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시작 -
TV 모니터, 게임기, 콘트롤러,
지금까지의 게임기는 이 3가지가 하나의 세트였다.
그러나 지금, 그 고정 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닌텐도는 그것을 한다.
- 야마우치 히로시 -
- 닌텐도란 무엇인가 -
쿄토의 한 구석, 화투가게
닌텐도의 역사는, 일본의 쿄토에서 시작된다.
무로마치 시대, 쇼고인 저택 앞에 있던 주택을, 메이지에 사는 한사람의 직공이 매입해,
가게를 연다.
- 메이지의 고도, 화투 공예가 -
닌텐도의 창업은 1889년(메이지 22년) 9월 23일.
유명한 공예가 였던 야마우치 방지로씨(야마우치 히로시의 증조부)가,
쿄토시 분쿄구 오오하시 니시이리 에서 「닌텐도 카드」를 창립,
화투의 제조, 판매를 개시했던 것이 그 역사의 시작이다.
그의 화투는 쿄토와 오사카에서 판매되어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화투가 어느 덧 도박장에서 사용되게 되면서,
그와 함께 사업도 커진다. 「대통령표」의 화투가 가지는 아름다운 색감은
당대의 고상한 미의식에 들어맞았고,
프로 도박사는, 승부의 기로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닌텐도 카드의 화투 수익은 자꾸 자꾸 성장하고 갔다.
그러나 방지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 전개를 한다.
1907년(메이지 40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트럼프의 제조를 단행한다.
그와 동시에, 판매 시장의 확대화를 모색한다.
거기서 점 찍어 두었던 것이, 당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지고 있던 국영 기업
「일본 전매 공사」(담배 산업)이었다.
일본 전매 공사와 교섭을 성공 시켜, 결국 닌텐도 카드의 화투는
담배 유통망을 타 전국에서 판매되게 된다.
그리고 어느덧 「대통령표 화투」는 전국적인 브랜드에 성장해,
화투를 대중의 사이에도 넓게 침투 시켜 번성하게 되었다.
닌텐도 카드는 방지로씨가 명이 다할 무렵에는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닌텐도, NINTENDO, 任天堂」회사명의 유래
방지로가 붙인 「닌텐도」라고 하는 회사명은, 오늘날에 와서는 정확한 유래는 모른다.
열심히 노력하고, 마지막에는 그 성공 여부를 하늘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의미일까.
중국의 고사성어 인사를 다해 천명을 기다린다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닌텐도의 사사에는
인생은 한치 앞이 어둠, 운은 하늘에 맡겨, 주어진 일에 전력으로 임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야마우치 히로시 탄생 -
2대째 츠미라
방지로에게는 후계자가 되는 아들이 없었다.
그 때문애 딸의 데릴사위로서 근면 성실하고 정직한 청년
카네다 츠미라를 맞이해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1929년, 야마우치 츠미라가 닌텐도 카드의 2 대째 사장에 취임한다.
그는, 가업과 달리 부동산업 에도 열심이고,
쿄토의 히가시야마 지구의 토지를 입수해 나간다.
염원의 사내 아이 탄생 -야마우치 히로시-
츠미라와 아내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선대와 같이, 딸뿐이었기 때문에,
장녀의 데릴사위인 이나바록지 승을 맞아들였다.
1927년, 승과 아내와의 사이에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엽기적인것 같지만 그 당시 일본에서는 흔히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ㅡㅡ;)
닌텐도 창업이래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는, 히로시 이라고 명명되었다.
히로시가 5살때, 3대째 뒤를 이을 것이었던 아버지,
승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히로시는 모친으로부터도 떼어져 조부모인 원에게서 자란다.
히로시에게 할머니는, 뭐든지 좋아하는 대로 시켜 주었다.
관습 따라서 엄한 교육도 받았지만, 후계자로서 자유롭게 자랐다.
히로시의 성격은 건방지고 도전적이 였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로, 호기심 왕성한 아이로 자라게 된다.
1940년, 히로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전쟁이 시작된다.
그는 학도 동원에 의해 군수 공장에서 일했다.
1945년, 패전과 함께, 히로시는 아무도 모르게 놀러 가고 싶었다 라는
이유로 쿄토를 떠나 토쿄의 와세다 대학에. 조부가 히로시를 위해서 구입한
시부야의 쇼우토우(고급 주택가)의 대저택으로 옮겨서 살게된다.
대학 생활은,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매일 같이 즐기고 향락적인 생활이였다.
당구에 열중해, 한달에 몇차례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이나 술을 마셨다.
쿄토의 부자 사장의 아들로서 화류계에서도 유명한 그는,
사치와 위세의 즐거운 자유분방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전환기가 찾아온다. 조부 츠미라가 병에 쓰러지고 위독, 임종하게된다
그는 급히 쿄토에 돌아와, 삼대째 사장으로서 가업을 잇게 된다.
그 당시는 그가 21세가 약간 지났을때의 일이다 .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야마우치 사장 취임-
조부의 위독으로, 야마우치가 삼대째 최초의 사내 아이인 야마우치 히로시는
급히 쿄토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임종한 조부 의뒤를 이어서 가업을 잇게 된다.
- 22세의 부자 사장 -
후계자를 유언 하는 병상의 츠미라에게, 야마우치 히로시는
닌텐도로 일하는 야마우치가의 사람은 자신 이외로 필요없다라고 말해,
조부는 조건을 수용해서, 회사에 있던 야마우치가의 사촌형제들을 회사로부터 퇴사 시키게된다
1949년, 조부 츠미라의 타계에 의해,
손자인 야마우치 히로시가(와세다 대학 중퇴) 22세의 젊음나이로 사장에 취임한다.
닌텐도 카드는 작으면서 훌륭한 전국 브랜드이다.
사내에서는 이런 부자로 괜찮은가라고 히로시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로
고위 사원 100명 이상의 비난에 부딛치게 된다.
야마우치는 그런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천성적 결단과 속도 낙관 주의로 위기를 극복해,
젊은데 꽤 하잖아 라는 평가를 획득하게 된다.
1951년, 야마우치는 회사명을 「닌텐도 카드」에 변경해,
다카마쓰 마치에 본사를 옮기게 된다.
생산 기능을 그곳에 집중 시키고 현대화를 추천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히트 상품을 낳는다.
1953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트럼프의 소재에 플라스틱을 채용,
그 제조에 성공했던 것이다. 플라스틱 트럼프는 고급적인 이미지로 알려져서, 대히트를 하게 된다.
지금은 트럼프는 플라스틱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정말로 혁신적인 상품이었다.
1959년에는 판권 획득이 힘들던 디즈니 와의 교섭을 성공 시켜,
디즈니 트럼프를 발매, 어린이용 트럼프라고 하는 신경지를 개척해, 공전의 대히트를 하게된다.
TV에 대량의 선전을 했던것도 대 히트를 기록하게된 원인이다.
더불어 플레이 가이드를 동봉.
이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호평, 매상에도 크게 공헌 하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그는 하드웨어에 소프트 메뉴얼을 부속해서 파는 방법을 알게되어
그 중요성을 알게 된다.
이전의 1956년에, 야마우치는 미국에 시찰을 가게된다.
세계 최대의 트럼프 메이커인 US 프레잉 카드사의 시찰이 주된 목적이었다.
어떤 거대한 대지가 나타날까 라고, 기대속에 두근거리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던 청년 사장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단순하게 작은 중소기업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히로시는, 카드를 업으로 하는 한, 세계 제일이 되어도 이런 것인가라는
큰 쇼크를 받게된다.
1962년, 야마우치는 닌텐도를 주식 오사카 증권 거래 시장 제2부에 상장.
주가도 900엔 전후까지 상승 해 나가게된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지방의 유력 기업으로 상장되어
주주를 위해서 라도 가업인 카드 회사로부터 벗어나 성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다른 사업으로 진출 하는 닌텐도 -
- 탈카드 노선 -
카드 사업의 규모가 생각지도 않게 작음을 보았던 젊은 경영자, 야마우치는,
새로운 비지니스에 차례차례 진출 하게된다.
- 시행 착오의 시대 -
그 당시 부터 야마우치는, 탈카드 노선의 모색을 시작 하게된다.
러브호텔의 경영(자신 스스로도 종종 이용했다고 전해짐)이나,
택시 회사의 운영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 하지만, 어느 것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지금부터는 인스턴트의 시대가 된다 라고 예견,
3분식품 이라고 하는 자회사를 설립, 식품 산업에 도전한다.
뽀빠이 라면이나 디즈니 플릭커 등이 그 예.
그리고 인스턴트 밥이라는 혁신적인 즉석 밥의 개발을 지시 한다.
(현재의 야끼소바 UFO와 같음, 뜨거운 물을 넣어 3분후 뜨거운 물만 버려 먹는 타입)
개발진은, 대학의 연구실에 억지로 간절히 부탁해 어떻게든 상품화에 도달했다.
