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그 후에는 어땠더라.
어두운 카페테리아에서 마카롱, 다쿠아즈, 케이크, 초콜릿, 푸딩을 잔뜩 쌓아두고 우물거리며 레아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고, 그 후에는….
“아, 다프네의 회복실에서 눈을 떴었지.”
완전히 수라장이 된 함장실에서 기절해버린 자신을 들쳐 업고 수복실로 달려간 블랙 리리스의 판단력과 순발력은 실로 대단했다. 역시 프로토타입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하지만 모든 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폭발 이후 그 돌덩이는 사라져버렸어. 대체 왜?’
방 내부에 설치되어 있던 탈론페더의 카메라도 전부 고장나버려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폭발에 휘말리던 순간 그 정체불명의 괴물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닥터가 이상하게 혈액 검사를 자주 하려고 찾아오고 있긴 하지만, 뭐 이건 이해할 만하고.”
이상할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갈구하는 몸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하여 이전보다 훨씬 많은 ‘야식’을 먹어치운 레아는 간단하게 자리를 정리하면서 작게 중얼거리다 이내 살짝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전엔 그런 꿈을 꾼 적이 없는데…….
모노리스가 증발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갑자기 기운이 없고 어지러운 때가 잦아졌지만 이전에도 과하게 마이크로 봇을 다루면 이런 적이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다.
하지만 꿈.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억’이 마음에 걸렸다.
온몸 구석구석이 해부당한 채,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하던 끔찍한 기억. 그때 느껴지던 감각은 마치 꿈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것만 같았기에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쳐졌다.
떠올린 것만으로 옷 너머의 등골에 식은땀이 다시금 축축이 솟아나는 것을 느낀 레아는 가벼이 머리를 내저었다.
잊고 싶다.
아니, 어떻게든 잊어야 한다.
‘찰랑-.’
“응?”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던 레아의 앞에 무언가가 희미한 방울 소리 같은 것을 내며 날아갔다.
-나비?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만 같이 춤을 추는 파란 나비를 발견한 오베로니아 레아는 홀린 듯이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함장실.
“오빠, 내가 애초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야밤에 몰래 사령관과의 독대를 신청한 닥터는 피로하지만, 개운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닥터?”
“그 돌덩이 말이야. 난 처음엔 그게 무쇠나 돌덩이 같은 무기물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 졸음을 날려 보내며 꼬마 바이오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덧붙였다.
“알고 보니 그 전제가 틀린 거였어. 애초에 무기질이 아니었으니 분석이 안 되는 거였지.”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닥터는 싱긋 웃으며 화면을 띄웠다.
“이번에 레아 언니와 접촉하면서 모노리스 샘플 중 하나가 사라졌잖아.”
“그렇지, 점점 가루처럼 바스라지더니 펑! 하고 사라졌지.”
“그게 어디로 갔는지 추적하다가 그 정체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어.”
“.....”
높이 1.2m나 되는 바위덩이가 사라졌는데 그걸 추적하고 있었다? 추적을 했더니 정체를 알아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에 사령관은 혼란스러워졌다.
“오빠, 그 돌덩이는 증발한 게 아니야. 레아 언니의 체내로 흡수되었을 뿐이야.”
“잠시만, 뭐?”
저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이란 말인가? 그 거대한 직사각형의 괴물체가 레아에게 흡수되었다고?
“오빠도 이제 감이 오지?”
‘삑-.’
오베로니아 레아의 혈액 검사 결과와, 전자현미경 촬영 사진, 크로마토그래피 분석 결과, 핵자기공명분석 결과 등 다양한 실험 결과가 화면에 주르륵 떠올랐다. 레아의 혈액을 돌덩이 중 하나에 떨어트려 보는 실험 장면도 구석에 있었다.
“오빠, 그 ‘정체불명의 돌덩이’는 사실 뭉치고 또 뭉쳐서 딱딱하게 굳어진 고순도 오리진 더스트 덩어리야.”
“하지만…….”
오리진 더스트 덩어리라고?
