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아몬드 듀오 #18, 5월 31일 04:00업데이트
● 99 요단 알바레즈
데뷔했던 2019년 신인상을 받는 괴수가 되더니 다양한 플래시백으로 등장하고 있네요.
● 99 피터 페어뱅크스
23에선 99카드로 빨리 찾아왔습니다만
노리고 내는 조합 같진 않지만, 16번 팩처럼 극과 극의 가격 형성이네요.
Kaiju라는 수제 맥주가 호주에 있네요.ㅎ
★ WEEKLY WONDERS #10 (기타 프로그램) 6월 1일 04:00업데이트, 다음 주 목요일 03:59 종료
※ 1~7구간 7/8포인트 구성
※ 모먼츠 4개
1~3
4, 랜디 존슨, 노히트 노런 경기
9회말 디트로이트 4~6번 타자를 2개의 삼진으로 돌려세웠는데요. 존슨의 초창기라 역시 고질병 문제로 무려 6볼넷에 8삼진 경기였고, 요즘은 결코 보기 힘든 138구나 던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실 필더는 메이저리그보다 NPB 타이거스를 먼저 경험했었네요.
※ 미션 4개
★ 게임 업데이트 8, 2023년 6월 1일 20:00 배포
※ 구글 번역
PS4: 1.08
PS5: 1.008
Xbox One 및 Xbox Series X|S: 1.0.78
닌텐도 스위치: 1.08
배포 예정: 6월 1 일 / 오전 4시(PT)
♣ 다이아몬드 다이너스티
● 이제 스쿼드 필터를 미니 시즌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스쿼드 관리 화면에서 캡틴이 벤치에 있는 플레이어로 교체된 경우 캡틴 부스트가 활성 상태로 유지되는 버그를 수정했습니다.
♣ 온라인 일대일
● 협동 채팅 메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수정했습니다.
♣ 3~10월(MTO) 및 프랜차이즈
● 모든 스카우트가 활동 중인 임무가 있는 경우에도 아마추어 빅 보드에서 초안 유망주 목록에 액세스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 유니폼 업데이트
● BAL City Connect 헬멧 세부 정보를 업데이트했습니다.
● ARI 유니폼 아이템을 최신 세부 정보로 업데이트했습니다.
● CIN City Connect 저지를 최신 세부 정보로 업데이트했습니다.
♣ 여러 가지 잡다한
● 다양한 해설 업데이트 및 조정.
♣ 개발자 노트
● 현재 게임 플레이 또는 라이브 콘텐츠 밸런스 변경 사항은 없습니다.
★ TOPPS NOW 9주, 6월 3일 04:00업데이트
※ 41~50구간, 81~100포인트
※ 5월 TN 플래시백+캡틴 카드 PXP 미션
※ 5월 넷째 주, 카드 PXP 미션
※ 모먼츠 7개
그러고 보니 첫 달엔 모먼츠에도 예전처럼 짤짤이 스텁이 있었는데 5월부터 없어졌네요.
1~4, 타자
5~7, 투수
※ 카드 7장
● 44구간(88포인트) 90 마이클 매시
● 45구간(90포인트) 92 거너 헨더슨
잘 좀 해봐! 해마다 챙겨주는데 멘도사 라인에 있으면 되겠어!!
● 46구간(92포인트) 94 조안 듀란
● 47구간(94포인트) 94 조나단 인디아
● 48구간(96포인트) 95 루이스 가르시아
● 49구간(98포인트) 95 잭 휠러
● 50구간(100포인트) 99 크렉 킴브렐
올 시즌 기록이라 라이브 카드 기준으로 구종을 올리면 어쩌나 했는데 잰슨처럼 예전 구종 넣어줬네요.
Question
★ Lou Gehrig Day 기념, 6월 3일 04:00업데이트
2년 연속 날짜에 맞춰 등장했는데, 99카드가 나와있어서 이번에 무료 팩으로 대신하고 작년엔 수상자 살바도르 페레즈 카드와 함께였고 2023년 수상자는 '브랜든 크로포드'입니다.
● 97 루 게릭
4·ALS는
★ 다이아몬드 듀오 #19, 6월 3일 04:00업데이트
● 99 타릭 스쿠발
● 99 호너스 와그너
400세이브 인터뷰하는 킴브럴 모습이 득도+해탈에 이른듯한 모습이라면, 거기에 추가로 온화한 미소까지 더한 와그너 선생님입니다.
'손'때문에... 아니 '맨손' 때문에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업데이트로 카드도 늘어나니 레전드 선수들도 속속 등장하고 과거의 맨손 타격 선수들을 게임 속에서 만나게 되죠.
그래서 언제부터 배팅 장갑을 사용하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요.
여기저기 기록+기사들을 찾아보니 재미있더군요. (나만 재미있을 수는 없기에...)
기록에 의하면 경기 중에 전통의 맨손 타격을 벗어나 장갑 같은 다른 물건을 사용해서 타격을 해봤던 선수는 1932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프란시스 조셉 레프트 오둘'과 '조니 프레데릭' 선수였는데요.
2명의 선수 모두 물집이나 손바닥 갈라짐 같은 고통 때문에 타격에 사용해 보는 생각을 하게 됐고, '레프트 오둘'의 경우엔 장갑을 사용해서 타격을 했는데 당시 야구용 배팅 장갑 제조회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잖아요.
거리의 상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던 일반 장갑을 사용했고, '프레데릭'은 당시 미식축구 선수들 역시 어깨 보호용 패드가 요즘 같지 않아서 밀착감과 부상 방지를 위해 패드와 어깨 사이 공간에 붕대를 많이들 넣고 또는 감아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붕대를 본인의 손에 권투선수의 붕대(핸드랩)처럼 감아서 타격을 했고요. 하지만 오래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회복 후엔 시대 흐름에 맞게 다시 맨손 타격을 했고요.
그리고 타격에 장갑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 1949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자이언츠의 '바비 톰슨'이 골프 장갑을 착용하고 타격을 했는데 정규 시즌은 아니었고요.
다시 시간은 흘러 1964년으로 갑니다.
엠엘비 닷컴, ESPN, 폭스, 심지어 쿠퍼스타운도 대부분 이 시기의 한 선수가 사용한 것이 배팅 장갑 대중화의 시작이라고 보더군요.
