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
에그는 깨졌고 세계를 등졌다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그를 깨고, 세계를 바꿔라."
오오토 아이는 늦은 밤 괜히 산책하겠다고 나갔다가 알 수 없는 이면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면세계의 학교는 학교폭력 PTSD를 일으키는 괴이한 현상들로 가득하고 화장실에서는 휴지가 말을 거는 황당한 이 때, 낮에 주웠던 에그가 깨지자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온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거대 괴물을 쓰러트려야 한다? 과연 오오토 아이는 알 수 없는 인물과 상황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 처음 방영할 당시에 제 인생작이 될 줄 알았습니다.
청소년 ■■이라는 굉장히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져 있다고 느껴졌고 이는 중반까지는 유효했다고 봅니다.
물론 후반부부터 튀어나오는 뜬금 설정들에 전반부가 다루던 주제들의 궤도가 휘어지고 결말에서는 어떠한 것도 매듭짓지 못한 채 끝났지만요.
이 작품이 왜 나쁜가에 대해서는 시청하신 모든 분이 아실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이 작품이 전반부에서 가졌던 찬란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다룹니다.
사회적 문제는 창작물과 절대 때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다루는 방식이나 강도에 따라 괜히 논란만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런 사회적 이슈에서도 특히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명인의 ■■은 아예 보도지침이 따로 있을 정도로 특별 관리되고 있고, 이는 한 사람의 ■■이 그저 한 사람의 소멸로만 그치지 않고 주변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죠.
창작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민감하고 또 복합적인 원인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인 만큼 다루는데 있어 깊은 고찰이 필요합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에그 세계에서 원더 에그를 깨면 그 안에서 현실에서 ■■한 소녀가 나온다는 굉장히 공격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심인물인 주연 4인방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소녀들에게 까지 납득 갈만한 서사를 부여해야 하는 심히 어려운 과제를 안고 시작한 작품이라는 겁니다.
놀랍게도 초중반 까지는 이를 훌륭히 수행해나갑니다.
에그 소녀들에게 현실에 존재하는 사연을 부여해 공감을 이끌어내고 동시에 물리쳐야 할 적인 에그 킬러를 에그 소녀들이 ■■하게 된 원인으로 배치해서 상대해야 할 강력한 동기를 제공합니다.
주연들은 과거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을 경험했기에 에그 소녀들에게 크나큰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납득되고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했던 친구를 되살릴 수 있다는 동기를 부여해서, 청소년 ■■이라는 사회문제를 중심으로 주연 4인방과 에그 소녀들을 한 대 묶고 각자의 성장과 되돌릴 수 없는 사연을 나란히 배치시켜 짧지만 절대 얕지 않은 서사를 완성합니다.
큰 줄기 없이도 이런 전개가 끝까지 유지만 되었어도 이 작품은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기 다른 사연에 대한 깊은 통찰은 청소년 문제를 그저 어릴 적의 방황으로만 여기는 여타 작품들과 궤를 달리하거든요.
청소년이 겪은 사회문제들은 터부시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원더 에그에서 나오는 소녀들이 겪은 사연들도 전부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각지대에 놓여 외면 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 작품은 이런 문제들의 원인을 ‘본체만체’라고 표현합니다. 에그 세계에는 에그 소녀들을 상처 입힌 원더 킬러들이 각자 존재하지만 본체만체는 어디에나 존재하죠.
본체만체 처럼 기괴하지만 기발한 청소년 사회문제에 대한 고찰을 곳곳에 배치해서 각기 다른 사연에 입체감을 더해 줍니다.
그랬습니다만 이게 에그 세계와 원더에그에 대한 설정이 설명되는 후반부 파트에서 뿌리 채 흔들려버립니다.
