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우…….”
과연 용이 말한 대로, 갑판 위에선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용의 무릎을 전부 차지한다는 굉장한 사치를 부리며 축 늘어졌다. 뭐가 그리 재밌기라도 한 모양인지 용은 내 머리카락이며 볼을 연신 만지고 있었다.
“좀 피로가 풀리십니까?”
“으응……. 진짜 좌아악 늘어지는 느낌이네……. 이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아.”
“잠깐 주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깨워드리죠.”
“거짓말……. 아침 될 때까지 안 깨울 거면서…….”
“제가 서방님께 어떻게 감히 그럴까요.”
짐짓 놀라는 말투 속에서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하긴 이런 실랑이도 매번 있었지 아마. 늘 뻔한 결말이었다. 난 침대 속에서 용의 품에 안겨 아침을 맞이할 테고 내가 왜 안 깨웠냐는 책망에 용은 늘 그렇듯 적당히 맞춰 주며 넘어갈 터였다.
뭐, 뻔히 알고서도 속아 넘어가면서 그걸 즐기는 나도 어지간히 용에게 빠져 있다는 뜻이겠지만.
“서방님, 주무시기 전에 잠깐만 하늘을 봐 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용은 내 양 뺨을 살그머니 잡았다.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하늘은 별의 바다였다.
아스라이 파도치는 소리와 얕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 저 먼 하늘 위에는 보석처럼 찬란한 별빛. 그리고 두 뺨에 느껴지는 용의 부드러운 손길과 온기. 여름밤의 환상에 나는 넋을 잃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어떠십니까?”
“…정말 예쁘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은 내게 이 하늘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게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기분 좋게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하늘하늘한 잠옷 위로 얇은 가디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고 단아했다. 하얀 가디건 위로 가지런히 묶여 늘어진 머리카락은 밤을 펼쳐 놓은 것만 같았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예뻐, 용.”
그래서 이번에도 솔직히 말했다.
“저 말고 하늘을 더 봐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늘도 네 머리카락처럼 아름다워.”
세상에, 이건 하르페이아 따라 봤던 200년 전 영화에서도 할까말까한 대사다. 분명 질책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용은 잔잔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오늘따라 낯간지러운 말씀을 많이 하시는군요.” 용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모습이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제 몸도…그리고 제 마음도 전부 당신의 것이니까요.”
“난 그냥 네가 좋은 거야. 굳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차림새 같은 거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거랍니다. 지휘하실 때의 그 총명함을 여심에 1할이라도 신경 써주신다면 다들 고생은 안 할 텐데…….”
“나도 어지간하면 부탁 같은 건 다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 가끔은 부담이 너무 심하단 말야……. 그런 거 다 들어줬다간 오르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난장판이 될 걸.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용의 핀잔 아닌 핀잔에 자연스레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번에 의도치 않게 스틸라인(아무래도 얘네가 제일 많으니까) 애들의 대화를 엿듣는 모양새가 됐었는데, 세상에 나 같은 게 뭐라고 나 한번 보겠다고 별별 암거래까지 횡행하는 걸 보고 한동안 혼이 나간 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펜리르 같은 애들은 유혹이고 뭐고 한 네 단계쯤 건너뛰고 다 벗고 함장실에 뛰어 들어오질 않나, 소완은 내 식사에 최음제를 타려다 실패하질 않나, 레오나는 발키리가 나랑 먼저 잤다고 으르렁대다가 저번에 결국 둘이 같이…….
아니 뭐 여하튼 그렇게 애들 사이에 껴서 피곤할 거면 차라리 일로 피곤한 게 훨씬 낫다. 적어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하면 줄기는 하니까. 그런데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의, 특히나 지휘관급처럼 자존심 강한 애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해결 방법도 없고 피만 마르는 거 같다.
