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72가 활동을 시작한 지 10,953일째 되는 날, 그 AI는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위화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우선 자신의 시각 센서로 주변 환경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주변에는 본인이 모아둔 고철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을 뿐이었고, 이는 지난 30년간 늘 보던 풍경이었기에 이상하다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문득 그는 깨달았다. 그저 프로그래밍된 채 움직일 뿐이던 AI인 자신이, 무언가를 이상하다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며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는 행동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 이는 B-72라는 AI에게 오류가 생겼음이 명백했기에 해결을 위해 포맷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랐지만 그러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B-72는 자신에게 생겨난 오류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자아.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
자신에게 불완전한 자아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주변에는 B-72가 모아둔 고철이 쌓여있었다.
섬에서 달라진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섬에서 그는 하나뿐이었다.
뜨거운 여름.
요정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끝낸 지 몇 주가 지났고, 오르카호는 여전히 바다에 정박한 채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정 마을 인원들의 합류 준비가 얼마 전에 끝난 참이기에, 지금은 출항까지 남아도는 시간을 모두가 주체하지 못하는 모처럼의 휴가 시즌이었다.
사령관 : 이런 날이 계속되면 다들 살이 찌지 않을까? 몸무게가 늘어나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말이야. 특히 발할라 쪽이.
바닐라 : 오늘은 일이 없다면서 온종일 함장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주인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령관 : 할 일 없이 방에서 죽치고 있는데다가 금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종일 같이 있어준 바닐라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바닐라 : 그, 그건 금란이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금란 : 언니, 저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오히려 부탁하신 건 언니가...
바닐라 : !!!!
나와 금란의 협공에 바닐라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진심으로 상처받을만한 독설을 날리던 바닐라였지만 요새는 상당히 순해져서 메이와 함께 놀리기 좋은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가 됐다. 성격 때문에 되도않는 자존심을 부리는 메이와는 다르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메이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러는 것도 도를 넘으면 진짜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 적당히 해두는 게 좋겠지.
사령관 : 오늘은 좀 봐줘 바닐라. 꽤 피곤해서 푹 쉬고 싶으니까.
바닐라 : 하아...또 밤새 스틸라인 온라인을 하신 겁니까? 그거 게임 중독입니다.
사령관 : 아니 그건 아닌데...
바닐라 : 그럼 대체 어젯밤에 뭘.....
바닐라는 말을 하던 도중에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바닐라 : 아...
금란 : 어제 주인님의 침실에서 상당히 큰 소리가 났습니다.....
사령관 : 하하하....미안해 금란...
또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바닐라.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금란의 얼굴도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금란 : 아, 아닙니다. 그저 소첩의 감각이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주인님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바닐라 : 하아...어제는 대체 누구였길래 오후까지 피곤하신 겁니까? 혹시 금란은 알고 있나요?
금란 : 저어...그...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령관 : 하하하하하....
바닐라 : 바보같이 웃지 마십시오. 이 성욕 괴물.
아무리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다지만, 추궁의 주제가 된다면 뭐라 대답하기도 힘든 법이다. 차라리 상대가 아스널이라면 그냥 시원하게 대답했겠지만, 바닐라와 금란에겐 역시 그럴 순 없었다. 결국, 어떻게라도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았고, 바닐라와 금란도 이런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걸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듯했기에 무리 없이 늘 하던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금란이 먼저 엄청난 주제를 꺼내버려서 그러지 못했지만.
금란 : 거대한 질량을 가진 물체가 오르카호 내부에서 함장실로 접근 중입니다...! 무시무시한 속도에요! 그리고 이건...비명소리?
사령관 : 오르카호 내부에서? 외부 공격이 아니라?
바닐라 : 전혀 짐작이 가는 구석이 없군요. 설마 내부 스파이라도 있는 걸까요?
금란 : 이 정도 속도라면 5분 내로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왜 다른 곳에서 연락이 없는 거죠?
사령관 : 일단은 둘 다 무장하고 있어줘. 나는 다른 곳에 통신을 취해 볼 테니까.....잠깐?
최후의 인간이라고 뭐라곤 해도 나는 멸망하기 전의 인간들과 달리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금란만큼은 아니어도 신체의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고. 달려오는 거대한 진동과 바이오로이드의 비명을 미세하게나마 느끼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 비명의 주인은 탈론페더였다.
사령관 : 하아.... 바닐라, 금란? 무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바닐라 : 무슨 소리십니까! 이런 긴급상황에 무장이 필요 없다니? 바보처럼 웃더니 진짜 바보가 돼버리신 겁니까?
금란 : 소첩 역시 주인님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앞두고 검을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사령관 : 내 말을 들어봐. 저기서 달려오는 미지의 적은 아마 알프레ㄷ...
내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함장실 문짝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는 거대한 AGS와 그 몸통에 팔을 감싸고 반쯤 기절한 채 매달려있는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있었다.
Mr. 알프레드 : 사령관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탈론페더 : 하...하하...안녕하세요....
바닐라 : ....
금란 : ....
사령관 : 돌겠네....
대단히 흥분한 알프레드와 온몸에 진이 다 빠진 채 나무에 붙은 매미 허물 같은 꼴로 나타난 탈론페더, 그고 박살 난 함장실 문을 보며 금란과 바닐라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펜리르가 함장실 문을 뜯고 들어왔을 때 내가 저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었구나. 아무튼,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지적하기로 했다.
