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331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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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져 땅거미가 바닥을 흩는 언덕 위에서 아우로라가 모닥불을 지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야지에서 장작으로 불 지피는 건 어떻게 60여년이 지나도 이렇게 힘드냐. 요리사의 직함이 우는 것을 느끼며 - 그녀가 포티아였다면 이렇게까진 고생 안 했을 꺼다 - 간신히 불을 피어올렸...
“에취!”
재채기에 불이 꺼졌다.
....아무래도 불을 지피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그녀는 발키리가 자신의 실수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투덜거리며 라이터를 찾았다.
탕 -
저 멀리서 아련하게 총성이 들렸다. 거, 탄약 아껴야 한다니깐, 하고 아우로라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탄약도 구하기 힘든 귀중한 물자고 함부로 소모할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아우로라의 불만은 수풀을 흔들며 발키리가 큼지막한 암사슴을 걸머지고 나타나자 순수한 감탄으로 바뀌었다.
“우와”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하죠”
단 한 발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절명했을 것이 분명한 사슴을 보고서, 아우로라는 저격수 발키리의 사격실력에 오늘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식량조달 담당일 때마다 느끼곤 하는 거지만. 그녀를 전장에서 마주해야 했던 적들은 정말로 두려웠을 것임이 틀림없다....그녀가 가진 문제만 아니라면 말이다.
“동물 같은 건 이렇게 겁도 없이 잘 쏴잡아오면서...”
“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오늘 요리 순번은 넌데”
“압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발키리는 솜씨 좋게 사슴의 가죽을 벗기고 해체하기 시작했다. 아우로라 역시 옆에서 그녀의 사슴 해체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멸망 전의 주방에서야 예쁘게 잘 가공된 식재료들이 매일매일 문 앞에 도착했지만, 멸망 후에 그런 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멸망 후 60여년을 떠돌이 생활로 버티다 보면 누구나 서바이벌 전문가요 Man Vs. Wild...아니, 이 경우는 Woman Vs. Wild구나. 하여튼 간에 생존 먹방을 찍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 먹방의 메뉴는....사슴의 내장을 꺼내면서 아우로라는, 60년 동안 발키리가 식사당번이었을 때 고기가 있으면 언제나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메뉴를 재확인했다.
“...오늘도 햄버그지?”
“당연한 말씀을.”
...
오래 전에 인적이 끊겼을 -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아니니까, 적어도 60년은 이곳에 인간이 왔을 리 없다 - 나지막한 언덕에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생고기로 햄버그를 만드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피 빼고 그냥 굽는 게 아니라 고기를 으깨고 다지는 작업이 추가로 필요하니까. 그러나 발키리는 구태여 그 어려운 작업을 해가면서까지 고집스럽게 햄버그를 구웠다. 뭐,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긴 했다. 그녀의 햄버그는, 아우로라가 감히 장담하건데, 소완의 실력에 비견할 만했다. 아니, 소완조차도 이렇게 멸망 후 향신료도 식재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완벽한 햄버그를 결코 쉽게 만들어내지는 못하리라....절대 아우로라가 발키리를 가르친 거라서 자화자찬하는 게 아니다.
“이제 햄버그는 진짜 잘 하네. 나보다 더 잘 하겠어”
“아우로라가 60년동안 가르쳐 줬으니까요. ”
“그래. 햄버그만 잘 하지만.”
“우리 만난 첫날부터 제가 가르쳐 달라고 했죠?”
“.....”
‘첫날’이라. 그 말에 갑자기 자신을 내버려두고 생각에 잠긴 듯한 아우로라를 뒤로 하고 발키리는 오랜만에 옛생각에 잠겼다.
