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게임이라는 항목 안에서 턴제 전략 게임(Turn Time Strategy)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란 그리 큰 편이 못 됩니다. 복잡한 규칙을 숙지하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점에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임과는 거리가 멀지요. 주류의 위치로 부상하는 날이 찾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는 장르입니다. 이와 같은 성질은 웬만한 작품 가지곤 발을 들이밀 엄두도 내기 힘든 뻑뻑한 시장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유서 깊은 명가에서 내놓은 신작 내지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전통 있는 시리즈의 새 얼굴 쯤 되는 물건이 아니라면 눈길을 끄는 것조차 어려운 바닥이지요.
혹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걸작을 부활시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엑스컴 : 에너미 언노운(이하 엑스컴 EU)'은 1993년에 발매된 게임인 'X-COM'을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원작의 제작사였던 MicroProse Software는 중독성 강한 경영 시뮬레이션인 타이쿤(Tycoon) 시리즈의 시초라 할 '레일로드 타이쿤(Railroad Tycoon)', 그리고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을 세상에 선보인 곳이기도 하죠. 물론 회사의 명성이 작품의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오래된 게임을 이제 와서 다시 건드리는 것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냐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군요.
1993년, X-COM : Ufo Defense. 혹은 UFO : Enemy Unknown. |
답은 간단합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고작 세 편의 작품을 끝으로 대가 끊어져버린 이래 어느덧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최근까지도 적극적인 모방의 산물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X-COM이란 게임이 보여준 매력과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모든 아류의 근원이 리메이크라는 형태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겠지만, 아마도 놀라움을 주지는 못했을 겁니다.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일 뿐이니까요.
돌아온 엑스컴 EU는 처음부터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을 구축해 버렸다는 인상을 준 바로 그 작품, 'X-COM : Enemy Unknown'을 충실히 모사한 듯한 외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목부터가 그 증거인 셈이죠. '엑스컴'은 외계인의 침입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된 초국가적인 비밀 단체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eXtraterrestrial COMbat unit'의 약자죠, 엑스컴의 사령관으로서 조직을 지휘하여 외계인의 활동을 저지하고 인명을 보호하며, 나아가 미지의 세력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만큼 병력을 증강해 역습을 가하는 것이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2012년, 엑스컴 : 에너미 언노운. |
게임 속에서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선은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기본이죠. 과제의 경중을 저울질하고 소요되는 시간을 따져 본 뒤, 부서 곳곳에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기지를 관리해주어야 합니다. 가진 돈을 효율적으로 투자하여 최대한의 성과를 이끌어내고 추가로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자 분투하는 과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각은 경영 시뮬레이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연구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외계인과의 싸움에 필요한 장비들의 위력과 성능을 향상하는데 특화된 부서입니다. 보통은 전투가 끝난 뒤 병사들이 수거해 온 무기의 파편과 우주선의 잔해, 외계인의 사체 등을 분석하거나 해부하여 아군의 과학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고 있습니다. 운 좋게 외계인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였다면 이를 고…아니, 심문하여 정보를 얻어내는 것 또한 연구실의 몫입니다.
엑스컴 최고의 미인인 발렌 박사. |
그녀의 취미는 외계인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
이 기술은 이제 제 겁니다. |
IN○EL이란 회사가 이런 식으로 성장했다고 하더군요. |
외계인의 기술을 분석하는 특정한 프로젝트를 완료하였다면 다음은 실제로 사용할 물건을 만들어 낼 차례입니다. 무기와 방어구에서부터 인공위성 및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물품은 기술실을 통해 원하는 만큼 발주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을 결정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작전 통제실을 방문하여 활동 스캔을 실행시키면 비로소 게임 속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위성을 이용하여 지구 전체를 샅샅이 훑다 보면 일정한 확률로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적들의 움직임을 잡아내곤 합니다. 대기권 안으로 진입한 우주선을 포착하여 전투기를 출격시키는가 하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무차별적인 테러나 요인을 납치하려는 움직임을 발견하여 저지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태를 확실하게 마무리 지으려거든 직접 병력을 투입해서 적들을 전부 해치워야만 합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
배치를 잘 고려해서 시설을 지어야 합니다. |
지구의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하루가 흘러가는 식. |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열한 공중전. |
사실 조직의 수장으로서 엑스컴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별도의 연습 따위를 거치지 않고서도 금세 숙지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수준입니다. 간단하지만, 어렵습니다. 문제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엑스컴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결성된 군사 조직일 뿐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운영에 드는 비용은 전적으로 가맹국의 지원금에 의존하는 형편입니다. 12개의 가맹국 중에서 특정한 국가의 상공에 위성을 띄워 감시망을 형성해줘야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초반에는 보유한 위성이 달랑 한 개뿐이죠. 더 만들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만듭니다.