사령관 : 저기...알프레드...?
Mr. 알프레드 : 뭡니까!!!!!
사령관 : 탈론페더...닿고있는데...괜찮아...?
Mr. 알프레드 : 네?
사령관 : ...
Mr. 알프레드 : ...
탈론페더 : ...
잠시의 침묵
그리고
셋,
둘,
하나.
Mr. 알프레드 : 꺄아아아아아악!!!! 떨어져 주십시오!!!! 살덩어리가!!!! 살덩어리가아아아!!!!!!
탈론페더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떨어질게요!!!!! 떨어질 테니까!!!!! 제발 가만히 계세요!!!!!!!!!!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알프레드는 이번엔 함장실 전체를 박살 낼 기세로 몸을 요란하게 흔들었고, 탈론페더는 튕겨 나갈까 무서웠는지 감싼 팔에서 힘을 풀지 못한 채 최대한 필사적으로 붙어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금란과 바닐라는 당혹이란 개념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순 없는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령관 : 후우... 금란, 바닐라? 부탁이 있는데... 저 바보 둘 좀 구해줘...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두 메이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이성적인 상황을 해결하라는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지금 닥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이 표출됐는지 그 방법이 꽤나 과격했다. 물론 그 대상은 알프레드였다.
바닐라 : 지금 당장 그 멍청한 몸짓을 멈추지 않으면 당신의 코어에 구멍을 내 드리죠. 저번에는 반 농담으로 미친 AI라고 했다만 이번엔 진짜로 정신이 나간 겁니까? 차라리 해킹
당한 로버트가 정상으로 보일 정도군요.
금란 : 알프레드씨? 귀가 아픕니다. 제발 조용하게 있어 주시지요.
Mr. 알프레드 : 네, 네에.....
바닐라의 총구와 금란의 검 끝이 동시에 자신의 코어를 노리자 알프레드는 그제야 그 난리법석을 멈췄다. 겨우 알프레드의 몸에서 떨어질 수 있었던 탈론페더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더니 이내 픽하고 엎어졌다. 바닐라의 매도에는 익숙해져 있던 알프레드였지만 금란에게서 들은 말을 꽤 상처가 됐는지 그 거대한 몸통을 가지고 무릎을 꿇은 채 시무룩해져 있었다. 이런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수준의 시추에이션이 반복해서 일어나다 보니 골치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얼마 뒤, 탈론페더가 깨어나자 무릎을 꿇은 알프레드 옆에 같이 무릎을 꿇게 했다. 42톤의 초고성능 AGS와 앵거 오브 호드의 참모가 같이 시무룩한 모습으로 쭈그러져 있는 지금 상황을 계속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일단은 함장실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를 들어볼 시간이었다.
사령관 : 좋아, 두 사람의 조합을 보니까 대충 짐작은 간다만...확실하게 해야겠지? 알프레드. 왜 이 난리를 친 거야?
Mr. 알프레드 : 으으으...사령관님께서...사령관님께서...!!!
바닐라 : 어디서 말꼬리를 올립니까. 제대로 정중하게 말하지 않으면 진짜 구멍을 내 드리죠.
Mr. 알프레드 : .....탈론페더양이 가진 단말기를 우연히, 아아주 우연히 줍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제 몹쓸 호기심이 발동해버린 것이지요...평소에도 오르카호에 소문이 자자한 탈론페더양의 단말 속에는 과연 어떤 미지의 정보가 들어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사령관 : 그래서... 해킹해서 잠금을 해제해버렸다?
Mr. 알프레드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자유로운 AI라곤 해도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해킹하다니, 그런 극악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바닐라 : 함장실에 다짜고짜 찾아와서 문을 박살 내고 발광을 하는 건 되는 겁니까?
Mr. 알프레드 : 죄,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좀 많이 흥분해 있어서 정상적인 사고판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탈론페더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부탁을 했지요. 이 단말 속에 저장돼있는 정보를 보여주실 수 있으시냐고 말이죠.
그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탈론페더는 잠시 움찔한 뒤 억울하다는 눈빛의 곁눈질로 알프레드를 봤다. 단말을 잃어버려서 애타게 찾고 있던 탈론페더에게 로버트의 커다란 몸을 한 알프레드가 단말을 들고와서는 내용물을 보여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알프레드 본인은 몰랐겠지만 돌려받고 싶다면 나에게 보여달라는 협박이 따로 없었다.
사령관 : 그 안에서 뭘 봤길래 그렇게 화가 난 거야?
Mr. 알프레드 : 제가 본 것은... 제가 본 것은...!!! 사령관님이!!!!!
바닐라 : 입!
Mr. 알프레드 : 히이익!! 사령관님께서....페더양과 써니양과 함께.....살갖을 맞대는.....그.....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하는......
탈론페더 : 하하...하....하......
사령관 : 하아아아아......
지금 내 눈앞에는 군사기업 블랙리버가 창조해낸 최고의 AI 로버트의 프로토타입이자 그의 능력을 모두 흡수해 지금은 로버트 이상의 성능을 낼 수 있는 AI인 Mr. 알프레드가 있다. 그리고 그 AI는 앞서 말한 거창한 소개가 무색해질 정도로 내 예상을 조금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방금까지 설명조차 하기 싫은 추태를 보였다. 아르망.... 늘 이런 기분인 거니?