예전 아키타입 글에서 '안드레 도슨'과 함께 같은 별명으로 등장한 선수 출신 해설가(CWS 해설 은퇴) '켄 해럴슨'입니다. (CWS 8대 단장도 역임)
사연이 재미있는데요.
켄 해럴슨 이분이 야구 선수로 아주 뛰어나진 않았지만(9년 경력 타율 .239 703안타, 131홈런) 중계방송을 하게 되는 끼도 있고 당구, 골프(투어 자격증 보유) 같은 다방면의 잡기+재능이 있었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을 잠깐 살펴보면요.
1968년 1만 달러 진입(최초)
1978년 $21,000
1980년 $30,000
1984년 $40,000
1985년 $60,000
1990년 $100,000
1999년 $200,000
2003년 $300,000
2009년 $400,000
2014년 $500,000
그리고 직장 폐쇄가 있던 2021년 12월 2일~2022년 3월 10일, 새로운 협약으로 5년 계약이 시작됐죠. (매년 2만 달러씩 증가).
2022년 $700,000
2023년 72만
2024년 74만
2025년 76만
2026년 78만 달러
5년마다 갱신되는 단체협약(CBA, 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은 역시 '호랑이 토니' 위원장의 힘+노력도 조금은 있었겠고요.
켄 해럴슨은 1963년(21살) 데뷔했는데 당시 최저연봉은 6천 달러였습니다.
마이너리거 선수들 비시즌에 생계를 위한 투잡 뉴스도 종종 나오지만 당시엔 주전 자리 보장도 힘든 메이저리거들도 돈벌이가 되는 일들을 했고, 켄 해럴슨도 본인 재능을 살려 루키 시절엔 부업으로만 메이저리그 연봉보다 많은 수익을 거둬들였는데요. (당구+골프) 당구 상금으로는 보통(40~100달러) 골프 대진료+상금으로 100~150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2년차 이던 1964년 9월 4일(금요일) 양키스와의 경기가(19:00) 있었는데, 예고된 선발이 우완 루키여서 우타자이던 본인은 선발 제외라서 그날도 아침 일찍 골프를 쳤다고 합니다.
골프 치며 그립을 바꿔쳤었고(무려 27홀, 당신의 체력은 정말) 야구장으로 출근했는데 라인업 카드를 보니 본인이 선발로 올라와 있더랍니다. (사정상 원래 선발이던 우완투수에서 당일 좌완 화이티 포드로 변경)
연습타격하다 보니 골프 그립 바꿔친 것 때문인지 물집이 생기게 됐고, 그때 생각난 것이 라커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골프장갑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경기 시작하고(4번 1루수) 1회 첫 타석에서 빨간 골프 장갑을 낀 본인의 모습을 보고 양키스 덕아웃에서 놀림+야유+욕설도 있었지만 첫 타석은 볼넷을 기록했고요.
3회 타석에서는 역시 빨간 장갑을 착용하고 홈런을 쳤고(137m) 9회엔 동점 홈런을 쳤는데 무려 146미터였다고 합니다.
해럴슨의 동점 홈런이 무색하게 요즘 오클랜드처럼 경기는 연장 가서 졌고요.
다음날 출근해서 경기장에 들어가니 양키스 타자들이 연습타격을 하고 있었는데, 선수 전원이 빨간 장갑을 착용하고 있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날 경기 끝나고 '미키 맨틀'이 클럽하우스 클러비에게 부탁해서 같은 장갑을 20켤레 구매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맨틀이 보기에 인상 깊었던 점도 있었겠고 위트 있는 장난도 되겠죠.
인터뷰가 2008년이었는데 당시 왼손 타자 '조이 가트라이트'가 번트 데고 1루 베이스까지 3.4초를 기록했었나 봅니다.
켄 해럴슨은 자신이 지금까지 본 모든 선수 중에 1루 스프린트는 미키 맨틀이 가장 빠른 선수였다고 하네요. (우타자는 이분도 전설의 보 잭슨을 꼽았네요)
궁금해서 찾아보니 메이저리그 우타자는 평균 약 4.3초, 좌타자는 4.2초 정도 되고 미키 맨틀은 좌 타석에서 3.1초를 기록했었더군요.
선수와 단장 생활을 지나 해설을 하던 당시 인터뷰에서 예전 야구와 가장 다른 점을 불펜으로 뽑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불펜전이라 표현) 본인 선수 시절엔 투수진이 9~10명이었는데 이젠 12~13명이 평균이고, 본인 루키 시절엔 350이닝 가깝게 던져야 에이스이던 시절에서 점차 줄어들어 300이닝, 250이닝 시대를 지나 이젠 아프지 말고 200이닝 시대로 변화한 관리와 흐름도 뽑았고요.
예전엔 없던 에이전트의 등장만큼 선수 연봉 규모가 올라가 구단에선 관리가 더 어려워진 점과 바뀐 언론 환경도 뽑았는데 예전엔 언론의 압박이 10단계 중에서 1~2레벨이었다면 이젠 10으로 변한 시대여서 강한 압박+압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버티기 힘든 점도 있다고 하셨네요.
메이저리그에 켄 해럴슨의 빨간 배팅 장갑이 있다면, 한국 야구엔 김동엽 감독이 생각나네요.
해태 감독하면 코끼리 감독이 자동 연상되겠지만 해태의 초대 감독은 김동엽 감독이었고요.
해태의 검+빨 유니폼 조합이 영국 근위병 복장, 그리고 해태주조의 술 디자인에서 온 이야기도 있는데, 홈런왕(1982,1986) 출신의 코털 김봉연 님이 이야기하시길 해태 검+빨 조합 탄생 배경은 술 좋아하던 김동엽 감독이 계열사 양주 나폴레온 색상 조합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재미 삼아 이야기하신 건지 정말 디자인 선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당시 관계자만이 알고 있겠죠.
술 주량 부심 부리는 사람들을 골로 보낼 수 있던 '나폴레온'이었는데요. 초코파이처럼 우리나라 업체들은 이름이나 디자인 서로 베끼기? 정말 잘하죠. 해태주조에 나폴레온이(1976년 출시) 있었다면 롯데주류의 캪틴큐(1980년 출시)도 생각나네요(롯데 또 너냐...)
