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국민이 뭘 요구하느냐가 그것이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안 가면 죽습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한국당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아 선거 승리를 이끈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17일 자유한국당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이같이 쓴소리했다. 어렵더라도 역사와 국민이 요구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거다. “선거에서 결과가 좋게 나올 수도 있고, 시간이 부족해 결과가 안 좋게 나와도 정치적인 생명력은 생길 것“이라는 취지에서다.
보수를 기반으로 중도와 진보까지 아우르는 윤 전 장관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문재인정부의 국정운영까지 정국 전반에 대해 폭넓은 식견을 보여줬다.
그는 ‘보수 통합’과 관련해 “보수 야당이 합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2040세대의 지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느냐다. 한국당은 그걸 고민하는 거 같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선 “‘청와대 하수인’, ‘청와대 출장소’ 같은 모욕적 평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의회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고 직격했다. 다음은 윤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반환점을 돈 문 대통령에 조언을 한다면.
“민주주의라는 게 낭비가 많고 효율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그걸 생략하면 나중에 더 힘을 들여도 안 된다. 문 대통령이 ‘협치와 통합’을 강조했는데 실제론 반대로 했다. 의회정치 과정을 밟으면 자동으로 협치가 된다. 대통령이 더 적극적으로 야당에 다가가면 야당도 타협할 것 하고 양보할 거 하지 않겠나.”
―지난 5월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에게 고언했는데.
“문 대통령에게 ‘야당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전반기에는 강경투쟁을 하고 후반기에 가면 대안정당이 되겠다며 달라지는데 이걸 염두에 두고 너무 저놈들(한국당)이 죽일 놈이라 생각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 생각을 풀지 않으면 부담이 대통령에게 온다.(고언 이후 대통령이 좀 바뀌었는가)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뀌겠어요?”
―여당인 민주당은 어떤가.
“여당은 상충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는 대통령과 정부를 도와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해야 하는 역할, 또 하나는 입법부로서 대통령과 행정부 견제를 해야하는 거다. 하지만 대통령 의사를 무조건 추종하고 (대통령과 정부를 견제해야 할) 입법부 책무를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하수인’, ‘청와대 출장소’ 같은 모욕적 평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니까 안타깝다.(열린우리당 시절 ‘108번뇌’ 트라우마 때문인 것 같다) 민주 정당이 군대도 아니고 기업도 아니고. ‘108번뇌’는 특수한 경우였다. 민주 정당이란 게 시끄러운 게 자연스러운 거다.”
―제1야당인 한국당과 황교안 대표는 어떤가.
“황 대표는 생의 대부분을 검사로 활동했다. ‘검사동일체의 원칙’, ‘상명하복’이 철저하다.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평생을 살아서 가치관·사고방식·행동양식이 수직적으로 맞춰져 있는 것 같다. 황 대표가 평생 굳은 체질을 바꾸기까지 본인은 본인대로, 당은 당대로 괴로울 것이다. 더구나 한국당은 탄핵당한 정당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던 황 대표가 탄핵정당 대표로 왔다.”
―그럼 한국당은 어떻게 해야 하나.
“본인들이야 억울한 심정이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헌법을 어긴 게 가장 큰 죄다. 이런 상황에서 제1야당 대표가 돼서 리더십을 발휘하기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정치상황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아 어려울 거다. 지금은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뭔지 생각해야 한다. 국민이 뭘 요구하느냐가 그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안 가면 죽는다. 과감하게 가면 국민이 평가해준다는 거다.(환골탈태하라는 얘기인가) 한국당이 환골탈태를 약속한 건 횟수도 기억 안 날 정도로 많다. 무슨 종기도 안 짼 거 같이 하면서 환골탈태한다고 외쳐도 이제 국민이 안 믿는다.”
―지난번 보수통합 가능성에 긍정적이던데, 지금도 유효한가.
“요새 보니까 황 대표가 통합 생각이 많이 있는 것 같진 않다. 검찰이 정권실세들의 비리와 관련한 수사를 시작했다. 여러 개가 줄줄이 터질 거란 얘기가 있다. 이런 게 몇 건 더 나온다 치면 ‘우리가 굳이 다른 세력하고 통합 안 해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보수도 각개약진하는가) 제3지대가 열려 있긴 하지만 군소세력들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여러 세력을 누군가 묶었다 쳐도 통합이 이뤄질 때 다수 국민이 높이 평가하겠나. 보수 야당이 합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2040지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느냐다. 한국당은 그걸 고민하는 거 같지 않다.”