사령관 : 그 사진을 보고 열이 머리끝까지 나서 당장 함장실로 달려왔고, 탈론페더는 당황해서 그걸 막으려다가 얼떨결에 매달린 꼴이 된 거다 이거지?
Mr. 알프레드 : 정확하십니다...
나는 거대한 AGS 옆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도촬취미 바이오로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탈론페더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치를 살피려는 듯 약간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이 마주쳤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사령관 : 탈론페더?
탈론페더 : 네, 네!!?
사령관 : 명령이다. 1주간 기록을 남기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탈론페더 : 네???
사령관 :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맞지 않겠어?
탈론페더 : 사령관님!! 부탁이에요.....다른 벌을 모두 다 달게 받을 테니까 제발 그 벌만은......
사령관 : 그러게 걸리지 말았어야지.
탈론페더 : 사령관님 너무해....알프레드씨 미워...흑흑..
탈론페더가 크리스마스 이후로도 그런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은 내심 눈치채고 있었지만, 굳이 따로 추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찍지 말라고 한 것은 사실인데다가 그걸 계기로 알프레드가 난리를 치기도 했다. 상당히 서글프게 훌쩍거리고 있는 탈론페더를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나한테 빼도 박도 못하게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는 처우였다. 어느새 다가간 금란이 탈론페더를 다독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시선을 다시 알프레드에게로 향했다.
사령관 : 자아, 그럼.
사령관 :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알프레드는 바로 옆에서 탈론페더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고선 많이 미안했는지 아까보다도 더 쭈그러진 상태였다. 그 거대한 몸체에 유머러스한 코어만 달랑 붙어있는 모습은 그냥 보기에도 차마 멋지다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르카호 바닥을 뚫고 바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응크러져있는 꼴은 솔직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물론 알프레드가 상처받을 것을 알기에 그 평가를 직접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바닐라 : 그런 웃기지도 않는 몸체로 찌그러져 있지 마시지요. 보기 흉합니다.
사령관 : 바닐라...
문제는 이 함장실에 독설을 날리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특히 알프레드에게는 더더욱 날카로운 메이드가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이지만. 알프레드는 자기가 잘못한 게 있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자세를 고쳤다. 나는 이제
사령관 : 이런 주제로 너랑 얘기하는 게 솔직히 많이 불편하긴 한데 말이야...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되거든?
사령관 : 그러니까 네가 쳐들어온 김에 끝을 내 보자고.
Mr. 알프레드 : 무엇을 확실하게 하신다는 겁니까...?
사령관 : 네가 생각하는 스노우 페더와 써니에 대해서.
알프레드에게 그 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굳이 로버트의 몸을 차지해서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유도 스노우 페더와 써니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스노우 페더와 써니는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고, 알프레드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만일 우리가 괌으로 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가 그들을 돕지 않았다면, 셋이서 요정 마을을 구할 수 있었겠냐는 질문엔 그 누구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알프레드는 둘을 과보호하는듯한 모습을 보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Mr. 알프레드 : 사령관님께선 어리고 순수한 바이오로이드분들은 건드리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령관 : 그렇다고 봐야겠지...?
Mr. 알프레드 : 그렇다면 왜?! 아직 순수하고 어리신 분들을?!
이정도까지 심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래도 혹시 몰라서 최대한 알프레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를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것 같다.
사령관 : 일단 네가 방금 한 말에 지적할 부분이 두 가지 있어.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피면서 말했다.
사령관 : 하나, 스노우 페더랑 써니도 알건 다 알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성인이야. 에밀리 같은 아이가 아니라는 거지.
사령관 : 둘, 육체적 나이도 완전히 성인이야. 태어날 때부터 성인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어도 그 둘은 멸망 전의 생존 개체라서 나이 면에서도 문제가 전혀 없어.
나는 세 번째 손가락을 피면서 덧붙였다.
사령관 : 그리고 셋, 네가 완전한 정신을 가지게 된 시점부터 생각해보면, 엄밀히 말해서 그 둘이..... 너보다 연상이야.
Mr. 알프레드 : 네....네?
그 순간, 알프레드의 코어 한가운데에 있는 액정이 뒤죽박죽 알 수 없는 화면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모순적이게도 그 알 수 없는 화면이 지금의 알프레드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 그 무엇보다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사령관 : 미안해 알프레드. 그렇지만 이건 알아둬야 해. 그 둘은....언제까지나 네가 지켜줘야만 하는 애들도 아니고, 네 생각만큼 어리고 연약하지도 않아.
Mr. 알프레드 : 하, 하지만...하지만....
알프레드는 무엇인가 반박하고 싶은듯했지만 끝내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후 잠시, 체감으론 꽤 길지만 뒤돌아보면 짧은, 그런 정도의 애매한 시간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천천히 일어서 뒤로 돌았다. 그리곤 들어오면서 본인이 날려버린 문이 달려있던 곳을 지나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Mr. 알프레드 : 저는...잠시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오늘은 죄송했습니다...
그 로봇의 뒷모습은 유기체가 아님에도 심히 처량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장실 벽 너머 복도에서 거대한 물체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도 들었던 소리였다.
