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 잔 할까요?"
이 말은 근대화 때 다방과 같은 시설이 들어서면서,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차(茶)를 발명해 마시던 그 시절부터 "우리 이야기 좀 해 볼까요?"와 같이 통용되는 안부 인사이기도 합니다. 차나 커피가 만들어내는 어감이 "이야기 좀 나눌까요?", "그렇다면 다음에 봅시다."와 같은 사무적인 말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기 때문이겠죠. 물론 카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누구나 쉽게 커피와 같은 음료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서, 차나 한 잔 하자는 말은 따뜻함 속의 형식적인 위선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잘 나타낸 소설이 김승옥 작가의 '차나 한 잔'이죠.
다행히도 '커피 토크'에서의 차와 커피는 위선적이기보단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따뜻함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커피 토크는 2020년 시애틀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입니다. 오크나 엘프, 뱀파이어 같은 판타지 속의 요소가 혼재된 세상에서 주인공은 야간에 개장하는 카페를 운영합니다. 그리고 술 대신, 해가 진 거리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스토리가 등장하죠.
판타지에 나올 법한 종족들이 존재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
가까운 미래. 과학이 발전하면서, 영생을 누리던 엘프들은 숲을 떠나 자신들의 기업을 설립하며 사회에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오크는 도끼를 버리고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드워프나 다른 종족 또한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족이 섞여 살기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오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즉 게임에서 나오는 다양한 종족들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치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종, 피부색, 성적 기호, 음식에 대한 선호 등 사람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커피 토크는 이 다양성에 판타지적 요소를 살짝 섞어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자신을 '비건'이라 주장하며 진짜 피 대신, 모조 피를 먹는 뱀파이어. 게임 개발을 하는 오크 여성. 솔로 가수를 꿈꾸는 네코미미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게임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주문에 따라 주인공은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줍니다.
기본적으로는 느긋하게 손님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임
다양한 레시피를 조합하여 커피를 만들자
원한다면 라떼 아트도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요소는 비주얼 노벨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손님의 요구에 따라 음료를 만들어 줄 뿐, 이야기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으며 대화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앞서 흥행했던 'VA-11 HALL-A(이하 발할라라 칭함)'와 다르지 않다고 불 수 있습니다. 다른 점은 칵테일의 자리를 커피가 대체하는 정도일까요. 물론 절대로 단순한 '파쿠리' 게임은 아닙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분위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이미 발할라 전에도 대화를 통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게임은 이미 꽤 있었습니다.
커피 토크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어떠한 큰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합쳐짐으로써 주제를 이루죠. 액자식 구성이 흥미롭게 다가오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야기나, 사건에서 세계관과 주제를 잘 녹여내야 합니다. 각종 설정을 줄줄 말해주거나, 로어와 같은 요소로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나 행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플레이어를 게임 속 세상에 이입하고 몰입하도록 해 주어야 하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자
앞서 언급했듯이 주인공의 카페에는 다양한 손님들이 오갑니다. 소설가를 꿈꾸는 회사원인 프레야. 근무 짬짬이 와서 느긋하게 쉬다 가곤 하는 경찰 조르지. 서큐버스와 엘프 커플인 루아와 베일러스. 병원에서 일하는 늑대 인간 갈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카페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각자는 다양한 고민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은 나름 현실에 대한 은유를 품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오크인 머틀의 이야기는 개발진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다니며 틈틈히 글을 쓰는 예비 작가 프레야는, 생업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죠. 그렇다고 주인공이 대놓고 이야기에 개입하거나, 조언을 통해서 그들을 계몽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 첨언하자면, 여기서 발할라와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모든 레시피가 공개되어 있는 발할라와는 다르게, 커피 토크는 모든 조합을 알려주진 않습니다. 주인공은 고객들의 주문에 따라 원하는 음료를 유추해내야 합니다. 물론 추리가 크게 어렵진 않습니다. 잘못된 음료를 만들더라도 최대 5번은 다시 조합할 수 있으며, 정 안되면 세이브-로드를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살짝 달라지는 것을 제외하면, 틀린 음료를 내놓더라도 게임 오버를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몇몇 분기에서는 엔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레시피는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커피 토크는 시청각적인 부분에서 훌륭한 성과를 보여줍니다. 카페에서 재생되는 Lo-fi 스타일의 음악부터, 커피를 내리는 소리, 창문 앞을 지나가는 보행자들, 등장인물의 모습과 행동 등 꽤나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을 쓴 듯한 모습을 보여주죠. 등장인물의 성격도 그들의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에 잘 녹아들어가 있고요.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작중 등장인물들이 약간의 말다툼이나 대립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때 사용되는 화면 연출은 '총성과 다이아몬드'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클로즈업된 등장인물의 사진이 작아지거나, 커지기도 하죠.
이런 시각, 청각적 장치들은 플레이어가 더욱 게임 속 세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액자식 구성의 목표를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매끄럽게 완성해 내는 겁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대화 속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러 장치들. 커피 토크는 자신들이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결과 또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젊은 손님들은 스마트폰을 쓰지만 나이 든 손님들은 폴더폰을 사용한다
서로의 주장이 상충할 때, 움직이는 화면을 통해 분위기를 표현하기도
편의성 부분에서도, 텍스트류 게임이 갖춰야 할 시스템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날짜를 선택해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플레이할 수도 있으며, 로그를 제공해 놓쳤던 이야기라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동 대화 진행이나, 대화 스킵 기능도 존재합니다. 로딩 시간도 빠릅니다. 가끔 몇몇 비주얼 게임들이 다회차를 권장하면서도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비록 간단한 시스템이지만 꽤나 만족스러웠습니다. 실수로 대화를 넘겨 버리거나, 다른 음료를 내놓았을 때의 반응이 궁금해 시간을 돌리고자 할 때 이런 시스템이 없다면 불편함과 동시에 몰입도가 깨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죠.
원하는 날짜를 재플레이할 수 있으며, 대화 중간에도 저장이 가능하다
요약하자면 커피 토크는, 현실과 다른 듯 비슷한 세상 속에서 커피를 내리며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게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여러 요소들을 꼼꼼하게 준비해 놨죠.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일상적이지만, 꽤나 묵직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우리의 현실과 꽤나 맞닿아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잔잔한 사운드트랙 위에 풀어내고 있죠. 그렇기에 커피 토크는 약속이 없는 느긋한 주말 오후에 플레이하기 적절한 게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따뜻한 커피를 두고요. 거창한 음료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믹스 커피라도 좋아요. 카페인이 없는 코코아도 괜찮습니다. 단, 술은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