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4
그리고『바이오해저드』는 태어났다.
회사에 방치된 남자의 게임 개발도(開発道)|미카미 신지의 이력서
캡콤 시절에『바이오해저드』와『역전재판』시리즈 등 수많은 대히트 게임을 세상에 내놨고 현재도 Tango Gameworks 대표로 의욕작을 발표하는 미카미 신지 씨의
이력서를 깊이 파고듭니다.『바이오해저드』를 탄생시켰던 젊은 시절의 경험이나, 크리에이터로서 살아가기 위해 내린 결단의 배경을 들어보았습니다.
『바이오해저드』와『역전재판』시리즈를 비롯한 갖가지 대히트 게임을 만든 미카미 신지 (三上真司/ @shinji_mikami)씨.
캡콤 퇴직 후에 창업한 Tango Gameworks에서 후학 양성에 주력하면서 현재도『싸이코브레이크(The Evil Within)』시리즈 등의 개발에 종사하며
자신을「만드는 것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게임 크리에이터로서 전 세계에서 경의를 받은 미카미 씨를 현대의 성공자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 반생을 쫓아가면 만드는 것에 몰두하기 위한 것을 찾고 때로는 큰 절망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이면에는 지위도 안정성에도 과거의 히트작에도 속박될 수 없는 미카미 씨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미카미 신지 씨: Tango Gameworks(@tango_jpn) 대표, 총괄 프로듀서. 1965년생. 1990년에 도시샤 대학 상학부를 졸업 후 주식회사 캡콤 입사.『캡콤 퀴즈 하테나?의 대모험』『알라딘』등의 개발에 종사하며 1996년에는 디렉터로『바이오해저드』를 릴리스. 제4개발부 부장을 지낸 뒤, 2005년에 회사를 퇴직하고 독립한다. 2010년에 주식회사 Tango를 설립(동년 10월에 제니맥스 그룹 산하에 들어가 Tango Gameworks 스튜디오로 변경).『싸이코브레이크』시리즈를 세상에 내놓는다. 2015년「게임 러브 바르셀로나 2015」에서「명예상(Premio de Honor)」을 수상. 현재는 최신작인『Ghostwire:Tokyo』를 개발 중.
「동기와 소란 피워도 들키지 않았다」. 방치된 신인 시절
── 초대『바이오해저드』 *1에서 생각하는 것은「좀비 개가 창문으로 뛰어드는」장면 *2입니다.
그 장면은 결과적으로 아주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바이오해저드』에 등장하는 적은 좀비라 기본적으로 움직임이 느립니다.
그래서 유저에게「조금씩 두려워진다」라는 감각을 줄 수는 있지만 움찔할 순간적 놀래킴을 주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스피디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장치로서「좀비 개가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든다」라는 장면을 포함시켰습니다.
── 저의 게임 인생에서 가장 움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그 장면을 넣느라 복도 맵을 도중에 변경해서 스탭들은 꽤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맵을 바꾸면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받고, 모든 것을 조정하고 고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 타협하지 않고 고민을 거듭한 결과가 명작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군요. 이번에는 그러한 실적이나 일의 배경에 있는 미카미 씨의 행보를 보겠습니다.
커리어 그래프를 보면, 24세에 캡콤에 입사했을 때는 상승하고 있습니다만, 그 뒤는 한 번에 하강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좋아하고, 게임 제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캡콤에 입사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캡콤은 아케이드 게임 *3으로 성공하고 제가 입사한 1990년 전후에는『파이널 파이트』『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대히트작을 낳았습니다.
히트작을 낸 반면 이렇다 할 활약이 없던 시기도 있었고 경영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창업자인 현 회장 츠지모토 켄조 씨는 은행에 머리를 몇 차례나 숙이고, 집을 담보로 해서 겨우 자금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가짐에도 끌렸습니다.
그래서 입사 당시 꿈과 희망이 넘치더군요. 입사 2일째까지는.
── 2일째까지! 겨우 2일 뿐이라고요?