리카의 서사가 정리되는 7화까지는 위의 요소들이 큰 무리 없이 작동하지만 이어지는 9화에서는 네이루의 친구이자 동료, 지금은 식물인간인 코토부키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엇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10화에서 뭔가 꿍꿍이가 있어보이던 아카와 우라아카가 원래는 천재 과학자였지만 소녀의 ■■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목각인형으로 정신을 옮긴 상태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최후반부인 11화에는 통째로 아카와 우라아카의 과거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처음에는 본편 내내 언급되던 세계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릴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인조인간에 ai를 이식한 프릴은 아카와 우라아카의 동기를 설명하는 인물로 그쳤어야 하지만 이 작품은 세계관의 확장을 원했던 것인지 프릴을 괴이한 사건 끝에 그 무엇도 설명하지 않고 행방불명 시켜버립니다.
프릴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카의 아내를 죽인 것은 확실하지만 아카의 딸인 히마리를 죽였는지는 심증만 있을 뿐입니다. 프릴을 아카가 죽였을까요? 모릅니다. 불타는 배경만 보였을 뿐 죽였는지 모릅니다. 후반부에 등장한 곤충 머리 괴인들과 관련이 있을까요? 모릅니다. 심증만 있을 뿐.
네. 설정을 풀이하고자 야심차게 준비한 11화는 무엇하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채 마지막화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습니다.
대망의 12화에서는 수미상관 매듭이라도 지어보고 싶었는지 평행세계의 오오토 아이를 등장시키지만 심상세계에 겹쳐진 평행세계라는 해괴한 설정에 머리만 아플 뿐이죠.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평행세계의 아이를 극복하고 성장한 현실세계의 아이가 보듬어주는 성찰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거 같은데.
이 작품의 설정이 뭐였죠? 네. 평행세계의 아이는 그냥 죽은 겁니다. 심상세계에서 과거와 마주한 게 아니라 평행세계에서 이미 죽어버린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거죠.
되돌릴 수도 뒤바꿀 수도 없는 상황을 보고하는 성찰과 성장을 우리에게 납득 시킬 수나 있을까요.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그래도 6개월이나 기다리게 한 특별편 에서는 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제는 생각하는 걸 그만 두었는지 이제껏 열심히 뿌려 대던 떡밥을 한 대 모아 바다에 던지더니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하고 끝납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크나큰 가능성이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안티플롯 이라는 명목 하에 들어낸 평범함을 거부하고 싶다는 고집 대신 주제에 대한 통찰과 인물들의 성장에 집중했다면 10년이 넘어서도 회자될 만한 수작이 되었을 겁니다.
끝내 자신의 서사를 매듭짓지 못한 아이와 네이루, 분량 때문인지 깊이가 얕았던 모모에와 달리 카와이 리카는 아이와의 첫 만남부터 불우한 가정사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잘 엮어서 성장서사를 깔끔하게 보여주었기에 짧은 분량이었지만 꽤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그 캐릭터 결말부에 어떻게 되었냐고요? 멘탈을 다잡으며 성장할 수 있던 계기를 처참히 부숴버리며 리셋 시켰습니다. 환장할 노릇이죠.
제 인생 최악의 애니메이션은 쓰르라미 울적에 업/졸입니다. 근데 방영 당시에는 그냥 웃겼어요. 시리즈의 팬으로서 처음에는 화가 나다가 끝에 가니까 그냥 웃기더라고요,
근데 원더 에그 프라이어티의 결말을 보았을 때는 참담했습니다. 길을 하나 잘못 들어서 망가진 작품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 작가의 아집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참극 같았거든요. 배신당한 느낌이랄까요. 뭐 기대한 제가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노지마 신지는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생각하고 작성 했을 테니까요.
작화, 연출이 훌륭한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주연 4인방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려져서 되새기면 되새길 수록 뒷목이 당기는 느낌이네요.
초중반부의 보여준 훌륭함이 눈에 아른거려 너무나도 아쉬운 작품,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 판매량도 망한 마당에 후속작은 영원히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회문제에 대해 진지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 앞으로도 많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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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의 임팩트는 제 인생 다섯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 24.01.31 21: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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