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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MULTI] 켄터키 루트 제로, 떠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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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켄터키 루트 제로 출시일 2020년 1월 28일
개발사 카드보드 컴퓨터 장르 어드벤처
기종 PC, PS4, XONE, 스위치 등급 국내 미발매
언어 자막 한국어화 작성자 PforP

 

 

*본 리뷰는 닌텐도 스위치판으로 진행했으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던 하지만 이제는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은 미지의 영역으로 떠났어.

사랑을 알게 되면 그것을 진짜로 발견하면 그안엔 모두가 준비된 감정적 느낌이 자리하지.

너의 가면은 날아갔어. 넌 거기 없었지만, 미지의 영역에는 있었었지.

-Spoon, 'The Mystery Zone' 중


좋은 게임은 만나기 힘들다

 

킥스타터 당시 올라왔던 영상. 완성된 게임과 노선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보인다.

 

이야기는 2011년으로 올라간다. 킥스타터에 인디 게임 프로젝트가 올라오는 정도는 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드보드 컴퓨터라고 지칭한 이 인디 제작진이 올려놓은 시놉시스와 그래픽, 콘셉트는 매혹적이었다. 이 계획서에 반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갑을 열였다. (그중 하나는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 임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2년간의 제작을 마치고 등장한 프로젝트는 에피소드형 어드벤처 게임 〈켄터키 루트 제로〉라는 이름으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 환영은 기나긴 여정의 일부에 불과했다. 카드보드 컴퓨터는 3명으로 이뤄진 초소형 제작사였고, 액트 3 이후부터는 발표 기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2016년 액트 4 발표 후 2018년에 완결될 예정이라는 공표랑 달리, 연기되더니 2년이나 지연된 2020년 1월 드디어 완결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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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유소에서 마무리까지 7년이나 걸릴 줄은 제작진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발표 기간이 길어진 이유는, 제작진 중에 전담 프로그래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본을 담당한 제이크 엘리엇, 그래픽 담당인 타마스 케멘지, 음악 담당인 밴 배빗 모두 프로그래밍과 거리가 멀었다. 엄밀히는 제이크와 타마스는 개별 명의로 소규모 게임을 발표한 적이 있었고 이 게임에서도 프로그래밍을 담당했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 같은 스케일의 프로그래밍이 필요한 게임은 처음이었다. 막판 액트 5 작업과 콘솔 이식 문제로 프로그래머가 기용되긴 했지만 제작진 역시 〈켄터키 루트 제로〉는 일반적인 게임 개발 환경과 거리가 멀었다고 밝힌 바 있다. 완결 후 가진 인터뷰를 살펴보면 액트 2까지 3개월만에 만들어서 공개한다는 약속을 한 뒤, 실작업에 들어간 뒤 후회하고 변경했다고 한다. 케멘지는 〈켄터키 루트 제로〉를 '게임'이 아닌 '소프트웨어 아트 프로젝트'라고 지칭했는데 이 단어는 게임의 정체성과 느린 작업 속도를 설명하고 있다.


It's About Twiligh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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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엔딩도, 호감도(?)도, 퍼즐도, 아이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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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해서 상호작용 버튼을 누르거나, 대화문을 읽다가 선택하는 게 전부인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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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길 탐색 정도가 게임 플레이라 할 수 있긴 한데, 미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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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워킹 시뮬레이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고전적인 어드벤처 게임에 가깝다. 특히 <하프>랑 유사한 점이 많다.

 

재미있는 점은 〈켄터키 루트 제로〉는 플레이 자체가 복잡한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복잡함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고 한다. 일단 이 게임의 장르로 분류하면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다. 게임 진행 역시 캐릭터를 조작해 상호 작용 지점을 클릭하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에 충실하다. 다만〈켄터키 루트 제로〉는 일반적으로 상상할법한 1990년대 그래픽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보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확히는 1980년대 초중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들 (혹은 초기 그래픽 어드벤처)을 생각하면 좋다. 그래픽은 평면적인 스테이지와 행동 묘사 정도고, 상황과 반응, 결과나 묘사는 텍스트에 많이 기댔던 시절의 어드벤처 게임 말이다. 게임 도중 등장하는 동화를 좋아하는 대학원생 로버타 (시에라 엔터테인먼트의 로버타 윌리엄스) 역시, 이 시절에 대한 오마주라 보면 좋다. 일본 게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사운드 노벨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켄터키 루트 제로〉를 실제로 해보면 어떤 '기묘함'이 있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사이베리아〉 이후 소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반복하는 리바이벌 어드벤처 게임이나, 영화적 체험에 매진하려는 신세대 시네마틱 어드벤처 게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게임이다. 우선 이 게임은 퍼즐과 아이템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은 캐릭터를 조작해 스테이지에 배치된 상호작용 지점을 조작하거나, 대화문을 읽으면서 선택하는 것뿐이다. 가끔 스테이지를 벗어나 길을 탐색하는 과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그리 비중은 크지 않다. 그렇다고 비주얼 노벨이나 퀀틱 드림의 시네마틱 어드벤처처럼 복잡한 분기점이나 다양한 엔딩 가짓수를 지닌 게임도 아니다. 당연하겠지만 QTE도 없다. (있다면 그야말로 난센스겠지만) 진행은 큰 서사 하나에만 매진하고 있으며, 다른 선택지를 눌러도 진행은 동일하다.