그리고 김동엽 감독은 어필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수 지도하는 것도 감독의 몫이지만, 경기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판정에 어필하는 것도 감독의 역할이라고 했었고, 인터뷰에서도 다음엔 어떤 어필로 할까 하는 방법들도 생각한다고 했을 만큼 항의를 자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쇼맨십도 있어서 유니폼을 입으면 관중들에게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면서 유니폼 뒷주머니에 수건을 말아 넣어 볼륨감도 주던 분으로 기억하고요. (그래서 예전에 해태 오리 궁둥이 선수가 섹시했었나...)
선수 어필로는 OB의 유지훤 님이 특히 기억이 납니다.
코치 시절 모습은 그냥 어른 모습이었지만 선수 시절엔 강한 어필도 많이 하시고 안구가 튀어나올 것 같은 화난 모습+목에 핏대+삿대질은 물론 분에 못 이겨서 헬멧 던지고 하던 모습도 생각나네요.
그리고 김동엽 감독하면 LG 팬들이 좋아하는 '노송'님도 빼놓을 수 없죠.
김용수 님이 아마 시절 주로 사용하던 번호는 14번이었고,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했죠. 선배가 14번을 이미 사용해서 차선으로 선택한 번호가 38번이었습니다.
1987년 김동엽 감독이 재부임 하면서 번호를 양보했고, 지금의 영구결번 41번이 됐는데(남은 번호 중에 1번에서 가까우면서+14번을 뒤집은) 만약은 없다지만 41번이 아닌 38번이 LG의 영구결번이 될 수도 있었고요.
김동엽 감독은 왜 38번을 선택했느냐하면 이분이 6.25전쟁으로 인해 남으로 내려온 황해도 실향민이십니다.
이젠 세월이 흘러 실향민이 많이 돌아가신 시절이기도 하고 구어는 사라지고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시대라 잘 사용하진 않지만
예전엔 삼팔따라지(38 따라지)라는 이야기가 많이 사용됐었죠.
전쟁으로 인해 생긴 말인데 (삼팔선, 38th parallel north line) 실향민 김동엽 감독은 고향+자신이 실향민이라 38번에 대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야구 감독 선임 이전이나 이후에도 MBC 라디오 '홈런 출발 김동엽입니다' KBS 라디오 '김동엽의 스포츠쇼' 또는 프로야구 중계방송 시절에도 황해도 억양이 간간이 들리던 기억이 있고,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별명은 프로야구 감독 시절이 아니라 한양대 감독 시절 빨간 배팅 장갑 끼고 현란한 작전지시 내리던 모습을 본 기자가 기사 내용이나 헤드라인에 사용한 것이 시초가 되어 모든 매체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형제의 나라 드립+죽음의 백조(B-1B 폭격기) 같은 현상이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분이 환갑도 못 살고 용산 독신자 아파트에서 쓸쓸히 돌아가셨죠.
아파트 복도에 TV소리는 2~3일 희미하게 들리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인기척 없어서 아파트 청소하시던 분이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갔더니 침대에서 돌아가신 체로 발견됐죠.
그리고 '삼팔따라지'라는 단어는 국립국어원 사전에도 등록되어 있습니다.
38은 삼팔선에서 파생된 말이고, '따라지'라는 말은 조선의 문헌에도 등장하는데 한자어의 듯을 풀이하면 뜻은 '작은 잡고기+송사리와 같이 작은 물고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전통놀이 화투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100년 조금 넘죠.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어 사전에는 따라지를 왜소한 사람+난쟁이+키 작은 사람의 별명 같은 걸로 설명하는데, 이때 민간에 이미 널리 퍼진 화투의 섰다에서 최고의 조합 38광땡처럼 따라지(1끗)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6.25를 겪으면서(38선) 피치 못해 고향 떠난 사람의 신세와 같은 신조어로도 사용됐습니다.
김동엽 감독+김용수 선수 배번 이야기 나온 김에 박찬호 선수의 61번도 사연이 있죠.
1994년 다저스와 계약한 박찬호 선수는 16번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다저스 선배 출신이자 1994년까지 투수코치를 하던 '론 페라노스키'의 번호는 현역+코치 시절 모두 16번이었고요.
마이너리그 내려간 사이 1995년 2월에 토네이도 딜리버리의 노모 선수가 계약금 200만 달러+최저연봉 10만 9000달러로 계약하고 데뷔해서 16번을 되찾을 기회는 완전히 차단되었죠.
투수코치 말고 선수로 노모 이전에 16번을 사용한 선수는 직장인은 아주 싫어하는 '릭 먼데이'였는데요.
이분이 은퇴하고 다저스 라디오 중계나 가르시아파라와 분석프로그램도 진행하셨고, 다저스 팬뿐만 아니라 미국에선 올드팬들이 좋아하는 분입니다.
대학시절엔 레지 잭슨의 1년 선배였고, 잭슨보다 더 좋은 성적과 기량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요.
잭슨과 함께 모교의 첫 대학야구 월드시리즈 우승도 하게 됩니다.(1965년)
릭 먼데이 이야기를 하려면, 토미 라소다 감독이 등장해야 하기에 짧게 이야기하자면, 감독으로선 대단하지만 선수로는 평범하지도 못한 토미 라소다였는데요.
토미 라소다는 1960년에 은퇴를 하고 바로 다저스 스카우트로 채용됩니다.
라소다를 스카우트로 채용한 단장이 '알 캄파니스'인데, 식사+돔+야구 잘하는 으린 션슈, 좋아하시는 총재님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있죠.
선동열이 그때 '다저스 왔으면 무조건 10승은 한다고' 총재님에게 이야기했던 단장이 '알 캄파니스'고요.
스카우트 시절 토미 라소다가 눈독 들이고 좋아해서 2만 달러의 계약금으로 계약하려 했던 선수가 '릭 먼데이'였는데, 프로행 대신 장학금을 받고 대학으로 향했고,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창단 첫 우승을 하게 됩니다.
릭 먼데이는 1965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 지명을 받았는데, 1966년 전체 1번 선수가 7만 5천 달러, 전체 2번이었던 레지 잭슨이 8만 달러였으니 '릭 먼데이'의 아마추어 시절 성적과 기대치가 얼마나 큰 선수였는지 대략은 짐작해 볼 수 있겠고요.