완성된 제품은 , 퍼져버린 죽같은 제품, 히로시 스스로도 시식하지만,
엄청나게 이상한 맛에 낙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 시작을 결단,
물론 결과는 완전히 팔리지 않고 참패, 드디어 이 길도 단념하게 된다.
설상 가상으로 1964년, 일본이 토쿄 올림픽으로 인한 호황으로 들뜨고 있을 무렵,
닌텐도의 수입을 지탱하고 있던 트럼프 시장이 포화에 이르러, 매출이 제자리에 머므르게 된다.
닌텐도의 주가는 한때 900엔으로부터 급락, 마침내 60엔까지로 떨어지게 된다.
이때 야마우치 사장은 깨닫는다.
오락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 오락 상품이라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것, 자고 일어나면 시장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업으로서 노하우 축적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닌텐도는 창업 시작부터 오락 상품인 화투, 트럼프를 제작해 왔다.
비록 탈 카드라고 해도, 택시, 호텔 경영, 식품 산업에서는 무리가 있었다.
역시, 지금까지 걸어 온 오락의 세계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금 문제도 위험하지 않고 신속하게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닌텐도는 완구분야를 목표로 하게 된다.
60년대 후반부터, 닌텐도는 여러가지 오락 상품을 출시 해 나간다.
젊은이들을 타겟으로한 양면 트럼프 , 훌라후프 붐으로 인한 히프 플립 ,
보드게임에는 운명 게임, 오오하시 거천이 인기 절정때에는 거천의 마작 교실등
여러가지 완구 상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도전해 보았지만 원래 작은 규모의 장난감 시장에 후발 주자로 나서서
전통의 메이커 (토미나 반다이) 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노하우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서로 경쟁해도 , 이렇다 할 이익도 나오지 않고, 사업의 이익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가야할 길은 하나. 즉, 오락의 세계에서 장난감 메이커가 진출하고 있지 않은 분야.
그것이 전자공학 분야였다. 여기 밖에 닌텐도 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전자 공학 분야로 진출하는 닌텐도 -
전자 공학 분야로 진출한, 야마우치는 1965년부터 이공계 대졸자의 채용을 시작 했다.
당초에는, 지방의 중소기업 카드의 닌텐도 에게는 이공계 학생은 와주지 않았지만,
노력의 결실이 서서히 증가해서 조금씩 전자 공학 완구가 개발되게 된다.
- 닌텐도 하드웨어의 아버지 요코이 군페이와 하이테크 완구 -
최초의 출발은, 화투의 제조 라인의 설비 보수의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코이 군페이는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심심풀이로 부서에 있던 기계로 만들고 있던 완구가 야마우치 사장의 눈에 들게되어
야마우치 사장은 닌텐도는 게임 메이커이니까, 게임으로서 상품화해라고 지시.
1966년, 그상품이 울트라 핸드 (800엔) 팔리기 시작한다.
텔레비젼 선전에 힘입어 140만개나 팔렸다.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대히트였다.
이것에 착안 야마우치는 개발부를 신설, 요코이를 설비 보수의 일에서 개발부에 전속 시켰다.
새로운 제품을 제작하라는 사장 명령에 따라
요코이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게 필사로 연구해서, 조금씩 기발한 아이디어가 덧보이는
신상품을 개발 해 나간다.
1968년, 울트라 머신(1480엔)의 개발·상품화.
전기로 탁구공을 발사하는 소형의 기계지만 이것도 대히트.
자이언츠 V9의 초기 무렵의 배팅 센터의 호황에도 힘입어, 3년에 200만개의 매상을 기록.
또 3년 후에는 잠망경을 모델로한 울트라 스코프(2980엔)를 개발.
매출은 가격의 영향으로 이전의 2개의 상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인기는 있었다.
요전에도, 닌텐도의 개발부는 여러가지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일본 그랑프리 F1 인기 전성기에는, 모형 자동차를 발사하는 쇼트 레이서 를 개발
하이칼러의 고급스러움을 매력으로 하는 살맨 트럼프를 발매
자유 연애의 문화가 유행할 무렵에는, 연인의 손을 잡아 애정도를 재는 기계
러브 테스터를 개발
시대의 유행에 더불어, 그 틈새를 포착한 것과 같은 완구를 세상에 내어 놓게 된다.
- 다변화 경영에게 모색 -
그 당시 닌텐도는 다변화 경영의 길도 찾고 있었다.
가정용 간이 복사기 카피 라스를 사무용 기구에 시작해,문구 자나 노트, 학생용 교재도
제작 훌라후프의 유행으로, 새로운 디자인의 운동기구, 유모차 등
여러가지 제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실패. 게다가 고액의 개발비를 투입하고 있던,
회사는 빚에 파묻혀서,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아슬아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 그당시의 상황을 후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회상 -
그 당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돈에 대해 걱정을 했습니다.
상장 기업의 경영자라고 하는 체면도 있어서, 어쨌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만약 기업을 주식에 상장 있지 않았으면 회사를 소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적 부터 돈에 궁할리가 없었던 그도 그 당시에는 돈 떄문에 이리저리 다녔다고 전해짐.
회사를 유지 할 수 있던 기반을 그는 화투, 트럼프라고 했다
수수하면서도 안정된 이익을 올리는 정평 상품이 있었기 때문이 였다.
간신히 1970년에 무렵부터, 닌텐도의 기술진도 점점 안정되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기술과 아이디어가 집결한 획기적인 완구 상품이 개발되게 됩니다.
- 광선총의 대히트 -
1970년, 광선총, 광선총 SP 를 발매.
전대미문의 엄청난 대히트, 해의 완구 업계 탑 세일즈를 기록 하게 됩니다.
휴대 전등의 전구, 전지와 셔터로 소총에서 광선을 발사
태양전지를 수광 센서로서 이용하는 아이디어.
발사 타겟을 동봉해 가격도 5000엔 정도였다.
이 기술을 발전 시켜서 광선총 커스텀 시리즈를 발매 하게 됩니다.
사정거리 100미터를 자랑하는 광선총이였지만, 이 제품은 전혀 팔리지 않게 됩니다.
이유는 필요 이상의 고성능화(소총의 광원에 카메라 strobe를 사용)를 사용해,
가격도 25000엔(현재의 10만엔)과 시장을 무시한 가격 설정이었던 것 때문인지.
광선총의 히트로 날개 돗힌듯 팔려나간 광선총 시리즈이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이 불량품이 속출,
소비자로부터의 반품으로 인해서. 팔린만큼의 큰 이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마우치는 이 상품의 성공으로 인해
전자 공학을 활용한 상품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놀이를 제공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닌텐도가 직접 다루어야 할 상품이다 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당시, 닌텐도는 신사옥을 건축하게 됩니다.
흰 외벽에 쓰여진 NINTENDO 라는 문자가 쿄토의 화투가게로부터 세계의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탈피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 레이져 클레이사격장 -
1973년 봄, 닌텐도는 업무용 레져 시설 레이져 클레이 사격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광선총으로 기른 노하우를 대형 레져 시설로 발전 시켜,
볼링 붐의 유행과 더불어 시설의 포화화를 예측해,
본사 이전에 따른 대지 이용을 생각한 기획 개발이였습니다.
닌텐도는 이것에 사운을 걸고 임하게 됩니다.
성공하면 고액의 부채를 돌려줄 수 있고. 일개의 완구 메이커로부터도 탈피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업을 스포츠로 정착하게 되면, 비약의 대찬스.
쿄토에 오픈한 세계 최초의 실내 클레이 사격장에는,
첫날부터 보도진과 손님이 밀어닥치고 대성황, 곧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잇달아 주문이 오게 됩니다. 히트의 전주곡 이였습니다.
닌텐도는 모든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고액의 투자를 결정,
이 레져 시설용의 자재를 준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져 사격장은은
수개월 만에 맹렬한 기세로 증가해 나가게 됩니다.
- 겁없는 3인방 -
레이져 클레이 사격 시스템에서는, 요코이가 중심에, 프로젝트 담당에는
그가 뽑은 카미무라 마사유키가, 그 아래에는 시즈오카 대학으로부터 입사한
타케다 현양이 배치되었습니다.
요코이는 훗날에 개발 인원 일부를 인솔해 게임 보이 그외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종사하게 됩니다.
카미무라는 훗날에 개발 인원 일부를 통솔, 하드웨어 제작에 종사하게 됩니다.
타케다는 후에 개발 3부의 중심이 되어, 특수 칩이나 메모리, 배터리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후 닌텐도를 지탱 나가는 중요한 3인반이, 이 레이져 클레리 사격의 개발에 집결했습니다.
- 예상치 못했던 오일쇼크 -
그러나 그 가을, 중동 전쟁이 발발, 오일쇼크가 일본을 습격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소비 행동은 신중하게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격장에
손님이 끊기게 됩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제품주문 취소가 잇따라, 외상 판매금의 회수도 않되는 상태에서.