그 날 그녀가 그 악몽 같은 시설을 빠져나와 머릿속에 입력된 좌표로 향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니, 그녀가 게을러서는 아니었다. 지나가는 차동차라도 히치하이킹해서 얻어날 수 있으면 그렇게까지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테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그녀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첫째, 나와놓고 보니 온 세상이 심통꾸러기 아이가 쏟아놓은 레고상자마냥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먼길을 걷는 동안 그녀가 발견한 자동차라고는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길 위에서 불타오르거나 연기를 풀풀 내뿜는 채 파괴된 것들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고철이 되어버린 온갖 물건들 - 정체불명의 잔해들도 있었다. 발키리는 그게 뭐였는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외에는 쥐새끼 하나도 길 위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바깥세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교통체계가 마비되고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가버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면 뭐 별 수 있겠는가. 걸어야지.
둘째, 이건 좀 더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잊을 만하면 어딘가에서 인간과 유사한 존재감을 내뿜는 것들이 나타났다. 그놈들이 철충이라고 불린다는 건 나중에 아우로라를 만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어쨌든 그 때 당시에도 놈들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건 알았다. 발키리는 놈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그 엄청난 중압감을 견뎌낼 수가 없었고, 결국 놈들로부터 숨고 또 피해다니다 보니 먼 길을 빙 돌아오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가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는 몇 주가 걸렸다.
....세상이 철충에게 파괴되는 데에는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정작 와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 이거지”
“아무것도 없진 않았지요. 폐허가 있었고, 당신이 있었죠”
미소짓는 발키리의 시선을, 어쩐지 아우로라는 회피했다.
“딱히...널 기다린 건 아니었어.”
“그런 것치곤 저한테 막 이것저것 속사포처럼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면 오랜 친구라도 본 줄 알았을걸요.”
“....뭐, 그렇지.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단 말야”
“당신 진짜로 울었죠.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왔는데 거기 당신이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진짜 거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뭐 지시받았던 것도 없고?”
“네. 제게 지시할 인간도 없었고, 왜 거기까지 가야 했는지, 거기가 뭐하는 곳이었는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하며 터덜터덜, 몇 주를 걸어 도착한 그 자리에, 아우로라가 있었다. 꽤 드라마틱한 만남이긴 했다. 시꺼멓게 타서 골조만 남은, 블랙리버의 로고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한때는 크고 웅장했을 을씨년스러운 건물의 깨진 초석 위에, 푸른 머리의 요리사가 멀뚱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다 망가진, 어, 블랙리버 연구소 본부라고 했죠?”
그곳이 블랙리버(에 속한 자회사)의 연구소라는 건 도착해서야 알았다. 정작 와보니 이미 철충들이 박살내놓고 간 뒤였지만. 발키리에게 주어졌던 임무가 뭐였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을 것이었다. 몇 주 간의 대장정을 거쳐가면서 거기까지 간 발키리는 오히려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었다. 앞으로는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다행히 그 당시의 아우로라는 발키리보다는 적극적이었다....주차장에서 고장난 자동차들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엄...거길 빠져나오려고 문 안 잠긴 차 찾고 있었는데.”
“그게 이거잖아요.”
“이건 정확히는 주차장에 있던 게 아니지. 연구소 지하층 기업역사관에 있던 전시품 타고 나온 거잖아”
“그런 것치고는 잘 굴러가잖습니까. 그럼 됐죠.”
“그러니까 정들어서 60년째 못 버리고 있는 거지. 안 그래?”
그리고 거기서 둘의 오랜 여행이 시작되었다. 어디 정해진 갈 곳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철충을 피해 떠도는 방랑자들의 여행을.
솔직히 말하면, 나쁘진 않았다. 인간이 사라진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떠돌이 바이오로이드를 잡아갈 시티가드도, 바이오로이드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하는 나쁜 인간들도 없었으니까. 식량은 인간이 전멸하고 나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 동식물들에게서 구하고, 물은 빗물을 받아 쓴다. 정 필요한 게 있으면 이제는 버려진 인간들의 도시로 들어가서 – 철충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어 좀 위험하긴 하지만 – 생필품을 좀 챙기면 되고. 멸망 후에는 그런다고 아무도 그녀들에게 뭐라 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60년 동안 서로 같이 굴렀으니, 이제는 물어봐도 되리라.