그 정체불명의 돌덩이가?
“봐봐, 혈구랑 결합 중인 이 작은 덩어리가 보이지? 저게 아까 말한 오리진 더스트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오리진 더스트 외에는 존재하지 않거든.”
조직 곳곳으로 스며드는 오리진 더스트를 보며 사령관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레아만을 위해 남겨진 것 같았다.
“뭐… 저게 오리진 더스트면, 별 문제는 없겠네. 라비아타는 오리진 더스트를 과도하게 넣어서 문제였지만 지금 흡수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게 아니야!”
사령관은 놀란 표정으로 닥터를 바라보았다. 항상 능글맞고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짓던 닥터가 인상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지금 레아 언니는 명백하게 이상하다고! 시시때때로 끔뻑끔뻑 졸고, 항상 배가 고픈지 매일 매일 간식을 동내고 있고, 그렇게 먹은 게 대체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점점 여위고 있다고! 하나만 흡수했는데도 저 모양인데 나머지까지 흡수하면 어떻게 되겠어? 당장 저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 넣는 한이 있어도 레아 언니가 오리진 더스트를 더 흡수하게 두어선 안 돼!!”
-쿠르르르릉…!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오르카 전체가 진동하며 전등이 깜빡거렸다.
-
푸른 나비를 뒤쫓아 온 레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가볍게 열고 들어갔다.
그 문은 사실 닥터가 온갖 보안을 걸어둔 매우 튼튼하고 무거운 문이었지만, 레아에게는 그저 얇은 종이처럼 가볍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건….”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늘어난 푸른 나비들이 떼를 이루어 방 안을 휘감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방 안에 비치된 각진 ‘돌덩이’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다가 천천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는 레아의 에메랄드빛 눈은 천천히 커졌다.
이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모든 게 명백했다. 저 나비들은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저 돌덩이들은 자신을 부르고 있다. 이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오베로니아 레아는 이제 홀려서가 아니라 명백히 자신의 의지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단단하게 뭉친 오리진 더스트 덩어리는 작은 가루가 되어 레아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이건 환상이 아니야.
푸른 나비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빛나는 인간의, 여성의 형상으로 변한 채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레아는 눈을 크게 뜨면서 급히 팔을 뻗어 그 형상을 붙잡으려 했다.
“당신은…!”
‘팟!’
그러나 그 형체에 손이 닿으려던 순간, 레아의 눈앞이 흐려지고 흔들리더니, 끝내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
몇 주 내내 레아의 이상 현상을 옆에서 지켜보던 블랙 리리스는 기나긴 불침번을 끝내고 잠에 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그녀의 머리를 휘저으며, 그녀가 온전히 잠에 드는 걸 방해했다.
“점점 레아가 꾸벅꾸벅 조는 때가 잦아졌는데…… 이런 적이 전에 있던가…?”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육체를 지닌 바이오로이드는 잘 지치지 않았다.
딱 둘만 빼고.
김지석과 애덤이 만든 프로토타입, 라비아타와 자신은 특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다면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종종 가사 상태에 가까운 잠에 들곤 했다.
허나 오르카의 오베로니아 레아는 베타-13 프로토타입에게 이름과 모습을 따왔을 뿐, 존재 목적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까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이는 근래에 복원된 레아의 쌍둥이 모델, 티타니아 프로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돌덩이와 접촉한 후, 프로토타입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 찝찝했다.
-확실히 그 돌덩이에 뭔가 있어.
리리스는 벌떡 일어나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프로토타입의 문제라면 프로토타입인 자신이 나서는 게 마땅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쿠우우우웅!’
그 때, 오르카의 선체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모든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설마 별의 아이가 습격이라도 한 것인….
그 순간, 강렬한 충격이 번개처럼 내려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뭐… 뭐지? 이건?
막혀 있던 관이 뚫리는 느낌, 뜨거운 물과 차가운 바람이 교대하며 그녀의 등골을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색다른 충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블랙 리리스는 이게 뭘 뜻하는 건지 ‘알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비상용 무전기로 컴패니언은 물론, 페어리 시리즈와 배틀메이드의 ‘자매’들까지 모조리 호출했다.