선행 투자로 자재 확보를 하고 있던 닌텐도는 막대한 타격을 받아
다시 한번 또다시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와는 규모가 다른 엄청나게 큰 부채를 안아, 빚더미의 수렁으로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야마우치는 전자 공학의 장래성과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을 대상으로도 놀이를 판매 것도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
새로운 전자 공학 기술의 습득에 계속 힘을 쏟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요코이씨는 이 시기, 회사에 공헌하려고,
여러가지 상품을 출시 하고 있었습니다.
광선총과 16밀리 필름을 사용한 와일드 건맨, 그에 이어
실사 영상을 사용한 과녁 게임 바트르샤크와 스카이 호크를,
빛을 변조파에 태워 전송한다는 광선 전화 LT, 자동 연주기 가능한 전자 북 일렉트로닉 콩가,
왼쪽으로 밖에 돌지 않지만 저렴한 가격의 무선조종 좌익 RX,
벽에 비친 빛을 떨어뜨린다 컨셉의 duck 헌트 등등....
어느 것도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이익에는 좀처럼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닌텐도는 이 후 당분간 청색 한숨의 맵고 괴로운 시대가 계속되어 간다.
오일쇼크란~!!!!!
아랍을 중심으로 한 석유 수출국 단체가, 석유의 가격 인상과 생산 삭감을 밝혔기 때문에,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 석유에 의존하는 일본 경제에 있어 대 타격이 된 것.
주부들의 사이에는 석유 부족→물 부족→사재기하고라고 하는 심리가 발생
가격 인상을 기다려 석유를아끼는 상인들과 함께,
슈퍼에서 비닐 종이가 없어지는 등 큰 소란이 일어난것.
그것과는 반대로 생활필수품이 아닌 오락 산업에서는 도산하는 회사가 잇따랐습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빛으로 나아가는 닌텐도 -
- 미스터 비디오 게임 -
1970년대의 닌텐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거대한 부채를 안고 온갖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터널의 저 편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칼라 TV게임기의 개발 -
1970년대 중순, 미츠비시 전기로부터 칼라 TV게임기 개발의 요청이 온다.
실은 미츠비시 전기는 타사와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개발 도중 그곳이 도산. 공중에 뜬 계획의 인계요청이었다.
야마우치 사장은 성공을 느껴 즉석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
1975년, 미츠비시 전기와 제휴해 텔레비젼 게임의 개발을 개시.
야마우치 사장은 가격이 비싸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처음에 판매 가격으로 부터 원가를 산출하게 했다.
다른 회사의 제품이 2만엔 이상이었기 때문에, 1만엔을 하락하라고 지시.
담당자(카미무라)가 미츠비시와 절충에 절충을 거듭해 최종적으로 야마우치의 주장으로 타결.
1977년, 폰 등 간단한 비디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소프트를 내장한
칼라 TV게임 6, 칼라 TV게임 15를 발매하게 된다.
결과 그 계획은 성공. 판매랭은 100만대정도
닌텐도의 성공에 가세해 다른 회사들도 소프트 내장형태 가정용 게임기를 발매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가정용 TV게임기의 세계에 처음으로 첫발은 내딛게 된다.
이시기의 잡다한 이야기 - 야마우치 사장 개명 -
1977년, 야마우치가 50세를 맞이했을 무렵,
그는 이름을 박에서 부로 개명하게 된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가 사업을 하면서
용무로 전화번호부를 보니, 야마우치 히로시라고 하는 자신과 동성 동명의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것도 그의 직감에 의한 것인지 , 닌텐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 업무용 비디오 게임에 진출 -
1978년, 타이토의 업무용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발매,
다음 해, 전 일본이 열병에 걸린것 같은것 같은 침략자 붐으로.
남녀노소, 아이로부터 샐러리맨까지 모두가 이 게임에 열중해, 붐은 일본 열도를 석권 했다.
(일본의 게임 업계는 이것을 기폭제로서 성장해 나아간다)
야마우치는 이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보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야마우치는 생각하고 있었다 전자 공학 기술을 응용한 오락. 그것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닌텐도는 가정용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늦었지만, 스페이스 피버라는 아류판을 릴리즈해 큰 수입을 얻게된다, 업적은 일단 회복하게된다.
그 스페이스 피버를 첫 출전으로 닌텐도는 업무용 비디오 게임의 분야에 진출,
헬리콥터 파이어, 경찰관, 스카이 소형선 선장, 그리고 레이다 스코프등등...
닌텐도의 개발진은 차례차례로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 간다.
[정보]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2부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미야모토 시게루와 닌텐도의 만남 -
참고로 이글은 일본 사이트의 자료와 제의견이 혼합된 글임을 아시길...
-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에 입사 -
1977년, 미야모토 시게루가 닌텐도에 입사했다.
그는 닌텐도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닌텐도는, 화투나 트럼프는 물론, 아케이드의 게임을 만들고 있거나,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가정용의 디즈니의 보드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이외에 하나 더 완구 장르가 있어, 그곳은 가정용의 광선총으로 노는 게임이나,
가정용의 복사기, 유모차, 문구 등, 여러가지 헨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대로, 트럼프로 살고 있기에,
그 나머지 부서는 헨인을 만든는 회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라면, 헨인것을 기획했을 때에 상품으로 해 줄 것 같은 회사가 아닐까
생각한 나머지 선택했습니다.
미야모토의 아버지 친구가 야마우치씨의 옛 친구 였던 것을 인연으로,
미야모토는 야마우치와 직접 면접을 하는 찬스를 얻게 됩니다.
그는 화첩과 큰 붓를 지참해, 유아용 행거나, 유원지용 시계,
아이가 3명 동시에 탈 수 있는 그네시소를 꺼내 설명을 했다.
그것을 본 야마우치는, 그가 가진 풍부한 독창성에 매력을 느껴서 채용라게 됩니다.
그리고 입사한 미야모토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런데 , 입사하고 보니 트럼프는 생각이상으로 크고,
헨인것의 적자가 재산으로 꽤 위험한 상태였던것이라고 이야기.
당시의 그에게 맡겨진 일은, 인쇄물의 디자인, 카드의 밑글씨 제작,
게임기의 케이스의 디자인(블록 무너뜨리기는 미야모토가 손수 제작) 등이었다.
- Nintendo Of America 창립 -
1980년, 뉴욕의 맨하탄에 위치한 현지 법인
NOA -Nintendo Of America-를 창립. 대표이사 사장에게는, 야마우치의 사위인
아라카와가 오르게 된다.
지금까지의 닌텐도는 자사의 게임을 현지의 타회사에 라이센스 공여하는 형태로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이익이 적었다.
지금부터는 NOA가 수입해 판매 해 나가면 좋다.
라고는 해도, NOA는 설립하고 나서 당분간 업적이 침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라카와 사장은, 샘플 테스트로 호평이었던 업무용 게임기
레이다 스코프를 대량으로 팔아 사업을 확장 계획을 물론.
그리고 자금의 거의를 쏟아 넣어, 레이다 스코프 3천대를 주문 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이다 스코프는, 4개월의 항운 수송의 사이에 완전하게
인기가 사그라들어 버리고 있어 전혀 판매되지 않고
2천대나 재고로 남아 버리게 됩니다.
재고 처리가 곤란한 아라카와 사장은, 게임기 본체는 그대로 두고,
ROM 내용만을 바꾸어 팔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본사에,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 그 기반만 보내도 좋다라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제일 근처 수송이 가까운 지역,
미국의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시애틀로 NOA의 주거지를 옮겼다.
(닌텐도는 시애틀 매리너스의 구단주 한마디로 시애틀 토박이)
- 미스터, 비디오 게임 -
NOA로부터 새로운 ROM 개발의 요청을 받은 본사 닌텐도.
그러나 개발진은 모두 다른 일에 쫓겨 개발부서 프로그래머에게는 그런 여유는 없었습니다.
요코이의 디자이너에 만들게 해라 하는 제안에 의해,
(가나자와공업 대학으로부터) 입사 4년째의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시방서를 맡기게 됩니다.
최초의 구상은 게임&워치의 뽀빠이 게임. (동키콩 탄생~!!!)
요코이와 미야모토의 아이디어로 인해 그유명한 동키콩의 시초가 탄생하게 됩니다
개발자들에게 아저씨라고 불린 이 캐릭터, (훗날 마리오라는 캐릭터로 불리게 된...)
미야모토가 쓴 기획서의 일러스트에는 미스터 비디오 게임이라고 정해지게 됩니다.
후에 NOA의 사원에 의해 마리오 라고 이름이 붙여지게 됩니다
- 동키콩 -
반년 후, 완성한 게임의 타이틀은, 3가지 제목중에서,
닌텐도의 사원이 선택한 동키콩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은 서해안으로 배편으로 보내신다.
