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라킬> 중간점검
옷 =문명 =미디어 with파시즘
4분기 애니메이션 중에 주목할 만한 작품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킬 라 킬>을 뽑을 것이다. 가이낙스의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실패 이후, 이마이시 사단이 가이낙스로부터 독립해서 설립한 스튜디오인 “트리거” 최초의 장편 TV 애니메이션. <데드리브즈>, <천원돌파 그렌라간>에 빛나는 이마이시 히로유키답게 이번에도 그다운 애니메이션을 내놓았다. 배경을 학교로 어레인지한 무협물이라는 점에서는 <화산고>가, 부끄러운 옷차림의 미소녀가 싸운다는 점에서는 나가이 고의 <큐티허니>가, 각종 타이포 그래피와 작은 네타들이 80년대가 떠오른다. 정말 끝내주게 쌈마이한 소재다. 게다가 <킬라킬>은 그것들을 웃기게만 다루는 게 아니라 3D기술까지 총동원해서, ‘초인’적인 싸움을 아주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 볼거리만으로도 <킬라킬>은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테마가 <킬라킬>의 중추에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건, 이 작품의 시작부터 예고되고 있다. <킬라킬> 1화는 다음과 같은 역사 수업으로 시작한다.
“1933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 정권을 획득. 히틀러 내각의 탄생이다. 독일의 전후 민주주의가 파시즘 정권을 낳아버린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시작 부분에서부터 자신이 파시즘의 이야기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이 골때리는 애니메이션 어디에서 파시즘 얘기가 나왔단 말인가? 나는 그것을 옷, 문명, 미디어란 키워드로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킬라킬을 관통하는 소재인 ‘옷’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작품 내부에서 보면, ‘교복’이 본래 ‘군복’에서 따왔음을 운운하는 사츠키의 말이나, ‘옷과 사람은 적이 아니다’라는 누디스트 비치, 그리고 이를 부정하는 극렬 테러리스트인 키나가세 츠무구는 ‘사람은 옷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고 하는 등 각자 그 의견이 다르다. 덧붙여서, 마코나 류코는 ‘카무이’를 류코의 ‘친구’로 생각하는 듯 하다.
바깥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엘렝코스 님의 글에서는 ‘옷을 쾌락의 상징적 척도’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옷’을 바로 문명으로 읽어내려고 한다.
문명이란 대체 무엇인가? 네이버 사전에는 문명이 다음과 같이 등재되어 있다.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 흔히 문화를 정신적ㆍ지적인 발전으로, 문명을 물질적ㆍ기술적인 발전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그리 엄밀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하이라이트를 주고 싶은 부분은 바로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형태”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존의 안전을 확보하고,번영하고,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서 변형하고, 새로 만들고 , 파괴했다. 그것이 바로 문명이다. 나는 여기서 옷이야 말로 문명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대로라면, 인간은 벌거벗은 원숭이다. 그런 인간은 털이 없기에 추위나 위생의 문제에 시달렸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 — 또다른 자연을 파괴하고, 변형하여 새로운 ‘옷’이란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생각해도 틀린 추리는 아닐 것이다. 성경에서도, 아담과 이브가 최초로 선악을 알고 난 뒤에 한 행위도 성기를 풀로 가림으로써 옷을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다. 옷이란 형태가 문명의 핵심이란 것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궁극적으로 문명의 확장 방식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은 인간 스스로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였다. 인간은 스스로 가죽털이 없었기 때문에 옷을 만들어냈다. 이 옷이 바로 확장된 인간이 되었다. 다른 문명의 이기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스스로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지 못했기에 뗀석기를 이용했다. 인간은 안전하고 딱딱한 등껍질 따위가 없었기에 동굴에서 살기 시작했다. 확장된 인간은 나아가 인공적인 환경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집을 짓고, 모여살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명의 기술적 발전 부분 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신적 발전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인간 사이에 안전한 상태를 추구하기 위해 도덕과 법을 제정하고, 인간 사이에 교환을 간편히 하기 위해 화폐를 만들고, 이러한 사회들이 모여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야말로 우리 인류의 신체의 확장이다.
완전한 하드웨어를 갖춘 생명이란 환상이 이 악몽의 원천이란 말이다. —오시이마모루, <공각기동대 : 이노센스>
여기서 문명의 성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문명은 단순히 자신의 신체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체의 확장이란, 신체의 영향력의 확장이기도 한다. 그래서 문명은 매개체,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미디어라는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운송 수단과 통신 체계와 같은 것들이,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언어, 화폐, 기록 매체 같은 것들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의지를 전달하고 영향력을 확장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의 복잡한 형태인 사회 제도 역시, 이러한 미디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신체의 확장을 추구하던 인간의 의지는 마침내 또 다른 자연을 찾아내어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변형하고, 파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바로 인간 그 자체다. 인간 스스로 안전과, 위생과,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싸움을 멈추고 조화(調和)를 이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그 문명의 확장의 원동력이었던 인간의 의지를 제어해야 한다. 인간 스스로의 확장은, 인간 스스로의 제한한다는 아이러니를 낳고 만다. 물론 이러한 제한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극한에 이른 형태가, 바로 파시즘(전체주의)이다.