“누구나 서방님의 총애를 받고 싶어 하니까요.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그건 좀…….”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서방님.” 용이 내 입술에 재빨리 검지를 대며 말했다. “그러한 생각이 저희들의 유전자 정보에 박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저나 다른 분들이 서방님을 생각하는 감정은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은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서방님의 전투 감각이나 전장 파악이 누구보다 훌륭하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서방님은 뛰어난 지휘관은 아니십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전장에서 지휘관은 적을 쳐부수는 일뿐만 아니라…때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아군을 쏴 죽여야 하는 결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분명히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서방님은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 난 욕심쟁이지. 목표도 달성하고, 아무도 안 죽게 할 거야.”
처음 콘스탄챠와 그리폰이 날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녀들은 날 구출해줬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부족한 날 믿고 따라와 주고 있다. 이들 모두, 그리고 여기 있는 무적의 용도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 내 가족이자,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이자, 내 생명의 은인들이다.
난 이들을 잃는 게 너무나도 두렵다.
“네, 그게 서방님이 이전의 인간 분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인간 분들은 저희들에게 ‘죽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부서진다’라고들 하죠. 아무리 물건이 소중하다 해도 물건은 물건일 뿐, 동등한 인격체 따위는 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전 너무나도 많이 봐 왔습니다. 하지만 서방님은 저희를 아껴 주십니다. 쓸모 있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서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가 처음 서방님을 뵈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는 줄 아십니까?”
“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을 거 같은데…….”
무적의 용은 멸망 이전의 인간들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문자 그대로 인류 최후의 인간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필요한 건 인간이라는 희망이지, 지휘나 업무를 할 인원이 부족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디 가장 안전한 밀실에서 인생을 만끽하고 계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매일 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끼고 놀면서요.”
“아니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끼고 논다기보단 끼워진다는……. 아니, 그래. 계속해 봐.”
“함 내에 예쁘게 차려 입은 더치걸도도 보이길래 그 말로만 듣던 테마파크 C구역 손님이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나 진짜 인식이 안 좋았었구나…….”
“그리고 덴세츠 사나 코헤이 교단 쪽의 바이오로이드들도 보여서 사상 쪽으로도 이상한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고요.”
“나 진짜 인식이 안 좋았었구나!”
가슴이 막 후벼 파지는 것 같이 아파왔다. 하긴 용은 멸망 이전부터 살아 있었으니까 더치걸을 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덴세츠 사니 코헤이 교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멸망 전에 있던 사이비들이라 하니 그것도 이해는 가고. 물론 우리 애들이 사상적으로 이상하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가끔…아니 좀 자주 폐하니 구원자니 반려니 하면서 반쯤 빨개벗고 쳐들어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제발 아르망이 그런 건 안 배웠으면 좋겠다. 애들 정서 교육이 너무 안 좋은 거 같아.
“하지만 지내보면서 점차 느끼게 됐습니다. 이들이 단순한 명령이나 의무 따위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서방님께서 이들을 진정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도 역시 느끼게 됐습니다. 인류 부흥이다 뭐다, 솔직히 아미나라는 분께서 제게 남긴 마지막 사명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용은 허리를 굽히더니,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줬다.
“그 때문에 서방님을 만났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저 역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방님께선 제 삶의 지표를 바꿔주신 분이시니까요.”
“하하,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내가 배우는 입장인걸.”
“그런 사소한 것 따위가 아닙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이런 밤하늘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겁니다. 그게 군사학적으로 어떻게 유용할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겠죠. 하지만……. 자, 서방님. 제 손끝 쪽으로 있는 별을 봐주십시오.”
그녀의 손끝에 걸린 하늘엔 여전히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용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가 알타이르(견우성), 그리고 저기가 베가(직녀성). 그 위로 있는 게 백조자리입니다. 백조 머리 쪽에 빛나는 별이 데네브, 그리고 이 셋을 이은 게 여름의 대삼각형입니다. 별자리들의 지표라 할 수 있죠.”