입사 3일째부터 상황이 변했어요. 상사는 저 포함 동기 입사자들을 사내 창고로 끌고가「여기서 게임 기획만 생각해라」라고만 말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출근해서 인사를 함과 동시에 그 날 과제를 받고 하루종일 기획만 생각하고, 일일보고서와 함께 제출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즉, 방치되었던거죠. 너무 방치돼서 동기들과 창고에서 큰 소란이나 피면서 지내본 적도 있지만 상사는 전혀 몰랐고, 아무말도 듣지 못했어요(웃음).
그 후 입사한지 몇 개월 지났을 무렵, 갑자기 디렉터 같은 포지션으로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래머 선배에게「저, 게임 만든 적 없는데, 어떻게 해야되죠?」라고 물어봤지만,「기획을 세워보면 좋겠어」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게임에 관한 것은 99.9%,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일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간 거예요.
기획을 만들어 가면「너무 재미없다」라는 반복뿐 ,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나날
── 신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이라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곳은 아무도 입사하고 싶지 않을겁니다(웃음).
장인의 세계에서는 흔히「선배의 등을 보고 훔친다」라고 하잖아요. 저를 둘러싼 환경이 바로 그랬습니다.
선배들은 실제로「너를 가르칠 시간 없어, 내 코가 석자야!」라고 했습니다.(웃음). 좌도 우도 모르는 신인에게는 분명 가혹한 환경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경험은 저 자신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의 신인 육성은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스킬을 가르치고 기초 다지기를 해서 발판을 마련하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쪽이 성취는 빨리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신인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완성된 기획을 선배에게 보이러 가도「재미없다」라고 반려될 뿐이었습니다.
30쪽짜리 기획서를 만들어 가도 선배는 처음 몇쪽밖에 보지 않고「너무 재미없다」라는 한마디였습니다.
뭐가 안 좋았는지 조언도 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재미가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오로지 그 반복이었습니다.
── 신인 시절의 가혹한 나날 속에서「회사 그만두자」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업계에 관심이 가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그런적은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는 환경은 내게는 더 좋았어요. 세세한 규칙도 없었고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선배를 흉내내면서 그럭저럭 형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처음 첫 게임을 만들었을 때에는 큰 충실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게임에서 우러나온「어설픈 느낌」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시 캡콤의 상사나 선배들은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 저의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선배 중 한명으로,『록맨』『마계촌』시리즈로 알려진 후지와라 토쿠로 씨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게임 제작을 한껏 가르쳐준 스승같은 존재입니다.
미카미 씨의 스승, 게임 디자이너 후지와라 토쿠로 씨(사진제공 : 후지와라 토쿠로 씨)
후지와라 씨 하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후지와라 씨의 조언을 받기 위해 시간을 내었던 날. 동기들이 제 직전 시간에 후지와라 씨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후지와라 씨의 대응은 저에게 대할 때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아주 친절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웃음).
그 광경을 본 순간 솔직히「저 녀석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잖아, 부럽다」라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후지와라 씨는「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라는 의미」를 저에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Tango Gameworks 스튜디오 내에 게시되어 있는 미카미 씨의 메시지
<업무를 받았을 때 먼저 그 의도를 생각하고 모르겠다면 묻고 그리고 잊지 않도록 메모하라>
게임 크리에이터인데도「바코드 배틀러」의 유행을 몰랐다
── 스승으로부터「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자」라는 소중함을 배워 점차 성장한다는 실감을 받은 미카미 씨입니다만,
커리어 그래프를 보면 26세, 입사 3년차 때「회사를 그만 두려고 했다」라고 하십니다. 이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3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4개의 타이틀을 세상에 내놓고 한 사람 몫은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좀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겠다」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조금 본궤도에 올라와 있었거든요.
입사 2~3년차 시절 당시 캡콤 사무실에서 1장
그때, 지인으로부터 권유를 받았습니다. 상대는 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선배로 이미 캡콤를 그만두고 도쿄의 작은 게임 회사로 이직했을때 였습니다.
「요새 뭐해? 지금 도쿄에서 재밌는거 만들고 있는데 보러올래?」라는 말을 들으면 신경이 쓰이잖아요.
저는 출장을 빙자하여 도쿄에 가서 선배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봤던 게 개발중인 3D게임 화면이었습니다.
── 지금은 3D게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는 아직 가능성이 모색되는 단계로 보일때였죠.