이 점에서〈켄터키 루트 제로〉는 1990년대 한국 동인 게임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허큘리스판 〈하프〉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하프〉 역시 주인공을 조작해 상호작용 지점을 접촉해 텍스트를 읽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카드보드 컴퓨터가 진짜로 〈하프〉를 영향받았을 가능성은 없지만,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서사적인 경험을 상호작용, 나아가 게임 디자인과 연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일직선이었던〈하프〉랑 달리 〈켄터키 루트 제로〉의 상호작용과 서사적인 경험의 연계는 좀 더 복잡하다. 이 부분에서 카드보드 컴퓨터는 지극히 기본적이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파고들어 가고 있다. 바로 선택지다. 상술했듯이 〈켄터키 루트 제로〉의 선택지와 대화문은 큰 서사 하나에만 매진하며, 다른 선택지를 눌러도 결말은 같다. 이런 디자인에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럼 왜 비디오 게임으로 만들었느냐. 소설로 쓰지.'라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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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 대부분이 '역할을 연기한다'에 집중되어 있는데, 연극스럽다고도 할 수 있겠다. '스테이지'라는 용어가 게임에 쓰이는 걸 생각하면 재미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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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각기 다른 인물들의 선택지가 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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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를 수식했던 '이야기 얼개'라는 장르명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게임이다.

 

이에 대한 카드보드 컴퓨터의 답은, "선택에 따라 세부 내용과 묘사가 달라지는 걸 음미해보세요."다. 이 게임에서 대화문과 선택지는 아무거나 선택해도 진행할 수 있지만, 선택지를 통해 볼 수 있는 서술과 묘사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다른 서술과 묘사를 보려면 그 액트를 다시 플레이해 다른 선택지를 봐야 한다. 〈켄터키 루트 제로〉의 개성은 개별 선택지가 별 영향을 끼치진 않는 것처럼 보여도,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디자인에서 비롯된다. 이는 '선택지의 주체'를 활용한 연출로도 이어진다. 대부분의 어드벤처 게임에서 대화는 고정된 한 명의 캐릭터와 관련된 내용만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는 상반된 선택지나 다른 캐릭터가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콘웨이를 조작해 대화하고 있다 하더라도, 로사나 준버그, 이즈라 같은 다른 캐릭터들이 선택지에 끼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끼어드는 선택지를 고르면 다른 반응과 설명이 뜨는 경우가 많다.


특히 플레이버 텍스트에 가까운 장소를 설명하는 상호지점들이 대표적이다. 액트 4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플레이어는 결혼식이 이뤄진 섬을 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선택지를 통해 이 장소를 전과자들의 결혼식장이었다고 할 수 있고, 고등학교 연인들이 결혼한 장소로도 볼 수 있다. 카드보드 컴퓨터는 게임 속 상황을 정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정해지도록 디자인하고 있다. '롤플레잉' 요소를 도입한 어드벤처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타마스 케맨지 홈페이지를 찾아가 보면 〈던전 앤 드래곤〉 5판 빈 캐릭터 시트가 올라가 있는데 (자기 시트인 척 해보라는 재치 있는 문구가 달려있다) 카드보드 컴퓨터가 TRPG 팬이며 게임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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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변화보다 '서술'의 변화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네마틱 어드벤처와 차별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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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파격적인 대화창 연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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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코 엘리시움>을 좋아했던 팬이라면 생각보다 공통점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디자인이 뭐가 신기하겠나 싶겠지만, 여타 게임 제작자들에게는 나름 흥미로운 시도였던 게 분명하다. 작년 화제작이었던 〈디스코 엘리시움〉의 제작사인 ZA/UM이 〈켄터키 루트 제로〉에게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의외겠지만 두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디스코 엘리시움〉이 〈켄터키 루트 제로〉에서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서사의 공간을 플레이어가 직접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대화문/선택지 디자인이다. (나머지 하나는,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주제 의식이다) 지금까지 어드벤처/RPG 게임에서 대화문과 선택지는 제작자가 설계한 선형적인 노선을 따라가는 쪽에 가까웠다. 개중엔 게임 오버로 빠지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선형적인 노선에 일탈한 처벌에 가까웠다.