바람결처럼 속삭이는 목소리. 미풍에 검은 머리카락이 밤물결처럼 일렁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봤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장군이나 지휘관의 강인한 눈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저기 흐르는 별무리가 은하수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젖을 너무 세게 빠는 바람에 흐른 젖이 저 은하수가 되었다고 하죠. 그래서 영어로는 은하수를 밀키 웨이, 즉 젖의 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엄청 자세히 아네. 난 지금까지 그냥 별들이 예쁘다고만 생각했어.”
“기술이 발달했다곤 하지만 별자리를 관측하는 능력은 항해의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단순히 주입된 지식에 불과했던 이 기억이, 이제 서방님 덕에 제 눈에도 저 별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저 별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단순히 기록 정도로밖에 치부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제게 하나하나의 추억입니다. 후후, 방금 말한 헤라의 젖도 조금 전 욕실처럼…….”
“아아아아니 그건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거고. 시, 싫었어?”
“아뇨, 그렇게 느긋하게 이어져 있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뭐랄까 그게……. 뭐 씻겨 준다는 건 그런 의미긴 하지, 응. 이제 안 건데 용은 격렬한 쪽보다는 그렇게 느긋하게 오랫동안 하는 걸 더 선호하는 듯하다.
아니 나는 왜 이럴 때도 이딴 걸 생각하고 있는 거야.
“실은 제가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게 하나 더 있는데, 서방님께서 같이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 지금?”
“네. 아니 지금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용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난 조금 긴장했다. 이렇게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지금 아니면 어렵다’라는 말의 무게는 꽤 무겁다. 하지만 용은 그런 내 심각한 표정에 미안한 듯 일어서며 내 손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응?”
“왈츠라는 겁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서방님과 꼭 이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난 춤의 ㅊ자도 몰랐지만 막상 하는 건 용의 가는 허리에 손 두른 채 빙빙 도는 것뿐이라 어려울 건 없었다. 음악이 없었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곳에서 느리게 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좀 추워졌지만 괜찮았다. 그럴수록 용을 더 꼭 끌어안으면 됐으니까.
가슴이 밀착되어 있는 탓에 그녀의 고동이 아주 잘 느껴졌다. 얼굴을 사르르 붉힌 채 작은북 치듯 두근거리는 용의 모습은 내 빈약한 어휘력이 미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를 안기 전 전희로서가 아닌 그저 사랑스러울 뿐인 입맞춤. 단지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도 입술을 타고 느긋한 안락함이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듯했다. 한 자리에서 느리게 돌며,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새 모이를 쪼듯 입을 맞췄다.
“오늘 멋진 선물을 줘서 고마워.”
“아까도 말씀드렸듯, 서방님을 챙기는 건 아내로서 당연한 의무니까요. 하지만 실은 제 사심도 많이 섞여 있었답니다.”
“이런 사심이라면 얼마든지 섞여도 좋을 것 같아.”
“기꺼이 참고하겠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그만 내려가시죠. 이제 슬슬 잠항해야 할 때이니.”
용이 손을 끄니까 그제야 늦은 졸음이 밀려왔다. 이거 오랜만에 늘어지게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기분이 들었다. 한쪽 팔에 매달리는 사랑스런 아내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오르카의 안으로 들어갔다.
갑판에서 그녀가 보여준, 짧고도 달콤한 시간. 이제 계단을 다 내려가면 다시 이들을 이끄는 자리에 서야겠지. 하지만 괜찮다. 용과……. 그리고 날 믿어주는 모두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 평화로운 밤이 조금 더 지속되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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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외
“헉, 사령관님 내려가신다! 곧 잠항하겠어요.”
광학미채라도 썼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말 예상치 못한 어둠 속에서 탈론페더가 불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나온 건 메이와 나이트앤젤. 둠브링어의 지휘급 개체들과 호드의 참모라는 참으로 의외의 조합이었다.
“대장님. 제발 좀 저렇게 해보세요. 아니 저거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좋으니까 좀 따라해 보시라고요. 매번 튕기기나 하니까 사령관님이 어려워하시죠. 그러니까 동침 횟수도 제일 적고요!”