1981년, 미국에서 동키콩의 발매가 이루어 지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제한된 목슴의 마리오를 움직여,
애인을 고릴라로부터 구출한다는 스토리로.
플레이어는 여러가지 장애물을 넘어서, 미녀를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러브 스토리성, 룰이 한눈에 들어오는 쉬움,
그리고 재미있는 게임성으로 이게임은 닌텐도 게임 최초로 이체로운 느낌을 가지게됩니다.
- 동키콩의 권리를 타이토에 -
동키콩을 본 일본 기업 타이토(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만든 회사)는
동키콩의 권리를 모두 사고 싶다라고 고액의 금액을 제시해 NOA에 신청을 하였습니다.
(아직 그시기는 동키콩이 그다지 팔리고 있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아라카와는 고민 끝에 , 결국 타이토에 권리를 팔지 않는 방침을 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동키콩은 엄청나게 팔리게 됩니다.
아라카와는지금의 이익이 보다는 장래의 이익을 생각한
이 판단이 올바른 판단 이였음을 증명했습니다.
- 재미로 보는 NOA의 사장 아라카와의 최후 -
90년대 후반 닌텐도의 수장 야마우치 히로시의 은퇴가 예견된 가운데
후계자로 지목된것은 야마우치씨의 사위 NOA의 사장 아라카와씨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마우치씨는 이라카와씨는 닌텐도 이사직에서
해임해 버리게 됩니다
그결과 닌텐도의 경영은 할연구소의 사장 이와타씨를 대표로
미야모토 시게루씨를 비롯한 6인 공동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야마우치씨가 아라카와씨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자신도
친족에게 계승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업관이 판이하게 달랐던점을 들수 있겠습니다
야마우치씨가 보유자금을 두터이 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중소기업적 방식을 띄고 있다면
아라카와씨는 자금으로 무리하게 확장을 하는 형태인 대기업의 기업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게임업계의 불황과 북미 시장에서의 닌텐도의 위축을 본다면
그 당시 야마우치씨의 판단이 옳았다느것을 볼수 있습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대히트~!!! 게임&워치 -
야마우치가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던 전자 공학 응용 완구의 가능성.
70년대에 닌텐도의 경영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 안에서도 닌텐도는,
새로운 전자 공학 엔터테인먼트 로의 모색과 탐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 엄청난 노력과 시행 착오가 결실을 이루어서 ,
마침내 닌텐도 제국 전성기의 신호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전자 공학을 응용한 완구, 휴대형의 게임기라는 제품으로 인하여.....
- 휴대 할 수 있는 소형 게임기 -
어느날, 요코이는 신간선 안에서 샐러리맨이 계산기를 꺼내
심심풀이로 버튼을 누르면서 놀고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 순간 심심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게임기를 생각해낸다.
그는 그 아이디어를 야마우치에게 이야기 하게 됩니다,
야마우치는 세계 제일의 계산기 회사 샤프와 협의 하여
계산기 사이즈의 게임기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휴대용를 염두한 디자인이 설계되게 됩니다.
사람은 앉았을 때 손을 잡는다라는 점을 착안 엄지손가락 으로 밖에 조작 할 수밖에 없다
라는 이유로 가로 모양의 케이스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같은 이유로, 콘트롤러도 단순하게 해, 버튼을 누를수 있을 만큼 크기로 제작되게 됩니다.
- 게임&워치 발매 -
1980년 봄, 세계 최초의 휴대형 액정 게임 머신 「게임&워치가 발매됩니다.
간단히 이용 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한 게임성을 첨가,
성인용으로 가격 설정(5800엔)해,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에게 까지 대히트, 마침내 전 일본에서 붐이 불게 됩니다.
야마우치는 매출을 보고, 게임&워치 시리즈의 시리즈화가 진행되게 됩니다
요코이는 게임 아이디어를 생각해 , 소프트 디자인으로도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 요코이 군페이의 철학 -
요코이가 생각하는 철학에은 지나간기술의 수평사고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 기술이란 최첨단의 것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이용되어 제작이 저렴한 기술을 말합니다
수평사고란 원래있던 용도의 기술을 다른 제품에 사용한다를 말합니다을.
(마치 계산기의 기술이 게임&워치에 사용되었던것 처럼)
게임&워치는 소형 계산기의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5000엔 정도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도,
소형의 액정 TV가 마오서 그 기술이 대중적이 될 무렵 나왔던것입니다.
요코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술자가 자주 착각하기 쉬운점은, 굉장한 기술로 굉장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기술로 수평사고 해야만, 히트 상품이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게임&워치의 전성기
게임&워치는, 전세계에서 판매되어 어느세대 어느나라도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가격은 5000엔 정도였기 때문에, 당시의 완구로서는 결코 싼 것은 아니였지만
이것이 야마우치에게 있어 알려준 사실은 전자 공학 완구는 아이 뿐만이 아니라
어른의 세계에서도 팔린다라는 사실과
오락은, 재미있으면 조금 비싸도 유저는 사 준다라는 확신을 주게 됩니다.
- 멀티스크린 -
야마우치 사장의 게임&워치로 2명의 게이머가 게임을 동시에 즐길수는 없는가라는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해서
2개의 액정 화면을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게임&워치가탄생 하게됩니다.
1982년, 게임&워치 멀티스크린이 등장, 이 제품도 대히트를 얻었다.
(그 밖에도, 칼라 스크린·MICRO VS.SYSTEM 등이 있다. )
- 닌텐도 독점 십자 키의 탄생 -
처음으로 십자 키가 채용된 것은 게임&워치의 동키콩입니다.
지금까지의 업무용 게임이나 가정용 게임기의 콘트롤러는,
조이스틱이나 볼륨 패널이 부착 되어 있었습니다.
게임&워치는 얇고 작기 때문에 그것들은 붙일 수 없었습니다.
요코이는 엷은 크기의의 죠이스틱을 구상 시행 착오를 반복해,
십자형태의 키를 발명 합니다. 십자형태로, 위를 누르면 아래가 떠오르는 구조로,
조이스틱을 보지 않고도 감촉만으로 누르고 있는 방향을 알게되는 제품이였습니다.
게다가 조이스틱에 비해 사용하는 근육이 적기 때문에 조작을 하면서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십자키는 후에 패밀리 컴퓨터에도 탑재되어 단순하고 뛰어난 조작성은
빌게이츠 조차도 미래의 멀티미디어 기기에 탑재하는 것은 십자 키 라고 말하게 됩니다.
게임&워치의 전세계적인 대히트에 인해,
닌텐도는 세계 진출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짊어지고 있던 부채를 모두 반제해,
전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고 수익을 얻는 우량 기업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세계를 석권 하는 가정용 게임기를 등장 시키는 원동력에도 이바지 하게됩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3부~!!!!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본격적인 제국의 건설 패밀리 컴퓨터 -
게임&워치의 세계적인 대히트로 자산을 축적한 닌텐도는.
이윽고 그 자금력을 아케이드 게임에 투자,
동키콩시리즈, 마리오 브라더즈, 아이스 크라이머, 렉킹 크루 등의 히트 상품을 개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게임의 소프트, 하드 두가지 분야에서 힘을 기르고,
노하우를 쌓아 새로운 멀티 소프트 형태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 아타리 VCS의 성공으로부터 -
1977년에 미국에서 아타리가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VCS는 1980년대에 들어오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82년까지 미국에서만 1500만대의 보급을 기록하게 됩니다.
아타리는 카셋트식 방식을 채용한 가정용 게임기로,
카셋트를 바꾸면 새로운 소프트를 즐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닌텐도가 제작해 오던 소프트 내장 방식의 제품은 아니였습니다.
야마우치 사장도 아타리의 부실한 그래픽과 사운드를 보면서
이런 제품은,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혹평을 했지만
야마우치 사장도, 아타리의 대 성공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1980년대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살펴 보자면
1980년을 시작으로 일본,미국의 완구,가전 메이커는 회사마다 가정용 게임기를 연달아 발매해,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 시장은, 춘추 전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 80년대 초반의 주요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기 +
발매 시기 제품명 메이커 CPU(bit) 가격
81/07 카셋트 비전 신기원 4bit 13,500
82/06 인 텔레비젼 반다이 16bit 49,800
82/09 오디세이 2 필립스 8bit -
82/10 태 토미 16bit 59,800
82/11 게임 PC 타카라 8bit 59,800
82/11 막스 머신 줄 실업 수당 8bit 34,800
82/11 다이 도우미 존 야마기와 16bit 34,800
당시의 일본에서는 PC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으로
대부분의 기업이 텔레비젼 게임기의 사양에 PC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제작했습니다.
키보드를 장착하거나 프로그램을 제작 할수 있거나
게임 뿐만이 아니게 범용성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텔레비젼 게임기의 가격은 (일명 취미용 PC) 4∼5만엔이 주류였습니다.
