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4409 ('스카이나이츠, 아이돌마스터! (10)")
-----
샬럿은 눈을 떴다.
벌써 다음 연극에 나갈 때가 됐나? 그런데 배우대기실이 왜 이렇게 어두워? 난방은 왜 또 꺼져 있지? 으, 추워.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그녀는 배양액 속에서 일어났다. 공연중이 아닐 동안 바이오로이드들을 장기 동면시키는 실린더의 생명유지액이 물결치며 그녀의 풍만한 알몸에서 뚝뚝 떨어졌다. 젖으니 더 춥네! 으흐흐! 하고 그녀는 덜덜 떨며 이번 연극에서 자기가 입어야 할 옷을 찾았다. 어두워서 옷장은커녕 분장실로 들어가는 문조차 못 찾을 지경이라 샬럿은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비틀비틀 더듬더듬 길을 찾았다. 이러다 몸에 멍 들면 출연을 못 할 텐데, 하고 그녀는 투덜거렸다. 간신히 분장실로 들어온 그녀는 짜증스럽게 조명등 스위치를 두드렸다. 다행히 전기가 아주 나간 건 아닌지 깜빡, 깜빡이면서 분장실이 어둑어둑하게나마 밝아졌다. 아주 어두워서 간신히 눈앞이나 겨우 보일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장실에서 샬럿 전용 기사복을 챙겨 입을 정도는 되었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샬럿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쐐 오랫동안 실린더 속에서 잤던 건지 배가 고팠다. 그러고보니 배우대기실 뒤편에 배우들이랑 스태프들 먹을 거 쌓아 둔 냉동창고가 있던 걸로 아는데.
“아니, 이 사람들 피난이라도 갈 작정인 거야?”
불행히도 냉동창고의 냉동기도 꺼져 있었지만, 반지하에 습도조절도 훌륭해서 냉동창고의 온습도는 일정한 서늘함으로 유지되고 있던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샬럿을 놀라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창고 안에는 온갖 종류의 통조림 - 참치부터, 복합 영양 배양육까지 - 가 가득 들어차 있던 것이다. 거기다 여러 가지 생필품까지 꽉꽉 알뜰하게 비축되어 있었다. 누가 보면 여기서 살림이라도 차리고 평생 먹고 살 작정인 줄 알겠다. 정작 그걸 먹고 쓸 사람들은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는 게 문제지만.
‘햐, 이거 나 혼자 다 먹으려면 백 년은 걸리겠는데’
그녀는 이 알쏭달쏭한 상황에 실없는 고민이나 하면서 배우대기실로 돌아와 두리번거렸다. 동료 배우로서 옆의 실린더에서 잠긴 채 대기하고 있어야 할 모모도 카엔도 요안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실린더에 아예 불이 꺼져 있었다. 가만 보니 금도 좀 가 있는 거 같은데. 용액이 다 샜나? 그 안은 텅 비어 있었고 거기 있었어야 할 동료 배우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이하게 불이 켜져 있는 실린더는 방금 샬럿이 깨어난 그녀의 실린더와 그 건너편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다음 연극의 주인공의 것이었다. 샬럿은 그 실린더로 다가갔다. 그리고 실린더 옆 한 켠에 떨어진 포스터를 주워들었다.
고고한 여기사 샤를로테! 사악한 악당들로부터 다프네니아 공주님을 지켜라!