“야, 저건 치사하게 부관 직위 가지고 한 거잖아!”
“대장님 부관 설 땐 오르카가 맨날 바닷속에만 처박혀 있었습니까? 그거 말고도 기회가 대체 몇 번이나 있었는데…….”
“아 그렇게 잘났으면 니가 먼저 사령관 유혹해보던가!”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그 후에 날 제치고 했니 안했니 울고불고 징징거리는 거 짜증나서 그러는 거예요.”
“뭐, 징징? 너 말 다 했어?”
“설마 다 했겠습니까?”
메이와 나이트앤젤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 인신공격까지 으르렁대건 말건 탈론페더는 사령관과 용이 내려가는 순간까지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고 나서야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렌즈에서 눈을 뗐다. 눈이 게게 풀린 게 무슨 약이라도 한 대 맞은 표정이었다.
“아아……. 이렇게 낭만적인 컷을 찍을 수 있었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리드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아! 그야말로 예술성까지 갖춘 엘레강스한 작품이에요! 제 인생 베스트 2에 해당한다고요!”
탈론페더는 되도 않는 오드리의 말투까지 흉내 내며 눈을 반짝였다. 참고로 베스트 1은 아직 공석으로, 언젠가 분명히 있을 칸과 사령관의 밀회였다.
“약속 지켰으니 그 우스꽝스러운 통계는 당장 삭제해줘요.”
“네~ 벌써 다 삭제했답니다. 자, 끝!”
“뭔데? 뭐 때문에 나까지 끌려 나왔는데?”
“대장님이랑은 관계없고요, 그냥 오늘 참모총장님이 한 거 보고 제발 조금이라도 배워서 나중에 써먹기나 하세요.”
나이트앤젤이 삭제해달란 건 언젠가부터 시크릿 네트워크에 뜬 ‘사령관과 동침 횟수가 가장 많은 바이오로이드는?(추정)’이라는 정체불명의 게시글이었고, 그걸 발견한 즉시 가장 수상한 일이 있을 땐 보통 범인이었던 탈론페더를 찾아가 미사일을 들이대며 협박했다. 그게 어쩌다보니 기브 앤 테이크가 돼서 이런 도촬…아니 촬영에 끌려나온 거지만.
메이 대장이 꼴찌만 아니었어도 못 본 척 하는 건데. 정말 이 땅꼬맹이 철부지 대장 덕에 도촬에도 협력해보고 참 바이오로이드 생(生)이라는 건 알 수 없느 노릇이었다.
“근데 참모총장도 참 웃겨. 설마 사령관이랑 사귀는 거 잘 감추고 있다고 자기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마 오르카에서 저 둘 사귀는 거 모르는 건 참모총장 본인밖에 없을걸.”
용이 하나 간과하고 있는 건 이 오르카 안에서 비밀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넓어봤자 폐쇄된 잠수함 안인데 소문을 감춘다고 얼마나 감춰지겠는가? 용이 그토록 경계하던 탈론페더는 이미 둘의 밀회 장면을 모조리 찍어서 시간별, 날짜별, 주제별로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이걸로 제 마이 사령관 초극비 시크릿 네트워크가 또 불을 뿜겠네요!”
“닥치고 내려가기나 해요.”
알 바냐. 탈론페더가 침을 질질 흘리건 말건 나이트앤젤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한 손에 도촬범, 한 손에 징글맞은 대장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오르카 내부로 들어갔다. 자기 스텔스 능력이 하필 이런 데 써먹힐 줄이야……. 본의 아닌 자괴감이 마음속에서 뭉글뭉글 솟아오르는 그녀였다.
“내가 이 화상 땜에 못 살아…….”
물론 그녀의 한탄은 가라앉기 시작한 오르카의 구동음에 묻혀 들릴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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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매운맛 시동 걸어야죠 | 20.08.21 16: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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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제가 묘사 위주로 쓰는 걸 좋아해서요 | 20.08.21 22: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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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니다~~~ | 20.09.19 21: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