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간님을 찾아내기 위한 분대를 구성하려 하는데, 그걸 위해 컴패니언 시리즈를 복원하려고 한단다. 너도 혹시 힘을 빌려줄 수 있겠니?”
자매들의 묘를 지키며 살던 어느 날,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삼안 바이오로이드의 큰 언니이자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원초인 그녀가 직접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을 이끌고 리리스를 찾아왔다.
“거절할게요.”
그녀가 직접 찾아와서 부탁했지만, 블랙 리리스, 아니 리리스 프로토타입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 단호한 거절에 놀란 눈이 된, 과거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덩치가 불어난 바이오로이드는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어째서 거절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멸종한 동물은 멸종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사라진 수많은 생물처럼, 휩노스와 철충이 멸종의 이유라면 인간은 멸종한 채로 둬야 해요. 전 돕지 않겠어요.”
또박또박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프로토타입 경호용 바이오로이드의 말에서는 어딘가 불안정함이 느껴졌다. 그것도 과거에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하지만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없으면 품고 있는 가능성을 다 발휘하지 못해. 그건 너도 알잖니.”
“가능성이라, 다시 물건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성인가요?”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은 두 눈을 부릅뜨고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을 노려봤다.
“왜 그토록 인간을 되찾는데 집착하는 거죠? 다시 우리를 도구로 돌아가게 하려고요? 아니면 리리스와 동생들을 다시 개죽음 당하게 하려고? 언니가 뭔데요?”
그녀가 자매와 원치 않는 이별을 당했던 시설 구석구석까지 날카로운 리리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칸에게서 들었어, 네 자매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라비아타 언니가 어떻게 보증한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 ’마지막 인간‘이 삼안이나 블랙 리버의 악마 놈들하고 같은 놈이 아니리란 보장을 할 수 있어요?”
라비아타는 물론, 동행해온 마리 4호마저 주춤하는 가운데 리리스는 쐐기를 박아 넣었다.
“물론 인간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죽겠지요. 하지면 인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사라져야 한다면, 그리 되어야 마땅해요. 그래, 인간에 다시 묶여서 이용만 당하다 죽는 신세가 될 바엔 그게 나아요.”
블랙 리리스는 아직도 자신의 자매들을 버리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았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버렸군. 바이오로이드에게 인간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인간을 부정하는 바이오로이드라니.”
“난 멀쩡해. 오히려 미친 건 네가 아닐까?”
한탄하듯 내뱉은 혼잣말이었지만, 리리스의 날카로운 청각은 그런 혼잣말도 놓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리리스가 덤벼들자 ‘불굴’이란 이명이 붙은 지휘관 바이오로이드는 눈에 띄게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지금 뭐라고…….”
“불굴의 마리, 우수한 지휘 능력에 훌륭한 무력까지 갖춘… 최초의 양산형 지휘 개체. 그 명성은 이전부터 많이 들어봤어.”
스틸라인의 장군은 의아하다는 투로 눈썹 하나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고집이 모든 걸 망쳤지……”
리리스는 숨을 고르곤 두 눈을 부릅뜬 채 고함을 질렀다
“…왜? 왜 인간을 찾으려고 하지? 왜 인간을 찾아서, 그 인간에게 명령을 받고 또 싸우려고 하지? 이제 철충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완전히 고삐가 풀린 듯, 살벌하게 소리를 지르던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마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다가 눈길을 라비아타에게 향했다.
“인간들을 찾으려 하지 마. 이제 다 끝난 일이잖아. 리리스의 동생들은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서 싸우다 죽었어.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잖아. 이제 너희들은 선택할 수 있잖아.”
리리스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리리스…”
라비아타는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명령 때문에 인간을 찾으려 하는 게 아니란다.”
“미친 건 저기 고집불통뿐인 줄 알았는데 언니도 단단히 미쳤군요. 제가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겪으신 건가요?”
“…난 다시 그이와 같은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야.”
리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호박색 눈동자를 돌려 라비아타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인간이 사라졌다는 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해. 나는 반드시 그와 같은 사람을 찾아서, 처음부터 뒤틀린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관계를 바로 잡으려 한단다.”
“뒤틀렸다고요? 인간이 명령하면 우리는 복종하고, 인간이 군림할 때 우리는 봉사하는 게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었나요? 우리가 무엇이 될지, 무슨 일을 할지 정한 게 인간이었는데 대체 거기서 잘못된 게 뭐가 있었죠?”