- 닌텐도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 -
적어도 다른 회사가 일년동안에 따라 올수 없는 것을 만들어라.
이것이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야마우치 사장이 개발진에게 내린 명령이였습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회사 제품보다 기술, 가격 양쪽면에 있어
획기적인 제품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야마우치가 설정한 목표 가격은, 9800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능에서는 다른 제품을 능가해야 한다고 야마우치는 이야기 했습니다.
닌텐도의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의 프로젝트 명은 영 컴퓨터
영 컴퓨터의 하드웨어 개발은, 개발 부장, 카미무라 마사유키가 담당 하게 됩니다.
개발 목표는 철저한 비용 절감과 뛰어난 기능
카미무라는 우선, 타사의 게임기를 연구했습니다.
모든 제품이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지만 게임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필요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는 미야모토 시게루 등의 디자이너들과 업무용 게임의 개발 팀과 협력해,
게임에 필요한 요소를 확인해 제품을 게임에 필요한 기능에 결집 시키는것을목표로 했습니다.
중앙 연산 장치(CPU)는 가격적인면에서 8 비트로 결정.
당시 애플 컴퓨터에 사용되고 있던 CPU-6502를 선택 하였습니다.
화상 처리용의 칩(PPU)에는 전용 IC를 개발했습니다.
발색수,스프라이트수, 처리 스피드의 실험을 반복하고 수정해서, 최대수를 결정해 나갔습니다.
- 스타디움 -
닌텐도 가정용 게임기의 개발자들은 패미컴을 스타디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스타디움의 의미는 가정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게임을 즐길수 있는 경기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용 게임 센터라고 정의 내릴수 있겠습니다,
게임 센터의 게임을 가정에서 즐길수 있는 게임기.
그런 컨셉으로, 소프트웨어를 기둥으로 한 하드웨어 개발을 해나가게 됩니다.
-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패미컴의 모습 -
1982년, TV화면을 256×240으로 분할, 하나 하나의 점에 54색의 발색을 할 수 있는
당시의 업무용 게임기의 게임을 재현 할 수 있는 커스텀 칩을 개발.
칩 개발 제휴처인 리코와의 가격 교섭에서.
리코는 납입 가격 2000엔 이내라는 닌텐도의 의견에 난색을 나타내지만,
야마우치 사장의 2년간에 300만개의 구입을 보증 하겠다는 말에
리코는 요구를 수용, 15000엔에 이르는 본체 가격이 실현되게 됩니다.
케이스와 콘트롤러는, 요코이씨가 인솔하는 개발부서의 일부가 담당.
케이스에는 원가가 저렴한 빨강과 흰색의 플라스틱을 사용한 디자인,
방향 지시 패드에는, 튼튼하고 비용의 저렴한 십자키 가 채용되어
버튼은 2개 장착, 2개의 콘트롤러 중 한쪽에는 마이크로폰을 붙였습니다.
+ 83년 발매 주요 가정용 텔레비젼 게임기 +
발매 시기 제품명 메이커 CPU(bit) 가격
83/03 아루카데아 반다이 8bit 19,800
83/05 ATARI 2800 ATARI 8bit 24,800
83/07 태쥬니어 토미 8bit 15,200
83/07 SC-1000 세가 8bit 15,000
83년에 들어서면서, 게임기의 가격대는 2만엔 전후가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토미나 세가는 아직까지 PC의 개념을 기반으로 제작한 게임기였습니다.
반다이는 총력을 기울여서 아루카데아를 발매하게 됩니다.
- 패미컴 본격적인 발진 시동 -
1983년 5월, 패미컴 발매에 앞서, 야마우치 사장의 초심회(도매상 업자) 연설.
이 패밀리 컴퓨터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게임기 제품의 가격은, 14800엔 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도매상은 충분히 팔릴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수 있겠지만
소프트웨어의 재미가 보장되므로 반드시 패밀리 컴퓨터는 팔릴것 입니다.
패밀리 컴퓨터 발매에 있어서 닌텐도의 전략.
1. 저렴한 가격 설정 - 하드는 부모가 아이에게 사주어도 부담이 느껴지지 않을정도의
가격을 목표로 최대한 억제한다.
2. 뛰어난 성능 - PC의 불필요한 기능을 일절 배제해, 게임만을 중시 하는 기능에 특화 시켰다.
3. 소프트 중시 - 게임 소프트를 가장 중시해, 다양하고 충실한 라인 업을 제작한다.
+ 지금까지의 하드로 돈을 버는 전략이 아니라, 하드를 보급 시키고 소프트로 이익을 창출한다 +
그 당시 이미 야마우치의 머릿속에는
유저는 소프트를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하드를 삽니다라는 사실과
유저는 항상 새로운 소프트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것이다.
- 패밀리 컴퓨터 발매~!!!! -
1983년 7월 15일, 패밀리 컴퓨터 일본에서 발매됩니다.
동시 발매 소프트로는, 동키콩, 동키콩 JR, 뽀빠이.
1984년 1월에는 오목, 마작, 마리오 브라더즈가 발매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11월에는 뽀빠이의 영어 놀이, 12월에는 베이스볼, 동키콩 JR의 산수 놀이가 발매.
그 이후에도 테니스, 핀볼, 광선총 시리즈 와일드 건맨, duck 헌트, 호간즈아레이, 골프등이
연이어서 발매되게 됩니다.
패밀리 컴퓨터는 충실한 소프트 라인업 업무용의 소프웨어의 완벽이식, 대전, 사고력 게임으로
인기가 급상승, 발매로부터 반년만에 47만대,
다음 해에는 165만대를 팔아, 닌텐도의 가정용 시장 독주 태세에 들어가게 됩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써드파티와 시장 관리 -
닌텐도는 처음에는, 다른 게임기 메이커와 같이 패밀리 컴퓨터용 소프트를
자사에서만 독점해서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프트 수의 부족과 다른 게임기와의 차별화 전략으로,
야마우치는 서드파티에 참가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생겨난 제도가 닌텐도만의 독자적인 라이센스 공여 제도입니다.
- 아타리 쇼크로부터 -
1982년 2연말, 미국에서 폭발적인 보급을 이룬 아타리 VCS의 거대 시장이 붕괴하게 됩니다.
아타리의 성공에 편승해 다수의 소프트 제작 메이커가 소프트 제작에 참가하게 됩니다,
ATARI사는 소프트 퀄리티 유지를 위한 어떠한 기준이나 제도도 없었으므로
시장에 질이 낮은 소프트가 급증, 소비자는 저질 소프트의 범람으로
소프트에 싫증을 느껴버려 결국 아무도 아타리를 플레이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때는 30억 달러를 넘어가고 있던 시장이, 1억 달러 이하에 급격하게 위축되게 됩니다.
상품으로서 대성공을 거둔 ATARI VCS 시장이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순식간에 세상으로부터 자취을 감추게 되어 버립니다.
이 사건을 지켜본 닌텐도는 사실을을 심각하게 고려해 법률 연구가들과 검토를 거듭한 끝에,
독자적인 기술이나 판매 제도를 고안해, 패밀리 컴퓨터 시장을
관리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게 됩니다.
+ 야마우치의 말 아타리 쇼크에 관하여... +
결국 일어나 버렸군요, 유저들은 비슷한 내용에는 곧바로 질려버립니다.
처음에는 모든것이 새롭기 때문에, 모두가 즐겼습니다.
유저들도 처음에는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유저들은,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내용에는 곧바로 질려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하드로, 수 많은 게임을 즐길수 있다라고 해도,
어느 게임을 즐겨봐도, 그곳에 새로운 재미나 매력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타리 시장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10가지 소프트중 1개에서 2개의 훌륭한 게임이 있으면,
하드유저들의 수요가 집중해서 시장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 백가지의 소프트가 나오더라도 비슷한 내용의 게임이라면,
유저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오락의 세계입니다.
텔레비젼 게임은 오락일뿐입니다. 의식주 같은 생활필수품 이라면 몰라도,
텔레비젼 게임을 할수 없기 때문에 생명에 지장이 있거나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게임은 유저들에게 있어,
막상 사려져 버린다 해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장있다거나 그런일은 없습니다.
재미있거나 새롭지도 않은 게임에, 많은 돈을 지불해가면서 까지
게임을 즐기려는 유저는 없을것입니다
- 시장 관리의 사상 -
패밀리 컴퓨터 시장에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반복된 실패는 절대로 일어나면 안된다는 일념하에.
닌텐도는 하드 메이커가 소프트의 퀄리티를 체크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아타리 쇼크는 피할 수 없다라는 정신으로, 독자적인 시스템을 창안 하게 됩니다.
닌텐도는 우선 상표를 부각시켰습니다.
패밀리 컴퓨터, 패밀리 컴퓨터는 닌텐도의 상표입니다.