1965년이 토미 라소다의 마지막 스카우트 업무 시절이었는데요. 이때 다저스의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톰 시버'를 알아보고 보고서를 작성해서 계약하자고 했는데, 계약금 최소 5만 달러를 생각하던 톰 시버였는데 다저스는 10라운드 지명에 1만 달러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고, 톰 시버는 바로 히드라를 시전했습니다.
드래프트 1년 재수해서 1966년 애틀랜타의 흡족을 제안에 계약을 했지만, 이번엔 사무국에서 제동을 걸었죠(대학 시즌 종료 전에 계약해서 규정 위반)
그래서 CLE, PHL, NYM 3팀이 추첨해서 당첨된 팀이 메츠였고, 톰 시버는 이후 메츠+메이저리그 레전드가 됐죠.
토미 라소다의 톰 시버에 대한 스카우트 리포트인데요.
패스트볼에 73점을 줬고, 커브는 63점으로 평가했는데 지도하면 향상 가능성이 있다고 썼습니다.
스카우터들은 리포트에 점수를 20~80으로 작성하죠.
70~80, 평균 보다 훨씬 높은 레벨
60, 평균 이상
50, 평균(메이저 리그 기준)
40, 평균을 밑돔
20~30, 평균 보다 훨씬 낮은 레벨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을 50점 기준으로 보고, 10점 구간별로 위아래의 차이+편차를 나타내는데, 평균 분포에서 위아래 3구간으로만 진행해서 샘플의 표준편차를 99.7%까지 적용하므로 0~100점이 아닌 20~80점을 사용한다고 하죠.
시간이 지나 토미 라소다는 다저스의 24대 감독이 되고, 릭 먼데이는 오클랜드를 거쳐 컵스에서 뛰고 있었는데, 인연이 되려면 어떻게든 된다고 1976년 4월 25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있었는데요.
4회 말로 넘어가던 이닝 교대시에 좌익수 쪽, 펜스를 넘어 2명이 경기장으로 뛰어듭니다.
릭 먼데이는 캐치볼을 하려다 난입한 관중을 보게 됐는데, 처음엔 동료 좌익수와 악수를 하려는 흔한 난입 팬으로 봤는데 좌익수를 그냥 지나치고 주머니 더듬는 것을 보곤 칼이나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약에 취한 관중은 잘 접어두었던 성조기를 꺼내 운동장에 펼치고는 라이터 기름을(휘발유) 부어 성조기를 불에 태우려 했습니다.
뒤에서 다가온 릭 먼데이가 젖은 깃발을 낚아채서 성조기 방화를 막은 일이 있었는데요.
5회 타석에 들어선 릭 먼데이에겐 다저 스타디움 전광판에 그레이트 플레이라는 문구로 행동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은 일이 있었고요. (2명은 모두 성인 같지만 부자관계이고 아들은 11살이었습니다)
릭 먼데이가 고교 졸업 시절에도 다저스에 입단시키고 싶어 했던 토미 라소다였죠.
다저스는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로 데려오게 되고, 릭 먼데이는 이후 다저스에서 라소다 감독과 함께 우승반지도 끼고 방송도 하게 되는 운명이었고요.
성조기 사건이 있던 해가 미국 건국 200주년의 해이기도 했고, 베트남 전쟁이 끝난 다음 해라 미국이 아니어도 국뽕이 차오를 만한 행동이라 팬들이 좋아하게 됐고요.
릭 먼데이가 베트남전 참전은 안 했지만 대학시절 해병대 ROTC였고 그때 재향 군인 병원에서 참전했던 수많은 부상 병사들을 봐왔기에 차마 성조기 불태우는 것을 더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조기는 본인이 보관하고 있는데 어느 돈 많은 수집가에게서 100만 달러 판매 제의도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고 합니다.
블루 다저스 이야기도 나왔으니 한국에도 정말 푸른 피인지 피검사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듯, 토미 라소다+빈 스컬리의 어록들이 생각나네요.
The saddest day of the year is the day baseball season ends.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
I bleed Dodger blue and when I die, I'm going to the big Dodger in the sky.
내 혈관에는 다저 블루의 피가 흐른다. 내가 죽으면 하늘에 있는 더 큰 다저 블루로 갈 것이다.
The difference between the impossible and the possible lies in a person's determination.
불가능과 가능의 차이는 개인의 결단력에 있다.
No matter how good you are, you're going to lose one-third of your games.
No matter how bad you are, you're going to win one-third of your games.
It's the other third that makes the difference.
당신이 아무리 잘해도 게임의 3분의 1은 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못하더라도 게임의 3분의 1은 이길 것입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다른 3분의 1입니다.
그리고 빈 스컬리 선생님이 매일 하던 멘트는 모르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하는 문구죠.
Have a nice evening to all of you wherever you are
여러분 어디에 있든 모두 기분 좋은 좋은 저녁 되세요.
그리고 중독성 강한, 이제 다저스의 야구 경기를 함께할 시간입니다 또는 다저스 야구의 시간입니다.
It's time for Dodger baseball
아 그리고 토미 라소다 감독이 1994년 스프링캠프에서 박찬호 선수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다저스를 위해 던질 것이다, 다저스 마운드에서 투구할 것이다'라는 다짐+주문이 기억나네요.
다시 배팅 장갑 이야기로 가면 2022년 정규 시즌이 끝나고 나온 통계가 있는데, 선수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배팅 장갑 1위는 '프랭클린'이었고요. (미국 언론의 기사나 야구 장비 리뷰하는 북미 유투버들도 모두 프랭클린을 최고로 뽑더군요)
방망이의 경우 1위는 '빅터스'였습니다.(2년 연속)
루이스빌 슬러거의 160년이 넘는 전통+명성을 단기간에 넘어선 시장이라 좀 놀랐고요.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의 토박이 출신 친구 둘이서 차고에서 열정으로 창업한 빅터스 스포츠고요.
브라이스 하퍼가 시즌이나 2018년 홈런 더비 우승에 사용한 것도 도움이 됐고, 작년엔 자신들이 만든 방망이로 같은 주의 필라델피아 선수들이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해서 더 기뻤다고 하는데, 2012년 힘들었던 출발 시기에 비하면 지금은 MLB의 프리미어 배트 제조업체로 성장해서 직원이 50명 정도 되고 1년에 7만 자루를 만든다고 합니다.
