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적의 용
실수였다.
[거기, 미스 드-하고(dragon, 용의 프랑스어 발음)?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간단하고도 속이 뻔한 도발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입꼬리는 히죽이며 웃고 있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건 탐색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우월감을 가진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럼 알면서도 넘어간 나는 대체 얼마나 무지렁이란 말인가?
서방님의 당황하시던 모습, 그 팔에 매달려 있는 그녀. 그걸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주변 모두 당시엔 너무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안다, 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분을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한심한 생각인지 정도는. 그리고 서방님이 나와 서약을 맺으셨어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맺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서방님의 일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서방님은 인류 부흥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신 분이니 내 욕심만 내세우는 건 정말 어리석고 난감한 짓이다. 아내 된 몸으로서, 어찌 서방님의 앞길을 돕지는 못할지언정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내 앞에서 굳이 저런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않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아, 느낌 정말 좋네요.”
“이, 이런 모습을 각하께 보여드릴 순 없네.”
“어머머, 남들은 이런 걸 입고 사령관께 보여드리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그러세요? 자, 가죠!”
“아니, 아아…….”
휘장이 확 걷히며 서방님이 보였다. 좀 전에 여기서 나오실 때 모습 그대로였다. 평소와 다른 깔끔한 그 모습에 순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쩜 저렇게 위풍당당한 모습이실까. 서방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사랑해왔다고 줄곧 자부했건만, 그런 마음들이 스르르 녹아가고 있었다. 눈을…마주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여드리기 싫었다.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분명, 도저히 남에게 보여줄 만한 표정이 아닐 터였다.
“……용.”
“그, 금방 벗고 나오겠습니다. 각하께선…….”
“너무 예뻐.”
“…….”
그 한 마디에 이성이 녹았다. 내 지위, 이 상황,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 모두 여름날 얼음처럼 녹아 없어져버렸다. 눈앞의 서방님만이 오직 내가 있는 세상이자 존재 이유였다.
“각하께서도 정말 멋지십니다.”
“그냥 둘만 있을 때처럼 불러 줘.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불리는 건 싫어.”
“하지만, 각하……. 여기 오드리 님도 계시고…….”
“오드리도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말했거든.”
서방님의 말에 이성이 제자리를 찾은 듯 머리에서 피가 쏠려나갔다. 부하들보다 더 인류 부흥에 힘써야 할 나부터가 사랑에 빠져 마음을 딴 데 쓰고 있다는 것으로도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남에게 들키기까지 한다면, 나는 도저히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다…….
“오드리 님, 이 일은 제발 다른 분들에겐…….”
“그런 알르에강스 떨어지는 일은 하지 않아요. 미스 드-하고는 왜 이리 걱정이 많으실까? 전 제 옷을 입고 그런 표정 짓는 걸 원치 않아요. 자, 방금 그 표정 좀 더 보여주세요. 당신,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표정 너무 매혹적이었는걸요.”
그 엉망인 표정이? 마음속에서 의문이 드는 것과 서방님이 내 손을 잡은 건 동시였다. 뿌리칠려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데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심장이, 눈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서방님께서 날 보고 계셨다.
***
응접실에서 좀 기다리자 작은 소란과 함께 용이 나왔을 땐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아아…….”
오드리가 나중에 보여 준 한 벌의 옷,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몸을 감싼 용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용은 하얀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었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하얀 꽃이 용의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아하게 뒤로 틀어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러서, 얼마 전에 같이 봤던 밤하늘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물안개처럼 엷은 면사는 용의 하얀 얼굴을 살그머니 가려줘서,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듯한 용의 얼굴을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드레스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늘 단정하게 입는 모습만 보다 보니 이런 노출이 더더욱 신경 쓰였다. 드레스는 어깨를 드러냈다는 점 외엔 크게 별다른 장식도 없었지만, 그 덕에 가는 허리라던가 몸매가 더욱 부각되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예뻐.”
그래서 겨우 그 말 한 마디 짜낼 수 있었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여길 답변이었다.
“각하께서도 정말 멋지십니다.”
다행히 용은 내 대답을 들어줬는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게 이 모습을 처음 보여줄 때의 그 부끄러운 미소였다.