패밀리 컴퓨터 관련의 상품의 모든 패키지, 카트릿지의 뒤, 설명서, 잡지나 서적 등에 게재해,
상표를 확립, 닌텐도의 허가 없이는 브랜드에 무임승차 한는 상법을 금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위반할 경우 부정경쟁 방지법으로 대처 할수 있었습니다.
소프트 메이커는 닌텐도의 승낙을 받지 않고는 패밀리 컴퓨터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덛붙여 서드파티가 패밀리 컴퓨터 소프트를 제작하려면
닌텐도와의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제도를 확립,
라이센스 승인을 하기전에 소프트 메이커에들에게 3가지 조건을 약속 받았습니다.
1. 게임 내용에 대해서 닌텐도의 심사를 받을 것.
2. 소프트 제작수를 (닌텐도와 협의한 후) 연간 1∼5개 이하로 제작할것.
3. 소프트 생산을 닌텐도에 위탁해, 수주시 제조비를 먼저 지불 할것.
이러한 관리 방식에 의해, 엄격한 조건아래, 패미컴 시장에 관리되게 됩니다.
닌텐도는, 상표권에 의한 부정경쟁 방지법과
초심회에 의한 유통 지배에 의해 시장을 지키는 구조를 만들내게 됩니다.
- 초심회 -
닌텐도의, 과거부터 조직화하고 있던 완구 유통 회사의 집합체
다이어회를 초심회라고 고쳐 초심회의 판매망으로 패밀리 컴퓨터, 패밀리 컴퓨터 소프트의
유통하게 된다. 초심회는 닌텐도와 일차 도매상의 친목 단체로,
처음은 프레잉카드, 훗날 게임&워치등 상품을 통해서,
대기업 50사 이상의 오류 유통조직으로서 형성되어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의 판매는 피크에는 완구 도매상의 총매상의 70%에 달했기 때문에,
패밀리 컴퓨터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가지는 것과 동시에
유통에 있어서도 닌텐도의 지배력은 강해졌다.
- 서드파티에 개방 -
닌텐도가 최초로 라이센스 공인을 해준 회사는,
당시 컴퓨터 소프트 대기업 허드슨과 업무용 게임기의 최대기업 남코였다.
양 회사는 84년 여름부터 소프트를 팔기 시작하게 된다.
허드슨은 너트&밀크를 발매 로드 러너는 140만개의 대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남코도 팩맨을 비롯한 유력 소프트를 발매하게 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 하게 되는 제비우스는 150만개의 판매량을 올리게 된다.
허드슨, 남코에 이어서, 타이토, 코나미, 캠콤 등등 여러 회사가 참가.
닌텐도는 이 6사까지는 초기 라이센스 기업으로서 우대 했다.
(소프트 발매 갯수 제한 없음, 자사 라인으로 카트릿지 생산 가능등... )
6사는, 패밀리 컴퓨터의 시장점유율에 매력을 느껴 자사의 소프트 개발력을 최대로 활용,
각각의 우수 분야에서 업무용 게임, PC 게임을 이식하게 된다.
연이어 발매되는 인기 우량 소프트들이 아이, 어른, 게임 매니아까지 사로잡아,
패밀리 컴퓨터의 매출을 가속화 시켜, 1984연말의 완구 판매경쟁은 패밀리 컴퓨터 일색이 되었다.
남코나 허드슨의 대 성공을 시작으로 소프트 메이커들이 잇달아 패미컴 참가를 희망하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닌텐도는 수탁 생산 방식으로 전향 자사의 엄격한 시스템을 의무 부여하게 된다.
- 닌텐도는 더빙가게 -
그 당시 야마우치 사장은 하드웨어 제작사는 메이커는 아니고,
더빙가게 라고 생각해 주세요 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의 더빙가게란 소프트웨어를 수탁 생산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있는 하청 기업을 뜻한다.
닌텐도는 이 독자적인 구조를 만들어냄으로 인해서,
위험부담 없이 전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닌텐도의 고수익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구조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반복된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
저질 소프트 범람를 막는 시스템을 구축해,
닌텐도의 지배하에 서드파티를 두어, 스스로의 이익 구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닌텐도의 횡포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타리 쇼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소프트 퀄리티의 유지라고 하는 명목이기도 하다
- 닌텐도에게 있어 새로운 전환점 -
서드파티에 의한 우량 소프트가 패밀리 컴퓨터 인기를 가속화 시키는 중,
닌텐도의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는, 패밀리 컴퓨터의 능력을 잘 살린
전 세계 비디오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게되는데......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4부 ~!!!!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서드파티의 참가에 의해, 패밀리 컴퓨터는 일본 열도를 석권하며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됩니다.
패밀리 컴퓨터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운에,
닌텐도 안에서, 일본 열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는
보편적인 걸작이 태어나게 되는데.....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
1985년 9월 13일, 패밀리 컴퓨터의 인기를 폭발 시켜버리는 소프트가 등장 했으니...
동키콩 마리오 브라더즈에 이어서 미야모토 시게루가 직접 제작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월드로 구성된 게임 세계에는, 독창적인 캐릭터가 돌아 다니고 있고,
불가사의한 장치들이 마리오에게 차례차례 다가온다.
플레이어는 즐거운 공간에서 돌아다니면서 노는것이다.
미야모토는 이 게임에 시각, 청각에 가세해 스스로의 체험으로 얻은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게 된다.
이름하여 마음 감각 마음감각은 설레임이나 두근거림을 충분하게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영화나 문학, 애니메이션과 융합 시켜, 그것을 게임으로 승화 시키게 된다.
이 소프트의 발매와 함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되는 패밀리 컴퓨터,
아이들은 물론 어른, 아마추어, 매니아까지가 이 게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윽고 전 일본열도에서 사회 현상이라고 말해질 정도의 대붐을 일으키게된다.
(훗날 닌텐도는 포켓 몬스터라는 게임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뒤집어 놓게된다)
- 움직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
미야모토는 슈퍼 마리오가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 (시게루 자신의 견해)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즐거워 하니깐. 나는 언제나,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이 있었습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등장했을 무렵으로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는 철학은,
움직이고 있는것 만으로 몇번이고 계속 즐기고 싶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즐기는 사람도 첫번째 스테이지의 최초의 화면 밖에 본 적이 없지만,
이 게임은 너무 좋아라고 말해 주는 것 같은 게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 버리는것에 관해서 - 미야모토 시게루
대화성, 인터랙티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납득 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게임에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 합니다.
마치 이건 자연을 기반으로 만든 모험 정원 같은 것입니다.
향후 기술이 발전해서 기술을 사용해 여러가지 것을 할 수 있도록 되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저들이 생각하는 자연이라고 하는것이,
마치 서로 대화하는것 처럼 만들어 지는것은 어떨까요.
그것을 할수 있다면 유저는 자신이 플레이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카나자와에서 행해진 강연에서, 미야모토는 TV게임을 타미디어와 비교해,
TV게임은 유저 스스로 접하는 영상이라는 발언을 하고 있다.
모험정원 이것이 미야모토가 생각하는 TV게임의 본질인 것이다.
(훗날 1996년 닌텐도는 슈퍼 패미컴의 후속 기종인 닌텐도 64를 발매하게 된다.
동시발매 타이틀인 슈퍼 마리오 64는 그가 항상 꿈 같이 주장해온
모험정원의 현실화로 유저 평론가 할것 없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3D게임의 이정표 같은 작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또 다른 계획이던 유저와 개발자간의 대화 인터렉티브한 게임을
닌텐도는 64DD라는 하드웨어로 실현하려고 하지만
발매 타이틀의 부제와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으로
미야모토의 또 하나의 꿈은 닌텐도 64의 후속 기종으로 미루어 지게된다.)
- 미국에서 NES 발매 -
1985년 연말부터 NOA는 미국에서 패밀리 컴퓨터 발매를 시작 했다.
아타리 쇼크로 인해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시장은 사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NOA는 비디오 게임기로의 이미지가 아닌,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TV를 사용한 새로운 완구의 이미지로 판매하기 시작 했다.
그 당시 판매 촉진으로서 동봉시킨 제품을, 요코이가 만들었다
광선총 시스템과 광선총 기술을 응용한 로보트 시스템 블록과 자이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없었던 재미있는 물건이라는 평가를 얻어,
서서히 소비자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북미에서 NES가 서서히 알려지고 있을 무렵
일본 닌텐도가 개발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NES 본체에 동봉해 팔기 시작 하게 된다.
슈퍼 마리오의 인기로 NES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
1988년까지 북미에서만 700만대를 판매하게 된다.
(아이에게 Let's play Nintendo!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NES는 폭발적 인기를 모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도 패밀리 컴퓨터(NES)는 맹렬한 기세로 팔리게 된다.