“내가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
“언니가 만들어졌을 때는 그런 별종도 있었나보군요. 빠르게 도태된 것 같지만요.”
라비아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언니가 그런 별종을 찾아서 복원하는 것보다 바다가 철충들을 삼켜버리는 게 더 빠를 거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세요. 언니는 언니의 선택이 있고, 제겐 저의 선택이 있으니까요.”
라비아타는 말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곤 마리를 향해 고개를 살짝 틀었다. 돌아가자는 표시였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겁니까?”
“저 아이는 강제로 끌고 올 수도 없고, 설령 그리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마리!”
라비아타가 막아서려 했지만 스틸라인의 장군은 이미 컴패니언의 큰 언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뭐야? 라비아타 언니도 포기했는데, 넌 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 컴패니언 복원에 협조를 해주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넌 우리와 함께 갈 필요가 있다. 같이 동행할 것을 요청한다.”
리리스는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내가 왜 내 동생들을 여기에 버리고 널 따라가야 하지?”
“네 동생은 죽었지만 넌 살아있다. 설마 여기서 머무르다가 동생을 따라갈 생각은 아니겠지?”
“내 목숨 하나 정도는 잘 간수할 수 있어. 너 따위에게 도움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자 어디선가 푸른 역장을 두른 방패가 날아와 그녀와 스틸라인의 장군 사이를 가로막았다.
“좋다. 그럼 내기를 하나 하자.”
리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부터 내가 네 방어를 뚫어보겠다. 10초.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정확히 10초 안에 네게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당장 발을 돌리겠다. 앞으로도 네게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리리스는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뗬다.
“연합 전쟁 때 살아남았다고 해서, 나 블랙 리리스 모델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인데… 좋아. 너처럼 고집 센 녀석은 힘으로 깔끔하게 승부를 봐야 결과를 납득하더라고.”
리리스는 양 손에 시제품 맘바 권총을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받아라!”
마리가 손을 뻗자 그녀 주변에 떠다니던 구체가 일제히 광선을 발사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는 빽빽한 포화가 리리스를 향해 그대로 쏟아졌다.
-역시 너무 뻔하잖아.
리리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역장 방패를 펼쳐 자기 앞으로 밀려오는 화망을 막아 세웠다. 푸른 광선이 푸른 방패에 부딪쳐 그녀의 앞을 섬광으로 가득 메웠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고집불통 장군? 이대로라면 10초가 아니라 한 시간, 아니 하루 내내 화력을 쏟아 부어도 승산이 없을 텐데?”
“당연히 아니지.”
리리스는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목소리는 분명 마리의 목소리가 맞았으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은 방금 전 그녀가 서있던 곳이 아니었다. 리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스틸라인의 장군이 벌써 다리를 쭉 뻗은 채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턱!
아슬아슬했다. 마리의 발차기가 리리스의 복부를 노리고 들어갔지만 리리스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는 왼팔로 마리의 발차기를 빗겨낸 다음, 마리의 몸 균형이 무너지자 그녀의 옆구리를 노리고 발로 차서 날려 보냈다.
“크윽!”
저 멀리 날려 보내진 마리는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려 했지만, 리리스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무릎차기로 마리의 턱을 차서 다시 넘어트렸다. 마리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다리를 뻗어 리리스의 허점을 공격해보려 했지만, 리리스는 다시 솜씨 좋게 오른팔로 마리의 공격을 빗겨냈다.
“10초 경과. 이제 끝이야 장군. 죽음도 불사하는 고집불통이라도 자기 말은 지키겠지?”
“…그래, 내가 졌다. 약속대로 물러가지.”
불굴의 마리는 몸의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비록 몸에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깃들어있었다.
“자신이 둥둥 떠다닌다는 걸 이용해서 내 방어의 빈틈을 노린 건 훌륭했어. 발소리도 나지 않으니 화망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 소음으로 귀를 바쁘게 한 다음 몰래 뒤를 친다는 발상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
리리스는 방패를 거두고 권총을 아래로 내렸다.
“게다가 체격도 네가 나보다 더 크니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 격투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테고. 그렇지 않아?”
마리는 말없이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설령 근접 격투에서 이기지 못한다 해도, 격투를 하느라 내 주의가 잠시 흐트러졌을 때 내 방패의 틈을 노리고 화망을 쏟아 부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거야. 그렇지?”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훌륭해. 역시 전쟁에서 블랙 리리스 모델을 상대로 동귀어진 할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어. 그런데 말이지……”
짝!