메이저리그 배팅 장갑 1위 업체 프랭클린의(Franklin Sports) 창업주는 '어빙 프랭클린'인데요.
이분이 1918년생이신데 신발 공장에서 일하다가 피혁+폐가죽 사업을 하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진로를 바꾸게 되고 사업을 물려받아 나중엔 장갑 제조를 시작하신 분입니다.
1983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어빙 프랭클린은 배팅 장갑을 그냥 만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상품의 모델도 되고 성능을 보증해 줄 만한 인지도와 인기를 겸비한 선수를 내세우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시대의 인기스타 마이크 슈미트와 스폰서 계약을 맺게 되고, 마이크 슈미트 선수도 착용만 하는 것이 아닌 제품 디자인이나 사용 후기와 함께 보안할 부분 등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보완을 하게 되고, 필리스 동료나 친한 선수들을 연결해서 30명의 선수들이 계약을 맺게 되고요.
마이크 슈미트가 디자인에 참여한 제품은 사용 후기도 좋고, 인기도 있어 지금도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이 롱런하는 제품이고, 캠프 기간부터 시즌 말미까지 필요하면 더 보내주지만 선수 1인 평균 80켤레의 배팅 장갑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빙 프랭클린의 노력으로 1988년엔 메이저리그 배팅 장갑의 80%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그때 사무국으로부터 공식 지정업체 제안을 받게 되고 계약을 해서 윌슨=글러브, 롤링스=공, 루이스빌 슬러거=방망이 처럼 프랭클린 배팅 장갑도 공식 공급업체 지위를 받게 됐고요.
약 때문에 미움을 받는 빅맥이지만 프랭클린 배팅 장갑과 얽힌 일화도 있죠.
1998년 홈런 레이스 시절 프랭클린을 사용하던 빅맥이었는데 나이키에서 100만 달러 제안을 했지만, 보장계약 1년 남은 연봉도 포기하고 팀을 위해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데 쓰라는 빅맥의 의리는 그때도 같았기에 거절한 일화도 기억납니다.
1998년 빅맥이 프랭클린에서 받은 용품 후원 말고, 성적에 따른 홍보효과나 인센티브 빼고, 연간 순수 계약 금액은 5천 달러였습니다. 에계 겨우 5천 달러야 하실 수도 있지만...
유명한 야구 집안 출신+맨손 타격보단 염소의 저주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17년 경력 내내 맨손 타격을 했던 '모이세스 알루'를 기억하실 텐데요.
1990년 데뷔했던 알루도 선수 생활 초기에 장갑 후원 계약을 맺었는데, 장갑을 사용한 적이 없고, 대신 해당 브랜드의 손목 밴드만 착용하고 경기를 뛰었죠.
그런데 사업하는 사람들을 얕잡아보면 안 됐던 것이 타석의 모습을 체크했고, 2천 달러를 받으며 계약 해지가 됐다고 했으니 1990년대의 맥시멈은 빅맥의 5천 달러 정도였다고 봅니다.
근데 프랭클린의 장갑은 야구 장갑으로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었고요.
6.25 전쟁에서 미군 기관총 사수 장갑이나 동계용 장갑으로 먼저 들어왔습니다. 전쟁 나면 공업+상업 시설에서 군사용품+무기 제조 많이들 했었죠.
기관총 사수 장갑은 태평양 전쟁의 영웅 '존 바실론'이 등장하는 '퍼시픽'에서도 없으면 어찌 되는지 자세히 알 수 있고, 영화 람보의 기관총 사격 모티브가 존 바실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존 바실론이 해병 1사단 소속이었죠. 6.25전쟁에서 인천 상륙작전이나 장진호 전투도 해병 1사단이었는데요. 사단 마크 옆에 보시면 숫자 안에 '과달카날'이라고 새겨 넣었는데, ~카더라에 의하면 한때는 인천 혹은 장진호도 작게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작은 목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 시기 미국도 민간기업 공장을 전환해서 많은 군사용품들을 찍어냈어죠.
어떤 나라는 반성도 없고 배상도 없이 모르쇠지만, 독일은 총리들도 참배+헌화+방문들을 곧잘 하고 국가+기업 차원에서도 배상이나 사죄가 있었죠. (전부는 아니라지만)
많은 명품들이 있는 독일이지만 1941년부터 상업 용품 생산 금지가 되고 낙지의 군사용품을 만들던 회사가 많은데 재미 삼아 올려봅니다.
휴고보스와 아디다스는 업태 변경을 한 셈이어서 한쪽은 베어링을 아디다스 공장은 그 유명한 판처슈렉 생산공장의 하나였고요.
오스람과 루프트한자는 친위대 수용소와 연결된 강제 노역도 했었고, 니베아는 인종차별 괴롭힘도 힘들었을 텐데 공습 피해도 봤습니다.
많은 미국 기업이 독일에 지사가 있었는데 전쟁 끝나고 미군+연합군 폭격으로 인해 입은 보상을 받기 위해 소송도 발생했었고,
콜라가 독일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하죠.
전쟁 발발하고 지금 러시아처럼 제재로 인해 콜라가 생산이 중단돼서 독일인 지사장이 개발하게 된 것이 환타의 시작이었고요.
IBM이 개발한 천공카드는 당시 미국에서도 인구조사+통계에 사용하긴 했는데, 낙지는 유대인 관리에 사용을 했고, 문제는 미국인 사장이 직접 판매를 하고 미대 낙방생에게 감사 메달을 받은 일이 나중에 알려지게 됐었죠.
전쟁이 아이러니한 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기억나는 맨손 타자 정리 조금 해보면 맨손 괴수 이미지의 '게레로'나 '리틀 조' 선생님도 게임에선 맨손 타격을 하지만 배팅 장갑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력에서 맨손 타격을 했지만 물집이나 손바닥 갈라짐 같은 통증 때문에 간혹 장갑을 사용하기도 했었고요.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는 밀워키 크레이그 카운셀 감독도 독특한 3미터 타격과 맨손을 생각나게 하지만 장갑을 사용했었습니다.( 이젠 프랜차이즈 기록을 600승대로 올려놓았네요)
수비가 좋았던 '마크 그레이스'도 맨손 기억이 강하긴 하지만 시카고의 혹독한 3~4월 추위 때문에 손이 너무 시려서 초봄에는 어쩔 수 없이 배팅 장갑을 사용했었고요.
