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 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
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로 신발이 더럽다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섞여 화장실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
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
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고
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 잡지에서
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
떠들다보면 그것도 꿈이다
지금도 밤늦게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
사진관집 이층
신경림, 창비시선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