그렇습니다. 그때는 1992년으로 3D게임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개발 중인 화면을 보고「이런걸 만들 수 있는건가!」라는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저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제작중인 게임이 완성되면 캡콤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그 도쿄의 그 선배에게서「역시 오지 않는 게 좋겠어」「전례없는 3D게임을 만들려고 했는데, 회사 사정으로 노선이 바뀌었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 당장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미카미 씨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네요. 사실 이 무렵, 저는 다른 이유로도 회사를 그만 두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서「바코드 배틀러 *4」가 대유행 했다지만, 저는 그 존재를 몰랐거든요.
── 그립네요! 저도 초등학생 시절 빠져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다양한 제품의 패키지에서 바코드를 잘라 모으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정말 빠져 있었군요. 일대 트랜드가 되고, 어른들에게도 널리 인지되기 시작했는데, 저는 바코드 배틀러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게임을 만들고 있는 사람인데요. 굉장한 충격을 받아서「이래서는 프로 실격이구나」라고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 두려고 했지만, 후지와라 씨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일이 너무 바빠서 세상의 흐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볼 여유도 없었고요.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동료는「소련 붕괴」소식을 모른 채 계속 지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실린 큰 사건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죠.
자기자신의 일하는 방식과 업계전체에 눈을 돌리며「이대로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바이오해저드』대히트 후에 기다리던 프로듀서로서의 우울한 나날
── 1994년, 미카미 씨가 28세 되던 해 드디어『바이오해저드』의 제작이 시작됩니다.
1996년 발매 전후로 커리어 그래프는 상승과 하강을 격렬하게 반복하고 있군요.
바이오해저드에 참여하게 된 것은 후지와라 씨의 타진이 계기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캡콤은 영화 타이틀을 게임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1989년에는 이타미 주조 씨가 제작 총 지휘를 맡은 공포영화『스위트 홈』을 게임화 했었습니다.
상업적으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 만든 게임으로 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타이틀이었습니다.
후지와라 씨는「스위트 홈의 시스템을 살리고 재도전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저는「매우 관심 있습니다!」라고 해서 두말없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겁니다.
── 결과적으로『바이오해저드』는 누계 275만개*5를 팔았고 현재까지 계속 대히트 시리즈의 주춧돌이 되며, 헐리우드 영화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미카미 씨의 경력에 큰 전환기가 된 것이 아닌지요?
『바이오해저드』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세상에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솔직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굴하지 않고 크리에이티브에 매진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성공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 자신은 오로지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고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온 것 뿐입니다. 회사에서 출세하겠다 같은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어쨌든, 게임 제작을 위해 입사했기에 사람을 관리하는 입장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당시의 캡콤에는 계장 이상이 되면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고「그건 무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바이오해저드』 발매 후의 미카미 씨
── 게임 만드는 현장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그러나 1997년에는 미카미 씨는 회사의 의향으로 프로듀서가 되어 있습니다.
이때 커리어 그래프는 최저가 되어있군요.
프로듀서는 프로젝트 전체를 아우르는 자리이므로 항상 크리에이티브 현장에 몸을 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당시「게임 만들려고 열심히 해왔는데 왜 내가 프로듀서가 된거야!」라고 분개했어요.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기분같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때까지 손에 들었던 적도 없었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웃음).
프로듀서라는 제도는 당시 외부 컨설팅 펌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태어난 직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타이밍에 프로듀서가 되어 버린겁니다.
회사로서는 실력 있는 사람을 위로 올려서 체제를 강화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게임 제작을 할 수 없으면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오랜기간 우울한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미카미 씨는 과거에 게임 크리에이터에게 있어 30대가 역량을 가장 발휘할 때라고 말하셨었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30대는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으면서 유연한 발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젊음과 체력이 있습니다. 게임 제작은 체력이 상당히 요구되는 거죠.
가장 불타고 있는 그 30대에 저는 8년간 현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게임 크리에이터로서 절정이던 30대에 프로듀서였던 것이 너무 분했습니다.
── 그래도 미카미 씨가 게임 업계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기분이 잠깐 스쳐간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업계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존경하는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를 불러내「프로듀서 해라」라고 한 사람은 캡콤에서 전무 이사까지 지낸 오카모토 요시키 씨입니다.