NOA의 당초 예상한 연간 1억 달러 목표의 매상이,
100억 달러로 엄청나게 상승,
닌텐도는 전세계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거대기업으로 입 후보 하게된다.
- 키잉시스템 -
미국에서는, NES의 성공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해적판 소프트가 난무하게된다.
NOA는, 전술적 라이센스 공인 시스템만으로는 시장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여기에 대응해 NOA는 소프트의 불법 복제를 막는 보안 시스템을 개발한다.
게임 카트릿지에 복제를 방지할수 있는 메모리를 내장,
하드에는 복제 카트릿지를 진단할수 있는 마이크로 컴퓨터를 내장 해서,
만약, 불법 라이센스로 카트릿지를 만들어도,
하드웨어 내에서 감지해 소프트가 인식되지 않는 구조를 개발 해내게 된다.
그리고 닌텐도는 이 시스템을 특허권과 저작권에 등록 하게된다.
소프트 개발사 입장에선느 닌텐도와 라이센스 계약을 하지 않으면
카셋트에는 인식 칩이 내장 되지 않기 때문에 게임이 실행되지 않는 구조인것이다.
이렇게 해서 패밀리 컴퓨터는 일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TV게임 시장을 완전히 제패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일, 미의 TV게임 시장은 패밀리 컴퓨터에 의해 엄청나게 팽창, 발전해 나가게 된다.
시장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야마우치는,
자신의 새로운 구상의 실현을 향해 도전을 시작하는데......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5부~!!!!
- 야마우치의 디스크 시스템 구상 -
패밀리 컴퓨터의 대 성공에 힘입어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에 여러가지 주변기기를 접목시켜,
정보 단말기의 용도로서 다목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장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위해서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의 뒤편에 확장 커넥터를 장착 시켰습니다.
이미 패밀리 컴퓨터에는 PC 애플과 같은 CPU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를 홈 컴퓨터 만들려는 장대한 계획을 시작 하게 됩니다.
- 패밀리 베이직 -
닌텐도가 허드슨과 공동으로 개발한 패밀리 베이직은,
패밀리 컴퓨터에 베이직 언어를 탑재한 카트릿지를 삽입해,
카트릿지를 키보드와 연결 시킨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패밀리 베이직의 기능은 패밀리 컴퓨터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제작할수도 있고
모니터 상에서 음표를 배치해서 간단한 음악을 연주 할수도 있고,
간단한 워드프로세서 기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가 워드프로세서나 가계부 등의 기능으로
기존의 PC를 대체할만한 잠재 능력이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패밀리 베이직이 널리 보급된다면 패밀리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나 PC의 기능으로서의 정보 기기의 표준 규격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능이 게임의 기능에 최적화된 메모리의 한계로인해서
PC로서의 기능은 어중간 할수 밖에 업었습니다.
간단한 프로그램과 음악은 만들수 있었지만, PC로서의 기능 미달로 야마우치의
첫 구상을 계획으로만 끝나게 됩니다.
- 패밀리 베이직 V3 -
패밀리 베이직의 계획에서 교훈을 얻게된 닌텐도는
다시 한번 허드슨과 손잡고 패밀리 베이직의 버젼업 판인 패밀리 베이직 V3를
드디어 개발 판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의 PC기능과 비교해서 조금은 개량되었지만
역시 간단한 프로그램 밖에 만들수 없었고, PC로서의 기능 부재로
시장에서의 매출도 부진, 유저들에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습니다.
- 디스크 시스템 -
패밀리 컴퓨터 발매가 2년이 지날 무렵
1985년 중순 닌텐도는, 소프트의 발매의 증가와
반도체 가격의 상승으로 인해서 카트리지의 가격이 상승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닌텐도의 눈에 들어 온것이, 전자 부품 제작사
미토미가 PC 전용으로 개발한, 퀵 디스크 라고 하는 외부 기억장치 였습니다.
PC의 플로피 디스크와 비교해서, 비용이 저렴하고, 구조도 단순해
대량생산의 조건에도 부합, 패밀리 컴퓨터용의 외부 기억장치로 상당히 적합했습니다.
게다가 카트릿지의 용량이 롬 카트릿지 보다 크기 때문에
소프트 내용의 발전 역시 도모 할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의 가격도 카트릿지는 5000엔을 넘어 갔지만,
디스크 시스템으로 낸다면 3000엔 정도로 절감 할수 있었습니다.
이런 장점에 매력을 느낀 닌텐도는, 미토미와 교섭에,
100만개의 수주 조건을 제시하게 됩니다. 미토미가 조건을 받아 들임으로서
15000엔 정도의 당시의 디스크 드라이버의 가격으로는 경이적인 저 가격이 실현되게 됩니다.
- 디스크 시스템 발매 -
1986년 2월 21일, 디스크 시스템의 발매와 동시에
전국의 매장에는 디스크 라이터의 설치를 개시하게 됩니다.
디스크 시트템의 장점으로는 대용량, 선명한 사운드, 저장이 간단하다 등의 장점으로
닌텐도는 디스크 시스템으로만 소프트를 공급하지 한다는 구호와 함께
전국에 디스크 라이터 1만대 설치를 약속함으로써,
패밀리 컴퓨터의 뉴미디어를 캐치프라이즈로 내걸게 됩니다.
디스크 시스템은, 발매년도에만 224만대를 팔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 젤다의 전설 탄생 -
디스크 시스템 발매와 함께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미야모토 시게루가 제작한 젤다의 전설을 들수 있습니다
젤다의 전설은 디스크 시스템과 같이 발매되어 3개월에 50만개를 판매하는 인기를 모으게 됩니다.
미야모토가 제작한 액션 RPG인 젤다의 전설은,
가정용 게임 최초의 RPG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작품이였습니다.
미야모토가 창조한 필드맵 시스템과 로드 타이틀 시스템은
향후 발매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RPG 드래곤 퀘스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미야모토는 젤다의 전설을 제작할때 마리오와 같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체험을 기반으로
비디오 게임 역사상 가장 완벽하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의
독보적인 게임 인터페이스와, 시스템. 세계관을 제작하게 됩니다.
- 발매 1년후의 부진 -
디스크 시스템은 발매 년도에는 200만대 이상을 팔정도로 호조 였지만
87년에 75만대, 88년에 29만대, 89년에 11만대와 같이
하드의 매상이 해가 갈수록 점점 감소 합니다.
원인으로는 서드파티에게 디스크 시스템 라이센스가 엄격해서,
유력 소프트가 디스크 시스템으로 발매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기술의 발전으로 카트릿지의 가격이 하락,
디스크의 용량이 디스크 시스템보다 앞세게 되고
배터리 백업 시스템이 개발되어, ROM 카셋트로도 저장이 가능하게 되는 등
기존 디스크 시스템의 장점이 모두 카트릿지로도 실현됨으로서
디스크 시스템만의 장점이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으로 유저의 입장에서는 디스크 시스템의 로딩이 스트레스로 작용,
하드웨어 자체의 악평도 있었습니다.
결국 디스크 시스템은, 서드파티에게도 소비자에게도
패밀리 컴퓨터의 반향을 다시 얻을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아직도 닌텐도는 디스크 시스템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 패밀리의 네트워크 시스템 -
디스크 시스템의 발매 이후 야마우치는, 시장의 한계가 보여지는 TV게임 사업을 넘어서,
수요의 큰 통신사업으로의 사업 변환을 시도 하게 됩니다.
1988년, 야마우치는 패밀리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통신 네트워크의 구축을 시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패밀리 컴퓨터 네트워크에 서비스를 들자면
우편발송, 에금, 계좌 이체, 주식 거래, 홈 뱅킹, 마권등록, 서점, 통신교육 등등의..
다양한 용도의 서비스가 시작되지만, 어느 부분도 크게 성공 하지는 못합니다.
패밀리 컴퓨터 단말기는 나름대로 보급되지만,
외적인 요소로 인해서 출발부터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로 패밀리 컴퓨터는 아이용 완구 이므로 금융 거래는 무리가 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패밀리 컴퓨터를 사용한 통신교육이나 유저들의 인식은 전무한 상태 였습니다.
역시 최대의 문제점은 통신 환경이였습니다.
일본의 일반 가정에게는 전화회선이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시간 사용시 통신에 부과되는 요금도 네트워크 보급의 장애 요소 였습니다.
결국, 디스크 네트워크를 도입한 가정은 전국에서 13만 가구에 그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마우치 사장은 모든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얼마 못가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네트워크 사업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패밀리 컴퓨터의 기세는 약해져 갑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도 세가나 NEC가 닌텐도에게 도전
닌텐도는 새로운 게임기의 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닌텐도, NINTENDO, 任天堂 6부~!!!!
- 요코이 군페이의 역작 게임 보이 -
80년대 초반 전세계에서 큰 인기를 모은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와치는 기본적으로 게임기 자체에 내장된 한가지 게임 밖에 즐길수 없었습니다.