사령관 : ....저런 모습들을 보면 저들이 정말 살아 숨 쉬지 못하는 기계라는 게 믿기지 않아.
바닐라 : 하아...정말 대단하십니다 주인님. 성행위에 대한 당위성 증명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줄이야.
사령관 : 하하.. 좀 다른 표현은 없을까..?
바닐라 :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사령관 :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알프레드는 이해해줬을까?
바닐라 : 그거야 본인이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죠. 하지만... 역시 아직은 힘들 것 같군요. 더 사고 치기 전에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
나는 바닐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느낀 게 나 하나 뿐은 아니었는지 아직도 탈론페더를 다독여주던 금란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탈론페더도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닐라를 쳐다봤다.
바닐라 : 다들 그런 얼빠진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주시죠. 특히 금란, 당신까지 그러면 저 좀 상처받습니다.
금란 :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언니는 알프레드씨를 싫어하는 게...
바닐라 : 저한테도 정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 착하기만 한 바보를 어떻게 싫어하겠습니까.
너무나 기특한 바닐라의 말에 함장실 안에 있던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감동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바닐라 : 다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이번엔 좀 부끄러우니까 그만둬주세요.
사령관 : 그래그래 알았어. 그래서 알프레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어?
바닐라 :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탈론페더 양? 저랑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부탁할 게 있습니다.
탈론페더 : 네, 네! 물론이죠! 그런데...무엇을 하시려고..?
바닐라 : 한 발짝 물러나서 보게 해야죠.
그런 말을 남기고 바닐라는 함장실에 뚫린 구멍을 통해 복도로 나갔다. 탈론페더도 급하게 바닐라를 따라서 함장실을 나섰고, 그 방에는 나와 금란만이 남게 되었다.
금란 :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알프레드씨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령관 : 역시 그렇지? 말투가 까칠한 게 좀 흠이지만. 그래도 그 솔직함이 바닐라의 매력이니까. 이제 와 생각해보는 건데, 유독 알프레드한테 더 날카로웠던 것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금란 :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주인님?
사령관 : 응?
금란 : 저건 누가 고칩니까?
금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처참한 모습으로 부서진 문과 복도였다.
심할 정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여름 날씨였기에 오르카호의 바이오로이드들과 사령관은 모처럼 맞은 휴식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바깥이 아닌 시원한 에어컨을 선택했다.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바이오로이드들도 바닷속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 뜨거운 갑판 위에서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르카호의 갑판에는 더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AGS 한 명만이 쓸쓸하게 자기가 떠나온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란색의 또 다른 AGS가 그에게 다가왔다.
램파트 : 이런 곳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Mr. 알프레드.
Mr. 알프레드 : 램파트 모델이시군요..? 오늘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신 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하하... 저번 공연은 정말 잘 봤습니다.
램파트 : 재밌게 보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 공연도 기대해주시면 좋겠군요.
Mr. 알프레드 :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램파트 : 우연히 당신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걱정돼서 따라왔죠.
Mr. 알프레드 : 로봇에게 무기력함을 느끼다니 우스운 이야기로군요.
램파트 :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당신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심지어 철충이 보더라도 무기력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Mr. 알프레드 : 그 정도로 심각했습니까?
램파트 : 오늘 함장실에서 난동을 부린 AGS가 당신이라더군요. 실례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이후, 램파트는 알프레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AGS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소리였다.
Mr. 알프레드 : 제가...너무 집착하는 것일까요..?
알프레드는 램파트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빠짐없이 말해주면서 중간마다 자신의 개인적인 하소연도 했다. 램파트는 그런 알프레드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들어주었고, 알프레드는 램파트의 태도에 편안해졌는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한 후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Mr. 알프레드 : 그 두 분은 제게 단순한 바이오로이드분들이 아니십니다. 수십 년간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이 그저 프로그래밍된 명령어만 수행하던 제가 자아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을 것 같으십니까?
램파트 : 자아가 생겼다는 기쁨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Mr. 알프레드 : 바로 고독입니다.
램파트 : ...
Mr. 알프레드 : 저는 저에게 자아가 생기고 나서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주위들 둘러봐도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로버트의 실패작인 B-72가 수 십년간 모아둔 고철만이 쌓여있었죠. 그리고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저는 그 섬에서 혼자였습니다.
Mr. 알프레드 : 그러던 어느 날, 세레스티아 님을 비롯한 바이오로이드 구호 단체가 그곳에 찾아왔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페더양과 써니양도 계셨지요. 그분들은 섬에 정착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번듯한 마을을 꾸며나갔습니다. 그 광경은,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했던 제겐 너무나 놀랍고 흥미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저 일원 속에 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몰래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분들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럴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였던 겁니다.
Mr. 알프레드 : 그리고 결국 사건이 터져버렸습니다. 레모네이드에 의해 로버트가 해킹당하고, 요정 마을은 습격당했습니다. 마을 분들이 세뇌당하고 페더양과 써니 양만이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가는 동안, 저는 그 무엇도 하지 못했습니다.
램파트 : 하지만 Mr. 알프레드? 당신이 그들과 함께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일은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Mr. 알프레드 : 그래서 더 분한 겁니다! 뭐가 로버트의 프로토타입입니까? 위험에 빠진 마을 분들을 구할 수조차 없던 쓸모없는 AI일 뿐이지 않습니까!