오카모토 씨는 젊은 시절부터 정말 신세를 지고 있었고「이 사람에게는 못 당하지」라고 생각하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못 당한다. 전 캡콤 전무 이사, 게임 프로듀서 오카모토 요시키 씨 (사진 제공 : YouTube 채널「세계의 오카모토 요시키 Ch」에서)
그러고 보니 발령을 받은 때에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오카모토 씨의 방을 나오자 복도에는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상당히 골몰한 얼굴을 하고 있던거죠.
그 선배가「미카미, 어떻게 됐어?」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거예요.「프로듀서 하라고 합니다. 앞으로 게임 제작을 할 수 없다면 이제 회사 그만둘까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선배는 진지한 얼굴로「내가 회사에 미카미 의사를 전달할테니까 당분간 참아주지 않겠어?」라고 뜨겁게 말해주었고...
그렇게까지 말해주면, 저 역시 마음이 움직이잖아요. 내 의지는 아니지만 회사를 위해서 프로듀서로 열심히 해보자.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서 때마침 선배가 복도에 있던 것은 오카모토 씨가 계획한 시나리오였지 않았을까 합니다(웃음).
── 미카미 씨가「그만두겠다」라고 말할걸 예상하고, 그 선배를 일부러 복도에 대기시켜 놨다고요?
오카모토 씨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정말「사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니까.
그 전에는「미카미는 월급 안올려줘도 게임만 만들게 두면 계속 다니잖아」라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말이 너무 심하잖아!」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오카모토 씨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맞는말이기 때문이죠(웃음).
현장으로 돌아간 기쁨이 폭발. 드림팀과 함께 만들어 낸 걸작
── 2004년 캡콤의 자회사로 설립한 클로버 스튜디오에서, 미카미 씨는 걸작으로 유명한『바이오해저드 4』를 디렉션 했습니다.
그리고 커리어 그래프는 최고조. 이는 크리에이티브의 현장으로 돌아간 기쁨이 폭발했다는 건가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어쨌든 8년간 참고 있었으니까요.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회사에는 계속「현장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기회를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프로듀서를 맡길 인재를 키우고 대신 제가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현장에 돌아와서는 정말 즐거웠어요. 매일을 즐기면서 일했으며,『바이오해저드 4』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이오해저드 4」는 패미통 어워드 CESA GAME AWARDS 등을 수상하며 시리즈 최고 걸작으로 꼽는 유저도 많습니다. 성공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타이틀 자체가 고난의 길을 겪으며 완성된 작품입니다.
프로젝트는 제가 디렉션에 들어가기 2~3년 전부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만, 몇 번이나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참여한 것은「바이오해저드 4」를 발매하기까지 불과 1년.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던 적도 있었고, 당시 팀의 멤버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발 참여 첫날에 단단히 비전을 제시하고 한 달 후에는 게임의 주요 부분을 시험할「퍼스트 플레이어블」의 단계를,
3개월 후에는 통상 게임플레이를 시험할「버티컬 슬라이스」의 단계로 추진해 나갈 계획을 전했습니다.
보통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지만,「바이오해저드 4」의 팀은 이에 잘 응해주었습니다. 정말 우수한 멤버들이었습니다. 이른바 드림팀입니다.
저에게 이 팀 멤버와 파트너가 된 것은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 이후 40세를 눈앞에 두고 미카미 씨는 캡콤을 퇴직했습니다.
캡콤를 그만 둔 이유는 두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표면적으로 말했던「절세」입니다. 당시 약 2000만엔의 연봉을 받고 있었으며, 절세를 퇴직 이유로 설명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 저는「캡콤과 조금 거리를두고 싶다」고 내심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캡콤은 초대형 노선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꾸준히 넘버링 타이틀만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현장에서 다양한 게임을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선의 위화감을 느끼게 되어 버린 거죠.
회사에는 지금처럼 기여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얻으려면? 그렇게 생각하며, 독립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 하지만 독립한 이듬해「창가족이 된다」라는 말과 함께 커리어 그래프가 급강하 하고 있습니다......
독립 후 저는「SEEDS」(2007년 플래티넘 게임즈 주식회사와 합병)라는 게임 메이커와 프리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SEEDS는 압도적인 인원 부족. 만들어야 할 소프트 수에 비해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의 팀 멤버를 모두 캡콤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카미야 히데키 팀에 합류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저의 팀은 해산 상태로 실질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루틴 업무로 매주 월 · 수 · 금요일 회의에 나갈뿐. 월 · 수 · 금은, 아무래도 어중간한 설정이잖아요.