10대 시절부터 굳은살 단련을 시작했던 포사다는 항상 맨손이었고, 현역에서 카펜터 선수가 가장 오랜 기간 맨손 타격 선수네요.
카펜터는 어린 시절부터 배팅 장갑 사용을 안 했던 선수입니다.
대학시절 추위 때문에 몇 번 사용했었다고 했는데, 메이저리그에선 데뷔 시기부터 맨손으로 기억하고, 성적이 점점 떨어지다 2020년은 타율 .186로 마쳤었죠. 그래서 2021년 초반엔 시카고 리글리필드만큼 봄에 추운 부시 스타디움이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인터뷰가 기억나네요.
맨손 타격 선수는 아니었지만 홈런 치면 배팅 장갑을 관중석에 던져주던 루틴의 션 그린도 기억나는데 가끔 영화보다 '에릭 바나' 나오면 이상하게 션 그린이 생각납니다.
그린은 좋은 성적을 기록하던 시즌에도(2001년 49홈런) 유대교 욤 키푸르 기간에 종교적 신념에 따라 결장을 했기에 어쩌면 기록할 수도 있던 50홈런 기록을 못했던 아쉬움이 있는데, 다저스의 선배 샌디 쿠팩스도 1965년 월드 시리즈에서 1차전 경기 날짜가 욤 키푸르 기간이어서 다음날 등판한 일도 있었습니다.
3번의 리그 타격왕과(3번째는 37세 시즌) MVP도 수상했던 '조지 브렛'은 시대가 변해서 요즘 같은 시대엔 보정이 없다면 오해를 살만한 마초 냄새 가득한 대답도 생각나네요.
폭스 스포츠에서 2021년 5월에 나온 기사가 있는데, 기사 작성 전까지 695명의 선수가 1타석이라도 타석에 들어섰는데 딱 11명의 선수만이 맨손 타격을 했었다고 합니다.
기자가 몇 명의 선수들에게 연락해 맨손 타격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팀 로카스트로'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사용했는데 대학에 갔더니맨손 타격하는 선배나 친구들이 있었다는군요. 그래서 본인도 젊은 신입생으로서 그냥 그들처럼 맨손 타격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카일 터커'의 경우엔 고등학교 1학년 시절까진 사용했고, 어느 날 배팅 장갑이 찢어졌는데 맨손 타격을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한동안 잘 쳐서 사러 가지 않았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고 하고요.
'조이 웬들'은 간단한 이유인데 맨손으로 방망이를 잡는 느낌이 더 좋다고 하면서 반문도 하네요. (솔직히 제가 볼 때는 배팅 글러브를 왜 껴야 하나요? 이게 제 질문입니다라고...)
'윌 마이어스'는 아마추어 시절 기대치답게 (2009년 드래프트 KC 3라운드-계약금 200만 달러) 중학교 시절 이미 나이키에서 장갑을 후원해 줬는데 딱 1경기만 사용해 봤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하고요.
'오스틴 헤이즈'의 경우엔 맨손 타격이 좋아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엔 정말 빠른 선수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출루하면 열에 아홉은 도루를 했는데, 그 결과 장갑이 자주 찢어지게 됐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배팅 장갑을 구매해야 해서 맨손 타격을 하게 됐다고 하네요. (엄마는 계속 사주려고 하셨지만 본인의 선택으로 맨손 타격을 했는데 속 깊은 아들이었네요)
가족의 사연으로 '펠리페 리베로'에서 누나인지 여동생인지 가족과 같은 성으로 맞추려 '바스케스'로 개명했던 펠리페 바스케스가 2021년 8월에 2~4년 형을 받았었죠. 시간이 빨라 이번 8월에 가석방 심사를 통과하면 출소할 수도 있는데요.
장갑 이야기하다 생각난 인물 중에 펠리페 바스케스와 비슷한 선수가 생각났는데, 메이저리그 4팀과 일본에서도 뛰었던 '멜 홀'이란 선수가 있었습니다.(풀네임:멜빈 홀)
이 사람이 맨손 타격을 잠깐 하던 클리블랜드 시절에는 '장갑은 여성용'이라는 말을 했던 선수인데, 뛰어난 성적은 아닌데 천방지축이 야시엘 푸이그를 넘는 선수였습니다.
양키스 시절이던 1990년 시즌엔 성적이 시원치 않아 '스텀프 메릴' 감독이 좌완 선발이면 라인업 제외도 했었는데 그런 기용에 불만을 품고 감독실 문 경첩이 떨어지게 소란을 피운 적도 있고, 트레이드 요청을 했지만 푸이그와 같은 외면으로 원하는 팀은 없었고요.
본인 실력은 생각 않고,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다고 생각해서 신인 '버니 윌리엄스'를 괴롭힌 일화도 있습니다. (양키스 팬들에게 사랑받게 되는 '버니 윌림엄스'는 1991년 7월 7일 데뷔)
본인과 반대로 조용하면서 성적도 내기 시작한 버니 윌리엄스를 보고 '밤비'라고 불렀는데 초롱초롱한 윌리엄스 눈망울 매력을 알아 봐준 것은 고마운데, 매력 포인트로 보고 부른 것이 아닌 그냥 눈이 크다는 조롱+놀림의 의미로 불렀고, 버니 윌리엄스의 라커룸엔 넌 성장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름표에 '미스터 제로'라는 이름표를 달기도 하며 괴롭혔는데, 나이 처먹고 장난도 한두 번이지 이게 심해져서 나중엔 코치진+프런트가 개입하기도 했고, 1992년 양키스 감독을 맡게 되는 벅 쇼월터가 감독실 문을 '멜 홀'이 부수던 1990년엔 34살로 양키스 코치로 있었습니다.
그런 미치광이 선수들을 젊은 시절부터 많이 봐서 지금 같은 선수단 관리를 하는 감독으로 지내지 않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고요.
'멜 홀'이 31살이던 1992년 5월 16일(양키스 소속의 마지막 해) 경기 전에 '올드 타이머 데이' 이벤트 게임이 있었습니다.