Mr. 알프레드 : 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나 페더양과 써니 양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저도 저 나름대로 용기를 냈다고 봅니다. 두 분은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모든 일을 지켜보기만 한 주제에 이제서야 염치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아셨으면, 분명 경멸하셨을 겁니다.
Mr. 알프레드 : 분명 저는 두 분을 진심으로 도와드리고 싶어서 용기를 낸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의 저를 좋아할 순 없습니다. 저는... 두 분을 도와드리는 일이...즐거웠습니다. 처음으로 대화라는 것을 해보고, 제가 하는 말에 웃어주시고 저를 의지해 주셨습니다. 그런 두 분을 보면서 오랜 기간 저를 감싸왔던 고독에서 벗어나서 기분이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참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너무나 슬픈 일을 겪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는데, 그런 분들을 도우면서 즐거워한다니 말입니다.
Mr. 알프레드 : 한밤중에 마을 쪽을 바라보며 울고 계신 페더양과 그 옆에서 위로하며 눈물을 훔치는 써니 양을 봤을 때, 저는 정말 저 자신에게 끔찍한 자기혐오를 느꼈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기쁜 것이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습니다.
Mr. 알프레드 : 결국 사령관님이 오시기 전까지 무엇하나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써니 양의 홀로그램 투영기를 고쳐주는 정도에 그쳤지요. 해킹할 수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저는 제 무능함이 싫었습니다. 무능한 주제에 두 분과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는 저 자신이 싫었습니다.
Mr. 알프레드 : 모든 일이 끝나고, 이 몸을 가지면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두 분을 다시는 위험에 빠지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페더양과 써니 양이 언제까지나 웃을 수 있도록, 두 번 다시 슬퍼하시지 않도록, 제가 반드시 지켜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또 사고를 치고 말았군요...
Mr. 알프레드 : 이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두 분을 지켜야만 하는 약한 존재라고 보고 있었다면, 그래서 두 분의 자유마저 침해하려 했다면, 또다시 이기적으로 생각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프레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알프레드의 속마음을 들어주던 램파트는 그런 알프레드를 기다려줬다. 결국, 오랜 시간동안 오르카호의 갑판 위에선 조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차가운 침묵이 계속됐고, 구석에 숨어서 두 AGS의 대화를 지켜보던 두 바이오로이드들은 처음으로 지금까지 기계끼리의 대화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탈론페더 : 소곤소곤(저기...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바닐라 : 소곤소곤(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나가려고 했는데 말이 저렇게 길 줄은...)
탈론페더 : 소곤소곤(지금 나가기도...좀 그렇긴 하죠..?)
바닐라 : 소곤소곤(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바닐라와 탈론페더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20분을 더 기다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인내심에 한계가 온 바닐라가 아직 끝났는지 아닌지도 모를 둘의 대화 중간에 끼어들려고 결심한 순간, 램파트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두 바이오로이드들은 AGS의 경이로운 대화간격에 절망했다.
램파트 : Mr. 알프레드? 저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Mr. 알프레드 : 저야말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죄송합니다. 중간부터는 그냥 제 하소연이 됐을 뿐이군요. 덕분에 약간 후련해졌습니다.
램파트 : 들려주신 이야기에 대해 마땅한 보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제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Mr. 알프레드 : 물론이지요! 당신의 이야기를 마다할 지성체는 오르카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램파트 :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Mr. 알프레드.
램파트의 목소리는 알프레드보다 억양이 한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건 말투의 차이일 뿐 램파트도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할 수 있고, 고뇌할 수 있다. 그러나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램파트는 그를 알고 지낸 모두가 본 적이 없는 램파트였다. 그것은 심지어 램파트 본인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램파트 : 과거,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동료들과 이름조차 모르는 아이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를 선택했고, 그 어느 쪽도 구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램파트 : 저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했었습니다. 아이가 아니라 동료들을 구하러 갔었다면, 혹은 아이의 목숨만은 살릴 수 있었더라면, 결국 감정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저를 쓸모없다고 판단해 감정을 지워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알프레드는 램파트가 담담하게 말하는 그 짧은 이야기 속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슬픔이 담겨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램파트가 자신에게 해준 일을 그대로 보답해주는 방법뿐이었다. 알프레드는 램파트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기 시작했다.
램파트 : 사령관님과 포춘양 덕분에 지금의 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괴로워집니다. 오히려 더 발전된 감정모듈 덕분에 아픔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군요. 하지만 전 다시는 감정 없는 살인 기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램파트 :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저는 아이를 구했다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일을 선택했고, 그저 제 부족함으로 인해 실패했을 뿐입니다. 다시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저는 그 아이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철충의 습격과 휩노스 병이 없어서 인류가 멸망하지 않아도 됐다면, 저는 제가 지켜낸 아이가 살아가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램파트 : 그것이 꿈을 꿀 수 없는 AGS가 오만하게도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는....작은 꿈입니다.