주 전반 또는 후반에 몰려있으면 남는 날은 여행을 가거나 여가생활을 즐길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한 번은「회의는 월 · 화 · 수요일로 하지?」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웃음).
이런 식으로 소위 창가족으로 1년 정도 보냈던 겁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힘든시기 였지만, 그렇다고 캡콤에서 프로듀서가 된 때에 비하면 커리어 밑바닥은 아닙니다.
게임 제작 현장 근처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손을 댈 수 없는 입장이었던 프로듀서가 더 힘들었습니다.「역시 나는 현장이 좋아」라고 재인식 했습니다.
※창가족(窓際族): 회사에서 일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는 나이 많은 월급쟁이(야유하는 말)
(https://ja.dict.naver.com/#/entry/jako/2e2101dc8bdd4562bbc8f7ff30e3b244)
게임 제작은「내일의 보증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서 재밌는 것
──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미카미 씨부터「자기자신이 크리에이티브 현장에 있다」에 대한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카미 씨는 2010년에 Tango Gameworks를 설립하고 경영자로서 후진을 지탱하는 입장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왜 이 결단을 내리신건지요?
설립 전 2~3년은 계속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해 온 것처럼, 저는 다양한 존재에 저항하면서까지 현장을 고집해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회사를 만든다면, 나는 현장을 포기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납득시킬 때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Tango Gameworks의 출범을 선택한 것은「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에게 게임 제작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 자신이 프로듀서 시절에 겪은 억울함을 젊은 사람들에게 안기고 싶지 않았어요.
게임 업계에서는 자사의 발전을 중시하고, 크리에이터의 생각을 소중히하지 않는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즉시 관리자 및 경영진에 끌어 올리려 하고 있죠. 물론 기업이 이익을 위해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당사자가 그것을 원한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업계에는 저처럼「언제까지나 최고의 게임을 계속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동시에 그것은 젊은 사람들의 미래를 책임을 짊어지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한 부분은 없었나요?
전혀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게임 제작은「내일의 보증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서 재밌는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일의 보증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히트작이 나오면, 기업은 그 넘버링 타이틀을 발매합니다. 유저가 요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당연합니다.
저도 바이오해저드 시리즈를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한편, 매출을 어느 정도 내다보고 기정 노선 아래에서 비슷한 게임을 계속 만들다 보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리지날 타이틀을 우리들은 마치 목숨을 깎듯이, 열심히 만듭니다.
넘버링 타이틀과 달리 결과는 예상할 수 없지만, 크리에이터가「재미」라고 믿었던 것을 세상에 내보내고, 그 작품에 결과가 따라 오면 엄청난 기쁨인겁니다.
대성공을 경험한 크리에이터는 게임 제작을 쉽사리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거죠, 또 이게 맞다고 생각하고요(웃음).
그래서 Tango Gameworks는 저를 위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처럼 실패를 반복해도「괜찮아, 죽지 않으니까」
── 미카미 씨는 과거에 제작 한 히트 타이틀에 대해 말할 때,「지금이라면 이렇게 할지도 모른다」「이런 일에 도전 해보고 싶다」고 개선점을 반드시 찾아내고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진화를 항상 요구하는 자세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단순히 저는「싫증을 잘내는」타입이라서요(웃음).
어떤 것이라도 처음 만들 때 두근두근 하고 동시에 불안함도 생깁니다.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면 기분의 업다운도 심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내보냈을때, 유저가「재밌다! 이거 갓겜이다」라고 말해줄 수도 있고「뭐야, 이 쓰레기 게임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긴장감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반복되지만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 이 일은 재밌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과거에 만든 것에는 이제 질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이사를 할 때마다 갖고 있는 게임 소프트도 버리고 저와 관련된 작품도 수중에 별로 없습니다.
싫증을 잘 내지 않는다면, 저는 비즈니스 크리에이터로서 더 안정적이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 과거 작품은 어디까지나 과거군요. 항상 미래를 향해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있으신 것인지요.