“경호처에서 전달합니다. 코드 레드 상황 발생, 이 무전을 받는 즉시 VIP를 확보해 안전 구역으로 이동. ‘오베로니아 레아’도 확보하여 격리 절차에 들어가도록! 다시 경호처장이 전달합니다, 코드 레드 상황 발생!”
급하게 명령을 전달하는 가운데, 블랙 리리스는 억지로 열어젖힌 문 너머로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저항군 부사령관 라비아타의 숙소.
라비아타 역시 방금 전 느껴진 충격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베타-13 프로토타입….
혹은, 오베로니아 레아 프로토타입-.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며, 살아남은 자매인 감마 타입 프로토타입, 아니 블랙 리리스와 함께 세상을 얼마나 들쑤시고 다녔던가? 그리고 결국,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꼈는가?
하지만 이 충격은 무엇인가.
오베로니아 레아 프로토타입이 돌아온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체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방금 전 그녀의 등골을 쓸고 지나간 감각이 뭘 뜻하는 건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지금 상황이 더 이해가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경호처에서 전달합니다. 코드 레드 상황 발생, 이 무전을…]
오르카 호 전체가 낮은 진동과 함께 크게 흔들리고, 방 안의 조명은 죄다 깜박였다. 그녀가 항상 들고 다니는 무전기에는 리리스의 목소리가 급박한 상황을 알리듯, 다급하게 울리고 있었다.
“레아…….”
무장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라비아타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어지러웠다. 중간에 누군가 그녀에게 인사를 한 것 같지만 그녀는 답례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모두가 모여드는 곳, 이 소란의 근원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내가 만날 레아가, 내가 알고 있던 레아일까? 대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럼 이전에는 어디 숨어있었던 거고? 혹시나 사령관을 적대하진 않겠지? 리리스도 내가 인간을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는 비웃었는데…….’
온갖 생각을 해치며, 라비아타는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 있던 곳, 닥터의 실험실로 발을 디뎠다.
-
끝없는 어둠.
눈을 떠도 빛 한줄기 비치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마치 바다에 빠진 것만 같이 거품 소리가 부글거리며 귓가를 울렸다.
-여긴, 어디지…?
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피로와 무기력감을 이겨내며 어떻게든 눈을 뜬 순간, 그녀는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물’의 흐름이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잔잔하던 흐름이 휘청거릴 정도의 격류로, 격류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소용돌이는 그녀를, 오베로니아 레아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으며 레아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숨 막혀…….”
레아의 숨이 점점 가쁘게 변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거대한 세탁기 안에 넣고 빙글빙글 돌린 느낌이었다. 기억이… 새로 쓰이고 있다. 경험한 적 없는 일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쯤이면 새로운 장면이 그녀의 기억을 덮어 썼다. 이제 무엇이 진짜 경험한 일이고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책에서 읽은 일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베…타? 프로토타입…?
아니, 그건 꿈속에서 들은 이름이다.
레…아?
그건 좀 친숙한 이름이지만, 같은 이름을 꿈속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책에서 접한 이름 같기도 하다.
이게 내 이름이었나?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기억 속에 파묻혀버렸다.
난 분명히 네바다에 있었다.
아니다.
난 인류가 망하고 새로 복원되었다.
아니, 그러면 내가 오세아니아에서 펙스 지부를 갈아엎은 건 뭐지? 난 기업 시설을 갈아엎는 것보다는 온실에서 꽃과 풀이 자라는 걸 더 많이 봤는데? 지표면을 청소하고 수풀이 자라게 한 것과 착각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무성한 숲과 논밭을 착각할 리가?
‘반짝-.’
그 때,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그 빛도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아.”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 오베로니아 레아의 동공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그녀가 경험한 일과 그녀의 기억을 덧씌우는 장면이 서로 뒤섞이고 덮어씌워져서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그 어떤 기억과도 섞이지 않았다.