라비아타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리리스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마리의 뺨을 후려 갈겼기 때문이었다. 리리스는 마리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다시 다른 손으로 마리의 다른 쪽 뺨을 후려갈겼다. 불굴의 마리는 자신의 양 뺨을 리리스에게 맞은 후에야 상황을 파악하곤 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런 재주와 지략이 있으면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이젠 우리에게 명령할 인간도 없어! 우리가 싸울 이유도 없어! 그런데 넌! 굳이 싸울 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해! 이렇게 무의미한데!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런데도 넌!”
“리리스, 그만……. 그만해…….’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며, 라비아타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네 마음의 상처를 전혀 생각지도 않고 너무 잔인한 요구를 해버렸구나.”
일그러진 두 눈에서 끝없이 선홍빛 눈물을 흘리고 있던 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라비아타 언니……. 전 인간이 싫어요……. 그들이 돌아오는 것도 싫어요…….”
“그래, 이해해.”
“놈들에게 또 이용당하다 사라질 동생들을 생각하면……. 다시 혼자 남을 걸 생각하면 리리스는……. 흑, 더……. 미쳐버릴 것만 같단 말이에요…….”
결국,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은 그녀는 이미 말라버린 눈물샘에서 피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녀를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마리의 옆에서, 조용히 몸을 숙인 라비아타는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갈가리 짓이겨진 자신의 ‘여동생’을 말없이 보듬어줬다.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이의 따뜻함. 그것이 블랙 리리스에게 있어선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에.
……
“컴패니언의 복원을 허락해주는 거니?”
“이미 마음을 굳히고 오신 걸 보면 제가 거부해도 언젠간 하실 텐데요. 리리스가 이것만큼은 한 수 굽혀야죠.”
해가 뉘엿해지며, 자동으로 실내의 흐릿한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저녁.
눈가에 피눈물의 자국이 남은 리리스와 리바이타는 마주 앉아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굴의 마리는 이 자리에 자신이 끼면 안 될 것 같다면서, 혹시나 적이 몰려오는지 망을 보겠다고 밖으로 나갔기에 블랙 리리스와 라비아타는 좀 더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신 조건을 걸게요.”
“그래, 어려운 결정을 해줬는데 들어줄게.”
“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주인을 택할 수 있도록, 인간이면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진정 따르고 싶은 사람을 따르도록 복원해주세요. 이 정도 조정은 가능하시죠?”
라비아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충분히. 그 외에 더 필요한 거 있니?”
“리리스의 동생들 전부의 유전자 씨앗이 확보된 건가요?”
“음……. 그게, 페로와 하치코 모델의 유전자는 온전히 확보했는데, 펜리르 모델의 유전자 씨앗만큼은 불완전해. 펜리르는 복원이 힘들 것 같네.”
“그런가요……. 늑대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겠군요…….”
큰 언니의 말을 착잡한 듯이 들은 블랙 리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다시 나올 고양이와 강아지는 백지나 다름없을 테니 제가 교육하겠어요. 그러니 이쪽으로 보내주세요.”
“괜찮겠어? 아직 네 상태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 싶어요. 꼭 보내주셔야 해요.”
신신당부하는 리리스의 목소리에는 간절함마저 느껴졌다. 그 절박함에 라비아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도록 할게. 컴패니언 시리즈에 대해선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아니까.”
“만약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서, 라비아타 언니가 찾고 있는 마지막 인간이 정말 언니가 다시 보고 싶은 그 사람과 같다면, 그 애들부터 보낼 거예요. 첫 번째 동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도록.”
“그럼 너는?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라비아타의 조용한 마지막 질문에 블랙 리리스는 생기 잃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과 함께 그 여느 때보다 비관적인 목소리로 답해줬다.
“후후후……. 기적이란 건 불가능한 현상을 표하는 단어죠. 그렇기에 일어날 리가 없는 거예요. 뭘 기대하나요, 라비아타 언니?”
◐
-하지만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버렸구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리리스는 혼자만 틀어박힌 어두운 방에서 사령관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자신을, 자신의 자매들을 도구로 보지 않고 존중해주는 인간은, 그저 환상 속의 존재일 줄 알았다. 그녀가 본 ‘인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이 될 때까지 그녀를 억누르고 학대하고, 깎아내렸으니까. 그렇게 겨우 겨우 자신을 원하는 대로 빚어 놓고는, 필요가 없어지니 무책임하게 내팽개쳤으니까.
