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려놓고 보니 제가 몹시 존못이라 투시를 잘 잡는 편도 아니어서
상반신만 뚝 뗀 버전이 더 보기 좋을 것 같아 두가지를 준비했읍니다...^^
19게에 올려놓고 보니 여기가 대회 본진이더군요
19금 내용도 아니고 해서 바로 여기에 올립니다.
사령관실에서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고, 그 귀찮은 하치코도 못들어오게 문을 잠궈두고 꿀잠을 자고 있을 터였던 나는 어느새 납치당한 공주님마냥 스틸라인 친구들에 의해 해변 위로 끌어내려(?) 졌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보지 못하고 으어어 거리며 영문을 몰라하는 나를 보고 피부가 구릿빛으로 그을린 하계전투복 차림의 브라우니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사색이 된 레프리콘들이 아랑곳 할 리 없는 브라우니들을 나무라는 한 가운데에 내 왜소한 몸이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마리 대장이나 레드후드 연대장도 몹시 곤란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거나 짜증나지는 않았다. 작지만 훌륭한 몸을 가진, 귀여운 인상의 실키가 검연쩍은 표정을 하고 다가와서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곱게 웃었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얼굴이 빨개진다.
해변은 축제처럼 왁자지껄했다.
아니, 그곳은 축제장이 맞았다. 얼마 전에 내가 결재했을 터인... 내용도 제대로 보지 않고, 축제라는 제목만 보고, '그녀들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최종결재를 땅 때려버린 어떤 계획서가 떠오른다.
이번 축제의 기안자는 모처럼, 플라잉 샬럿...아니지, 하르페이아였다. 지성미가 넘치지만 의외로 사무업무에는 서툴 것 같은 그녀가 축제 기간과, 장소와, 축제에 필요한 자원들의 조달을 고민하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을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지휘관급은 아니나, 실무자로서는 직급이 몹시 높아서 결재선의 협조자에 들어간 지휘관들도 쉽게 계획을 반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르페이아 그녀는 성실하다. 대충 계획을 짰을 리도 없고, 협조자인 지휘관들을 골탕먹일 정도로 배려가 없지도 않다. 이 축제는 누구하나 ㅌ 토달 수 없이 완벽하게 계획됐을 것이다. 경호부장인 리리스조차 내 신변을 이유로 축제를 반대할 거리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남국의 해변에서 웃으며 수영하고, 보급 참치가 아닌 축제음식을 먹고, 여름놀이를 즐기며 작전의 시름을 잊고 있는 대원들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오르카호에 탑승하지 않고 각지에 흩어져서 자신의 일을 하는 바이오로이드들도 모처럼 축제를 위해 모였다. 베이컨이 익는 냄새가 바다의 물비린내에 섞여 먹음직스럽게 풍겨온다.
대원들의 모습을 가늘게 눈을 뜨고 보는 내 뺨에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주인님"
정갈하게 아담하고, 하얀 바닐라의 손에 얼음과 라임을 띄운 액체가 가득찬 유리잔이 있었다.
"이거.. 몰디브란거야?"
"철지난 농담은 재미없습니다."
바닐라는 핀잔하듯이 말했지만 나는 바닐라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닐라는 항상 퉁명스럽지만, 그녀와 오래 지내면서 알게된 그녀의 속마음은 말투와는 다르다. 심지어, 그녀는 들떠있고, 다소 흥분해있다. 올려다본 바닐라는 언제나와 같은 메이드복이 아닌 오르카호 PX 표준사양의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는데, 몸매가 너무 감탄스러우서 눈을 떼기 힘들다. 아담하지만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확실하고 군더더기라곤 붙어있지 않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대체로 다 그런 편이긴 하지만 항상 똑같은 메이드복만 입던 바닐라의 또다른 일면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랜다.
"어... 이거 같이 한잔 하자고 하는거야?"
"아닙니다, 사실은 해변카페의 일일 점원입니다."
"나랑 농담하고 있어도 돼?"