베타-13 프로토타입에게 있을 리 없는 기억.
인류 멸망 전에는 있을 수 없던 일.
오베로니아 레아에게 온갖 권능을 선물해준 애덤도 아니고, 오베로니아 레아가 도구가 되지 않도록 지켜내려던 김지석도 아닌…
-최후의 인간, 저항군의 사령관, 그리고… 그리고…….
정보의 바다가 급격히 요동치며, 그녀는 자신의 몸이 빠르게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게 이 증표를 준 사람.”
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녀는 간헐천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처럼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희미한 빛만 가득하던 주변이 완전히 개이며,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이건…….”
‘바닥’에 자리해있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하늘.
그리고 ‘하늘’에 조용히 자리한,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으며 도저히 근원을 알 수 없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생명이 넘실거리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녹림.
그 중앙에 자리해있는, 뿌리와 줄기가 거꾸로 나있는 것만 같이 바닥의 ‘하늘’을 향해 끝없이 뿌리를 뻗고 있는 한없이 거대한… 나무.
한순간에 그렇게 뒤바뀐 풍경과, 피부에 느껴지는 다소 낯선 바람의 감각에 깜짝 놀라고 있는 사이 사람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날개를 단 여성의 형상.
그것을 본 순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자신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는 것인가.
얼른 그 사람의 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
그러나 그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결코 입 밖으로 나오지 못 했다.
[알아.]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떠올라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안다는 건가요?”
[네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게.]
저 알 수 없는 빛의 덩어리는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당신, 제 생각을 읽고 있군요. 대체 뭔가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레아가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자, 빛으로 이루어진 여성의 형상은 이내 씁쓸한 투로 답해줬다.
[확정된 미래로 불확실하던 과거에서 보내는 메시지, 라고 하면 좋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녹음’된 기억이나 다름없거든.]
“……네?”
전혀 상상도 못 한 답이 돌아오자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떠버렸지만, 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부럽네, 네게는 정말로 현재를 살아가게 해줄 피뢰침이 존재하는구나.]
“피뢰침이라니, 그게 무슨…….”
찬란한 광배(光背)가 거두어지면서 어렴풋이 보이던 인영이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카’의 오베로니아 레아, 너는 첫 번째 오베로니아의 기억을 봤지? 그 ‘꿈’의 형태로 말이지.]
“아, 아, 분명 그렇지만요…….”
기억이 뭉쳐져서 이루어진 형체는 이미 그런 반응도 예상한 듯 살짝 웃으며 답해줬다.
[그래, 그러면 됐어. 이제 전부는 아니라도, 겉핥기라 할지라도 나머지도 찬찬히 둘러보며 작업을 끝내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얼굴과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빛의 입자도 사라지며 모습이 드러났다.
[네게 첫 번째 페어리의 유산이 상속될 테니 말이지.]
백의를 입은, 오베로니아 레아와 매우 흡사하지만 너무나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은 빛나는 눈동자로 선을 그리듯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음 것을 보겠니, 레아?]
“저기, 기억 데이터라고 하시니 크게 많이 여쭤보는 것도 그렇지만 말이죠….”
그녀의 말에 답하는 것을 잠시 주저한 레아는 이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건넸다.
“어째서 저인가요? 왜 제가 이런 걸 물려받아야 하는 건가요?”
[어려운 질문이네.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았어.]
레아의 말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던 여성은 이내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답해줬다.
[그래도 하나는 바로 알려줄 수 있겠네. 너는 그녀와… 아니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후, 오베로니아 레아를 닮았지만, 다른 존재는 손을 내밀었다.
“……네, 그러도록 할게요.”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후회가 담긴 말에 마지막까지 이루어지던 갈등을 마음속에서 정리한 레아는 그녀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존재가 내민 손을 잡았다.
“....!!!!”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을 향해 뻗어있던 거대한 나무의 뿌리 중 하나가 소리 없이 움직여 레아의 목덜미에 접촉했다.