“도대체 왜 그렇게 햄버그 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거야?”
아우로라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안 후부터, 발키리는 그녀에게 줄기차게 햄버그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달라붙었다. 거의 집착 수준이라 아우로라가 얼떨떨할 만큼.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발키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제가 좋아해서 그런 거겠죠?”
“그런 것치고는 딱히 나보다 더 먹지도 않잖아”
사실 그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그냥 햄버그가 만들고 싶었다. 먹기보다는, 만들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잘.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맛있게. 왜 하필 햄버그인지는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알 수가 없지만,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 대한 남은 단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우로라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거고.
60년이라. 그러고보면 참 오래도 이 대지 위를 떠돌았다. 아우로라와 함께. 햄버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의 오랜 친우가 지나가듯이, 무심한 듯이 툭 던졌다.
“그보다, 발러, 너도 나한테 애칭 하나쯤 붙여줄 때 되지 않았어?”
“또 그 소립니까?”
“우리 이제 서로 알고 지낸 지도 60년이 넘었잖아. 나만 애칭으로 부르면 좀 그렇지 않아?”
“아직 넘진 않았을 텐데요. 올해가 아마 서기 2172년일 텐데.”
이 지점에서 아우로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답했다.
“.....와, 너 날짜 세는 거 아직도 안 놓쳤어?”
“저도 정확히 셌는진 모릅니다. 오차가 있을지도 모르죠”
“뭐 아무튼, 애칭 붙여줄 때 되었잖아? 아우로라니까 아우디 어때 아우디!”
발키리의 눈매가 약간 뚱하게 변했다. 오전에 들은 핀잔을 되돌려 줄 때가 온 것인가.
“우리 처음 만날 때부터 아우디라고 불러달라더니만 아직도 포기 안 했군요. 그거 옛날 자동차 회사 이름 아닙니까?”
“에, 잘 알고 있네”
“거, 왜 자꾸 애칭에 그렇게 집착합니까?”
“음...”
아우로라는 햄버그를 우물거리던 걸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답했다.
“친구잖아”
발키리가 피식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그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친구가 아니면 가족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발키리는 예의범절이 뭔지 아는 여자다. 막역지우라도 너무 허물없으면 안 되지.
“그냥 아우로라가 좋아요. 그 편이 예의도 바르고.”
아우로라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짐짓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햄버그나 먹자”
“네, 더 드시겠습니까?”
“에헤이. 멸망한 세계에서도 체중은 지켜야지.”
이제 거의 다 져가는 석양을 받아가며 아우로라가 시답잖은 소리나 더 하려는 그 때였다.
흠칫, 하고 발키리가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그녀와 60년을 같이 지내 온 아우로라는 그녀의 그 반응이 뭘 뜻하는 건지 잘 알았다. 그녀의 동료 발키리는 그 누구보다도, 이것 하나만은 그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인간의 뇌파, 인간의 기척.
그리고 이 멸망 후의 세계에서 바이오로이드들이 느끼는 ‘인간의 느낌’이란 게 뭘 의미하는지는 십중팔구, 아니 백에 구십구는 명백했다. 그러니 아우로라도 긴장할 수밖에.
“놈들이야?”
숨을 헐떡이며 발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로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시력 좋은 그녀의 저격용 눈동자에는 비쳤다. 저만치, 해 져 가는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작은 형체들이. 그리고 그건 누가 봐도 인간의 형태는 아니었다. 아무렴, 당연하지. 인류 멸망 후의 세계에. 아우로라는 발키리의 고개가 두 번 끄덕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체중 어쩌고 하면서 남겨놨던 햄버그를 와구와구 입에 처넣고선 다급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녀들이 있다는 흔적을 숨겨야 했다. 발키리가 느낄 정도면 저 똥차를 타고 도망치는 것은 오히려 들킬 위험만 늘릴 것이다. 아무도 없는 인류 멸망 후의 세계에 움직이는 자동차란 너무 눈에 띄니까. 차라리 어디 떨어져 숨어 있는 편이 낫다. 벌써부터 얼굴이 창백해져서 몸을 덜덜 떠는 발키리를 대신해서 아우로라는 햄버그를 구운 모닥불을 밟아 끄고 물을 부어 불씨까지 다 죽였다. 그리고는 최대한 그 재를 흩어 놓았다.