지난 시즌에 비열한 악녀 바바리아나로부터 훌륭히 왕국을 지켜낸 여기사 샤를로테! 이번 무대에서 그녀는 왕국의 셋째 공주 다프네니아 공주를 이웃나라 라오게니아로 호송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허나 그 정보를 입수한 불한당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용맹한 기사 샤를로테는 이번에도 수많은 마의 수하들을 물리치고 종국에는 거대한 촉수괴물을 물리쳐 공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연극을 관람한 어린이 친구들에게는 사은품으로 백토에게 정의로운 최후를 맞는 뽀끄루 대마왕의 디오라마를 증정해요!%
<이 연극은 전체 이용가입니다.>
“음, 이번엔 얼마나 죽여야 하는 거지”
샬럿은 콧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마 연극이 시작되면 죽어나갈 바이오로이드들이 좀 많을 것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게’. 덴세츠 사의 모토에 따라 여기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바이오로이드고, 모두가 진짜로 싸우고, 진짜로 죽는다. 샬럿쯤 되는 비싸고, 또 주연배우쯤 되는 바이오로이드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엑스트라 악당으로 출현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은 보통 불량품이거나 다쳐서 폐기되기 직전의 것들로서, C구역 대신 재활용 개념으로나 여기 오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샬럿이라고 그런 자들을 베어넘기는 게 유쾌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승부가 일방적이진 않았다. 그녀들에게도 샬럿을 쓰러뜨릴 기회는 있는 것이다. 샬럿은 아직까지 한 번도 져본 적 없지만, 언제나 그녀가 쓰러질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개중에는 극의 긴장감과 극적 연출을 위해 가끔은 샬럿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인간님들이 강제로 신체강화를 해 놓은 - 그런 자들은 보통 살아남아도 연극이 끝나고 얼마 못 가 몸에 걸린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 자들도 있느니만큼 그녀라고 늘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다시 말하건대 이 연극은 ‘진짜’다. 대본은 있지만, 연극의 흐름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극단 소속 아르망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스토리를 조율한다. 바로 그렇기에 첨단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연출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도 연극이라는 장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인간님들로부터 교육받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흥행이라고 말이다.
‘이번 연극의 결말은 어떻게 되려나. 이번 무대는 흥행할까?’
연극의 매 순간 순간이 목숨이다. 그건 엑스트라뿐만이 아니라 이 극단 최고 배우인 샬럿도 마찬가지다. 대본은 만들어져 있고 그건 그녀가 실린더 안에서 잠자고 있을 때부터 이미 모듈에 입력되었지만, 그녀는 이 연극의 결말이 ‘열린 결말’임을 알고 있었다. 연극의 결말이 어찌 될지는 오로지 ‘배우’들의 출연 시기와 그녀들 - 혹은 ‘그것들’ - 의 상태를 미리 조율해서 내보내는 제작진들 - 과 아르망 - 만이 예측할 수 있다. 솔직히 샬럿 자신도 이 연극이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했지만, 첫째, 극작가님이 바이오로이드인 그녀에게 구태여 알려 줄 거 같지도 않고, 둘째, 물어보고 싶어도 인간님들 지금 코뺴기도 뵈지 않는다. 뭐, 됐다. 그녀는 더 생각하기 귀찮았다. 원래 그런 거 깊이 생각하는 성격도 아니고, 극단 소속 아르망이 다 알아서 하겠지 뭐. 마지막에 나온다는 ‘촉수괴물’ - 아마 AGS를 개조해서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스킨 씌워놓은 물건일 거다 - 이란 녀석이 좀 신경쓰이긴 하는데, 아마 괜찮겠지. 원래 생각하는 거 귀찮아하는 성격 - 샬롯 기종이 원래 그런 경향이 좀 있다. 하긴 설정이나 개연성 같은 거 시시콜콜 따져가면 연극 못한다 - 인 그녀는 신경 끄고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내가 지켜드려야 할 공주님이다 이거로군”
알몸으로 잠든 채 생명유지액 속에 담겨 있는 다프네는, 비록 원래 연극용으로 제작된 바이오로이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갈하고 기품 있는 공주님의 느낌이 났다. 의상만 잘 입히고 분장 좀 해 주면 분명 훌륭히 공주 역을 소화해 낼 것이다. 샬럿은 씩 웃고는 실린더에 콩콩, 노크했다.
“지켜드릴 테니까, 멋진 공연 기대한다구요, 공주님”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몰라도 일단 무대에 가보면 상황이 어떤지 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런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그녀는 무대로 나아갔다.
...
무대는 샬럿의 상상 이상으로 휑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먼지와 부서진 잡동사니만이 굴러다녔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건지 곰팡내마저 풀풀 풍겨오자 그녀는 인간님들이야 변덕이 심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청소AGS들까지 단체로 휴가를 나간 거냐고 의아해했다.