벅 쇼월터는 메이저리그에서 뛰진 못했지만 드래프트된 팀도 양키스였고 20대에 빠른 은퇴를 하고 바로 양키스 마이너리그 감독을 거쳐 메이저리그 코치+감독을 하게 된 사람인데 이런 쇼월터 앞에서 '멜 홀'은 올드 타이머 데이에 참석한 양키스 선배들을 두고 이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누구지?(이 노인네들은 뭐야?) 이런 발언을 합니다.
그때 쇼월터는 생각했다고 하죠 여기 있으면(NYY) 안되는 선수라고... (아! 이 ○○는 안 되겠네 이런 마음이었을 듯)
'멜 홀'은 시즌 끝나고 FA가 되었는데 불러주는 팀이 없어 일본으로 가서 3년을 뛰고(롯데, 주니치) 1996년 돌아와 스프링 캠프 기간에 자이언츠와 계약하고 복귀했는데 이때도 입을 텁니다.(가끔 선발+주로 대타)
팀과 야구에서 대타의 역할은 물론 중요하지만 본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이죠. 발언에 대해 자이언츠는 곧 화답합니다. (5월 22일 방출) 이후 6월에 화이트삭스와 계약했는데 마이너리그에서 4경기를 뛰고 계약 13일 만에 다시 방출되고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이 끝나게 됩니다.
'멜 홀'의 범죄 시기로 돌아가 보면 양키스의 규율+전통은 존중하지 않았지만, 양키스 프리미엄 누리기는 좋아해서 그때도 아주 비싼 트럼프 타워에 거주하며, 밤이슬+여자를 좋아해서 밤에 활동을 많이 했는데 남에게 보여주기+과시용으로 하룻밤 경호에 1,400달러 보디가드를 대동하며 놀기도 좋아했던 선수였는데요.
그러던 시기에 경기장 외야에 3대가 양키스 팬인 여학생이 관람을 왔었고 야구공을 던져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학생이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할아버지에게 자랑을 했고 싸인도 받고 싶었던 학생이 연락처와 사연을 적어 편지를 보냈는데 2주 후에 학생이 집에 없는 사이 '멜 홀'이 전화를 걸게 되고요.
부모님은 양키스 선수가 직접 전화를 걸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장난인 줄 알았는데, 본인이 오늘 경기 타석에 들어서면 초구를 보내고 나서 홈플레이트를 방망이로 3번 두드린다는 약속을 했는데 온 가족이 저녁에 모여 양키스 경기를 보다 깜짝 놀라게 됩니다. (진짜였던 거죠)
뭐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후 학생 집에도 드나들게 되고 집에서 잠도 자고 학생에겐 다이아 목걸이, 본인 번호나 이니셜을 새긴 귀금속, 면허도 없는 15세 학생에게 자동차 선물 등으로 환심을 사고 여학생을 가스라이팅+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묘한 대상으로 만들게 되고요.
강제로 관계도 시작되고 싫다고 하면 18살 성인이 되면 결혼한다는 당근으로 무력화시키기도 하며, 부모가 소파에 있는데도...라던가 고래 곧휴도 올라오는 이곳이어도 쓰기가 싫은 미친 짓이 정말 많습니다.
'멜 홀'은 은퇴하고 텍사스에서 어린이 농구코치나 여학생 소프트볼 코치 등의 자원봉사도 했었는데요.
시간이 지나 2007년 '멜 홀'에게 1997년 castle폭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그래서 법 집행기관에선 멜 홀의 은퇴 이후 코치를 했던 10년간의 행적을 조사하게 되고 결국 법정에 서게 됩니다.
'멜 홀'은 거짓+과장 증언만을 토대로 한 것이라며 맞섰지만 견찰+검새가 아닌 경찰+검사의 설득으로 증언에 나선 피해자들과
위의 양키스 소녀 같은 피해자가 받았던 러브레터 등의 증거자료가 속속 등장했고, 5건의 재판을 받습니다. (14세 미만은 3건, 가장 어린 나이는 10살)
2009년 재판에서 형량의 절반을 복역할 때까지 가석방 심사가 없는 20~45년 형을 받고 복역 중입니다.
가석방 심사가 열리려면 2031년 11월이 돼야 하는데 '멜 홀'은 1960년 생입니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많은 아동 성○○범은 피해자 본인이 실제 나이보다 더 성숙한 어른처럼 느끼도록 하면서(분위기+가스라이팅) 자신은 젊게 또는 친구 또래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는데 멜 홀도 비슷했고 돈이 있던 양키스 시기엔 선물공세가 추가됐던 것 같습니다.
칙칙한 퉤퉤 이야기했으니 분위기 전환 삼아 위에서 '릭 먼데이'의 대학시절 챔피언 이야기했었죠.
미래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만날 수도 있는 선수들이 등장하는 NCAA 월드시리즈는 매년 6월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개최되는데요.(23년은 6월 16일~26일)
대회는 1947년부터 시작됐는데 이전에는 캔자스시티에서 열렸었고, 1950년부터는 '오마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판매 부진으로 넘버링 2개로 중단되었지만 과거엔 게임도 있었고, 07의 표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의 '제러드 위버'였고요.
오마하에서 NCAA 월드시리즈가 열리는 이유는, 상대한 선수 중에 볼이 너무 빨라 칠 수 없었다고 했던 '사첼 페이지'도 있고, 1927년엔 베이비 루스+루 게릭 선수와도 경기를 해봤던 '조니 로젠블랫'이라는 세미프로까지 뛴 선수가 있었습니다.
야구를 너무 사랑+좋아했던 이분이 은퇴하고 오마하에 살면서 1940년대 초반 지역 사업가들과 함께 트리플-A 팀을 유치하려고 했었는데요.
오마하에 있던 야구장 루크 파크는 1936년 화재로 없어졌고 적절한 경기장이 없어서 유치에 실패하게 됩니다.
일반인 신분으론 한계가 있으니 이분이 시의원에 출마해서 당선이 되고, 지역 사업가와 시민, 네브래스카 출신의 '리치 애시번' 같은 선수들의 도움으로 결국 경기장을 건설하게 됩니다.