“따라오십시오”
이미 얼굴이 반쯤 해쓱해진 발키리가 용케도 말을 안 더듬어 가며 아우로라의 뒤를 잡아끌었다. 그 민첩한 몸놀림에 아우로라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넘어져서 소리라도 났다간 놈들에게 들킬 위험이 증가했으리라. 놈들은 벌써 가까이 와 있으니.
“여기, 여깁니다”
둘은 언덕 사면에 듬성듬성 솟아난 수풀 사이로 들어가 몸을 엎드렸다. 낮은 포복 자세에서 그녀들은 작달만한 바위 옆에 낮게 뻗은 관목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까끌까끌한 나뭇가지와 거친 가시가 그녀들의 얼굴에 마구 생채기들을 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숨소리를 낮추고 기다렸다.
쿵, 쿵.
인간의 발걸음보다는 훨씬 육중한, 금속성 물체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발키리는 속으로 그 소리의 크기와 템포 그리고 빈도를 세며 가늠해 보았다.
‘칙 종류...이십여 기쯤. 한 놈은 특히 크군’
보지 않고 소리만 들어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이 능력이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건지, 아니면 하도 철충을 무서워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체득이 된 건진 그녀도 모르지만, 아무튼 꼬랑지 말고 꼭꼭 숨은 채 덜덜 떨면서 철충들이 지나가길 바라는 바이오로이드에게는 유용한 재능이다.
“젠장, 쟤네들 우리 차 주변에 있어. 주위를 살피는 거 같은데”
“고개 들지 마요, 아우로라. 들킵니다”
흔적을 없앤다고 없앴지만, 역시 ‘낌새’는 남은 모양이다. 하기야 언덕 위에 웬, 21세기보다도 훨씬 이전 시대의 자동차가, 깜짝 놀랄 만큼 구닥다리지만 어쨌든 꽤 좋은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의아하긴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놈들은 자동차 주변을 서성이며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동차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저만치 숨은 그녀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다행이었지만,
쩅그랑 -
“와 잠깐 저 씹”
놈들이 쉐보레의 뒷좌석 유리창을 깨부수자 아우로라는 그만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뛰쳐나갈 뻔했다. 옆에서 발키리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그리했으리라.
“가지 마십시오, 아우로라”
“그치만, 저, 저 개 좃....아오, 저 새1끼들이....! 내 차를....!”
“놈들이 바라는 게 그겁니다. 차주인이 있으면 오게 만드려고요. 가만 계십시오”
극한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곤 있어도 발키리는 발키리고 생각은 냉철하고 합리적이었다. 분명, 방금 전에 튀어나가려고 한 건 아우로라의 실수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던지라 아우로라는 그녀의 애증 깃든 차의 유리창을 깨먹은 놈들의 만행에 그저 분노로 신음하여 60년동안 떠돌며 늘어난 욕이나 뇌까리는 수밖엔 없었다.
“아오오...저 벌레자식들...”
숨을 죽이고 놈들의 깽판 - 놈들이 그녀들의 소중한 탈것을 깡통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 에 분통이 터졌지만, 그녀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우로라는 그냥 요리사다. 원래는 디저트나 만드는 파티시에였고 그 센스를 응용해 다른 요리도 잘 하지만 어쨌든 요리가 전투는 아니다. 염력을 사용하고 역장을 칠 수는 있지만 전투에 써먹기엔 한없이 비전투적이다. 그리고 비전투요원인 그녀 옆에 있는, 원래 전투용 바이오로이드인 발키리는...