“그냥 둘만 있을 때처럼 불러 줘.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불리는 건 싫어.”
“하지만, 각하……. 여기 오드리 님도 계시고…….”
“오드리도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말했거든.”
용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마 자기 딴에는 지금껏 안 들키며 잘 처신해왔다고 생각한 모양인가보다. 아니 나도 좀 전에 오드리에게 듣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한 건 우리 둘뿐인 모양이었다. 이따 말해줘야겠다. 지금은 우선 달래는 게 먼저고…….
“오드리 님, 이 일은 제발 다른 분들에겐…….”
“그런 알르에강스 떨어지는 일은 하지 않아요. 미스 드-하고는 왜 이리 걱정이 많으실까? 전 제 옷을 입고 그런 표정 짓는 걸 원치 않아요. 자, 방금 그 표정 좀 더 보여주세요. 당신,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표정 너무 매혹적이었는걸요.”
“용.”
“각, 아니 서, 서방님.”
“이건 오드리가 우릴 위해 준비해 준거래. 그러니까 고맙게 받자.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저희를? 어떻게, 아니 어째서…….”
“바로 그 표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미스 드-하고.” 오드리가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말했다. “여기 오르카에서 사령관은 절 포함해 정말 수없이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싸여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일부러 사령관의 팔짱을 끼고 선내를 배회해도, 단지 ‘부럽다’라는 시선을 보낼 뿐 순수하게 질투하는 분들은 없었어요.”
“찬물 끼얹는 거 같아 미안한데 리제나 리리스는 질투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의 질투는 조금 성격이 달라요. 리제 씨는 독점욕, 리리스 씨는 소유욕이죠. 하지만 여기 미스 드-하고는, 마치 평생의 반려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비유하자면, 후훗, 꼭 바람 피는 남편을 보는 눈빛이었죠.”
“…….”
나만 그런 생각 느낀 게 아니었구나…….
“바로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찾는 중이었어요. 전 당신에게 최고의 옷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 순간 역시 최고가 되어야 하고요. 미스 드-하고는 그런 의미에서 당신 옆에 서기에 최적의 분이시죠.”
“그럼 그대가 이걸 입고 서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전 당신과 같은 눈빛을 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오드리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제 사랑법은 당신의 것과는 조금 다르니까요. 각기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 않겠어요?”
오드리는 그렇게 말하며 패널을 조작했다. 위잉, 하는 소리와 응접실이 움직이더니 화창한 결혼식 피로연을 연상케 하는 배경이 나타났다. 소품에 식탁에 배경까지……. 본격적인데, 이건. 하긴 오드리는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니까.
“미스 탈론페더가 하는 것만큼은 못할 테지만 저도 나름대로 잘 찍어 드릴게요. 자, 어서 마주 서세요. 시간은 짧고 찍어야 할 사진들은 많답니다.”
“하지만…….”
“이리 와, 용.”
망설이는 용을 끌고 카메라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용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갰다. 그래도 내 부름에 응답하듯, 용은 부케를 꼭 껴안고 나를 바라봐줬다. 남들 앞에선 절대 보이지 않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녹을 듯 뜨거운 그 시선, 붉게 물든 얼굴.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희미한 미소와 떨리는 눈동자. 나는 홀린 듯 용에게 입맞춤을 했다.
홀린 듯이, 그렇게.
여름날의 태양처럼 뜨겁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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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목은 피가로의 결혼 중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에서 따왔습니다.
1. 원래 용과 오드리의 만담도 넣으려 했지만. 귀차니즘.
2. 뭔가...잘 안 써지는 느낌이군요.
3. 원래 쓰던 거나 빨리 써야지....
4. 취향 맞으시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미미한 글장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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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같은데 2편 꺼는 용 시점에서, 3편 꺼는 주인공 시점에서 1인칭으로 썼어요. 근데 실ㅋ패ㅋ | 20.08.25 2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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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의도는 알겠지만 대사는 한번만 서술한뒤 곧바로 서로의 독백만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쓰시는게 낫지않을까싶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20.08.25 20: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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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퇴고가 중요하다는 거죠.. | 20.08.25 20: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