파시즘은 전제군주의 폭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킬라킬>의 1화에서 언급되듯이, 민주주의 끝에, 인류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한의 조화(調和)를 추구한다. 인류 스스로가 원했단 안전과, 위생과, 쾌락의 조화(調和). 인간과 인간끼리의 조화(調和). 파시즘은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전쟁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평화를 바란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암 설치 센터를 설치했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아우토반이라는 거대한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나치는 국가 사상 처음으로 금연운동을 국가 단위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나치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 중 — 그렇다 , 인간의 의지는 혼돈스러운 자연으로부터 승리했다.
이토록 조화로움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만큼 완벽함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만큼 안전과 위생과 쾌락을 추구한 문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것을 단 하나의 메시지에 맞추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그들은 어떠한 불안도 없는 ‘순결(純潔, 쥰케츠)’함을 원했다. 그렇기에 파시즘은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단 하나의 의견으로의 만장일치. 그것이 설령 유태인을 학살하고 조선어를 말살할 지라도. 그리고 문명은, 미디어는 그런 파시즘의 의지에 충실하게 봉사했다.
파시즘이란 내면화하는 무엇이 아니다. 내면을 없애는 활동이야말로 파시즘의 본질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 즉 우편, 미디어, 해석적 교권을 장악함으로 비로서 파시즘이 꿈꾸는 공공성은 실현 가능해진다. 이러한 우편의 장악은 궁극적으로 공공적 해석 — 메시지에 의해 사적 영역이 완전히 점유되는 일에 다름 아니다. — 황호덕, <벌레와 제국> 中
문명과 미디어가 사람을 지배한다 — 그리고 그 문명의 핵심이었던 옷이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한 증거는 킬라킬 어디를 가도 널려있다. 킬라킬 2화, 학교가 바로 군대와 같이 군복에서 차용한 옷을 학생들에게 일괄적으로 입히고 있다. 다른 옷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교복만이 허용될 뿐이다. 킬라킬 5화, 옷의 폭주로 사람이 죽었다. 킬라킬 7화, 옷이 주는 편안함에 마코의 가족들은 류코를 버린다.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들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조화(調和)를 이루는 파시즘. 그렇기에 혼노지 학원에서는, 극교복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실력은 그대로 생활로 이루어진다. 거기에 공과 사의 구분따윈 없다. 새하얀 극교복으로 가득채운 혼노지 학원의 조화로움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옷을 벗어버리는 것 외에는 이 파시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옷은 사람의 적이 아니다”. 7화에서 마코의 가족이 옷을 벗어버리는 부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다시 옷을 입고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다른 옷을 입고 생활할 선택권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누디스트 비치가 속옷을 입지 않고, 마토이 류코가 새카만 카무이를 입듯이. 뿐만 아니라 — 옷은 사람과 친구과 될 수 있다. 아니, 본래 옷이란 사람과 친구가 되기 위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사람과 사람의 조화(調和)는 다른 형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반드시 순결함만이 답이 아니다.
나는 그렇기에, 파시즘을 벗어날 수 있는 답을 앞으로 <킬라킬>이 제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 외부의 존재였던 마토이 류코의 등장으로 혼노지 학원의 질서가 통째로 뒤집어진 것처럼.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7화에서 봤듯이, 키류인 사츠키는 그런 마토이 류코를 이용하여 혼노지 학원의 질서를, 조화를 더 강화하려고 했다. 또한, 5화에서 마토이 류코가 옷에 잡아먹혀 괴물이 될 수 있음을 키나가세 츠무구가 경고하기도 한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명확히 말할 순 없다. 다만, 선혈(鮮血, 센케츠) 낭자한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래, 타인과 이어진다는 것은 그 아픔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가지 색을 선명히 가진 채, 서로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 선혈 낭자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그렇게 피를 빨아 댄 이유는, 내가 창피하다며 널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만큼 피의 이어짐을 원하고 있던 거야, 그런 거였지? — 킬라킬 3화
고통이 따르는 색이라도 모든 게 보고 싶어.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아버리는 상처따윈 싫어. 스스로 상처입고 싶어. // 블랙 락 슈터, 나는 너를 상처입힌다. 상처입고 상처입어도 그래도 나는, 당신과 이어진다. — 이마이시 히로유키가 전투 씬을 감독한 <블랙★락 슈터>에서.
앞으로, 킬라킬은 19화가 남았다. 그 동안 킬라킬이 어떤 길을 보여줄지 그저 기대하며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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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런 리뷰는 추천이라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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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맥클루언의 이론이로군요. 뭐 그런 완벽함을 추구한 문명이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씀하시는건 한 가지를 간과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괴벨스나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로 알려지기 전에는 공산주의,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은근히 잘 알려져 있지 않죠. 그리고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완전한 조화위에서 성립되는 유토피아'가 무너진곳에서 유물론의 유토피아를 새로이 세웠고요. 기독교, 공산주의, 파시즘의 흥성 역시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진 문명의 또 다른 결정체라고 본다면, 그리고 이들의 붕괴가 결국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외치면서 붕괴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작품이 파시즘이라는 한때 유행한 사상의 비판에만 국한된다고 보긴 어렵겠죠. 인간이 내세우고 만들고자 하는 질서와 인간 자유의지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언제나 다른형태로 재현되고 있으니까요. 전 이 두가지 성질이 충돌하는것이 지금의 인류 문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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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만큼이나 가위와 바늘의 의미도 중요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명의 대표형태가 옷이란 것도 꽤 생각할 거리가 많죠. 실재로 불의 발견만큼이나 직물의 발견을 인류발전사에서 중요하게 다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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