개의 미니 시리즈에 와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집니다. 이 때 시련들의 막대함은 단순히 지리적인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내적인 갈등이 어느 때보다 팽창되었다는 것이죠. Stake 시리즈에서 마셀린은 뱀파이어를 그만둠으로써 줄곧 정체되어 있던 자신을 성장시키려고 합니다. Island 시리즈에서는 핀이 자신 존재의 기원을 찾게 되고, Elements 시리즈에서는 우 대륙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4원소에 휩쓸려 극단적인 감정에 매몰됩니다. 등장인물들이 풀어야 할 이런 시련들과 이를 푸는 데 주어진 모험의 시간을 보면서 어째서 제작진들이 등장인물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도요.
우선 시즌 7의 Stakes 시리즈의 주인공인 마셀린은 뱀파이어가 되어서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즉,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미래의 변화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몸에서 떼어낸 뱀파이어 정수, 거기에서 튀어나온 고위 뱀파이어들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하고자 했던 것들이 표상화된 것이죠.
풀은 마셀린이 초창기에 가졌던 철없는 장난기와 허세, 미성숙함을 보여줍니다. 여제는 마셀린의 아동중기를 책임졌던 사이먼을 노예로 만들고, 또한 사이먼이 떠난 뒤 홀로 방랑했던 청소년기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녀가 느꼈던 외로움, 고독을 드러내고, 교주는 과거에 대한 집착, 아집을 반영합니다. 문은 달이 광기를 불러온다는 미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 자신이 의식할 수 없고,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프로이트적인 무의식, 그리고 원초아-물론 이 둘이 완전히 등치되는 것은 아닙니다.-를 상징합니다. 다만 유일하게 킹 만은 미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면모와 대응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가지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성장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요소여서 다른 뱀파이어들처럼 최후를 맞는 대신 정화되는 것으로 다른 운명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을 해치움으로써 그녀의 시련은 완료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셀린이 추구했던 발전을 향한 직선적이고 일방향적인 대응은 모순되게도 뱀파이어 정수의 폭주라는 결과로 비화되고 맙니다.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이성만을 추구해야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강조했던 데카르트적 이성 철학과 같이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요소들을 자신으로부터 제거하고자 했던 마셀린의 시도는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이성으로 만들어진 비인간적인 병기들이 만연한 1, 2차 세계 대전 때 무너졌던 것처럼 분리하는 행위 자체가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이죠. 그녀는 쓰레기더미 속에 앉아 좌절합니다.
시즌 8의 Island 시리즈에서 핀의 여행의 목적은 마셀린이 추구한 것과는 반대로 기원으로의 회귀입니다. 멸종되었다는 인간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섬들을 둘러보며 핀은 자신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간이란 것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바다에 대한 공포가 심겨진 그 근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핀이 자기 아버지를 보면서 쌓인 부정적인 부모상과 전 시즌에서 은연중에 노출했던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을 친어머니 미네르바와 만나면서 해소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리즈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수잔 역시 잃었던 자신의 본명인 카라와 기억을 되찾고, 과거의 친구였던 프리다에게 사과하고 그 교우 관계를 재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죠.
그러나 여기서도 과거에 대한 지향 자체가 그들의 발목을 붙드는 시련이 되어버립니다. 카라의 친구 프리다는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과 자신의 좌절된 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예전엔 반항했었던 섬의 교육방침을 자기 지표로 삼고 거기에 의지함으로써 새로운 것, 미지에 대한 동경심을 꽁꽁 감추었고, 이 상황에서 수잔이 원하는 사과에 대한 진심어린 응답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친모를 만난 핀의 상황은 더 심각한데 미네르바는 드디어 재회한 자신의 아이를 안전한 곳에 있도록 통제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온 섬의 사람들까지 싸잡아 자신이 구축한 네트워크 망에 가두려 하죠. 여기서는 과거의 지표들과 근본적인 자녀에 대한 애정이 등장인물들을 속박합니다.