이 극장은 완전 자동화되어 있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AGS나 다름없다. 따라서 관리하는 인간이 한둘 없더라도 건물이 스스로 알아서 내부를 청소하고, 실린더 안에서 동면 상태로 대기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건물을 유지 관리 보수한다. 건물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 정도로 무대가 난장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바보긴 했지만 배우로서의 프로의식만큼은 진짜인 샬럿은 슬슬 진짜로 화가 나려 하기 시작했다. 무대가 이 꼬락서니여서야 관객들에게 제대로 된 공연을 보여 줄 수가 없지 않은가.
“뭐야 대체? 공연할 생각 없는 거야? 관객들에게 예의가 아니잖아!”
투덜거리며 그녀는 천천히 극장 안을 둘러보았다. 낡고 해진 관객석과 부서진 쪼가리들로 가득 한 극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극장 저 편에 휑하게 뻥 뚫린 거대한 구멍이었다. 뭐 커다란 거라도 와서 박은 건지, 아니면 어디서 대포알이라도 날라온 건지, 참 거하게도, 그리고 깔끔하게도 뚫린 터널이라고 감탄하며 샬럿은 무대 한 켠에 털썩 걸터앉았다. 기간테스도 여유롭게 드나들 수 있음직한 그 커다란 구멍 저편으로,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터널을 통해 찬바람이 들어오자 그녀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겨울이군’
그제야 그녀는 정말로 인간님들과 AGS들 다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 정도 구멍이 뚫릴 정도라면 극장에 뭔가 일이 터져도 보통 큰 일이 터진 게 아닐 터다. 당장 저러면 관객들이 추위에 떨지 않겠는가. 돈 안 내고 들어올 손놈 새1끼들도 생길 거고. 그런데 저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않고 다들 어디 간 거지?
뻥 뚫린 구멍으로 다들 나가 버린 건가? 저 문제 처리하려고 자재라도 구하러 나갔나? 나 동면장치 안에서 잠든 사이에 진짜 다들 장기휴가라도 받았나? 요새 뭔 전쟁인가로 극장 사정이 안 좋다더니만 혹시 내가 있는 걸 까먹고 휴업했나?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녀에게 뾰족한 정답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당분간 공연을 할 것 같은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음, 그럼 나도 저 휑한 터널로 나가도 되나? 바깥에 나가봐도 되는 건가?’
그녀는 극장의 전속 배우다. 최고의 대우를 받는 초 인기 바이오로이드였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그녀가 극장에 얽매여 있어서 그곳을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도 된다. 가끔 공연을 쉴 때 외출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스케줄이 빡빡한 그녀에게 그런 작은 즐거움은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그러니까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터널 저편으로 보이는 눈 내리는 바깥 세상의 겨울 풍경은, 어쩐지 을씨년스럽고 사람은커녕 바이오로이드 하나 보이지 않는 쓸쓸해 보이는 풍경이긴 해도, 삶의 거의 전부를 이 극장 안에서만 보내 온 샬럿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헹, 프로 여배우가 쉽게 무대에서 내려올 순 없지, 암”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피식 웃고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프로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무대에 서 있는 유일한 배우요, 유일한 기사다.
그녀가 무대를 떠나면 누가 공연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누가 지금 저 실린더 안에서 잠자고 있는 공주님을 지켜준단 말인가.
“읏차, 그럼 검술 연습이나 좀 해볼까?”
그녀는 무대 위에서 검을 뽑았다. 이 연극은 진짜로 목숨을 걸고 검과 검을 맞부딪히는 결투의 연속이다. 따라서 검술 실력이 녹슬지 않게 연마한다고 손해 볼 일은 없다. 그 때였다.
“어라?”
한동안 파라드(*펜싱에서, 상대방의 검을 막고 찌르는 반격기) 연습에 열중하던 샬럿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극장의 예의 그 터널에, 뭔가 큼직한 것이 서 있었다. 조금 전엔 없었던 것이다.
“어...폴른?”
그렇다. 그건 폴른이었다. 하지만 그냥 폴른이라기엔 너무 괴상하게 생겨서 샬럿은 처음에 그걸 못 알아볼 뻔했다. 온 몸을 이상한 질감의 검은 거죽이 뒤덮고 있고 눈이 시뻘갰다. 뭐 저렇게 생긴 폴른이 다 있지? 불량품인가? 꼭 옛날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괴물 같....