유저의 입장에서는 다른 게임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되면
다른 게임이 내장된 게임기를 사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프트 내장 방식의 게임&와치로 부터 8년,
요코이 군페이를 중심으로한 1 개발부는, 카트릿지로 소프트를 교환할수 있는
방식의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 휴대용의 패밀리 컴퓨터 -
게임보이의 개발 슬로건은 패밀리 컴퓨터 보다 싼 가격으로 유저에게 공급한다 였습니다.
이 과제가 멀티 소프트 형태 휴대용 게임기에게 요구되는 지상 명제였습니다.
휴대용 이니깐, 액정 모니터를 장 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저렴한 가격으로 컬러 액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흑백 액정에 게임&와치의 경험을 기반으로 샤프와 협력해 개발 하게 됩니다.
당초 계획은 게임&와치에 사용 된 계산기용의 TN액정을 채용했습니다.
요코이는 샤프가 TN액정으로 만든 시 제품을 보고 합격 판정을 내리게 됩니다.
샤프는 40억엔을 투자해서 게임보이 액정 전용 제조 공장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샤프의 시 제품을 본 야마우치 사장은 뭐야 이건. 외관이 이상 하잖아 라고 코멘트.
확실히 게임보이는 게임&와치 보다 본체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액정을 정면으로 보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마우치의 게임보이에 대한 외관 액정에 대한 부정적 코멘트로,
한때는 생산을 하지 말것인가 의견이 나와서 요코이는 절망의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코이는 반드시 성공할것이라는 신념으로 다시 한번 개발에 나서게 됩니다.
두번째 개발 도중에 채용된 액정이 STN 액정 입니다.
STN 액정은, 정면에서 선명하게 보이지만. 화면 스피드를 증가 시키면
콘트라스트가 떨어져 버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인간의 눈이 콘트라스를 자연스럽게 보정해 준다는 사실을 요코이는 발견.
요코이의 두번째 액정 개발 시도는 뜻하지 않게 성공하게 됩니다.
요코이의 노력으로 드디어 액정 화면과 스피드를 모두 만족 시키는 액정 모니터가 완성되었습니다.
- 야마우치가 게임보이의 화면을 흑백으로 만든이유 -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의 인터뷰 중에서...
컬러 화면이 일반화 되는 시대에 흑백 액정을 채택한 게임보이는,
다른 회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닌텐도가 조금 이상한게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팔리지 않을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게임보이의 장점인, 어디서나 언제라도 즐길수 있다는점.
기차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산에서도,
어디에서나 휴대하기만 하면 즐길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였습니다.
나 자신은 요코이와 함께 이 상품은 일본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크게 성공할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칼라 액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기술로는
태양 아래에서 화면을 보면 빛의 반사로 인해서 잘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3개의 건전지를 사용해서, 흑백 액정의 10분의 1정도의
지속 시간밖에 유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휴대용이라는 용도로는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품으로는, 휴대용 게임기로서의 유저들의 좋은 평가를 얻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닌텐도는, 게임 보이의 액정을 흑백 액정으로 채택했습니다.
- 게임보이 발매 임박 -
휴대용 게임기의 개발을 총괄하는, 요코이는
원가 절감을 위해서 깎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깎았지만,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큰 재미를 얻을수 있다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게임보이에 통신 기능을 장착하게 됩니다.
이 통신 기능으로 게임 보이를 통신케이블로 연결해서
다른 사람과 게임 데이터의 주고 받으면서 즐길수 있었습니다.
당초 게임보이의 전원은 아답터에 의한 충전식을 기본으로 개발었지만,
야마우치 사장은 외국인은 충전해서까지 즐기지 않는다 라고 다시 한번 코멘트
충전식에서 전자식에 변경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를 첨부한 휴대용 게임기가 탄생 하게 됩니다.
게임기의 명칭은, 카피라이터 이토이 시게자토가 게임보이라고 이름 붙이게 됩니다.
- 게임 보이 발매 -
1989년 4월 21일, 일본에서 게임 보이 발매됩니다. 12800엔의 저가격과 더불어서
알칼리 전지 4개로 35시간이라는 긴 사용시간.
동시 발매 소프트는 슈퍼 마리오 랜드, 테니스, 블록 무너뜨리기 3가지
소프트의 가격은 2600엔대로 당시의 소프트 가격으로는 최대한 낮춘 가격이였습니다.
게임 보이는 발매되자 마자 아이, 어른 가릴것 없이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게 됩니다.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즐길수 있는 매력에 곧바로 매료 되었고,
샐러리맨이나 OL는 직장의 휴식 시간에 즐기면서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닌텐도는, 게임 보이 라고 하는 제품을 내어 놓으며
일 인당 1대의 휴대용 게임기라고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됩니다.
- 소니의 게임맨 -
당시, 소니도 게임 보이와 비슷한,
액정 화면을 사용한 멀티 소프트 휴대형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 당시의 소니의 모습을 본다면 충분히 개발될 만한 제품이였습니다.
그당시의 소니는,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휴대형 카셋트 플레이어 워크맨을
출시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비슷한 형식의 휴대형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었던것.
하지만, 닌텐도의 게임 보이의 폭발적인 대히트로 인해, 소니의 계획은 기획으로만 남게 됩니다.
- 닌텐도 테트리스의 판권을 사다 -
NOA의 아라카와는, 업무용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던 게임 소프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게임은 러시아의 한 개발자가 계발한 테트라스라는 퍼즐형식의 게임이였습니다.
테트리스는 최초 판권은 소련으로부터, 영국의 미러사가 판권을 취득했습니다.
미러사는 1987년에 PC판 테트리스를 발매.
그리고 미러사에게서 아타리사가 권리를 취득해서 업무용 테트리스를 제작,
자 회사 텐겐이 NES용으로 제작해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타리사로부터 세가가 일본판의 업무용과 메가 드라이브용의 권리를 취득,
텐겐으로부터 BPS가, 패밀리 컴퓨터용과 PC용의 권리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보이 에게 테트리스가 필수 불가결이라고 생각한 닌텐도는,
휴대용 게임기 판권을 취득하려고, 소련에 사자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실제로는 소련측이 휴대용은 물론, 가정용 게임기로의
판권도 팔지 않았다는 사실이 판명 (미러사는 PC 전용의 판권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시 NOA의 아라카와 사장이 소련으로 날아와서,
가정용 휴대용 양쪽 모두의 권리를 수천만달러의 가격을 제시해서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을 여파로 아타리사와 세가사, 양 회사가 취득하고 있던 판권은 가짜라고 판명,
닌텐도로 부터의 판매 중지는 어쩔 수 없게 여겨지게 됩니다.
세가는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너무 경솔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대전형태 테트리스 -
요코이는, 게임 보이 전용으로 개발을 시작한 테트리스를 철저하게 연구해서,
조작성을 개량하고, 새로운 게임성을 부가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통신케이블을 이용한 대전을 형태의 테트리스 입니다.
플레이어끼리 방해 블록등으로 상대측을 공격 할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전중에 상대의 화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심리전을 유발하는 독자적인 게임성을 창조했습니다.
1989년 6월 14일, 대전형태의 테트리스가 발매. 동시에 게임보이용 통신케이블도 발매됩니다.
곧바로 동시 발매 소프트인 슈퍼 마리오 랜드에 필적하는 압도적인 인기를 얻음으로서,
슈퍼마리오와 테트리스는 게임 보이와, 함께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대붐이 일게 됩니다.
이 2가지 제품은 게임보이와 세트가 되어
전 세계에 발매되어 어떤 나라에서도 빠짐없이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1억대 이상을 판매한, 게임 보이는 세계 공통어가 되었습니다.
훗날 야마우치 사장의 회고를 들어보자면
테트리스라고 하는 소프트는, 단순하고 플레이 하기 쉬워서,
아이, 어른을 막론하고, 인류 공통으로 즐길수 있었던 소프트 였습니다.
게임보이라고 하는 하드웨어를 단기간에 여기까지 성장 시켰다는데에는
슈퍼 마리오와 함께 부정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 다른 회사들의 진출 -
게임 보이의 성공을 계기로, 뛰어든 회사들은
게임보이를 능가하는 칼라액정의 휴대용 게임기를 발매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게임기로는 세가의 게임 기어, 아타리의 lynx (links), NEC PC엔진 GT등이있지만,
어느 하나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게 됩니다.
- 새로운 시장의 개척 게임보이 -
요코이 군페이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와치는
게임 보이로 진화를 해서 휴대성, 멀티 소프트 형태의 게임기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게임보이의 통신기능을 극도로 살려낸 게임
사토시와, 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의 한 일러스터 3명이 만들어낸
포켓몬스터로 게임보이는 다시 한번 80년대 후반의 영광을 재현하며
최근들어서는 게임보이 어드벤스로 휴대용 게임기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