“괜찮아?”
다시 몸을 낮춘 아우로라가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고개도 못 쳐드는 발키리를 작게 토닥였다. 이미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진 발키리는 숨을 죽이면서 제발 저 무서운 자들이 사라져 주기를 기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철충을 공격한다고? 무리다. 도저히 무리다. 철충이 내뿜는 공포스러운 중압감 앞에서는 사격은 고사하고 총조차 잡질 못하겠다. 숨도 제대로 안 쉬어져 호흡이 가쁘다. 바위 너머로 흘긋 시선을 돌려 놈들을 엿보는 것조차 공포스럽고 몸이 떨린다. 그녀는 제발 어딘가로 가 달라고, 무서워 죽겠으니 제발 사라져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비굴하게, 느릿느릿 자동차 주변을 배회하는 놈들에게 빌었다.
“......”
놈들 가운데 유독 큰 칙이 보인다. 이마에 십자형 흉터가 나 있는. 놈이 선두에 서고 나머지 놈들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녀석이 이 무리의 리더인 듯했다. 어쩐지 어디선 본 것 같은데.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지금의 발키리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귀신이나 흉물에게서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무엇하겠는가. 그저, 그녀는 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서 그녀의 머릿속에 집어넣기라도 한 듯한 공포감에 몸서리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서 아우로라는 속으로 한숨쉬었다.
이게 그녀의 문제였다. 철충에 대한 공포. 너무 무서워서 총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숨을 몰아쉴 만큼의. 아우로라는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군용 바이오로이드에 어울리는 자질인가고 60년 내내 고민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답이 서질 않았다.
“하아, 하아...”
한 가지 장점만큼은 분명했다. 그렇게나 철충을 무서워하다 보니, 발키리는 철충을 감지해서 놈들을 피해 숨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했다. 아우로라 자신도 발키리의 그, 철충에 대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은엄폐와 회피능력 때문에 덕 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당장 오늘도 저 칙들에게서 몸을 숨길 장소를 신속하게 찾아낸 것도 그녀였으니까. 그러니, 그녀의 철충이 두려워 도망가는 습성 덕을 보았으니, 이번엔 아우로라가 발키리를 도와줘야 하리라. 그녀는 덜덜 떠는 발키리의 머리를 가슴팍에 파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발러.”
“윽, 흑, 흐윽”
발러, 용기(Valor)라. 이런 그녀에게 대체 무슨 용기가 있단 말인가. 철충을 보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도망칠 생각밖에 못하는 그녀에게 용기라는 별명이 가당키나 한지. 발키리는 숨도 못 골라가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도저히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명예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요, 그 부대의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부대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고 지탄했을 터다. 하지만 아우로라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그녀의 오랜 친구를 계속 달래었다.
“우리 지금 잘 숨었잖아. 그동안 잘 피해다녔잖아.”
“하, 하아, 후욱, 후...”
“이번에도 들키지 않을 거야”
쿵, 쿵, 쿵. 한동안 쉐보레 주변을 서성이던 놈들이 떠나가는지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와 동시에 발키리는 심장을 조여 오던 압박감이 점차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래도 그녀는 한동안 아우로라의 품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완전히 진정된 그녀는 바위 위로 살짝 고개를 올려 보았다.
“....갔군요”
철충에 민감한 그녀의 말이라면 믿어도 될 터다. 아우로라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의 야영지가 있던 곳을 건너다보았다. 철충들은 어디론가 가 버렸는지 사라져 있었지만, 그녀들이 조금 전까지 머물던 자리는 철충이 짓밟고 가서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뭐, 수폴 아래 숨어 있다가 다 해지고 헝클어진 몰골이 된 그녀들도 비슷했다.
“으....내 쉐보레....많이 부서졌어?”