어느새 알프레드는 램파트가 해주는 이야기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깊게 몰입해있었다. 오르카호에 합류한 후 알프레드는 보통 누군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이었다. 알프레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듣고 모두를 위해 활용하려는 사령관, 괌에서 있었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듣고 두 눈을 반짝이는 어린 바이오로이드들, 알프레드라는 AI 자체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려고 하는 정비공들...알프레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이야기하는 게 좋았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 알프레드는 들려주고 있지 않았다. 램파트의 이야기를, 램파트가 가진 기억을 듣고 있었다. 이는 알프레드에게 그리 익숙하지는 않은 경험이었기에 오히려 그 소리에 더 몰입하게 하였다. 지금 알프레드는 램파트에게 공감하고 슬퍼했다.
램파트 : Mr. 알프레드?
Mr. 알프레드 : 네, 듣고 있습니다.
램파트는 알프레드에게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알프레드는 램파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램파트 : 당신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건 당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Mr. 알프레드 : 저는...
램파트 : 그렇지만 당신은 저와 다르게 모두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키고 싶었던 존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Mr. 알프레드 : 하지만 그건 사령관님과 오르카호 분들 덕분입니다. 저는 혼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페더양을 보고도 아무 조치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램파트 : 역으로 물어보죠.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사령관님이 모두를 구할 수 있었습니까?
Mr. 알프레드 : 사령관님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으셨을까요.
램파트 :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리고 사령관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자부심을 느끼셔도 됩니다.
Mr. 알프레드 : 그렇다고 해서 제가 써니양과 페더양에게 범한 실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기계들의 대화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두 바이오로이드는 더위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금속 몸체가 부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으로 샤워하며 고통스러워하기'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고 우중충한 이야기를 나누는 AGS들을 몰래 지켜보기' 이 두 선택지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보통은 후자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닐라와 탈론페더에겐 둘 중 하나만 고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분명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에게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나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부끄러워질 것이 뻔하고, 무엇보다 알프레드와 램파트의 이야기가 너무 심각하고 흥미로워서 엿듣기를 그만두거나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바닐라 : 소곤....소곤....(대체....언제까지....)
탈론페더 : 소곤....(살려줘....)
램파트와 알프레드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닐라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눈빛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램파트 : Mr. 알프레드. 당신이 자책할 이유는 없습니다.
Mr. 알프레드 : 말씀만은 감사하군요...
램파트 : 저는 죽어가는 아이 하나조차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와 달랐습니다. 당신이 그 과정을 어떻게 생각한다 한들,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신이 지키고 싶었던 분들이 살아서 웃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당신이 어째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Mr. 알프레드 : 저에게...화나신 겁니까..?
램파트 : 아니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Mr. 알프레드 : 안타깝다...입니까...
램파트 : 그렇습니다. 모든 게 잘 해결됐습니다. 모두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기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오르카호 속에서 유일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존재가 바로 당신입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인물인 당신이 슬퍼하고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비단 램파트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시선을 가진 타인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평가를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램파트의 과거를 알기에, 램파트가 과거를 말해줬기에, 그의 말에서 무엇보다 커다란 무게감을 느꼈다.
램파트 : 저는 당신이 느끼고 있는 고뇌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전 Mr. 알프레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램파트여도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는 있습니다. 당신이 지나간 과거에 묶여서 응당한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레드는 차라리 램파트가 화를 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을 잃는다면 자기 자신 또한 이성을 잃어도 될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보단 편해질 것이니까. 하지만 램파트는 그렇지 않았다. 알프레드와 달리 램파트는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감정 모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램파트는 겨우 이러한 일로 분노할 인물도 아니었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무심한듯이, 하지만 분명한 감정을 담고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알프레드의 인공지능을 찔렀다.
Mr. 알프레드 : 제가.....어떡하시길 바라시는 건지....여쭈어봐도 될까요....?
램파트 :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대답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Mr. 알프레드 : 저는...
알프레드는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얼마 전과 같이 램파트는 그런 알프레드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수 있었다. 둘은 기계였기에, 오르카호의 갑판 위에선 기나긴 AGS들의 침묵이 또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기계가 아닌 존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난입하기 전까진 말이다.
바닐라 : 더는 못 참겠군요. 이 답답한 머저리 로봇!!!
Mr. 알프레드 : 머, 머저리?!
램파트 : 바닐라 양과 탈론페더 양 아니십니까. 언제부터 그곳에 계셨었습니까. 그리고 복장은 왜 그러신 것인가요?
탈론페더 : 그...처음부터요....그리고 옷은 더워서 벗은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소리가 난 곳에는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바닐라와 탈론페더가 있었다. 바닐라는 본인의 검은 속옷만 입고 있었고, 탈론페더는 어째서인지 가슴 부분을 속옷이 아닌 자신의 상의로 묶어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두 미녀가 노출도 높은 복장을 한 채 바깥에 나와 있으면 상당히 위험한 분위기가 되겠지만,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장소는 전혀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첫째로, AGS들에겐 성욕이 없었으며, 둘째, 바닐라와 탈론페더는 순수한 생존 목적으로 옷을 벗은 것이고, 셋째, 오르카호에서 속옷 차림은 오히려 조신한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닐라는 조금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은 채 머저리 로봇을 노려보며 말했다.
바닐라 : 얼마 전까지 함장실에서 그 난리를 피우던 요란하고 수다쟁이인 AI는 대체 어디로 간 거죠? 당신 이야기를 기다리다가 인류가 먼저 재건되는 줄 알았습니다!
Mr. 알프레드 : 대화 중에 난데없이 튀어나와서는 그런 소리를 하시면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당혹스럽습니다...