나는 쿡쿡거리며 건배를 하고 모히또를 한모금 넘긴다. 묘하게, 바닐라의 맛이다. 연녹색의 잎사귀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담백한 성격과 소박한 칵테일 사이에서 대응점을 찾고 있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바닐라에게 끌리는 것인지.
"손님도 별로 없는걸요. 이거 한다고 해서 뭐 보너스라도 줍니까? 근무라도 한 번 빼주시지요."
바닐라의 입가에는 미소가 아련하게, 하지만 마음아프게 걸쳐진 것을 느낀다. 그녀가 투정하듯 말한다.
"데이트.. 해주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무심코, 하지만 바닐라의 강변에 의해 이루어진 약속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렇게 강하게, 자기주장을 한 적을 나는 그 이전에는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약속을 이루어주기엔 나는 너무 많이 바빴다. 섬을 정리하고 획득한 것, 다음에 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해야만 했고, 그 와중에 잠시 쉬어가자는 차원에서 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축제가 기획이 됐다. 그렇게 일들을 마치고 생각한 것은 데이트는 커녕, 일단 잠부터 자자, 그런 것이었다.
"미안."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나마 가까이 있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것 같으니까요."
술에 강하지 못한 나는 칵테일 몇모금에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꿋꿋한 옆얼굴이 쓸쓸하면서도 유독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실 바이오로이드들 모두가 그랬다.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인간들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는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하건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해서. 멸망 전의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편이라는 바닐라도 그랬다. 마치 고서에 이름이 적힐 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른 퉁명스러운 말을 하게 된 바닐라 자매들은 인간들에게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피조물에게 온갖 악의를 담아 저주를 내리는 창조주의 모습은 뒤틀려 있지만, 사실 창조주들의 세월도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고통으로 얼룩졌다. 창조주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과 피조물에 의해 고통을 겪고 피조물을 저주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시작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미안."
"왜 사과하십니까?"
반사적으로 바닐라를 쳐다봤는데,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가, 열대의 바다처럼 일렁였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 우리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겹쳐지고, 입과 코에 그녀의 라임향이 진하게 풍긴다. 그녀의 따뜻한 혀와 입술이 달콤하다. 그녀의 아담한 몸이 내 품에 안기듯이 들어오고 깨끗한 섬세하고 목덜미가 습기를 머금고 내 팔에 겹쳐진다.
"여기선.. 안됩니다."
"응, 알고있어."
우리는 딱 거기까지만 했다.
"주인님, 우리는 모두 언제까지라도 주인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응."
"우리가 바이오로이드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니 저는 주인님이 좋습니다."
"알고있어."
손에 들어온, 바닐라의 씩씩하지만 예쁜 손은 작았다.
"저는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잖아."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일견 우리들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분명 사정이 나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철충들을 이겨내고, 혹은 별의 아이들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아 멸망전의 세상을 재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겨우 이 작은 섬의 해변에 잠시 잠깐 여장을 풀고 축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난 적어도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 다할 때까지는 이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제가 살아있는 한 주인님 곁에 언제까지라도 함께 있게 해주십시오... 그게 제 얼마 안되는 바람이랍니다."
"...그래, 나 버리고 도망가거나 통수라도 치면 안된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성실한 눈으로 말하는 바닐라의 말을 농담처럼 넘겼다. 나에겐 그녀들을 마지막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철충을 모두 퇴치하고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 어쩌면 그녀들은 행복하지 못할 수도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칵테일, 한잔 더 가져다 드릴까요?"
"좋지, 바닐라 것도 같이 한잔 더."
"네!"
힘차게 바(bar)로 들어가는 바닐라의 몸짓이 언제나의 메이드가 아닌 여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그게, 나는 기분이 좋다. 속박에서 해방된 그녀도 언젠가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살게되길 기도한다.
이 여름은 나에게 있어 모히또 맛의 바닐라로 기억되길 바라며.
(IP보기클릭)119.197.***.***
(IP보기클릭)175.223.***.***
(IP보기클릭)211.51.***.***
(IP보기클릭)11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