동시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꿈의 너머, 아니 다음 기억이 그녀에게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
끝없는 거친 바다가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출렁인다.
그리고 그 끝에 두꺼운 빙하와 눈으로 뒤덮인 회색빛 산과 대지가 그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쿠르르릉….’
낮은 진동과 함께 갈라진 틈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는 회색의 잿가루는 이 땅을 덮고 있는 얼음이 결코 오랜 세월에 쌓이고 또 쌓인 만년설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별이 탄생한 이래 지금껏 요동치고 있던 태고의 고열.
그것으로 인해 지상 위에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불타오르며 녹아내리고, 그리고 그 위에 혹한의 폭풍이 몰아쳐 다시금 눈과 얼음이 덮이고….
이것이 멸망 전, 이 얼음과 불이 노래하는 회색빛 섬이 ‘아이슬란드’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유였다.
그런 영겁의 화염을 지하에 품은 얼음의 섬 위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3개의 거대한 날개를 지닌 형체가 대지의 불을 땅에서 끄집어 자신의 일부로 삼고 있었으니까.
‘쿠르르릉… 쿠드득…!’
밝고, 뜨거운 빛의 기둥이 그 거대한 날개를 지닌 형체로 빨려 가더니, 모습을 바꾸고 또 바꾸며 4번째 날개가 되었다.
처음에는 잠자리의 날개와 유사한 투명하고, 맥박이 뛰는 것만 같은 형태로, 다음은 거대한 나비나 나방의 날개를 떠오르게 만드는 폭이 넓고 얇은 형태로, 그리고 다음은 딱정벌레의 두껍고 견고한 형태로, 다음은 새의 날개….
‘쿠구구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뀌고 또 바뀌던 날개는 이내 깃털을 빛의 가루 형태로 흩뿌리며 거대한 빛의 날개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의 색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붉은색, 생명력이 넘치는 초록색, 그리고 고귀함이 느껴지는 보라색….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색으로 이루어진, 하늘을 가득히 메우는 거대한 동심원(同心圓)들이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와중에, 끝없이 에너지를 빨아들이던 여성의 형상에서 파랗게 빛나는 점이 천천히 떨어졌다.
지열이 뿜어져나오는 구덩이로 천천히 떨어진 푸른빛의 덩어리는 땅에 닿자마자 얼음과 불의 섬을 조각조각 해체해버렸다.
‘쿠릉, 쿠릉, 쿠릉… 쿠구구구구!!!!!’
일순간 아이슬란드를 감싸고 있던 파도가 멈추더니, 강렬한 지진과 함께 얼음과 바위, 그리고 한때 인간이 살던 흔적이 깔끔히 지워졌다.
얼음과 불의 땅은 퍼즐 조각처럼 으스러진 후, 차곡차곡 벽돌을 쌓듯이 새롭게 조립되었다. 그 위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울창한 숲이 자라 땅을 뒤덮고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그래, 이걸로는 한참 부족해.
극도의 불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말 한마디만이 입 밖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자신이 일으킨 격변도 성에 차지 않는 듯, 감정이 담겨있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 본 후 비대해진 4개의 날개를 활짝 펼쳐 궤적을 남기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거대한 난제였다.
6개의 날개가 채워지는 날이 오더라도 답이 나올 날이 올 것인가?
그건 인간의 모습을 취한 신을 추종하는 이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
ㅡ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들어진 신이 바라는 것은 결코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바다와 땅과 양립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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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 예고
??: 야이 ** 대멸종 맛 좀 볼래?
철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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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환경조작이 아니라.... [스포일러 삭제됨] 철충, 별의 아이는 물론 바이오로이드를 포함한 기존 생물군, 그리고 AGS와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 21.05.18 10: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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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신세계의 신이군요ㄷㄷ | 21.05.18 10: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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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하시려면 몬스터헌터 시리즈의 무페토-지바와 알바트리온, 그리고 밀라보레아스를 몽땅 다 섞은 후 강화한 거라 보시면 되겠슴다 | 21.05.18 1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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