더구나 새로운 연구 대상에 대한 투자 및 이를 바탕으로 장비와 기기를 생산하는 공정은 적잖은 금전과 더불어 적들로부터 수거한 갖가지 외계의 자원들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쓸 곳은 많은데 비해 자원은 전혀 풍족하지 못 하다는 뜻입니다. 정 돈이 급하다면 귀한 자원을 매각하여 자금을 충당하는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만, 언 발에 오줌을 누기나 다름없는 짓이죠. 덕분에 게임 초반에는 살림살이가 꽤나 빡빡합니다.
초반의 관리에 실패하여 세 나라가 탈퇴한 상태입니다. |
눈물 젖은 예산을 받아보지 못한 자 경영을 논하지 말 것. |
설렁설렁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점점 난이도를 상승시키는 것이 보통인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엑스컴은 초보자를 위한 튜토리얼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레이어를 짓누르기 시작하는 이상한 게임입니다. 당장에라도 부도가 날 것만 같은 위태로운 기업의 CEO가 된 듯한 기분을 맛봐야 하죠. 잔고는 벌써 바닥을 치는데 지원금이 들어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끝도 없이 반복됩니다. 반면 결원을 채울 신병을 고용하고 다양한 시설을 건조하고 대륙마다 전투기를 배치하는 등 한정된 예산을 운용하여 실행에 옮겨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는 것은 해야 할 일들을 절반 이상 해치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수입이 점점 늘어나는 한편으로 돈이 들어갈 구석은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기실 엑스컴 EU가 긴 전쟁의 서장에서부터 플레이어를 바짝 조여 대는 의도란, 게임이 중반 이후로 접어들어 마침내 재정의 위기와 기술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우위를 점하는 순간 터져 나올 짜릿한 역전의 쾌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일 뿐입니다.
여러 사정상 모든 요청을 즉각 수락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 |
팔 수 있는 건 빨리 팔아치우는 게 좋다. |
이와 같은 성향은 적과 직접 대치해야 하는 전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엑스컴 EU의 개성 중 하나입니다. 외계인과의 직접적인 대치는 여타 TTS를 통해 익히 보아 온 턴제 전투의 정석과도 같은 형태입니다. 아군의 턴에서 병사 전원이 행동을 취하고 나면 외계인 쪽으로 턴이 넘어가고, 한 쪽이 전멸하거나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교대로 공격을 주고받게 됩니다. 개인별로 주어진 TU(Time units)가 다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거나 총을 쏘고 자세를 바꾸는 등의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기존의 시스템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폐지된 모양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많을 때에는 수송기에서 병사들을 하선시킨 뒤 적당한 위치로 분산시키는 데에만 십여 번의 턴을 소모해야 했을 정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 엑스컴 EU에서는 모든 종류의 공격을 포함하는 '행동'과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라는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르는 간단한 방식으로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플레이어는 병사를 이동시킨 뒤 행동을 취하게 하거나, 행동을 포기하고 두 번의 이동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턴이 돌아오자마자 이동을 버리고 바로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훨씬 깔끔해진 외형. |
전투의 속도가 전반적으로 훨씬 빨라졌다. |
덧붙여 가급적 많은 무기와 탄창을 휴대하기 위해 병사들의 군장 속 내용물을 한 명씩 일일이 정리해 주어야 했던 번거로운 작업 또한 같은 길을 걸었죠. 소총이나 산탄총과 같은 기본적인 무기들은 재장전만 제 때 해 준다면 탄약의 제한 없이 쏠 수 있으며 그밖에 남다른 성능을 지닌 무기와 전투를 보조해줄 장비, 병과에 따른 특수한 기술들은 다시 사용하기 위해 일정한 횟수만큼의 턴을 기다려야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방어란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엄폐'의 도입이 그것입니다. 전장에 있는 사물들은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 별도의 조작 없이 몸을 기대어 엄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때 몸을 얼마나 잘 가렸느냐의 여부 및 적과의 거리, 사선에 노출된 각도와 같은 요소에 따라 피격당할 확률이 달라지죠. 물론 사방을 모두 가로막아주는 엄폐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신중을 기해 안전한 위치를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동에 앞서 엄폐 가능한지를 미리 확인할 수 있다. |
엄폐 중인 적의 측면을 노리는 것이 핵심. |