“아니요. 뒷좌석 유리창만 깨놨습니다. 놈들도 앤티크 자동차는 부수기 싫었나보죠”
“걔네들도 인간들 문화재에 관심 있나?”
이제야 맘이 조금 안심되는지 가벼운 농담까지 하는 발키리를 보니 아우로라도 그나마 맘이 좀 놓였다. 하지만, 여기에까지 철충이 나타났다는 건 맘이 놓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요즘 점점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네. 뭔 일이라도 났나”
요즘 들어 철충들을 마주치는 빈도가 부쩍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지난 60여년동안 이 정도로 활동적인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철충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 걸까. 그러나 거기까지 그녀들이 알 방도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철충이 나타났다는 것, 바로 그 자체였다.
“이 지역도 이젠 안전하지 않겠네”
철충들이 활동영역을 넓힌다는 것은 반대로 점점 바이오로이드들이 설 자리가 좁아져 간다는 의미다. 그녀들에겐 안 좋은 소식이다.
“어디로 가는지 봤어?”
“해 지는 쪽...서쪽으로 가더군요. 정확히는 서북쪽요. 아까 발걸음 소리로 보아 상당히 느리게 이동 중인 듯합니다만,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진 않을 거 같습니다.”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놈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오늘은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야영하고, 내일 오전 중에 여길 뜨자.”
어질러진 야영지를 둘러보며 다시 주섬주섬 정리하는 - 그러다 또 실수해서 돌부리에 발가락을 찧고 폴짝폴짝 뛰는 - 아우로라에게, 발키리가 문득 한마디를 건넸다.
“저...아우로라”
“아야야...응?”
“아까 전엔 고마웠습니다”
“어?”
반문하는 아우로라에게 발키리는 약간 부끄러운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뒷말을 이었다.
“그...조금 전에 안아 주신 거요.”
극한의 공포에 내몰릴 때, 누군가 친절한 이가 따뜻하게 옆에 있어 주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 60여년 동안 철충과 한 두 번 조우해 본 게 아닌 발키리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 때마다, 아우로라는 언제나 그녀 옆에 있어 주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가 여기 함께 있다고.
그랬기에 오늘도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철충들이 내뿜는 무서움 앞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그 날, 아우로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미 옛적에 한없는 비관과 두려움 속에서 자1살해버렸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그녀의 그런 감사 앞에 정작 아우로라는 부끄러운지 콧잔등이나 긁적였다.
“뭐야, 발러 너 레즈비언이었어? 그런 거가 기분 좋았던 거야? 난 남자가 좋은데”
“저도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늘 같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감사합니다”
“아 됐어. 갑자기 낯부끄럽게 왜 그래. 대단한 것도 아닌데”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녀는 발키리를 바라보고서 마주 웃어주었다.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녀와 발키리는, 같이 오랜 시간 함께해온 그녀들은, 지금 그녀가 작게 답해주듯이,
“친구잖아.”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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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삽입된 곡은 '체리필터'의 "갈매기 조나단" (2002)입니다(https://youtu.be/cWOUWZ42WXs). 하지만, 듣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연도는 연표(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67220 /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7063)를 보고 참조했습니다. 이 해에 사령관은 무적의 용을 만났을 겁니다, 아마도요...설정 오류라면 좀 알려 주십시오.
2) 북미가 레모네이드 영역이라곤 해도, 철충이 지구를 지배하니 우리가 아는 완전 지배랑은 거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레모네이드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겠져.
3) 등장하는 칙의 종류는 아직 약간 생각중입니다.
2. 잡담
오늘은 분량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발키리 이야기를 길게 쓰느라 럼버제인 편은 내일로 돌리겠습니다. 대신 다음 발키리 편은 모레가 되겠군요 ㅎㅎ;;;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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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21.07.07 2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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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괜찮은 콤비이지 않습니까? | 21.07.07 2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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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ㅎㅎㅎㅎ | 21.07.08 01: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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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오리진은 백합이 없읍니다(엄근진) | 21.07.12 01: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