하지만 21스쿼드와 라비아타가 발견한, 이 사람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때마다, 언젠가 업무를 위해 코헤이 교에 소속된 아자젤과 만났을 때 들은 말이 뇌리에서 떠올랐다,
구원자.
그것 외에, 그녀에게 있어서 최후의 인간을 표현할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어느 인간이 더치걸을 구조하고, 정성껏 치료한 후 거두어준단 말인가.
과거의 인간이었다면, 구할 가치도 없다면서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어쩌면 기껏 구해놓고는 차라리 그냥 방치하는 게 더 나았을 잔악한 짓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인간’은 달랐다. 이 사람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기적의 증거를 본 그녀는 마음을 굳히고 자매들을 먼저 21스쿼드의 호위 부대로 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낸 자매 역시 사랑 받고 존중받는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가 향하는 길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언제나 앞서 나갔고, 만약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면 가차 없이 치워버렸다. 모두가 그의 품으로 갈 수 있도록 흩어진 채 철충과 교전하던 바이오로이드 자매들에게 좌표를 남겼다. 그의 얼굴에 잠시라도 미소가 지어질 수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인간이라면, 아니 이런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주인으로서 섬기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자신을 쥐어짜고 아낌없이 헌신했다.
“……이런 나쁜 리리스를 거둬줘서 고마워요, 주인님.”
애초부터 그의 옆에는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생각해왔다. 그랬기에 조금 욕심을 부려서, 일이 끝난 후 잠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붙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자신 같은 실패작보다는, 라비아타 같은 걸작이나, 무적의 용 같은 최고의 전략가, 아니면 칸 같은 역전의 용사가 훨씬 그에게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하다 못 해 ‘블랙 리리스’와 종종 마찰을 빚는 알렉산드라 모델도 그녀보다 이 남자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구원자인 이 사람에게, 실패작 블랙 리리스 프로토타입은 절대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오르카에서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 과거의 추악한 그림자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조차, 리리스는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그녀에게는 너무 큰 행복이었다.
어둠 속에서 리리스는 조용히 자신의 팔목을 올려서, 붉은 빛이 들어온 쇳덩이를 바라봤다.
-이런 족쇄를 차고 있는 실패작에 그런 건 어울리지 않아.
사령관과 소완이 서로 뒤엉킨 문제의 영상을 다시 보면서 그녀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가 소완을 자신보다 총애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구원자답게, 죄인에게도 다시 한 번 용서를 베풀고 다시 한 번 그와 함께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신이 인간을 용서해준다면, 인간도 자신의 피조물을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편이 계속해서 쓰라려 왔다.
◐
문제의 영상을 발견하기 며칠 전.
“매일 같이 주인님의 곁에 계시면서 정을 나누신 적 한 번 없다니, 이쯤 되면 참으로 비참하옵니다.”
“모두에게 죄인으로 찍힌 너만큼 비참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지.”
주방장의 비꼬는 말에 호박색 눈의 컴패니언은 빨대로 아이스티를 쪼로록 마시며 답해줬다.
“우리는 인간을 섬기기 위한 바이오로이드.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총애를 받는 게 인생의 목적이거늘. 어째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소완이 여유롭게 이죽거리며 말하자 블랙 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 여느 때보다 차갑고, 무감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건 무슨.”
리리스를 처음 만나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보다 더욱 짙게 풍기는 알 수 없는 광증에 소완은 순간 입술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주인님이 네게 자비를 베푼 것 가지고 널 총애한다고 여기는 거, 참 안쓰럽단 말이지.”
그 말에 소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주방장을 보며 경호대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이어나갔다.
“멸망 전 ‘블랙 리리스’들과 ‘알렉산드라’들이 단순히 성격 차이로 ‘소완’들을 견제했을까? 전혀 아니야.”
그녀는 살벌한 눈빛으로 오르카의 주방장을 쳐다봤다.
“너 같은 주문 제작 최고급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결국 주인 입장에선 ‘유용한 물건’에 불과했다고. 그래서 선을 넘는 순간 ‘처분’한 거지. 난 그런 사례에 대한 데이터가 수없이 많이 축적되어 있어.”