지금도 이런 선형적인 대화 디자인은 주류에 가깝다. 대표적으로 퀀틱 드림이 있는데, '당신의 선택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진다'라는 문구는 그 점에서 다소 기만적이다. 결국엔 퀀틱 드림이 만들어놓은 무수한 선형적 서사 중 플레이어가 하나 선택해 따라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켄터키 루트 제로〉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비디오 게임의 서사는 선형적이잖아요. 처벌은 없으니깐 어떤 얘길 듣고 연기하고 싶은지 한번 선택해볼래요?" 이 디자인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카드보드 컴퓨터가 선택지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여기고 성실히 썼기 때문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켄터키 루트 제로〉에게 영향을 받은 부분 역시, 선택지와 게임 진행 간의 강제성과 페널티를 느슨하게 만든 뒤, 선택지의 입체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디자인일 것이다. 게임 진행의 도구가 아닌, '역할 수행'으로써 고안된 선택지 디자인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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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보드 컴퓨터의 예술적 역량은 감탄이 나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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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나 '감정'을 읽기 어려운 그래픽인데 게임이 원하는 유령이나 망자의 쓸쓸함을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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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브리본>에 이어 오랜만에 와이어프레임 그래픽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려는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 디자인이 단순하지만 묘한 구석이 있다면, 타마스 케맨지가 담당한 그래픽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후술하겠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는 메인프레임 컴퓨터 시절 어드벤처 게임들과 1980년대 8bit 도트 그래픽에 매혹된 게임이다. 마치 초창기 와이어프레임 그래픽을 연상케하는 오직 흰 선으로만으로 이뤄진 지역 맵 묘사도 그렇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어둠 속의 나홀로〉 같은 초기 폴리곤 게임들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은 부분이 있다. 물론 초창기 선구 주자의 고군분투에 가까웠던 〈어둠 속의 나홀로〉에 비하면 고도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그래픽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는 상당히 인상적인 그래픽이라 할 수 있는데 게임이 가지고 있는 남부 고딕 특유의 전원에 드리운 신비롭고, 어두운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표정과 행동 묘사다. 이 게임의 인물 모델링엔 눈코입 나아가 표정 애니메이션이 없다. 이 때문에 플레이하면서 인물들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디자인이라 할 수 있는데, 서사에서 다루겠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는 (공포 장르가 아닌) 유령 게임이기 때문이다. 유령에게서 공포를 지워내면, 역사의 그림자로서 쓸쓸하고 고독한 이미지만 남게 되는데 〈켄터키 루트 제로〉의 인물 그래픽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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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은 준버그의 모티브로 켄터키 출신 컨트리 가수 로레타 린과 준 카터 캐시를 언급하고 있다.

 

이 영상도 그렇고, 다중 플랫폼 또는 비디오 아트적인 접근이 두드러지는 게임이다.

 

마지막으로 〈켄터키 루트 제로〉는 명백히 유튜브 시대의 게임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튜브와 트위치를 비롯한 비디오 커뮤니티가 등장하면서 게임 제작자들 역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홍보 양태는, 바이럴 영상일 것이다. 얼핏 보면 게임과 관련 없어 보이지만 작중 내용과 연관된 부수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어 팬들을 유도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켄터키 루트 제로〉 역시 액트 4부터 이런 바이럴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심지어 올라온 영상 중에서는 게임 본편에서는 짧게 볼 수밖에 없었던 영상도 있다.


다만 카드보드 컴퓨터는 단순히 팬질 떡밥에서 좀 더 나가고 있다. 이들이 만든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팬서비스 이상으로 일관된 예술적 노선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곧장 말해 〈켄터키 루트 제로〉는 1980년대 미국 문화와 현대 미술에 매혹되어 있다. 떄문에 〈켄터키 루트 제로〉의 바이럴 영상은, 베이퍼웨이브 (1980년대 팝 문화를 키치 하게 재해석한 예술 사조)를 거친 비디오 아트에 가깝다. 카드보드 컴퓨터는 시골 지방 방송국이라는 소재를 빌어, 싸구려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컨트리 디바와 1980년대 로봇풍 뉴 로맨틱스의 괴상한 결합인 준버그와 조니의 뮤직비디오는 그 점에서 흥미롭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빌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확장하고 있는 게임이다.


멈춰버린 현명한 피


정사각형의 그 하얀 목조 주책은 둥근 지붕과 첨탑과 소용돌이 모양의 발코니가 무척이나 우아한 17세기풍 저택으로,

그 집이 서 있는 곳은 한때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주택가였다.

하지만 차량 정비소와 조면기가 밀어닥치면서 이웃의 위엄 어린 명패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고,

마침내 에밀리 양의 집만 목화를 실어 나르는 마차와 급유 펌프들 사이로 고집스럽고 요염한 몰락을 드러내며 흉물 중의 흉물로 남게 되었다.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바치는 장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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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이해할만하다. 이 게임의 문장들은 만만치 않다(번역 문제도 있지만).