“아항”
샬럿은 대충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저건 아마 이번 연극에 출연할 장비 중 하나일 것이다. 몰골이 괴상한 걸 보면 아마 극중 등장하는 괴물이나 마귀쯤 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연극 말미에 촉수괴물이 등장한다고 했었지. 비록 지금 비척비척 걸어오는 저놈에겐 촉수가 달려있진 않지만, 뭐 그런 소품이야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부착하면 되는 것이다. 읏차, 하고 샬럿은 무대 아래로 내려와 그 폴른을 바라보앗다.
여기에 폴른이 있는 것도, 극단이 공연용 폴른을 가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녀의 극단은 언제나 최고를 지향한다. 언제나 최상의 공연품질과 스펙타클한 연출을 유지하기 위해 극단은 괴물 역할을 할 장비들이 필요했고, 이 극단 전용 건물에는 작긴 해도 AGS 생산 시설이 존재한다. 원래 군대에서 구형 폴른을 제조하던 라인 일부를, 신형 폴른이 나와서 그 라인이 쓸모없게 되자 떼어서 가져왔다고 들었다. 물론 보통은 거기서 직접 AGS를 자체 제작하진 않는다. 그러면 비싸니까. 일반적으로는 바깥에서 쓰다가 더 이상 못쓰게 된 AGS를 싼 값에 사와서 수리하는 데 그 기계실을 사용했다. 물론 보안 문제가 있으니 총 같은 군용 장비는 다 떼고 가져와서 말이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부품만 있다면, 뭐 진짜 본격적인 공장처럼 대규모 생산을 못 한다 뿐이지(그리고 총이 없다 뿐이지), 두어 대 정도는 못 만들 것도 없다. 그리고 어쨌든 샬럿은 그녀가 동면에 들기 전에도 극단이 언제나 전시와 행사를 위한 예능용 폴른을 한두 대 정도 창고에 비축해 놓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놈은 샬럿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자 배우대기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샬럿은 놈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놈의 역할은 촉수괴물이니까, 아마 놈의 코어에는 연극의 표적, 즉 공주 역할을 하는 바이오로이드를 찾아 죽이라는 명령이 입력되어 있을 것이다. 놈의 발걸음이 샬럿이 나온 배우대기실 쪽을 향하는 걸 보면 그건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둘 수 없지, 하고 샬럿은 칼을 뽑아들었다. 아직 연극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공주님이 돌아가셔서야.
“오, 거기 괴물이여, 멈춰서거라, 이 여기사 샤를로테를 앞에 두고 감히 어디를 가려 하느냐”
대본에 쓰여 있는 사극식 말투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리허설이다. 이미 샬럿이 실린더 안에서 동면 상태일 때 그녀의 모듈에 이번 연극의 대본과 연기지침이 훌륭히 입력되었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과 실제 몸을 움직여 연기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연기란 연습이 필요하고 프로란 부단한 반복 속에 만들어지는 법. 샬럿은 그리 생각하고 나아가 폴른 앞을 막아섰다. 상황을 보아하니 오늘 공연을 하기는 글렀고, 인간님들은 -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기는 해도 - 아마 샬럿에게 다음 공연을 위한 연습이나 하라고 놈을 던져줬을 것이다. 암. 리허설은 중요하니까.
지잉- 샬럿이 칼을 들고 적대의사를 보이자 놈의 붉은 안광이 더 시뻘겋게 번쩍였다. 그 반응 역시 예상했던 바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거 리허설 맞구만? 그럼, 대본 연습 겸 전투씬 합 맞추기나 해볼까. 그녀는 흠흠, 헛기침하고 다음 대사를 읊었다.
“이 내 목숨 살아있는 한 너의 그 흉수(凶手)로 아름다운 공주님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하리라, 너의 그 흉측한 몰골, 공주님 눈 앞에 내는 것부터 수치요 불명예로다, 그러니 공주님 어전(御前)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내 칼을 받거라, 괴물이여!”
그리고 샬럿은 놈에게 달려들었다.
...