이런 사람 내면의 감정들이 더 시련으로 극대화된 것이 Elements 시리즈입니다. 버블검의 사랑과 기쁨, 불꽃 공주의 경쟁심과 분노, 페이션트의 고독과 우울, 슬라임 공주의 나태와 쾌락이 온 대륙에 발산되어 거의 모든 이들을 휘감았고, 이들은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쳐져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독재정이긴 해도 국민들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던 버블검은 부정적인 감정을 강제로 거세하려 하고, 공정한 군주인 불꽃 공주는 국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페이션트의 권역 안의 모든 자들은 무기력함에 짓눌리고, 슬라임 공주의 백성들은 슬라임 공주 안에 녹아내려 자신의 모든 책무들을 내려놓죠. 이런 감정들은 사람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것이고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핀은 이전 시리즈들보다 훨씬 더한 역경에 처하고 맙니다. 모험 도중 제이크가 슬라임 공주에게 흡수되고 그 역시 불꽃 공주에 의해 분노에 미쳐버리고 말죠.
이 세 시리즈의 시련들의 근본을 보면 미래에 대한 진보, 과거로의 회귀, 감정 속으로의 매몰이라는 서로 다른 원인들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형성한다고 여기는 여러 부분들 중 하나에 편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없애는 것이라 여기고, 과거의 후회와 그리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변한 상태, 변할 수 있는 자신을 부정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 속에 이성적인 나의 능력을 잊는 것. 그럼으로써 ‘나’란 존재를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동양 철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좌절하던 마셀린은 곁에 있던 아이스 킹이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의 파편들을 가진 것을 깨닫습니다. 부정하고 거부했던 그녀의 외로움이 다른 편에서는 소중한 인연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죠. 이는 불교에서 ‘나’가 갖는 인식, 정체성은 항상 변한다는 무상의 개념과 통합니다. 나의 느낌, 지각, 육신, 행동, 인식은 자기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오취온)이지만 사실 이런 요소들을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나’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무아) 마셀린은 그녀 자신의 지각과 느낌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요. 목표로 해야 하는,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나’의 이미지 역시 무상하여 상황과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마셀린은 성장에 대한 자신의 일방향적인 집착을 내려놓고 이를 배제한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서양의 단선론적인 철학에서는 굴복으로 인식할 분리했던 면모들을 인수함으로써, 다른 말로는 성장에 대한 주관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중도를 걸을 수 있게 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모험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지표에 자신을 묶었던 프리다는 현실에 대한 낙담어린 수용을 핀의 연설에 의해 조금씩 깨부숩니다. 그 안에 수납되어 있던 미래와 미지에 대한 지도를 과거에 잃었던 친구인 수잔과 함께 펼치죠. 수잔 역시 과거의 추억과 미련들과 핀과 제이크와 엮이며 형성했던 수잔으로서의 정체성을 통합하고요. 지금까지의 족적들과 미래를 향하는 시선이, 대지와 물질계에 존재하는 육신과 하늘과 이상을 향하는 정신적 요소가 결합합니다. 힌두교의 딴뜨리즘에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모를 상징하는 샤끄띠와 이성과 초월성을 상징하는 시바 이 둘이 체내에서 함께 하여 합일을 이룰 때 숙련된 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부분적으로 상통합니다. 핀이 자식에 대한 천성적인 애정에만 몰두한 미네르바에게 그가 살아오면서 가진 신념과 사상을 역설할 때, 그럼에도 미네르바와의 혈육관계 역시 부정하지 않고 그의 정체성의 부분으로 인정하였을 때에야 미네르바의 폭주는 멈추고, 모자는 진정으로 상봉에 대한 회포를 풀 수 있었습니다.