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아버지로부터 들은「괜찮아, 죽지 않으니까」라는 말입니다. 지금이라면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런거죠.
새로운 것에 차례 차례로 도전하고 산처럼 실패를 쌓아 갔다 해도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는 인터넷에서 지식을 얻고 가급적 실패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갈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삶이 있어도 좋잖아요.
특히 젊었을 때는 자신의 인생이니까, 앞뒤 생각 없이 하고 싶은 일에 점점 손을 뻗어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둥글어지면 되는겁니다.
저 자신도 Tango Gameworks라는 스튜디오도 그런 삶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거대한 시장이 있는 나라에서 가끔 재미있는 오리지날 타이틀을 만드는 게임 개발 스튜디오가 있고, 가끔 크게 실패할 수도 있고요.
뭔가 휘청휘청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그런 회사가 하나쯤 있어도 좋잖아요.
취재·글: 타다 신스케
촬영: 야스이 신스케
편집: 노무라 히데유키(프레스 라보)
*1 : 1996년에 PlayStation용 타이틀로 출시된『바이오해저드』시리즈의 첫 작품.「서바이벌 호러」로 불리는 게임 장르를 확립시킨 명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 건물 내 복도의 창문을 뚫고 좀비 개가 갑자기 날아드는 장면으로 바이오해저드 팬들에게는 전설적인 장면.
*3 : 게임 센터 등에 설치된 업무용 게임기.
*4 : 1991년에 에폭사에서 발매된 전자 게임기. 바코드 수치정보에서 캐릭터와 아이템의 데이터를 만들어 경기할 수 있는 기능이 화제였다.
*5 : 2021년 3월 31일 기준. 캡콤 공식 사이트「밀리언세일즈 타이틀」로부터.
우리들의 이력서는
톱플래너의 이력서에서「일의 인생」을 깊이 파고든다!
『우리들의 이력서』는 제1선에서 활약하는 톱플래너의 이력서에서 그 사람의 경력 = 반생을 깊이 파고드는 WEB 매거진입니다.
일 인생 그 자체가 반영되는 이력서. 행복한 직장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축이나 사고 등의 정보를 찾아드립니다.
엔 · 재팬 주식회사와 주식회사 하테나가 공동으로 만든 편집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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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반 작품들이 재미도 있고 개인적으론 레벨구성이 기똥차서 반복 플레이 하기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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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썼었지만 여러인터뷰나 기사를 보면 사람이 굉장한 호인이자 대인배 같음 대단한 사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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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큐브로 만들어진 바이오하자드는 정말 대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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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만든게임은 제취향에 잘맞는데 다재미나게했네요 저도 고스트와이어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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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본인 마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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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썼었지만 여러인터뷰나 기사를 보면 사람이 굉장한 호인이자 대인배 같음 대단한 사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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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만에 이런 말을 하는거보면 그사이 디노1이나 바하리부트도 디렉터 한걸로 아는데 그건 완전 현장은 아니었나보네요. PN03 갓핸드 뱅퀴시 이런거 생각해보면 계속 독특한게임을 만들고 싶었던듯 | 21.07.04 21: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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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만든게임은 제취향에 잘맞는데 다재미나게했네요 저도 고스트와이어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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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4가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하지만 어떤 난이도에서든 온갖 기행,제약 플레이가 죄다 가능한 레벨디자인이 대박이었죠 ㅋㅋ | 21.07.04 22:5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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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성피부는 바짝 면도하면 화상입은것 처럼 뻘겋게 피부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 21.07.04 23:4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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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하면 필연적으로 피부가 개판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요.. 부위별로 차이점이 있어서 기르는 걸수도 있습니다. | 21.07.05 00:0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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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夜妹
그건 본인 마음이겠죠 | 21.07.05 00:0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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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기아밖에 못만드는 코지마일때 미카미는 정말 다양하게 재밌는게임을 만들엇는데 코지마보다 밑에있다는게 아이러니하네요요 | 21.07.05 18:4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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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는 MSX 남극탐험, 꿈의 대륙에도 주요 스탭으로 참여했고 폴리스너츠등의 다른 명작도 만들었기에... 또 MSX판 메탈기어가 서양에서 인기가 많았던것도 이유인듯여 | 21.07.05 21:5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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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갓본 | 21.07.05 12:1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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