 

서사로 넘어가보자. 아마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켄터키 루트 제로〉 서사를 요약하라고 하면 난감해 할 것이다. 도입부는 그래도 멀쩡하다. 켄터키에 사는 늙은 배달부 콘웨이가 배달하기 위해, '루트 제로'라는 신비한 고속도로를 찾아 나선다는 도입부는 그래도 '어드벤처' 게임답다. 하지만 도중에 만난 샤논과 함께 탄광에 들어서면서 〈켄터키 루트 제로〉는 혼란스러워진다. 문학 시간이 고통스러웠다는 사람이라면 〈켄터키 루트 제로〉를 플레이하는 걸 좀 고려하기 바란다. 텍스트와 이미지 모두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한국어 번역이 좋지 못한 것도 고려해야 되겠지만 (오타와 비문, 존댓말과 반말이 오락가락하는 번역이 걸린다) 문장을 봐도 〈켄터키 루트 제로〉의 영어 텍스트 역시 평이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당연하겠지만 모든 떡밥이 설명될 거라는 기대도 버리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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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의 후마스 저택.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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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미국 남부와 남부 고딕의 정서를 체화하고 있다고 보면 좋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미국) 남부 고딕 게임이다. 그렇다면 남부 고딕은 무엇인가? 일단 고딕 문학에 대해 짧게 정리하자면 죽음에 대한 주제와 낭만주의가 결합한, 공포 문학의 하위 장르에 속하는 문학이다. 대표작으로는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 〈제인 에어〉가 있다. 유령이나 흡혈귀, 인조생명체, 낡은 저택 속 비밀을 지닌 귀족 남성 같은 비일상적이고 두려운 존재들이 등장해 음침하면서도 격정적인 서스펜스와 멜로 드라마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딕이라는 장르명도, 이 장르의 소설들이 낡은 저택이나 교회 같은 폐허와 같은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고딕 장르는 원래 영국에서 등장했는데, 미국으로 넘어가서 남부에 정착 발전한 게 바로 남부 고딕이다. 물론 남부 이외에도 미국 여기저기에 고딕이 정착했는데 서부극에 정착한 위어드 웨스턴도 그중 하나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미국 남부에 고딕이 정착했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답은 '미국 남부가 미국 전반의 발전이나 진보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미국 남북전쟁 이후 공업 중심으로 미국 사회가 재편되면서 공장 산업이 없었던 남부는 북부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해방된 노예들 대부분 북부를 비롯한 자유주로 떠나버렸고, 백인 지주층들은 노예가 자유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비디오 게임에서는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그레이 가문과 브레이스웨이트 가문이 몰락한 남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문의 대립과 부정부패, 권위와 근친혼에 대한 집착,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플랜테이션과 늪지대는 남부 고딕의 주 소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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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고딕 작가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월리엄 포크너(좌)와 플래너리 오코너(우). 제작진 역시 이 두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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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남부 고딕에서는 멀쩡한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남부 고딕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20세기 초인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였다. 산업 문명과 흑인 인권이 정착하고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옛 남부의 영화에 대한 향수가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포크너, 트루먼 카포티, 유도라 웰티 (웰티 본인은 이 분류를 싫어했다) 맥컬러스, 코맥 맥카시, 어스킨 칼드웰, 플래너리 오코너, 테네시 윌리엄스가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개성 차이는 있지만 남부 고딕 소설들은 고딕 문화의 특징 속에서 남부 특유의 자연과 초현실주의, 종교 근본주의적인 분위기, 사회의 변화에 따른 몰락과 향수가 드러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레이 가문과 브레이스웨이트 가문의 후예들이 어찌어찌 현대까지 살아남아서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현실을 못 따라가는 풍경을 상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인물의 비루함과 결함이 영국 고딕 문학보다도 훨씬 강하게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남부 고딕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그로테스크'하다. 이런 결함을 가진 인물들이 기이한 사건들을 접하거나 저지르는 과정이야말로 남부 고딕 문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에 광인 전도사들과 뒤처진 남부인들이 돌연히 기이한 계시를 접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윌리엄 포크너 소설에 등장하는 있는 집 자제들이 알콜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패악질을 벌이는 것도 이런 '그로테스크' 전통하고 관련이 있다. 남부 고딕의 이런 성향은 남미로 넘어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윌리엄 포크너가 도입한 의식의 흐름과 비현실적인 분위기는 마술적 사실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르적으로는 호러나 스릴러, 범죄 장르하고도 연계되기도 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원작이기도 했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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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계에서 남부 고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제작사라면 시에라 엔터테인먼트가 있다(왼쪽 대령의 유산, 오른쪽 가브리엘 나이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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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나온 남부 고딕 게임이라면 <바이오하자드 7>이 있다.

 

사실 남부 고딕 자체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친숙하지 않은 문학 장르다. 현지인들도 절래절래하는 포크너를 위시해 기본적으로 그리 친절한 문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로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쓴 코맥 맥카시가 이 전통을 이어 국제적으로 성공한 작가라 할 수 있다. 대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 많다. 〈사냥꾼의 밤〉이나 〈엔젤 하트〉, 〈쓰리 빌보드〉, 〈머드〉, 〈매혹당한 사람들〉, 〈트루 디텍티브〉, 〈워킹 데드〉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전반적으로 세련됨과 거리가 먼 끈끈하고 질척한 인상의 영화들이 많다.