―안철수 전 대표가 국민의당 창당할 때 함께 했는데 ‘안철수 변수’는 어떻게 보나.
“지금 호남에도 기대할 수 없고 수도권에서 돌풍도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안 돌아오는 것 아니겠나. 여의치 않으면 총선이 지나 들어오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거 DJ(김대중 전 대통령)나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국내에 있든 국외에 있든 확고한 지지기반이 있어 언제 들어와도 자기 세력이 있었다. 안철수는 그게 안 되는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가겠다는 태도는 역동성이 좌지우지하는 한국 정치무대에선 힘들 수 있다.(안 전 대표는 어떤 사람인가) 온실에서 큰 화초 같은 사람이다. 세상을 모른다. 정치판에 들어와 고생 좀 한 게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거다.”
―각 당이 선거법 등으로 싸우지만 물밑에선 총선 준비가 한창이다.
“민주당은 여당이니까 여건이 좋다. 소리없이 미리 선거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한국당은 그 준비가 안 돼 있다. 최근 공천룰 만드는 위원회가 활동하던데 50% 바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로 충원하느냐가 중요하다. 선거 때마다 40% 이상 바꿨는데도 당이 전혀 안 바뀌었다. 가치관·사고방식이 똑같은 사람을 충원하니까 그렇다.(한국당이 박찬주 전 육군대장을 영입하려다가 역풍을 맞았는데) 요즘 유행어처럼 쓰는 게 ‘공감능력’인데 국민하고 공감할 능력이 전혀 안 되는 거다. 황 대표는 안보불안감을 불식시키고 국방태세를 튼튼히 하겠다는 상징으로 만들려고 했을 거라 본다. 그런 취지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국민 생각과 반대로 가는 거다. 민주정당 대표가 국민들로부터 공감능력 없다고 평가받는 건 치명적이다.”
―제16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 총선기획단장을 맡아 승리로 이끌었는데.
“(당시 이회창) 총재가 국민에게 약속한 게 ‘3김정치’ 청산이었다. 16대 총선 공천이 그 약속을 실현하는 첫 번째 경우였다. (이 총재에게) ‘야당은 (공천을) 양보다 질적으로 해야 한다. 구시대 정치에 대한 상징성이 강한 인물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없어 사람을 찾아올 겨를이 없었다. 총재에게 많은 사람들이 추천된 게 있길래 ‘만나보고 잘 판단해서 하시라’고 했지만 지금도 못내 아쉽다. 정말 자신 있게 좋은 사람 썼다는 장담은 못한다.”
―황 대표와 이 전 총재를 비교하는 사람도 있더라.
“황 대표와 비교는 (이 전 총재에게) 결례가 될지도 모른다. (황 대표가) 국무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을 했지만 커리어를 보는 것과 사람 됨됨이를 보는 건 다르다. 다만 두 분 다 법을 전공했고 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법을 전공한 분들인데, 정치에 적응하는 게 힘들다. 정치세계에는 버려서 얻는 게 있고 죽어서 사는 게 있다.(법을 전공한 정치인들은) 법률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으니 이게 용납이 안 된다. 이 총재는 여러 뛰어난 걸 갖췄지만 보편적 공감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조국 사태 때 문 대통령도 처음엔 ‘불법이 아니다’고 했지만 나중엔 ‘제도 내의 합법적 불공정에 대해 알았다’고 말했다. 이제 알았다는 얘긴가(싶었다).”
―문 대통령과 인연은.
“(제18대 대선 당시 도와달라고 해서) 두 시간 얘기를 해보니 사람이 민주적으로 보였다. 겸손하고 ‘뭘 모른다’고 정직하게 얘기하고, 박근혜 후보에 비해 훨씬 괜찮아 보였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내가 생각했던 문재인 맞아’ 하는 생각이 든다.(왜 그렇게 된 건가) 인상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봤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결국 지지하기 때문에 그게 자산이다. 하지만 ‘대통령 문재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통치의 책임을 진 대통령은 사람 좋다는 것만 가지곤 안 된다.(유능함을 얘기하는가) 물론이다. 유능함과 냉혹함이 있어야 한다. 권력자는 냉혹해야 된다.”
대담=김용출 정치부장, 정리=곽은산 기자 silver@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IP보기클릭)7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