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바닐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휴식 시간이 아닌데? 약간 아리송한 생각이 들었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근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닐라 곁엔 약간 낯선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뭔가 개량한복에 메이드복을 섞어 마개조를 한 듯한 옷, 그리고 공손하게 감은 눈. 감은 건지, 아니면 실눈을 뜬 건지 모르겠다. 일견 단정해보이지만 치마 한쪽이 허벅지 위쪽까지 푹 파여 있는 걸로 봐선 역시 멸망 전 인류의 취향이 어디가나 싶었다.
아, 최근에 합류한 바이오로이드였지. 배틀 메이드 쪽이라던가, 하여간 바닐라의 후계기쯤 된다고…….
“어…….”
이름이 뭐였더라? 내 멍한 표정을 귀신 같이 눈치챘는지 바닐라가 푹 한숨을 쉬었다.
“인사드리렴. 네 이름도 기억 못하시는 멍…기억이 좀 짧으신 우리 주인님이셔.”
“불초 금란, 주인님을 뵙사옵니다.”
여전히 바닐라는 입이 거칠다. 뭐 이름을 잊어버린 거야 내 잘못이긴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일단 인사부터 했다.
“끙,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반가워, 금란. 부족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애들을 이끌고 있어. 근데 바닐라, 무슨 일이야?”
소개만 하는 거라면 이따가 쉬는 시간에 해도 충분할 텐데. 업무 볼 때 굳이 찾아와서 할 필요까진 없는 일이다. 물론 내가 업무 방해했다고 짜증을 내거나 그런 적은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생각 이상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많이 쓰는 메이드들의 행동치곤 의아한 건 맞았다.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의외로 대답을 한 건 바닐라가 아니라 아르망이었다.
“폐하께선 부관을 잘 안 바꾸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가능하면 부관도 안 두려고 했지만. 근데 한번 오기 부려서 지옥을 맛본 뒤로 그 생각은 쏙 들어갔다.
“처음에는 콘스탄챠 양, 제가 합류한 뒤로는 저, 그리고 무적의 용 님. 폐하께서 저희들을 이끄신 뒤로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부관이 바뀐 건 세 번뿐이었습니다.”
“왔다갔다하면 인수인계도 힘들 테고, 또, 음…….”
“아무래도 업무 성격상 부관에 맞지 않는 인원들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말할 필욘 없잖아…….”
나는 음울하게 말하며 아르망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워울프나 토모 같은 애를 부관으로 두고 일할 순 없지 않는가. 워울프는 짜증난다고 패널에 총질할 것 같고 토모는 저 혼자 과열돼서 실려 나갈 것 같다.
솔직히 부관 후보군은 많다. 문제는 하나씩 다 단점이 있다는 거지, 나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알렉산드라는 잘할 것 같지만 리리스나 리제의 견제가 너무 심하고, 라비아타도 좋을 것 같지만 아직도 남들 앞에 나서는 건 좀 꺼리는 눈치다. 나야 뭐 이제 그 일은 그러려니 하는데 본인이 본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꼴이니, 거 참.
하여간 이래저래 재고 따지다보면 무난하면서도 일 잘하는 인원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맡긴 일 잘하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나? 나도 바꾸지 않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
근데 내가 생각해도 변명처럼 느껴지긴 하네.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구성원들이 폐하를 만나 뵙는 게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윽, 그래서 시찰이라는 것도 꽤 자주 나가잖아. 쉴 때도 여기저기 가보려고 노력 많이 한다고. 가능하면 좀 쉴 수 있게 해주는 방법도 생각해보고…….”
“시찰은 나가신 지 두 달이 넘었고, 쉬는 시간에 가는 건 역효과입니다. 저번에 쉬는 시간에 스틸라인 쪽 한번 가셨다가 난리 났던 것 잊으셨습니까?”
윽, 찔린다. 한번 깜짝 놀래켜주려고 불쑥 찾아갔다가 진짜로 놀라게 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마리가 직접 모든 스틸라인 숙소 정비 지휘하고 군기 빠졌다고 얼차려를 줬다는 흉흉한 소식도 들려와서 속이 좀 쓰렸다.
“그러니까 너무 호들갑이라고…….”
“폐하께선 저희들의 단 한 분뿐인 지도자. 폐하 스스로의 품격을 낮추어 보시는 건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럼 뭐 어떻게 하라고? 한번 돌아다닐 때마다 호위하라고 우르르, 시중들라고 우르르 그렇게 스무 명 서른 명씩 뭉쳐 다닐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즉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폐하.”
“…….”
좀 욱해서 농담한 건데. 내가 우물쭈물하자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던 아르망이 안쓰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폐하의 도구입니다. 아껴주시는 건 감사드리지만 진열장 안의 장식품처럼 여겨주시는 건 저희로서도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 좀 더 마음대로 다루셔도 됩니다.”
“끄으응.”
요지는 좀 더 거칠게(?) 다뤄달란 뜻인가. 전투 터질 때마다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막 굴리는 걸로 따지면 이미 충분히 거칠게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전투 때라면 폐하께서도 지휘로 며칠 밤낮을 저희와 똑같이 고생하시지 않으십니까?”
“야, 난 함교에서 이래라 저래라만 하는 거고, 현장에서 뛰는 거랑 같겠어?”