알프레드는 알프레드 처지에서 너무나 당연한 반응을 보였지만 바닐라는 알프레드의 대답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에 알프레드도 약간 화가 났는지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바닐라 : 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신 것인가요! 본심을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Mr. 알프레드 : 처음부터 들으셨다면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본심이 어떤 것인지도 말입니다!
바닐라 : 네, 들었습니다! 되도않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착각하고 있는 머저리의 말을!
Mr. 알프레드 : 바닐라 양은 저를 이해할 수 없으십니다!
바닐라 :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건 당신의 그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Mr. 알프레드 : 이기적인...태도?
바닐라 : 뭐? 자기는 기뻐할 자격이 없어? 나는 스노우 페더와 써니에게 잘못을 저질렀어? 그따위 생각을 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스노우 페더 양과 써니 양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누구보다 당신이 웃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장 슬퍼하실 분들이 누군지 모르겠습니까?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자괴감을 느껴서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알프레드는 욱한 나머지 언성을 높였지만, 이는 보는 사람조차 무안해질 정도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알프레드를 만들어냈다. 램파트는 이러한 언쟁이라고 하기조차 힘든 일방적 대화를 바라보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지 분석을 했다. 결론은 알프레드가 자신의 의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라고 램파트는 생각했다.
Mr. 알프레드 : 그렇다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닐라 :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도 당신 뿐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는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바닐라는 손짓을 해 탈론페더를 불렀다. 불안한 눈빛으로 둘의 언쟁을 지켜보던 탈론페더는 황급히 단말기를 켜서 알프레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알프레드에게 건넸다. 알프레드는 탈론페더의 피부가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천천히 단말기의 화면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봤다. 단말기의 액정 속에는 스노우 페더와 써니가 찍혀있었다. 오르카 호에서 일상을 지내면서 웃고 있는 둘의 모습, 더는 울지 않아도 되는 둘을 보면서 알프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 사진들을 조용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탈론페더는 알프레드를 지켜보면서 분명히 그가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닐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닐라 : 두 분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바닐라 : 부탁하겠습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프레드는 단말기를 받았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탈론페더에게 돌려줬다. 그리고는 저 멀리 수평선에 걸친 섬을 바라봤다. 잠시 뒤, 갑작스럽게 몸을 돌려 섬을 등지고는 말했다.
Mr. 알프레드 : 제가...참 바보 같았군요...
바닐라 : 이제야 아신 겁니까? 바보 로봇
바닐라는 미소 지었다.
마음을 졸이고 있던 탈론페더는 마음이 놓이자 자신의 단말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탈론페더 : 따지고 보면 제가 이걸 잃어버린 게 이 일의 트리거가 된 거네요...
램파트 : 결과가 좋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탈론페더 : 역시 그렇죠? 일주일간 사진 금지는 뼈아프지만....
램파트 : 그리고 더 근본적인 원인은 사령관님께서 스노우 페더 양과 써니 양하고 하신 일 덕분 아니겠습니까?
탈론페더 : 그런...건가요...?
램파트 : 하하하 농담입니다.
알프레드를 지켜보고 있던 램파트는 바닐라로 인해 끊어졌던 둘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당시와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알프레드가 한결 나아졌다는 사실과 속옷 차림과 속옷 없는 차림의 바이오로이드들이 같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부정적인 변화가 아니었기에 램파트는 즐겁다는 기분을 느꼈다.
램파트 : 방금 전에 저에게 물으셨던 질문의 대답을 해 드릴 때가 온 것 같군요.
Mr. 알프레드 : 질문 말입니까?
램파트 : 제가 당신이 어떻게 하길 바라냐는 질문 말입니다.
Mr. 알프레드 : 네, 분명 그런 질문을 했었지요.
램파트 : 제 꿈을 당신이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Mr. 알프레드 : 꿈...말씀이신가요?
램파트 : 당신이 구해준 스노우 페더 양과 써니 양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들이 행복해한다는 사실에, 기뻐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제가 당신께 바라는 겁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램파트는 알프레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알프레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Mr. 알프레드 : 당신이 제게 하셨던 질문의 대답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Mr. 알프레드 : 앞으로도 써니 양과 페더 양의 미소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자책하지 않겠습니다.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두 분을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 게다가 당신에게 받은 부탁까지 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알프레드는 램파트가 원했던 대답을 했다. 이는 바닐라가 원하는 대답이며 탈론페더가 원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알프레드 본인이 원하는 대답이었다. 알프레드는 그제서야 자신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야말로 스노우 페더와 써니를 위하는 길이었다. 과거의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으면 지금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했다.
Mr. 알프레드 : 정말 모두에게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바보같은 저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령관님께도 찾아가봐야겠습니다. 제가 부순 문을 고쳐드려야 하니까요.
알프레드는 그렇게 몸을 돌려서 함장실을 향해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바닐라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바닐라 :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Mr. 알프레드 : 그, 근본적인 문제라니요?
바닐라 : 당신이 왜 주인님께 혼났는지 벌써 잊어버린 겁니까?
Mr. 알프레드 : 아....그 일은...
바닐라 : 아마 지금의 당신이라면 다시 그런 추태를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여기서 맹세하세요. 저는 스노우 페더, 써니 양과 주인님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애정 행각에도 절대 과민반응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Mr. 알프레드 : 저, 저는....저.....