놈을 쓰러뜨리는 것은 너무 쉬웠다. 도중에 일반적인 폴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예측하기 힘든 움직임을 몇 번 보이긴 했지만, 원판이 어차피 총도 없는 비무장 폴른이라 쓰러뜨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큰 힘 들이지 않고 괴상한 폴른을 이상한 연기 풀풀 내는 고철덩이로 바꿔놓은 - 마지막에 놈이 쓰러질 때 놈의 몸에서 뭔 촉수 같은 것이 튀어나와 기어가려 했는데, 샬럿은 그걸 보고 ‘아하, 이게 그 촉수괴물에 쓸 촉수인가보다’라고 잘라버렸다 - 샬럿은 보람차게 배우대기실로 돌아와 참치캔을 깠다. 바깥이 어두워진 걸로 보아 밤이 된 것 같았고, 아마 오늘 공연하긴 그른 것 같았으므로. 아니, 솔직히 지금 상태로는 내일도 공연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솔직히 좀 더 맛있는 거 먹고싶긴 한데 안에 있는 게 통조림뿐이라서 말이지.’
참치와 빵통조림에서 꺼낸 빵을 우물거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뭐, 구운 감자도 맛있게 먹는 그녀의 식성에는 참치와 빵이라는 조합도 먹을 만하긴 했지만. 기사복이 더러워지면 귀찮아지므로 - 당장 내일 공연이 시작된다면, 그런 꼴로 어찌 감히 관객 앞에 나아간단 말인가 - 그녀는 그냥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만찬을 즐겼다. 아니, 뭐, 알몸이 편하기도 하고,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말이다.
원래는 배우대기실 안에도 CCTV가 있었고, 그래서 대기실에서 배우들이 뭘 하는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선을 넘는 오타쿠나 스토커들은 있게 마련이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런 자들은 대담해지기 마련이다. 모모를 좀 지나치게 좋아했던 어떤 오타쿠가 이 스마트 빌딩의 보안을 뚫고 CCTV망을 해킹하여 배우대기실을 ‘도촬’한 이후 - 충격적이게도 이 사건에는 항공자위대의 바이오로이드 ‘흐 모 씨’가 연루되어 있어 사회에 파장을 던졌다 - 극단은 고심 끝에 아예 배우대기실의 CCTV를 철거해 버렸다. 해킹과 보안의 싸움이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면, 언제나 공격측이 방어측보다 유리하게 마련이므로. 그러니까 배우대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원격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샬럿은 안심하고 알몸으로 참치를 씹을 수 있었다. 답답한 분장 의상 입다가 다 벗으면 엄청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하니, 여러 모로 알몸이 편리했다. 특히...이놈의 가슴은 갈수록 커지는지 날이 갈수록 기사복 분장이 낀다.
‘어...살 빼야 하나...?’
동면 중에는 분명히 투입되는 영양을 조절해서 체형을 유지해줄 텐데! 그녀는 투덜거리며 내일은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관객 앞에서 최고의 외모를 보여주는 것도 모름지기 프로 배우의 본분이다.
“아, 씨, 또 가슴에 기름 떨어졌잖아”
연극과 관련된 걸 제외하면, 샬럿은 다른 동료들로부터 생각과 행동을 동시에 못하는 바보가 아닌 건지 종종 의심받곤 했다. 지금도 훈련 생각 하다가 먹던 참치기름이 흘렀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나마 가슴이 워낙 커서 그게 일종의 벽(...)이 되어주어는 바람에, 몸의 다른 데에 먹던 게 떨어지진 않는다는 거지만. 휴지로 가슴에 떨어진 기름을 벅벅 닦으면서 투덜거리던 샬럿의 눈에 문득, 실린더 안에서 잠자고 있는 다프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쌍하기는. 나는 그래도 여기서 고추참치랑 빵이라도 먹을 수 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쿨쿨 잠만 자고 있다니. 샬럿은 빵쪼가리를 떼어 실린더 앞으로 다가갔다.
“공주님, 공주님도 하나 드시겠어요?”
“.....”
잠자는 다프네가 대꾸할 리가 없다. 바보인 샬럿도 그건 알았고 그래서 딱히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홀로 어둑어둑한 대기실에서 식사하는 게 뻘쭘했을 뿐.
“음, 오늘도 지켜줬으니까, 감사하시라고요, 공주님”
언제까지 그녀를 지켜줘야 할지는, 샬럿 자신도 몰랐지만. 샬럿은 그만 씻고 자기로 했다. 배우대기실 소파에 대충 누워 자더라도 그전에 몸에 묻은 기름은 닦고 양치는 해야 할 테니깐. 그녀는 알몸인 그대로 배우대기실의 배우 전용 샤워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뜨거운 물 안 나오잖아!”
