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키워드와 그에 관한 감상이 떠올랐습니다. 에로게에 이런 감상은 거창해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순수한 오타쿠 정신의 발로일 뿐이죠...
1. 요즘 철학서적을 좀 읽다보니 푸코라는 철학사상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푸코의 철학은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으로 정의됩니다. 정상과 비정상, 타자와 동일자는 문명이 근대로 넘어오며 자의적으로 설정한 기준이라 하며 이 경계를 허물고 여태까지 철학사상가들이 주장해 온 것들에 대한 모순점을 찾아 탈근대하려는 노력이지요. 이를테면 근대 이전까지 정신병원이라는, 광인(정신병자)을 정상인으로부터 "구분" 또는 "격리"하는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고, 보통사람들은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광기나 이상함조차 인간사의 한 단면이요 정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며 정상과 비정상을 결벽증적으로 구분하는 현상이 생기고 이들 무리들은 정상인의 무리로부터 격리 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 기준이라는 것은 무척 모호하여 정상 비정상을 구분하기 위한 노력조차 일종의 광기이자 야만성이 짙은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것을 계보학이라 하던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의 결과겠지요.
인간과 흡사한 안드로이드를 중심소재로 삼은 여러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그 창조주와의 문제점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인간의 정신을 가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 창조주인 인간과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는 안드로이드(로봇, 복제인간)를 인간과 구분하여 가혹하게 사역하면서 이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는 겁니다. 애초에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로 인해서 이들은 반기를 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들이 억압에 저행했듯이요.
아무리 떼깔좋은 눈큰 애들만 나오는 에로게, 갸루게, 순화해서 키네틱노블이라는 것도 결국은 쪽쪽쩝쩝 잘 나가다가 결국은 이러한 난관을 한 두 번은 보여주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니체의 철학이 아닌) 로봇 호시노 유메미는 한 세기동안 인간을 위해 헌신해온 로봇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없는 시절에도 인간을 위한 삶을 살고 있지요. "자신의 기쁨은 인간을 위한 봉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의 이 대사를 생각하면 조금은 어리둥절해집니다. "천국을 둘로 나누지 말라" 너는 로봇이잖아? 처음부터 스스로가 로봇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로봇으로써 인간에게 봉사하고 있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의식은 로봇과 인간의 대립 따위가 아닙니다.그런데 왜 저런 대사를 읊조리는 걸까요?
인간의 전쟁과 야만성,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다움과 인간답지 않음의 사이를 넘나들며 그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계속해서 고장난 판단만을 하던 유메미는 최후에 이르러서 자신이 생각했던 파행의 원인을 말합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고 바깥에 뭔가 문제가 있던 거구나..." 그리고 그 후 "천국을 둘로 나누지 말라"는 비장한 자기주장을 하네요. 인간을 몹시도 좋아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얻었으나 끝끝내 인간이지는 못했던, 그리고 최후조차 함께 하지 못했던 비인간의 일종의 인간선언은 아닐까요. 전쟁이라는 야만적 상황 속에서 우선적으로 가동이 멈춰지게 된 피조물 혹은 타자의 동일자 선언 으로 들리는 것은 아마도 제 비약일까요.
그러면 주인공은 그 동안 뭘했나...
주인공은 얼빠진 고장난 기계라는 인식을 유메미로
부터 거두게 됩니다. 타자를 동일자로서 인식하게 되는 일종의 발상의 전환일까요.
근대라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발상의 전환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붙인 오만한 레이블입니다. 그 근대의 진입과 함께 우리와 공존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정신들이 타자로 배척되어 격리되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야만이라면 야만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겠지요. 그런데 이 게임의 배경인 "궤멸적 전쟁"이라는 야만성의 극한에서 배척하고 자신과 구분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스스로의 "정상"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역설적이네요. 그것도 인간스스로의 피조물로부터 말이죠.
2. 블레이드 러너에서 데커드(헤리슨 포드 분)가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하는 리플리컨트는 영화사에 손꼽을 명대사를 남기죠.
"
I've...seenthings youpeople wouldn't believe.
Attackships on fire offthe shoulder of Orion.
Iwatched C-beams..glitterin the dark nearthe Tannhäuser Gate.
Allthose...momentswill be lost..intime...like...tears...inrain.
"
4년 수명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며 마치 노예와 같이 인간에 사역당합니다. 단순노동, 위안, 전쟁등 여러 분야에 쓰이는 리플리컨트들은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인간성마저 그대로 타고나는 탓에 창조물인 인간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설정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험난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예측되는 이 리플리컨트의 기억속에도 분명 좋고 따뜻한 기억들이 있었을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라질 자신의 기억을 아쉬워하며 눈물흘리지도 않겠지요. 시간속에 흘러가버릴 따름인 허망한 기억들을 눈물과 함께 보내며 산화하는 이 장면은 마치 플라네타리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마쥬 혹은 패러디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흘릴 수 없는,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흐르는 것 같다"고 느끼며 기동 정지해가는 자신의 기억을 어딘가로 가져가달라고 말하는 유메미의 모습, 그러나 전해지지 못할 행복한 죽음(주인공의 죽음)은 사이버 펑크 장르와 갸루게의 생각지도 못한 접점을 남기며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뭐 드라마씨디로는 유메미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하지만요. 전 그건 몰라서...)
"그것"은 자신의 기억이 담긴 메모리 스틱을 말한다.