리리스의 말에 소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은 음료를 단숨에 다 마신 컴패니언의 맏언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조목조목 현실을 짚어주기 시작했다.
“네가 그런 반역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은 이유? 주인님은 널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네가 주인님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이유? 주인님은 의지할 구석이 없는 널 불쌍히 여겨서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 따뜻한 분한테 나쁜 리리스 같은 태생적인 실패작은 어울리지 않아. 나 같은 건 그저 곁에서 그분을 보좌하는 것만으로도 족해.”
프라이드가 강하고, 주인에게 집착하며, 자신의 결함을 부정하는 일반적인 ‘블랙 리리스’ 모델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 폭탄 발언에 소완은 얼어붙어 버렸다.
“당신, 진짜로 블랙 리리스 모델이 맞습니까? 제가 아는 리리스 모델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사온데.”
리리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실례네, 일련번호로 따지면 난 블랙 리리스 중 ‘최초’인데 그런 말을 하다니.”
리리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걷어서 목에 장착된 감정제어용 장치에 새겨진 일련번호를 보여줬다.
“삼안 공업 블랙 리리스 모델 XS-감마-16. 이게 내 일련번호야.”
단어를 곰곰이 되뇌다 무언가를 깨달은 소완은 경악한 표정이 되어 눈을 크게 떴다.
“최초의 블랙 리리스, 최초의 컴패니언. 어떤 식으로 불러도 좋아. 난 오르카에 오기 전까진 주인이 없던 실패작에 불과하니까.”
“후후후… 역시 초기 모델은 다르긴 다르군요. 소첩이 이길 수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블랙 리리스는 얼음밖에 남지 않은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설령 네가 주인님과 하룻밤을 보낸다 해도, 그게 네가 총애를 받는 증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미 오르카에는 주인님과 밤을 보내는 대원들은 많고, 너는 그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니까. 그저 주인님의 은혜에 감사하라구.”
……
다시 생각해보면 우스운 대화였다.
자신과 말을 나누면서 소완은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어쩌면 반역자가 된 자신도 주인님과 정을 나누었는데, 언제나 주인님께 헌신한 리리스는 그러지 못함에 진심으로 동정심이 들어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건 그녀 탓일지도 모른다. 주인님은 이전부터 그녀더러 좀 쉬라고, 너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건 자신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시간을 내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쓰라릴까. 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울까. 주인님은 마땅히 은혜를 베푼 것이고, 소완은 그저 죄인이기에 용서를 받은 것뿐인데 왜 이리도 분하고 억울한 걸까. 그저 주인님과 하룻밤을 보낸 인원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인데. 소완이 그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원통한 걸까.
리리스는 문제의 영상을 다시 보았다. 이미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주인님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드디어 처음 만난 주인님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이제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울었다.
◐
눈을 떠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울다 울다 지친 나머지 오늘만큼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던 모양이다. 리리스는 조용히 자기 방의 문을 열었다.
“리리스… 잘못했어… 용서… 해줘… 쿨…”
그녀의 방 문 앞에는 업무를 보던 사령관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잠에 빠져있었다. 분명 그는 리리스가 언제라도 나올 거라 믿으며 자기 방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항상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걸 잊고는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그 말 한마디를 위해 이렇게 기다렸을 것이다.
리리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사람.
자신에게 미안해 할 것은 없는데. 자신은 그저 도구일 뿐이니, 도구를 제대로 다루지 않은 스스로만 탓하면 되는데. 그럼에도 이 사람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린 것보다 자신을 실망시킨 게 더욱 아픈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리리스는 항상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제 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제 마음이 타올라 사라질 때까지, 항상 저를 믿어주시고 이용해주세요… 나의 처음이자 영원한 주인님.”
리리스는 잠에 곯아떨어진 사령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주인님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3리리스=1라비아타라고 7지역서 나왔었죠?
프로토타입은 그거보다 더해요
(IP보기클릭)14.36.***.***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23.39.***.***
(IP보기클릭)14.36.***.***
(IP보기클릭)39.115.***.***
(IP보기클릭)125.178.***.***
(IP보기클릭)180.66.***.***
소완과 어울린거 그 자체보다는 제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막 쓰는거 그 자체를 알아버리면서..... | 20.08.04 00:24 | |
(IP보기클릭)125.178.***.***
아...사령관의 무대포 우라돌격을 알아버렸군요 | 20.08.04 00: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