Elements 시리즈에서 극단적인 감정으로의 편착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핀은 분노로 끓어오르는 자신의 상태를 LSP의 도움으로 버블검과의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버블검과의 끊어지지 않은 유대감과 우정, 정서적 지지 관계를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림으로써 분노에 집중하던 마음을 흩어놓을 수 있었지요. 그는 이런 다른 감정들에 자신의 주의를 전부 집중시킴으로써 분노에 대한 천착을 끊어낼 수 있었는데요. 바로 핀과 같은 경우가 불교에서 말하는 오취온-여기서는 그 중에 느낌-에 대한 집착, 갈애를 끊어내는 방법 중 다른 갈애로 갈애를 끊는 방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 방법은 무상과 무아를 인식하는 진리의 통찰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감정 등의 갈애에 항상 무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고, 작중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상징인 lsp가 자신의 힘을 이해했을 때 감정에 매몰된 우 대륙 전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감정의 번뇌에 벗어났다는 것에서 열반, 해탈을 연상할 수 있군요.
여하튼 이렇게 세 미니 시리즈에서 등장인물들은 주어진 모험의 시간 동안 시련들을 극복함으로써 흔들리고 균열이 일던 자기 정체성을 엮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사태를 해결하고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좋아. 근데 그게 끝이야? 뭔가 캐릭터들이 향상되고 변화해야 하는 거 아냐? 원상복구로 만족하는 거야? 특히 너. 마셀린, 너 말이야.’
그나마 핀이 몰랐던 자신의 기원을 찾아내고 통합했던 Islands 시리즈는 이런 비판을 피해갔지만, 다른 두 시리즈-특히 Stake는 더욱- 가시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 점에서 비판을 자주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양 철학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죠. 불교에서는 갈애를 없애고 열반에 들었어도 수행의 길은 멈추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얻었어도 멈추지 않고 남은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하여 중도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가죠. 불교의 마지막 단계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딴뜨리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딴뜨리즘에서 하반신에 위치한 물라다라 차크라에서부터 샤끄띠는 정수리의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자리한 시바에 이르기까지 위를 향한 여정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시바와 만나 합일되었을 때는 그대로 정수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아래로, 즉 이성, 이상적 영역에서 육신, 현실적인 영역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서양의 이성 중심 사유관에서는 이런 동양 철학의 양태는 허무한 것으로 착각될 여지가 있습니다. 간신히 얻은 깨달음, 더 진보된 단계에서 스스로 물러난다고, 허무한 사상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이 단계들이 그들의 생각처럼 허무주의적인 건 아닙니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 관조하는 지혜는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이데아처럼 현실과 단절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와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긴 여정이나 여행을 떠난 후 얻은 것들을 가슴 깊숙한 곳에 안고 다시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장대한 모험들을 겪은 후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들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마셀린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볼 수 없는 다른 쪽 면은 변했지요.
이것은 비단 작품에서만이 아닌 현실을 거니는 사람들이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삶 동안 거쳐가는 각자의 모험과 여정. 우리들은 우리 자신만의 모험의 시간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까요? 닥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죠.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반복되는 모험과 일상으로의 귀환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나’라는 것. 그러나 ‘나’를 이루는 것들은 절대적이지 않고 조금씩 변해간다는 것. 이를 계속 상기한다면 이상이나 현실에 얽매여 다른 쪽과 유리되지도, ‘나’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많이 미숙한 글을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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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동양철학은 국가운영의 "술"로서 여겨져온 학문이죠. 동양철학이라는 프레임 역시 서양철학의 틀에서 바라본 시선이고... 흔히 노자 사상을 자연친화의 시선으로 보지만, 근래 연구 트렌드는 "제왕학"의 시선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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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el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동양철학은 국가운영의 "술"로서 여겨져온 학문이죠. 동양철학이라는 프레임 역시 서양철학의 틀에서 바라본 시선이고... 흔히 노자 사상을 자연친화의 시선으로 보지만, 근래 연구 트렌드는 "제왕학"의 시선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이죠. | 17.08.05 2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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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로써 반가운 댓글이네요 추천 드립니다 | 17.08.15 17: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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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감사합니다! | 17.08.15 21: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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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졸하다니요. 시청자들이 미디어를 시청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재미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도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재미를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찾느냐는 개인차이고 재미를 느끼는 각각의 원인들 사이에 우위는 없다고 생각해요. | 17.08.07 23: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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