“그 ‘이래라 저래라’의 무거움을 잘 아시기에 지휘하실 때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시지 않습니까? 목표로 한 것은 반드시 얻으시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브라우니 한 명 잃으려고 하지 않으시지요. 참으로 욕심쟁이십니다, 폐하는.”
“알겠어!”
나는 백기를 올렸다. 아르망이 또 찬양 모드로 들어가면 머리 아프니까 이쯤에서 끊어야 한다.
“알겠다니까. 그럼 그거랑, 부관이랑, 여기 금란이랑 무슨 관곈데 그래?”
“네, ‘이중 부관’ 제도를 건의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직접적인 업무 보조는 저나 다른 분이 한다 하더라도 그 외 보조는 구태여 고도의 훈련이 필요치 않으니까요. 그럼 폐하께서도 업무에 지장이 없으시고, 저희는 돌아가면서 폐하와 가까워질 기회를 얻고, 순번제니 크게 마찰도 생기지 않을 터. 무려 하나의 투석기로 세 성을 동시에 부수는 것과 똑같습니다.”
방금 일석이조 그 비슷한 속담 얘기한 거지? 태클은 넘어가기로 했다. 취지는 좋다, 좋은데…….
“우선은 메이드 분에게 협조를 요청하니 기꺼이 응해주셨습니다. 시행착오를 몇 번 겪어보고, 개선한 뒤에 오르카 전 대원을 대상으로 한다면 폐하께서도 괜찮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금란을 소개해주는 거야?”
아, 그래서 바닐라가 일부러 데려왔구나. 바닐라는 예의 그 도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합류한 동생이고, 또 주인님의 시중을 잘 들려면 곁에서 관찰…아니 시중을 들어드리는 게 가장 빠를 테니까요. 다만.”
“다만?”
“금란, 네가 말할래?”
“소, 송구하옵니다. 주인님, 미천한 소첩은 오감이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아주 조금 예민하옵니다. 눈을 감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니 부디 불쾌히 생각지 않아주신다면 감사하겠사옵니다.”
아, 눈 감고 있는 거 맞았구나. 근데 감각이 예민한 게 뭐 어때서 그러는 거지. 난 재빨리 몸 냄새를 맡았다. 혹시 옷에서 냄새나나? 샤워도 꼬박꼬박 했는데.
“주인님의 청결은 저희가 모두 책임지고 있는데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지금 그런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바닐라 양?”
“…알겠습니다.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
“엥?”
왜 말하다가 끊는 거야. 내가 얼빠진 얼굴로 아르망을 돌아보자 아르망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규칙입니다. 각 구성원들의 특징은 폐하께서 부관으로 데리고 계신 동안 직접 알아보실 것.”
“…그 사악한 규칙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대?”
“제 별 것 아닌 생각을 그리 칭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망도 고민을 많이 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의도는 나와 오르카의 다른 일반 대원들이 좀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거겠지. 어쨌든 내가 그쪽에 대해 알려면 질문이나 실없는 얘기라도 해야 할 거고, 그럼 말문이 트일 테니까.
하긴 말 걸기 전까지 어쩔 줄 모르는 소심한 애들도 좀 있었지, 아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건데?”
“지금부터입니다.”
“뭐? 방금 말했잖아. 준비 같은 거 안 해?”
“이미 끝났습니다. 폐하께서 분명 허락해주실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르망이 생글생글 웃으며 명단 하나를 내밀었다. 와, 순번부터 시간, 할 일까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언제 다했대? 하여간 아르망은 날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또 예지!”
“후후, 방금 것은 폐하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금란에게 다가갔다. 어쨌든지 기념비적인 첫 이중 부관이다. 나도 잘하지 않으면.
“잘 부탁해, 금란.”
그러면서 가볍게 악수를…….
“하으응!”
“…….”
“소, 송구하옵니다. 주인님의 손길이 너무 듬직하셔서, 아, 아니…….”
진짜 가볍게 했는데, 금란이 음란한 신음소릴 내며 몸을 떨었다. 순간 뇌가 2초 정도 정지한 것 같았다. 보니 아르망은 웃음을 참고 있고, 바닐라는 날 한심하다는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감각이 예민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뭐 얼마나 예민하길래 악수로 이래?”
“온도 변화를 도 단위로 파악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헉.”
뭔 변온동물이니? 난 재빠르게 손을 뗐지만 금란은 숨을 할딱이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좀 야릇하긴 하네.
“근무 중엔 덮치시면 안 됩니다, 폐하.”
“안 그래!”
날 뭘로 보는 건지. 난 좀 과장되게 투덜거리며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두 명이 되니 좀 더 편하긴 했다. 금란도 뭐라도 해보려고 애를 썼고. 너무 예민해서 좀 불쌍하긴 했지만……. 어쨌든 첫 부관 역은 잘 마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없이 잘 될 줄 예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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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지 얼마 안된 관계라는 설정 땜에 호칭 고민 많이 하다 쇤네 찍었는데 좀 구린 느낌이 있긴 했어요. 모르겠다, 그냥 소첩으로 ㄱㄱ | 20.09.11 13: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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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대사가 불초 금란이니 저라면 그거 선택했을거같지만 수복대사나 로비대사에서도 그렇고 소첩 자주 쓰니 상관없을듯요. 금란과 사령관의 좌충우돌 스토리가 기대됩니다.ㅎ | 20.09.11 13: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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