3. 플레네테리움과 호시노 유메미
사실 앞에서 이리저리 말을 했지만, 이 게임의 진정한 주제의식은 이 두가지에 집약되어있겠지요? 인간은 별을 동경했으나 어리석게도 하늘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지요. 어리석은 인간의 피조물인 로봇 호시노 유메미(ほしの ゆめみ, 아마도 별의 꿈을 꾼다夢見는 뜻이겠지요)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손으로 망쳐버린 이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밤하늘은 온갖 신화와 전설이 살아숨쉬는 터전이자 과학적으로는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탐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밤하늘의 별로부터 세상의 탄생을 보았으며 중원에서는 영웅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소재이기도 했지요. 한편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삶의 터전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늘이라는 것은 다쳐서는 안되는 절대 이상인 동시에 언젠가 꿈꾸고 실현시킬 수 있는(일본어로 꿈꾸다는 夢見루, 꿈을 본다는 그 표현은 꿈을 보다 현실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본인의 사고관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현실적 대상의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죠.
게임의 배경이 되는 현실은 망가지고 어그러져 이젠 밤하늘조차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밤하늘을 꿈꾸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망가진거죠. 그런데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플레네테리움에서 부서지지 않은 밤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가 만든 피조물입니다. 유메미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황폐해지고 마음조차 간데 없어도 인간의 마음이 깃든 무엇인가는 여전히 남아서 살아있는 이에게 그 마음과 정신을 전합니다.
생물체는 유전자를 통해서 자신의 흔적을 확실히(!) 이 세상에 남기고 사라집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전자는 외부 요인에 매우 취약합니다. 생물은 걸핏하면 다치거나 죽고 유전자는 자연계로 나오자마자 파괴됩니다. 심지어 고등한 생물일수록 암수의 결합 없이는 유전자를 남길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단 한명이라도 살아있다면 후대로 전할 수 있는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과 마음이라는 유전요소입니다. 그 덕에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가는 시대에도 밤하늘을 통해서 체로키족의 늑대가 만든 은하수를 보고, 2000년 전에 오장원의 별로 져간 제갈량의 매운 충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메미는 부서져도 밤해늘에 대한 열망을 담은 마음은 누군가에게 전해져 하늘을 꿈꾸는 인간, 별의 인간의 대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4. 최근 오타쿠 서브컬쳐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의식으로는 역시 소통에 관한 문제가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95년도의 에반겔리온 시리즈(라고 한것은 극장판과 최근의 신극장판까지 모두 포함해서)에서부터 전파남과 청춘남, 나는 친구가 적다 모두 소통에 관한 오타쿠들의 문제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신과의 사이토 타마키씨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씨 모두 이러한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구조주의 철학에서 자신이라는 것은 타자(나와 다른이)와의 관계설정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거시기(id), 초자아(super ego), 자아 모두 타인의 존재를 기반으로 합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아버지를 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에 들려는 그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어린아이가 정상적으로 인간의 질서 안에 포섭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들 오타쿠의 심리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의 견해를 자의적으로 축약해보자면 오타쿠라는 존재는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잘 거치지 못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타자라는 것이 없겠지요.
다시 말해서 오타쿠들이 몰두하는 전투미소녀 혹은 주인공에만 몰두하는 미소녀들은 타자의 결여로 인한 오타쿠들의 알맹이 없는 자아, 그 욕망을 투사해주는 그러한 대상(그것을 남근phallus라 하며 이것은 생물학적인 고추가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라캉적 해석이네요(물론 이들의 철학과 사상은 방대하고 어렵지만 그저 제가 이해하기 쉬운 대로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투미소녀를 통한 욕망의 투여와 자기반성 역시 결국은 오타쿠들의 의미없는 유희로 돌아갈 뿐이라고 이들은 말합니다. 세계의 모든 모순과 결여를 두 어깨에 진 아름답고 조그마한 미소녀들이 결국은 주인공 앞에서 츤츤이니 데레데레니 하는 의미 없는 존재들로 변해버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어느새부터인가 오타쿠들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좀 더 가까이 바라보려 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오타쿠의 자기 긍정론을 펼치고 있는 [럭키스타]나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가 그렇고 오타쿠들의 무엇인가의 결여로 인한 타인과의 소통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전파남과 청춘녀]나 [나는 친구가 적다]는 좀 더 직접적인 형태의 SOS들이 있네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진퇴양난의 위기속에서 방구석 폐인으로 전락해가는 오타쿠의 SOS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序의 테마곡 Beautiful world의 가사를 잘 생각하면 또한 그렇지 않은가요?
플라네타리안에서도 저는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단 한 명의 사람도 없는 파괴된 도시에 고립된 주인공의 상황이나 고장난, 의미없는 말만을 반복하지만 극히 인간적 면모를 보이며 수십년 째 돌아올 리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로봇 유메미가 그렇습니다. 고장난 소통은 때로는 주인공과 로봇 사이에 형성된 유대간 처럼 전파가 닿기도 하지만, 전투로봇에 차갑게 막히며 좌절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삶의 의지를 잃고 여기서 멈출까 하던 주인공은 소통이 가능한 말벗을 만나며 다시금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제는 기다리지만은 않고 스스로 사람을 찾아가려는 로봇 유메미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형성해나가는 인간 혹은 그 유사종은 타자 없이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기 힘듭니다.
최근 저는 오타쿠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많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 결과 오타쿠의 집단과 심리에 대해 여러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오타쿠 서브컬쳐에서 보이는 여러 공통 속성(보이지 않거나 없을 수도 있겠지만)도 어느정도는 읽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는 여러 방법론이 있겠지만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오타쿠 서브컬쳐 하나하나를 뜯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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