1947년 '오마하 시립 운동장'으로 개장해서 캔자스시티에서 열리던 대학야구 결승전을 유치해서 1950년부터 개최하고 있는데, '조니 로젠블랫'은 마이너리그 팀도 오마하에 유치하고, 1954년엔 오마하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7년의 시장직을 마치고 3년이 지나 1964년 6월 28일엔 지역을 위한 공로+공헌으로 야구장 이름도 시립 운동장에서 로젠블랫 스타디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시민 여론과 시의회의 선물)
1950년 첫 대회 유치를 했고, 연장 계약을 이어가다 2008년 계약이 2년 남은 상황에서 25년 연장 계약으로 늘려 최소 2035년까지 유치를 확정해놓은 오마하입니다. (없는 전통도 만들기 좋아하는 미국이라 큰 이변이 없으면 앞으로도(미래) 계속 이어지겠죠)
오마하를 연고로 사행했던, 사용하고 있는 마이너리그 팀들은 3팀인데, 오마하 로얄스에서 신구장을 건설하고 이사하며 '스톰 체이서스'로 바뀌었지만, 오마하 로얄스에서 뛰다 데뷔했던 잭 그레인키는 20살 시절이나 지금이나 인상에 큰 변화는 없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학야구 월드 시리즈보단 오마하의 특산품은 내가 순댓국이나 설렁탕을 사드리고 싶어도 함께 식사를 하려면 큰돈을 내야 하는 워렌버핏 영감님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1958년 31,500달러에 오마하에 구입한 집에 살고 있는 영감님이신데요.
주식 관심이나 경제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6살 시절 6개들이 코카콜라 구입 후에 낱개로 재판매해서 돈을 벌었다는 워렌 버핏 이야기도 듣게 되는데, 사실 이분은 '펩시파'였죠.
펩시콜라에 체리를 첨가해서 마셨는데, 1982년엔 다이어트 콜라를 출시했고 1986년 체리 콜라를 개발 중이던 코카콜라 회장이 그 사연을 알게 되고 만들었던 콜라를 보내줬는데 입맛에 딱이었는지 그때부터 코카콜라로 바꿨고,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 초대장에도 펩시에서 콜라로 바꿨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총에서 제공하는 음료로 코카콜라가 등장하기도 했던 기억이고요.
정확하진 않은데 1950년대에 워렌 버핏이 어느 사업가에게 버핏 본인이었나 아니면 주식이었나 1만 달러인가 투자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무실도 제시간에 안 나오는 워렌 버핏이 못 미더워 투자를 안 했는데, 만일 투자했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현재 9천~1억 달러가 됐을 거란 이야기가 생각나네요.ㅋ
그리고 버크셔 해서웨이는 버핏이 펩시에서 코카콜라로 돌아선 1986년에 코카콜라 주식을 매수한 것이 아니라 10년도 더지나 1998년인가 코카콜라 주식 가격이 1/4로 떨어졌을 때 대량 매수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10% 가까이 보유하고 있다 하죠.
그리고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6월 개최되는 NCAA 월드시리즈가 있다면 8월엔 럭무럭무 잼민이 친구들의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가 있죠.
NCAA처럼 특정 지역,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즈포트에서 열리는데요.
전 세계에 등록된 리틀야구팀이 3만 팀이 넘는다고 하는데, 1938년에 석유회사에서 일하던 '칼 E. 스토츠'라는 착한 삼촌이 조카+조카의 친구들과 캐치볼 하다가 아이들 체구+체력에 맞는 야구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야구하기 좋은 거리나 마운드 높이 같은 리틀야구장 규격을 만들게 되고, 좋은 반응과 함께 리틀 야구팀도 창단되게 되고요.
그렇게 시작된 동네가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즈포트 였고, 1946년까지 '칼 E. 스토츠'가 생각한 데로 리그에 참가 또는 창단한 팀은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에만 12개가 존재했고, 1947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메인 경기장 이름은 '하워드 J. 라메이드 스타디움' 이라고 하는데요. (혹은 하워드 라마드 경기장)
'칼 E. 스토츠'가 처음 시작할 때는 지역 고등학교에서 의자를 빌려다 관중석으로 사용하고 했는데, 지역에 '디트릭 라메이드'가 창간한 인기 좋은 전국 간행물 '그릿 퍼블리싱'이라는 주간지 신문 회사가 있었는데요.
이 '그릿'(Grit)은 일간지는 아니고 우리나라 일요신문처럼 최대 14면의 잡지+신문 성격으로 당시 일간지가 미치지 못하던 시골 위주의 지역에서는 인가가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하워드 J. 라메이드'는 그릿 퍼블리싱을 창간한 디트릭 라메이드의 아들로 부사장이었는데 이 사람이 기부한 자금으로 지금의 부지를 매입하고 야구장을 건설해서 1959년 개장하게 됩니다.
개장 당시엔 목재 야구장이었고 이름도 '메모리얼 필드'였는데 1968년 철골과 콘크리트로 증개축 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끝-
산타나는 소문 듣고 왔다 갔나요? 변신했네요.
회복하고 복귀했는데 뭔가 짠하면서도 뭉클한 그런 마음이 살짝 들더군요.
아프지 말어 올스타 게임에서 마이크 달고 나와서도 F○○○ X2 거리던 근성 있는 모습으로 뛰길...
재미들 보셨길 바라고요.
홍보 많이 하던데 생각나거나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고요.
더블 XP, 스텁 세일도 시작했습니다.
끝으로 공짜 카드 먹기 힘드네요.
5월에 수많은 팩에서 다이아 카드가 2~3장이었는데, 시즌 2 뽑기는 아예 꽝이네요.
4~5번 한 것 같은데 전부 좌측 3형제만 나오고, 시즌 2 처음에 세어봤을 때보다 지금은 다이아 1개 늘리고 실버는 하나 줄였더라고요. 무지성으로 누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이아 1개 더 늘어나는지 지켜봐야겠어요.
(IP보기클릭)106.101.***.***
(IP보기클릭)112.145.***.***
오! 직접 뛰기까지 하시는군요. 다치지 않게 뛰시길... | 23.06.06 12:46 | |
(IP보기클릭)210.179.***.***
(IP보기클릭)112.145.***.***
매우+아주 고맙습니다. | 23.06.06 12:47 | |
(IP보기클릭)125.142.***.***
(IP보기클릭)112.145.***.***
에이 많이들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이름 때문에 300이하 금지 or 리오넬 메시 드립 할까 하다 그냥^^ | 23.06.06 12:4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