게임 역시 영화나 드라마보다 적긴 해도 조금씩 남부 고딕에 영감을 받은 게임들이 있었다. 맨 윗줄에는 시에라 엔터테인먼트의 〈대령의 유산〉과 〈가브리엘 나이트 1〉이 있다. 전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물과 접목했고, 후자는 오컬트 호러 미스터리와 부두교로 남부 고딕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가장 최근의 예라면 〈바이오하자드 7〉가 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어두운 대저택과 늪지대, 제대로 생각도 못하는 비루한 모습에 광기에 가득 찬 베이커 가족은 남부 고딕을 좀비물의 자극적인 맛으로 재해석한 버전에 가깝다. 일반적인 남부 고딕이라 보기 미묘하지만, 후술할〈레드넥 램페이지〉도 미국 남부의 감수성에 기반하고 있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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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고딕도 스펙트럼이 다양하긴 하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는 그 중 '문단 문학'에 가깝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영향력도 강하다.

 

다만 카드보드 컴퓨터는 남부 고딕 문학의 정체성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존재들은 장르적 재미보다는 현실의 문제랑 연계된 문학적인 상징성이 강하다. 이 점에서 〈켄터키 루트 제로〉는 남부 고딕에 영향을 받은,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하고도 연관되어 있다. 텍스트 역시 상황 설명 이상으로 문학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초현실적인 감수성이 등장하는 장황하고 시적인 서술 방식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등장인물 샤논의 성은 이 인물에 대한 오마주다) 윌리엄 포크너의 영향력이 뚜렷하다. 실제로 제작진 역시 마르케스와 오코너는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 다른 이름은 플래너리 오코너와 데이빗 린치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작가라 감이 안 잡힐수도 있겠지만, 제이크 엘리엇은 오코너 특유의 캐릭터 조형이 게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고 있다. [현명한 피]를 위시한 대표작들을 읽어보면 기괴하면서도 생생한 캐릭터들과 냉소적인 서술, 영적 깨달음과 돌연한 죽음이 등장하는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싶다. 후자 같은 경우는, 이런 초현실적인 내용에서 린치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이외 작중엔 온갖 인용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한 예로 이즈라의 이름은 미국 이미지즘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에서 따왔다), 상세한 정보는 팬 위키나 분석 기사를 찾아보는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꿈의 블루그래스, 빚의 켄터키


나는 하찮은 곳에 가봤고 그 모습이 맘에 들긴 했지.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아마 하찮은 곳에 가 있을 거야.

따뜻한 날씨와 내게 해로운 일자리만 받아들여. 작년의 폭풍이 남긴 흉터가 내 팔 위의 구더기처럼 놓이게 된 후로.

-Bonnie 'Prince' Billy, 'A Minor Place'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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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배경이 되는 켄터키 주 매머드 케이브 국립공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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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벤처 게임의 시초로 꼽히는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속 배경이기도 하다.

 

무대를 좀 더 좁혀보면, 〈켄터키 루트 제로〉는 명백한 지역 게임이다. 게임의 텍스트를 담당하고 있는 제이크 엘리엇은 액트 1 발매 당시 인터뷰에서 여자친구와 가족이 켄터키 출신이라, 이 게임을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카드보드 컴퓨터는 중요한 게임사적 전통을 동시에 이끌어오고 있다. 바로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다. 비디오 게임 역사를 알고 있다면 항상 언급되는 그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맞다. 이 게임의 배경이 〈켄터키 루트 제로〉의 배경과 일치한다: 켄터키 주 동쪽 애팔래치아 산맥에 있는 매머드 케이브 국립공원이다. 게임을 하고 난 뒤, 매머드 케이브 사진을 살펴보면 〈켄터키 루트 제로〉의 비주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 헷갈릴까 봐 진짜 매머드도 등장하기까지 한다) 액트 4에서 등장하는 동굴 아래에서 슈퍼컴퓨터 무릉도원으로 연구하는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무릉도원으로 진행되는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와 메인프레임 게임에 대한 헌사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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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키 주 지역 문화와 전설을 자세히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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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비언트와 켄터키 전통의 블루그래스 음악 간의 결합이 인상적이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존재들 역시 켄터키 지역 문화 나아가 애팔래치아 산맥과 관련된 민담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제이크 엘리엇은 켄터키 지역 문화엔 죽음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 밝히면서, 찬송가에 드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안도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작중에서 죽음과 소멸에 대해 두려움과 평온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대사가 있는데, 이를 보면 제이크의 발언이 어떤 의도로 했는지 알 수 있다. 좀 더 직접적인 인용도 있다. 소년 이즈라가 타고 다니는 거대한 독수리 줄리언이 그 중 하나다. 줄리언은 애팔래치아 근처에 살고 있는 미국 원주민인 체로키 부족 전설에 등장하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을 만들었던 거대한 말똥가리 전설을 연상케 한다. 비록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켄터키 루트 제로〉를 휘감고 있는 전설과 신화적 인용을 전부 인지하기는 어렵겠지만, 카드보드 컴퓨터는 그런 전설에 담겨 있는 감수성을 무리 없이 표현하고 있다.


