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드리 드림위버-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Che soave zeffiretto)
0.
삭삭삭, 천을 자르고,
슥슥슥, 혼을 넣는다.
1.
그건 여느 때처럼 일에 파묻혀 있을 때였다.
“사령관? 시간 있어요?”
급하게 봐야 할 업무부터 끝내니 벌써 점심 무렵이라, 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 마시고 있자니 은근히 보기 힘든 사람이 찾아왔다. 오드리였다.
“아 ,오드리.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크게 급하진 않은데……. 사령관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일이 있거든요.”
오드리는 약간 곤란하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머리를 굴려보자. 오드리는 오르카에 몇 없는 ‘대체 불가능한’ 인재 중 하나라 무척 바쁘다. 보통 다른 애들은 그녀가 옷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쓰지만, 실제로 오드리가 그런 부탁들을 들어주는 건 정말 바쁜 시간 짬 내서 해주는 호의에 가깝다.
본인 왈, 결국 나한테 잘 보이려고 다들 그러는 건데 안쓰럽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고 한다. 처음엔 선물이나 뇌물 비슷한 것들도 안 받으려고 하다가 딱 상대가 별로 부담 가지지 않을 선에서만 받는다고 했으니……. 응, 오드리는 진짜 착한 애다.
…이야기가 딴길로 샜는데 어쨌든 오드리는 전투로 손상된 의복의 수선이나 전투복 개선부터 시작해 내가 잘 모르는 전문적인 분야까지 손을 뻗고 있다. 가끔 볼 때 닥터에 포츈까지 모여 무슨 설계도면 같은 걸 보며 서로 얘기를 나누는 걸 보면 AGS의 장갑 등 하여간 겉을 감싸는 거 전반에는 다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오드리가 직접 찾아 올 정도면 꼭 필요한 일이겠지.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다른 애들을 잘 배려해주는 그녀가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소한 부탁이든 중요한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다면 최대한 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Splendid(멋져요). 하지만 정말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바쁘면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으, 괜찮아. 공방으로 가면 돼?”
나는 일부러 좀 과장되게 일어나서 오드리를 재촉했다. 내가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어 봤자 오드리의 부담만 심해질 테니까. 오드리는 기쁜 건지 미안한 건지 모를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에 살짝 매달렸다. 윽, 부드럽다…….
“정말 우리 사령관은 너무 젠틀하다니까. 날이 갈수록 멋져지는 것 같아요. 후후, 나중에 평화로워지면 꼭 전속 디자이너로 삼아주세요?”
“하하하……. 노력할게.”
“tres bien(아주 좋아요)! 자, 어서 가죠.”
오드리는 만족스러운지 내 팔을 이끌고 척척 걸어 나갔다. 아이고, 여기저기에 박히는 시선들이 따갑다. 재빨리 지나가려는데 오드리가 팔을 꽉 붙잡았다. 왜? 이해가 안 돼서 슬쩍 보니까 시선을 즐기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뭐 과시용 트로피도 아니고…….
“어머, 사령관. 한가하나보네?”
“그건 아니고 오드리가 도와달라고 해서…….”
“흐으응, 그래?”
가면서 레오나도 만났고,
“시찰 중이십니까, 각하?”
“아냐! 그냥 오드리가 도와달라는 게 있어서 도와주러 가는 거야.”
가면서 마리도 만났고,
“…좋아 보이십니다, 각하.”
“…….”
가면서 무적의 용도……. 으아, 용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바람 소리가 쌩하고 날 정도로 지나쳐 갔다. 단둘이 있을 땐 서방님이라 불러주는데. 오늘따라 저 ‘각하’ 소리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거 같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거기, 미스 드-하고(dragon, 용의 프랑스어 발음)?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
용의 걸음이 딱 멈췄다. 덩달아 내 심장도 멈추는 거 같았다. 우와, 진짜 심장이 멈춘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오오오오드리?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긴요.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어디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그런 낫 알르에강스한 눈빛을 그냥 넘긴다면 제 자존심이 깨진 유리잔처럼 팡 하고 터져버릴 거예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수천 개가 떠오른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왜 애먼 내 (비밀)아내를 도발하는 걸까? 용은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서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찮은지 주변 시선이 쏠린다. 으아, 테티스도 있고, 세이렌도 이쪽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난 내 표정 모르겠고, 오드리만 득의양양만 표정이다.
용은 분명 그냥 지나칠 거다. 나와의 관계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지만,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서 남들 앞에선 절대 그런 티를 안 내니까.
근데 어라, 또 내 예상이 빗나갔다. 용은 천천히 등을 돌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표, 표정이 장난 아니다. 농담 않고 눈빛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다. 난 분명 내 쪽이 키가 더 큰데도 용에게 내려다봐지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오드리 드림위버. 지위나 다른 관계를 다 떠나서 내가 그대에게 그런 근거 없는 빈정거림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근거 없는? 와우, 아주 질 나쁜 plaisanterie(농담)도 구사하실 줄 아시네요? 지금 제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런 말이 되겠군.”
“딸꾹.”
체했나보다. 없던 딸꾹질이 나네. 진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빼려 해도 오드리가 내 팔을……아니 얘 맨날 바느질만 하는 애가 뭐 이리 힘이 세다냐? 순식간에 뭣도 모르고 치정 싸움에 끼인 꼴이라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일단 나라도 사과하면…….
“저기…….”
“각하께선 잠시만 조용히 해주십시오.”
“사령관,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요?”
응, 말도 못 꺼냈습니다. 너네는 왜 이럴 때만 합이 잘 맞는 거니? 차마 말하지 못한 내 비명이 속에서만 울렸다. 농담 않고 둘의 시선 사이에 전기 스파크라도 튈 것 같다. 좀 더 정확힌 오드리가 놀리듯 빙글거리는 눈빛이고, 용이 좀 복잡한 눈빛인데……. 에이, 모르겠다! 난 용의 손을 덥썩 잡았다.
“가, 각하?”
“오해는 가서 풀자. 나 지금 오드리 도와주러 공방에 가고 있거든. 용도 와도 되는 거지?”
제발 된다고 해줘. 내 간절한 눈빛이 통한 모양인지 오드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고개 끄덕일 때만이라도 날 보고 좀 끄덕이면 안 될까…….
“보는 눈도 많으니 특별히 그래 드리죠.”
“자, 잠깐, 잠깐만. 각하, 이 손 좀…….”
“놀러 가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응? 서로 이상한 오해는 풀어야지.”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등 뒤의 시선들이 따갑다 못해 아플 지경이다. 나 대체 뭘 잘못한 걸까. 그냥 난 가벼운 마음에 고마운 마음으로 오드리를 도와주러 가고 있었을 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
아무래도 조만간 닥터한테 위장약이라도 받아 놔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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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이 하오체를 쓰긴 하는데...그냥 마리랑 비슷한 말투로 했습니다. 저기서 하오체를 쓰니 너무 건방진? 느낌이 나서.
2. 하오체가 나도 높이고 상대방도 존중하는 높임법이라 좀 이럴 때 쓰기 애매한 것도 있어요. 그냥 사령관에 대한 존경의 의미나 오르카 생활에 익숙해져서 대충 말투 변했다 칩시다.
3. 크흐흐, 파란의 예감. 삼파전 재밌지. 1인칭 시점은 확실히 쓰기 편하네요. 좀 더 다듬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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