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전북 익산으로 터를 옮겨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하는 가수 리아. 사진 에스아이케이알
요즘 핫하다는 유튜브의 콘텐츠는 바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주로 1980~1990년대 TV 콘텐츠들이 인기 있는데 덩달아 당시 인기를 얻었던 스타들의 근황도 궁금증이 높아졌다. 실제 최근 SBS의 유튜브 콘텐츠 ‘인기가요’(라 쓰고 애칭 ‘탑골가요’라 불림)에서는 당시 가수들의 앳된 모습이 많은 화제를 얻고 있다. 가수 임창정도 최근 인터뷰에서 “그 당시 시대를 앞서갔던 가수 양준일을 만나고 싶다”고 해 눈길을 끌었다.
많은 가수들이 그때와 진배없이 활약을 하고 있지만 소식이 뜸했던 이들도 있다. 1996년 빡빡 깎은 머리로 ‘개성’을 외치고 다녔던 가수 리아도 그중 하나다. 그는 1998년 나온 3집 앨범 ‘요조숙녀’의 애절한 타이틀곡 ‘눈물’로 큰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리아가 최근 관심을 받은 것은 지난해 말 갑자기 잘 살던 서울생활을 접고 전라북도 익산으로 전입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기 위한 것이라 예측했지만 그의 ‘큰 그림’은 훨씬 방대했다. 그는 서울과 지방을 잇는 하나의 큰 음악의 고리 그 중심에 서려하고 있었다.
“원래 처음 내려올 때는 ‘닭치고 음악하겠다’면서 닭도 키우고 음악도 하려고 했는데요. 현실상 지켜봐야 하거나 불가능한 부분도 있어서 당분간 정착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저는 단순히 ‘귀촌 라이프’를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니고요. 아직은 일을 할 나이고, 그 다른 방법을 찾는 거죠.”
리아의 집은 32대째 서울에서 살았다. 익산은 친척이나 연고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그의 남동생이 근방의 대학교를 다녀 조금 왔다갔다 했다는 정도다. 하지만 익산은 경남이나 전남처럼 지역색이 뚜렷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모든 게 두루 섞여있다. 철도도 여섯 개 노선이 교차돼 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익산에 있으면 서울도 1시간 반 남짓, 웬만한 지방도 다 두 시간 안에 밟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이 있었다.
지난해 말 전북 익산으로 터를 옮겨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하는 가수 리아. 사진 에스아이케이알
“아버지께서 산악인이셨어요. 그래서 5~10살 사이에 네팔에서 살았죠. 네팔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도 다니고 어울려서 놀고 했어요. 그때 대자연을 많이 접했죠. 사실 제가 자유로운 기질이 있어서 답답한 도시생활을 참지 못하는데 여태껏 어찌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차소리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익산에서는 나아지던 비염이 서울 오면 재발해요. 여러가지로 시골이 맞는 거죠.”
그가 고안했던 정착의 방법은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생산적 음악 공동체’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도시보다 훨씬 부담없이 차릴 수 있는 작업실이나 공연장 등의 환경을 통해 음악을 하고, 인근 지역의 여러 농산물 인프라를 이용해 협동농장 형태로 예술가들이 함께 부가가치도 만드는 터전이었다. 하지만 익산의 시스템은 아직 예술을 위해 귀촌을 하는 사람들까지는 돌보지 못했고 그는 군산이나 전주, 괴산 등 인근 지역에서 방법을 찾고 있다.
“아무래도 모든 것이 처음이니까 생각과 다른 부분도 있죠. 당연히 농사에는 경험이 없으니 당장 짓는다는 건 무리가 있었고요. 뮤지션들과 함께 영농법인을 만들어서 예술과 농사를 접목해보고 싶어요. 특히 익산이나 전주 지역은 국악을 하는 분들이 많아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의 뮤지션들이 나와요. K팝도 요즘 뜨긴 하지만 탄탄한 실력의 다른 장르 뮤지션들이 ‘월드뮤직’ 느낌으로 새로운 한국음악을 알릴 수 있다고 보거든요.”
일단 생각은 많지만 당장은 익산에 잘 적응하는데 노력하기로 했다. 동네의 농사일도 거들면서 어르신들과의 교류도 넓히고 마트나 시장도 다니면서 발도 넓혔다. 처음에는 짧은 머리의 리아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그를 기억하는 나이대의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알아봐주고, 아예 그를 모르는 할머니들은 시장에 다닐라치면 “미용실 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인심이 좋고, 흙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벌레도 안 무서워하는 그에게 시골은 딱 맞는 삶터다.
지난해 말 전북 익산으로 터를 옮겨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하는 가수 리아. 사진 에스아이케이알
“데뷔한지 22년이 됐는데요. 참 길었어요. 지난 10년 동안은 치유를 좀 받으려고 히말라야도 가고, 카레이싱도 해보고, 스쿠버다이빙 강사도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께서 심장수술을 하셔서 간병도 하고 중부대학교에 나가서 강의도 해봤죠. 결국 여러 경험을 통해 느낀 건, 제가 하는 음악이라는 건 참 감각적인 일이라 이론에 경도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빡빡머리로 등장했던 그때, 사람들은 리아를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하면서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짧은 머리였으며 심지어 어머니도 더 예전 시절 짧은 머리에 베레모를 쓰셨던 멋쟁이었다. 그의 데뷔곡 ‘개성’처럼 개성을 담아두지 않고 표출하고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려 하는 그의 본성이 그를 지금까지 이끌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은 어느 날, 그는 편안한 터전을 박차고 나와 스스로 고생길에 자신을 내던졌으며 그 결정에는 쿨하게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제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님이 직계 조상이세요. 그러한 개혁적인 피가 저희 집안에도 흐르나 봐요. 사실 내려왔을 때는 ‘지방에 와서 뭘 뜯어먹으려 하느냐’ ‘이효리 흉내내냐’ 말들이 많았어요. 어떨 때는 ‘내가 여기 왜 와있나’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뜻한 바를 계속 이뤄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긴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여유도 있거든요. 왜 12억원을 내고 서울 홍대 좁은 작업실에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죠. 암튼 새로운 땅을 개척한다는 생각으로 행복한 길을 닦아나갈 생각입니다.”
리아는 2008년 6집 이후 각종 프로젝트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참여 외에는 정규 앨범이 없었다. 최근에는 마음이 맞는 뮤지션들과 익산에 모여 퓨전밴드를 만들었다. 곧 그들의 음악은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나 록, 국악, EDM(일렉트로닉댄스뮤직) 그 어디에도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독특한 음악의 탄생이 기대된다. 익산에서 판을 벌렸다. 이제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제대로 한 번 놀아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