밴 배빗이 담당한 음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켄터키 주의 또 다른 별명은 블루그래스인데, 이 이름은 음악 장르의 이름이기도 하다. 컨트리나 포크의 시조에 가까운 민속 음악으로, 버즈The Byrds나 밥 딜런 같은 현대 포크/컨트리 계열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음악을 그리 많이 쓰지 않고, 쓰더라도 앰비언트 음악을 주로 쓰는 게임이지만 이따금 삽입되는 블루그래스 곡들은 상당히 잘 어울리는 편이다. 고딕풍 블루그래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아이언 앤 와인이나 보니 프린스 빌리 같은 남부 컨트리/포크를 좋아한다면 취향에 맞을 것이다. 밴 배빗은 〈켄터키 루트 제로〉 이전까지는 큰 커리어가 없었던 사람이지만 이후 주목받아 하우 투 드레스 웰이나 엔젤 올슨 같은 유명한 인디 음악가들과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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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팔래치아 산맥 근방이 미국에서는 탄광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미지는 존 세일즈의 <메이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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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켄터키 주에서 있었던 탄광 파업 사건인 1973년 할란 카운티 노동쟁의는 게임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바바라 코플랜드 <할란 카운티 USA>.

 

매머드 케이브, 애팔래치아 전설, 블루그래스 음악이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면, 탄광과 전기 회사, 채무는 게임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액트 1에서 플레이어는 엘크혼 탄광에 가게 될 것이다. 작중 설명을 따르면 이 엘크혼 탄광은 전기 회사 소유로, 탄광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대접을 했으며 거대한 홍수 사건이 일어나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고 한다. 홍수 사건을 제외한다면 이 설정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켄터키 주 나아가 애팔래치아 산맥 자체가 미국에서는 탄광 지역으로 유명'했'다. 상술했던 로레타 린도 켄터키 주 광부 가족 출생으로 "광부의 딸" 이미지로 유명해진 가수다. 여기다 탄광 사고를 비롯해 광부들의 노동 투쟁사도 상당히 유명하다. 켄터키가 아닌 웨스트 버지니아가 배경이지만 존 세일즈의 〈메이트완〉을 보면 애팔래치아 산맥 탄광에서 일어났던 부당한 대우가 최소 1920년대까지 올라가는 문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켄터키 주에서도 탄광 노동 쟁의도 일어났다. 그 중 유명한 쟁의를 꼽자면 게임의 배경 바로 근처에 있는 할란 카운티에서 1973년 일어난 쟁의를 꼽을 수 있다. 할란 카운티는 1930년대에도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대대적인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도 탄광을 소유한 듀크 파워 사 (현재는 듀크 에너지로 이름을 바꿨다.)는 여전히 노동자들을 푸대접했다. 40년이 지난 1973년 6월 또다시 부당 대우에 폭발해 장장 13개월에 거친 투쟁이 벌어졌다. 바바라 코플랜드가 이 투쟁을 〈할란 카운티 USA〉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제법 알려진 사건이라 창작 뮤지컬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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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통합 전기 회사의 횡포와 이에 대한 반감이 언급되는 것도, 역사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다.

 

이 할란 카운티 파업은 게임 내 배경에도 반영되어 있다. 먼저 전기 회사의 악행과 사람들의 저항이 있다. 작중 전기와 지역 문화를 독점하고 주민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통합 전기'가 어떤 회사를 모티브로 했는지는 상술한 내용을 읽었다면 눈치챘을 것이다. 액트 2에 등장하는 뮤지션 듀오인 준버그와 조니 역시 이런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노조파괴 임무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현실의 변화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게 돼버린다. 실제 할란 카운티 파업 당시 듀크 파워 측에서 노조 파괴자를 보내 횡포를 부렸던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한 변주라 할 수 있다. 추가로 영어로는 이런 파괴자를 Scab이라고 지칭하는데, 이 단어는 이 게임의 영향을 받은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노조 지지자들이 자유노동자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미국 현지의 레드넥 인식을 풍자하고 있는 랜디 뉴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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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게임계에도 훌륭한 예시가 있다. 바로 <레드넥 램페이지>다.

 

다른 하나는 액트 2 막간극 '엔터테인먼트'하고 관련이 있다. 이 막간극은 동명의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작중 설정에서는 1973년 11월에 초연이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현실에서는 할란 카운티 파업 투쟁이 한창 이뤄지고 있을 시기다. 이 '엔터테인먼트'는 〈켄터키 루트 제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이 연극의 내용 대부분은 가난한 켄터키 인들의 우울한 신세 한탄으로 담겨 있다. 그런데 연극 후반부에 들어서면 슬레이드 가족과 에벌린 힉맨, 해리 에스페란자 모두 빚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1970년대 켄터키 인들의 고단한 삶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동시대 미국이 겪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고리가 있다. 우선 켄터키를 위시한 애팔래치아 산맥 근방 주들은 '힐빌리'로 불리는 레드넥 (가난하고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을 일컫는 말) 하위 분파가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현지에서 힐빌리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은데, 가난한데 인종 차별하고 근친상간하며 밀주나 마시는 촌티 나는 꼴보수 이미지가 강하다. 당연하겠지만 2016년 미국 대통령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한 주기도 하다.


