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위 불란서 여인이 노래한다
이 서신은 결코 소리 내어 읽어서는 안 되오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소 은신처에는 그 어떤
소식도 당도하지 않소 무한의 어둠 속에 있소 이곳에서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최소한의 불빛만이 필요하오 무한의
어둠 무한의 음악, 역병이 창궐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숨어
지내고 있소 일부러 숨은 건 아니지만 세상에 정체를 드러
내기 싫은 예술가의 칩거 정도라 말해 두겠소 불 꺼진 세
상에 저녁이 오면 나는 조용히 깨어나 최소한의 불빛에 의
지해 수신인 불명의 서신을 적소 이 서신은 결코 소리 내
어 읽어서는 안 되오 이것은 역병이 창궐한 시대 불란서 고
아에게 보내는 침묵 서신이기 때문이오
서신을 읽는 동안 담배 한 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동
봉하오
그대가 불란서 고아가 아니라고 해도 좋소 담배를 피우
지 않아도 좋소 어쩌면 글을 읽는 동안 칠흑의 어둠과 촛
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거리의 등불들을 다 끄고 온
마음이 책상 앞에 앉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질 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이 서신을 읽으시
오 무명 삼베처럼 서걱이는 마음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눈
물 한 방울 고이거든 창문을 열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시오
삶은 어쩌면 그대의 숨결 속에 있을 게요
침묵이 이루는 광대한 대평원을 다 돌아보려면 말 한 필
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동봉하오
농담이었소
창문을 잠시 열고 역병이 창궐한 세상을 바라보며 프란
체스코 교황의 안부를 잠시 걱정했을 뿐이오
나는 원래 교황을 좋아하지 않소 포프보다는 차라리 파
이프가 좋소 묵직한 담배파이프를 보면 질 좋은 담뱃잎을
파이프 가득 채우고 양지바른 담벼라가 아래 쭈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담배나 피우고 싶소 그것이 예술가의 본질적 삶
이라 생각하고 있소 역병으로 우리 곁을 떠난 루이스 세플
베다를 추모하며 창문을 열고 담배 한 대를 피웠을 뿐이
오 프란체스코 교황의 안부를 잠시 걱정했을 뿐이오 나는
부디스트도 카톨릭,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신자도 아니오
내 유일한 종교는 시요 그나마 내가 쓴 시의 유일한 독자
는 나요 시가 아마 이 세상을 구원할 게요 아니 어쩌면 침
묵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을 게요 왜냐하면 침묵은
가장 첨예하게 확장된 시이기 때문이오 침묵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있을 게요 만약에 이 세상이 구
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요
짐 자무시가 만든 어느 가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소
늙은 공산주의자 같은 그의 모습은 뭔가를 생각하게 하오
숲에 가면 낯선 것들이 많소 그러나 현실을 기록하면 그
것은 가장 낯선 것이 되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오늘
은 낯설고 아름답소 불 탄 종탑에는 누가 살았던 것도 같
소 콰지모토의 얼굴을 하고 누군가 가림막에 둘러싸인 옛
거주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오 목조 건물이 쉽게 불타오르듯
아름다운 상상은 쉽게 불타오 그래도 인류의 추억은 대부
분 목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에스메릴다를 닮은 그녀는 불
란서 고아처럼 말하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유령처럼 배
회하던 거리는 텅텅 비었소 이제는 진자 유령들만이 바람
에 떠밀려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소 어둠은
한 마리 검은 말을 타고 다가오오 검은 말 위에 앉아 누군
가 하염없이 밤의 지평선을 바라보오 고독과 침묵이 이룩
한 광대한 밤의 영토요 어두운 거리를 떠돌던 삼총사는 이
미 고향으로 돌아가고 달타령을 부르는지 달사냥을 떠났는
지 달타냥은 보이지 않소 리산은 아마 아일랜드로 갈 것이
오 강정은 옥이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창문을 열
고 담배를 피우고 있소
이곳엔 이제 아무도 없소
위 위 불란서 여인이 발음하는 긍정의 소리만이 멀리서
아름답게 들려오는 밤이오
은신처로 연락 주시오 주소는 동봉하지 않소 안녕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박정대, 민음의 시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