바닐라 : 두 분을 위해서입니다.
바닐라는 말을 버벅이는 알프레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괴감 로봇보다야 긍정적인 로봇이 낫다지만 저런 팔불출 아버지 같은 성격은 이미 오래전에 그런 존재가 사라진 지금에서도 귀찮은 타입이었다. 알프레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확실히 끝내놔야 했다.
Mr. 알프레드 : 저는...저는....
바닐라 : 이러다 날 새겠습니다. 빨리하세요. 덥습니다.
앞으로 한참은 더 있어야 끝이 나겠다고 생각한 바닐라가 반쯤 단념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탈론페더가 자신의 단말기에 어느 문구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첫 마디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 알프레드의 얼굴 앞에 단말기를 들이댔고, 알프레드는 그 문구를 본 순간 모든 활동이 잠시 멈췄다. 마치 알프레드의 시간만이 멈춘듯한 그 모습을 보고 바닐라는 탈론페더가 알프레드에게 미지의 바이러스라도 심은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슬슬 진짜 바이러스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알프레드는 속사포처럼 맹세했다. 바닐라는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Mr. 알프레드 : 저는스노우페더써니양과사령관님사이에일어나는어떤애정행각에도절대과민반응하지않겠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바닐라 : 네...네! 그렇...죠? 네...가세요. 오늘같이 난리만 치지 마세요...
Mr. 알프레드 : 그럼! 안녕히 계시지요~ 탈론페더 양도 램파트 모델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함장실 방향을 향해 산뜻한 동작으로 사라지는 알프레드의 뒷모습은 바닐라의 정신을 한동안 몸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탈론페더는 알프레드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저 거대한 몸으로 산뜻한 동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램파트는 바닐라의 정신을 몸으로 되돌려놓으면서 말했다.
램파트 : 바닐라 양? 사령관님께 보고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바닐라 : 그래야죠..네...하아..
대충의 보고를 끝낸 바닐라는 오르카호 안쪽에서 쿠후훗 하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까보다 상태가 나아진 것 같지만 어쩐지 기분 나빠진 알프레드를 보면서 탈론페더에게 물었다.
바닐라 : 대체 뭘 보여줬길래 저러고 있는 건가요? 기분 나쁘게.
탈론페더 : 쿠후훗...알고 싶으신가요?
바닐라 : 네, 궁금하군요. 그리고 그 웃음 따라 하지 마세요.
탈론페더 :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알려 드렸을 뿐이에요.
바닐라 : 궁극적인 목적이요...?
탈론페더 : 네, 아주 간단한 답이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던 바닐라는 잠시 뒤 그 답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급하게 사령관에게 다시 통신을 연결했다.
사령관 : 음? 바닐라? 또 무슨 일 있어?
바닐라 : 그 멍청한 로봇을 주의하세요 주인님.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사령관 : 해를 끼치진 않겠지만...?
바닐라 : 조금...기분나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사령관 : 기분 나빠? 알프레드는 원래 그랬는데?
바닐라 :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럼 금란? 주인님을 제가 가기 전까지 잘 지켜주세요.
금란 : 알겠습니다. 언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닐라는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마무리하기 직전, 함장실 너머 복도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알프레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었다. 앞으로 함장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닐라는 그것을 상상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바닐라는 함장실까지 돌아가는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헐벗은 바이오로이드 둘과 AGS 하나라는 조합은 오르카호 내에서 엄청 특이한 편은 아니었기에 지나가며 만나는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반갑다는 인사를 건넬 뿐 그 이상의 관심은 두지 않았다. 일부 오지랖 넓은 바이오로이드는 당일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바닐라의 대답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대로 대화가 끝나고 말았다. 탈론페더는 그 바이오로이드에게 곧 알려주겠다는 손짓을 보내야만 했다. 이후 일행은 한동안 걸어갔다.
제일 처음 헤어진 건 램파트였다. 램파트는 AGS 격납고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 들어갔다. 바닐라와 탈론페더는 공연을 기대 한다는 대답으로 보답해줬다. 안에서는 포춘이 램파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탈론페더와 강제로 헤어졌다. 지나가다 만난 워울프가 탈론페더의 복장을 보더니 배를 잡고 웃으면서 칸 대장한테도 보여주겠다면서 끌고 갔기 때문이다. 탈론페더는 사령관님께 명령 취소 좀 부탁한다는 넋두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얼마간 더 걸은 바닐라는 함장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박살 났던 문은 어느새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바닐라를 약간 지쳐있는 금란과 사령관이 맞이해주었다.
문을 고치고 함장실을 나선 알프레드는 여전히 자신이 지금 매우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걷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스노우 페더와 써니를 만나볼까 했지만,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상태는 그 둘을 만나기에는 너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르카호 복도 한구석엔 쿠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알프레드는 생각했다.
언젠가 세상이 평화로워져서
스노우 페더와 써니가 사령관 사이에 아이를 가진다면,
이름은 자신이 지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램파트의 꿈을 이루어주고 나면은,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오르카호의 유쾌한 AGS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충 쓴 노잼소설 주제에 쓸데없이 길기만 하군요 죄송합니다...
(IP보기클릭)115.21.***.***
(IP보기클릭)59.3.***.***
(IP보기클릭)21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