가뜩이나 어렵고 힘든 상황인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감이 잡혔을 것이다. 2020년 기준으로 켄터키 주는 빚 순위 4위, 실업률이 4.4%로 꼽히는 가난한 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추가로 2010년대부터 작중 엘크혼 탄광처럼 폐광하는 탄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할란 카운티 역시 2015년 마지막 남은 노동조합 소속 탄광을 폐쇄했다는 뉴스가 떴을 정도다. 자연히 삶의 질도 확연히 떨어져 할란 카운티는 매우 가난한 지역에다 알콜 소비율도 매우 높다고 한다. 사실 강원도의 탄광 마을들이 석탄 산업 몰락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마냥 남 얘기가 아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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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켄터키 주 정부가 빚의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이 게임이 숨겨둔 정치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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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이 '빚'에는 의료 보험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실을 주지하고 다시 보면 섬뜩하게 다가올 대사와 장면이 보인다. 우선 샤논은 콘웨이에게 어렸을 적에 한꺼번에 몰아서 치과 치료를 받고 제대로 된 의학적 조언을 받지 못했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명백히 서민들을 착취하는 미국 건강 보험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후술할 콘웨이의 운명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펄 슬레이드는 켄터키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가서 금융업계에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하는 말이 '저는 진짜 담당자가 될 거에요. 신용 조합에서든 어디든.'다. 이 말은 거대 금융업계에 들어가 고객의 신용을 관리하고 착취하는 큰 손이 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착취하는 큰 손은 누구인가? 연극 끝에서 해리는 빚 때문에 손님들을 하드 타임즈에 팔아버렸다는 고백을 하고, 끝나자마자 해골이 등장한다.


숨길 것도 없이 하드 타임즈 양조장은 가난한 힐빌리, 나아가 서민들을 착취하는 현실의 금융업계와 자본가 집단의 풍자다. 액트 3에서 밝혀지길 이들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덧셈 기계를 숭상하는 집단이다. 이 덧셈 기계가 뭘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경제를 좌우하는 컴퓨터와 계산기다. 사실상 이 게임의 악당 집단이라 할 수 있는데, 은밀한 계략으로 힐빌리들을 빚의 수렁에 빠지게 한 뒤, 계약을 맺어 빚을 갚을 때까지 빠질 영원한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카드보드 컴퓨터는 이 하드 타임 양조장 직원들을 해골로 표현하는데, 액트 3 도입부를 본 사람이라면 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쳤다가 치료받은 콘웨이의 다리가 뼈로 변했기 떄문이다. 콘웨이는 미국의 열악하고 비싼 의료 보험에 수렁에 빠진 뒤, 하드 타임 양조장의 농간에 휘말려 영원한 노예가 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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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셈 기계를 신봉하는 하드 타임 양조장은 그 점에서 "서민들을 '빚'의 수렁에 빠지게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풍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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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흘러가서 그렇지 전체적인 맥락을 따져보면 의표를 찌르는 섬뜩한 상황과 대사가 자주 나온다.

 