...
다음 날, 혹시 오늘은 공연을 할까, 하는 가능성 낮은 희망을 품고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나온 샬럿의 눈 앞에, 또다른 폴른이 나타났다.
놈은 이번에는 똑바로 샬럿을 목표로 하고 달려왔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현명한 행동패턴이다. 놈이나, 혹은 놈에게 명령을 주입했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제작진들이나, 먼저 다프네를 죽이려면 샬럿을 통과해야 한다는 걸 학습했을 터다. 당연한 처사다. 그래야 스토리가 말이 되고, 드라마가 진행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샬럿은 침착하게 대사를 읊으려고 했다.
“오, 거기 괴물이여 멈...이크크!”
그러나 놈이 그럴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몸을 부닥쳐 오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연극을 위한 학습이 덜 되었군. 미숙한 초짜 AGS같으니. 상대 배우랑 합 맞추는 건 연기의 기본 중 기본이라고. 어디 가서 연기 기초교재라도 읽고 오란 말이야. 뭐, 좋다. 다음에 올 녀석은 좀 더 낫겠지. 그녀는 그러길 바라며 칼을 뺴들었다.
놈을 쓰러뜨리는 데는 칼질 네 번이면 충분했다.
쓰러진 놈에게서 또 한 번 어디서 튀어나와 꿈틀거리는 촉수를 잘라내며 샬럿은 속으로 내일은 뭐 다른 일이 벌어지진 않을지, 내일은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 다음 날. 바뀌는 것은 없었다. 폴른은 또 나타났다.
그 다음 날. 역시나였다. 또다시 폴른이 나타났다.
그 다음 날. 똑같았다. 놈은 다시 나타났다.
그 다음 날도, 여전히.
......그리고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4414>
-----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이번 이야기의 배경은 덴세츠가 소유한 극단과 극장의 이야기입니다.
2) 이 때 당시의 일본에 자위대가 있는지, 군대로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자세한 설정을 알려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2차 연합 전쟁 때에는 군대가 되었을 법 하기도 한데...
3) 샬럿이 언급한 전쟁은 2차 연합 전쟁을 의미합니다.
4) 항공자위대의 흐 모씨는...여러분도 다들 아시는 그 바이오로이드입니다.
5) 덴세츠 극단의 연극 방식(아르망의 역할이나 열린 결말, 진정 죽고 죽이는 연극, 실사를 추구하여 로봇까지 동원 등)은 기존 설정에서 유추했습니다.
6) 공주님을 다프네로 설정한 이유는...사실 이 소설을 구상할 당시에는 딱히 얌전하고, 다소곳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공주 역을 맡길 만한 적절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뭐, 다프네 정도면 이쁘잖아요. 안 그런가요?
2.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현재 진행중인 장편 시리즈 (스카이나이츠, 아이돌마스터!)와 연계되는 이야기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2) 사실 원래 이 이야기는 제가 라스트오리진을 하면서 가장 먼저 구상했던, 제가 가진 라오진 소설 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그래서 원래는 카엔 자리에 모모가 들어가 있었답니다). 그걸 이렇게 연결해서 여러분께 선보이게 되네요. 제 가장 초기 구상안이었던만큼 설정이나 캐릭터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제 불찰입니다.
3. 잡담
혹시 필요하시다면(설마 그럴 일이 있겠느냐마는), 제 소설은 얼마든지 가져다가 뭔가 만드시는 데 쓰셔도 됩니다. 출처만 밝혀주시고 제게 알려만 주세요.
언제나 찾아와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호응해 주시는 덧글과 추천이 창작자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1.44.***.***
그렇지만...세월과 고독은 모든 것을 마모시키고 쇠락하게 만들지요 ㅎㅎ | 21.01.16 22:27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211.44.***.***
미쳐돌아가는 맛이 바로 멸망 전 세계 아니겠습니까 ㅎㅎㅎㅎ | 21.01.17 01:06 | |
삭제된 댓글입니다.
(IP보기클릭)211.44.***.***
용자추종자
ㅎㅎㅎㅎ ㅎ아상 재밌게 그리고 꾸준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1.01.18 23: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