이때 콘웨이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중 콘웨이는 암울한 과거를 지닌, 늙고 지친 중년 노동자 남성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하드 타임즈 양조장의 노예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콘웨이의 반응은 공포보다는 무덤덤한 모습을 보인다. '일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네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탈출이나 도망가려는 시도도 없이, 실종된 이후 끝날 때까지 영원히 등장하지 않는다. 콘웨이는 살아있을 때나, 노예로 전락했을 때나 별반 다름없는 '좀비'였던 것이다. 콘웨이의 이런 심리와 행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커녕 사회적 안전장치 없이 오로지 '빚'만 남은 2008년 이후 남부인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콘웨이의 무덤덤함과 실종이 두렵게 다가온다면 장르화되지 않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공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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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설이 큰 의미가 없는 게임이기도 하다. 최종화인 액트 5는 떡밥 회수 따윈 없는 안티 플롯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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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5의 결말은 그 점에서 조용하지만 격렬한 감정이 들끓는 추도사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2008년 이후 미국 남부에 대한 은유였다면 액트 5에서는 방향성이 달라진다. 액트 4와 5 사이에 남부의 지지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카드보드 컴퓨터가 선택한 결말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명확한 답을 원하던 사람이라면 액트 5에서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액트 5는 지금까지 이어왔던 모든 떡밥을 묻어버리고 멸망 이후 애도와 재건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무책임한 전개가 아니다. 오히려 일관성 있는 전개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켄터키 루트 제로〉의 등장인물들은 소외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이다. 은퇴밖에 남지 않은 콘웨이, 가난한 이민자 가장 출신으로 친척들이 사라지거나 죽은 샤논, 부모가 사라진 뒤 독수리 줄리안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던 소년 이즈라, 탄광 노조 파괴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몰락으로 존재 의의를 상실한 준버그와 조니가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폐허에 도착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만드는 것뿐이다. 이 역설성은 〈켄터키 루트 제로〉의 희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들이 하는 노동은 하드 타임즈 양조장이나 '회사'의 착취적 노동하고 명백히 다르다. 그들이 애도와 재건을 끝내고, 모이는 곳은 배달하기로 했던 물건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다면 어떤 결말이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드보드 컴퓨터는 구조적인 폭력 이후 남은 황무지에서 무의미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고 있다. 그 점에서 〈켄터키 루트 제로〉는 켄터키라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그 지역이 겪고 있는 어렵고 힘든 현실을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묻고 있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니다. 일단 요새 보기 드물게 순수한 어드벤처이기 때문에 액션을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관심을 끌기 부족할 것이다. 여기다 시적이고 모호한 전개와 어느 정도 제반 지식이 있어야 파악할 수 있는 메세지, 반대로 단순한 게임 디자인은 어떤 이들에게 실체 이상으로 고상하게 있는 척하는 게임처럼 보일 가능성이 크다. 곧장 말해 넘치게 '예술'적이다. 하지만 〈켄터키 루트 제로〉는 실속 없는 예술은 아니다. 일단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미적 감각이 그 어떤 게임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독창적이다. 이 시청각적 경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돈을 낼 가치가 있을 정도다. 이야기 역시 모호하긴 해도, 남부 고딕과 마술적 사실주의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시대 미국 남부가 겪고 있는 문제를 섬뜩할 정도로 드러내고 있다. 이 정도면 7년을 걸쳐서 해볼 만한 예술이다.


경이로움을 지닌 희망에 가득찬 사냥꾼과 그가 돈을 묻어둔 바위에 새겨진 수 없이 많은 발톱 자국.

우리는 이상한 말들을 간신히 붙잡는다. 신이 빚은 인간은 그저 다시 한 번 살아가길 바랄 뿐.

-Iron & Wine, 'Serpent Chamber'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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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역시 10년에 가까운 여정에서 많은 것이 변했다고 고백했는데, 그러한 시도를 할 만한 게임이었다.


작성: PforP / 편집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댓글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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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요즘 짬짬히 자기전에 스위치로 플레이 중입니다. 한국어 공식 번역이 좀 어색하긴 한데, 영어로 보면 일부 표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언압이 좀 있더군요. 콘솔판은 번역 출시가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월 안에 액트5까지 엔딩을 목표로!
20.02.13 16:33
(5187791)

58.238.***.***

BEST
7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보니, 당시의 시대상이 많이 반영된 듯 하네요. 제작진들의 생각 변화도 그렇구요.
20.02.14 18:42
(4848030)

210.100.***.***

BEST
리뷰 정말 좋네요. 꼭 사고 싶은 게임이었는데 스위치로도 발매했군요. 리뷰에 오코너가 나와서 너무 좋네요. 메모장에 문장 복사 붙여넣기 하면서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16 08:40
BEST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요즘 짬짬히 자기전에 스위치로 플레이 중입니다. 한국어 공식 번역이 좀 어색하긴 한데, 영어로 보면 일부 표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언압이 좀 있더군요. 콘솔판은 번역 출시가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월 안에 액트5까지 엔딩을 목표로!
20.02.13 16:33
(5187791)

58.238.***.***

BEST
7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보니, 당시의 시대상이 많이 반영된 듯 하네요. 제작진들의 생각 변화도 그렇구요.
20.02.14 18:42
(1842366)

115.137.***.***

와 이거 번역에 엔딩까지 나온건가요? 액트 좀 하다가 멈췄는데 당장하고 오겠습니다. 글은 하고와서 읽겠습니다.
20.02.16 01:10
(4848030)

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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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말 좋네요. 꼭 사고 싶은 게임이었는데 스위치로도 발매했군요. 리뷰에 오코너가 나와서 너무 좋네요. 메모장에 문장 복사 붙여넣기 하면서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16 08:40
(602177)

106.240.***.***

리뷰가 게임을 살렸네요. ㅎㅎ
20.02.17 13:11
표지가 저래서 무슨 FPS겜인줄 알았네요; 잘읽었습니다.
20.02.17 14:00
(236817)

211.210.***.***

레데리2 리뷰 쓰신 분과 같은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박한 배경지식에 혀를 할딱거리고 갑니다.
20.02.17 18:28
(299573)

61.73.***.***

번역이 안 좋은 건지 아님 내 이해력이 딸리는 건진 몰라도, 액트4까지 진행해도 도통 뭔 소리들을 하는건지, 어떻게 전개되어가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접었던 게임 명작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엄청 가리는 게임인 건 분명한 거 같습니다. 전 갠적으로 비추네요.
20.02.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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