지형의 고저에 따른 손익이 존재하는 전장을 바탕으로 기존의 것을 버리고 없던 것을 추가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꾀함으로써, 엑스컴은 원작의 시스템을 퍽 단순한 형태로 가다듬으면서도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깊이를 더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줍니다. 쉴 틈 없이 유리한 지점으로 병력을 움직이면서 과감한 우회 기동으로 적진의 측면을 찌르는가 하면, 엄폐물이 적은 지역으로 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유인하는 등 지형과 상황에 걸맞은 전법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종종 역동적인 시점으로 대원 또는 외계인의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
각! 개! 전! 투! |
만일 전술적인 사고 없이도 운 좋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건 아마도 병사들의 희생을 대가로 치른 덕분일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초반의 전투는 경영과 마찬가지로 빠듯하기 짝이 없습니다. 몸값이 싸고 추가적인 비용이 들지 않는 대신 일정 이상의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장기판의 졸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병사의 특징이죠. 외계인을 때려잡는 것 외에도 정예 병력을 키워내는 것 또한 전투의 중요한 목적인 셈입니다.
게다가 분대의 정원은 최대 6명으로, 그나마도 처음에는 네 명까지만 내보낼 수 있습니다. 원작에 비해 인원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만큼,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의 양과 분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두 명의 선임 병사만을 주력으로 삼아 적들을 처리할 생각이 아니라면, 예전처럼 한 두 명 쯤 총알받이 내지는 미끼로 삼을 각오하고 무작정 돌격시키는 전법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었죠.
각국으로부터 모집한 병사들. |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
병과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사실은 조심스러운 지휘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중화기,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데 특화된 저격병, 이동 범위가 넓고 아군을 보조하는 것이 주된 역할인 지원병, 근거리에서의 전투에 유리한 돌격병으로 나누어지는 네 가지 병과는 계급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뛰어난 인재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계급이 높은 병사들은 그만큼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갓 전입해 온 신병들에게도 가급적 많은 기회를 주고자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임무 중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에 대비하여 각각의 병과 마다 골고루 쓸 만한 전력을 준비해두어야 하기 때문이죠. 평소에 미리미리 평균을 올려두지 않는다면 자칫 일병과 상병으로 가득한 내무반에서 병력을 차출해야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이 접근해서 샷건으로 갈겨버리는 재미가 일품인 돌격병. |
"외계인을 쏠 때 뭘 느끼시나요?" "반동." |
병과에 따라 특성이 뚜렷하게 달라진다. |
능력이 별로다 싶으면 빨리 해고해버리는 편이 바람직. |
이처럼 풋내 나는 이병들을 대령으로 진급시키는 과정은 자연스레 정성과 관심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에 박차를 가하듯 엑스컴 EU는 대원들의 이름과 별명, 외모, 인종 등을 바꿔줄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르가 무엇인지를 감안하자면 선택의 폭도 그리 좁은 것만은 아닙니다. 일종의 육성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게임에 좀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는 소소한 여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애착은 금물입니다. 엑스컴의 전투원은 결국 소모성 자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 게임은 RPG가 아닙니다. 그럴 확률이 비교적 낮을 뿐, 영관급의 우수한 병사라 해도 얼마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외계인의 소행일지언정, 공들여 키워 놓은 대령의 죽음이란 입력 도중 실수를 범하는 경우까지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지휘관의 오판과 미숙함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고 놉니다. |
'출격 앞둔 엑스컴의 여성 병사, 숨 막히는 뒤태.' |
첫 번째 교전에서부터 최후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엑스컴의 전투는 한 가지 명백한 일관성을 지닙니다. 프레임 단위의 움직임을 구분해 내는 경이로운 동체 시력이나 마우스 또는 패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들린 손놀림, 갑작스레 닥친 위기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게 해 주는 의연한 마음가짐과 이를 뒷받침해 줄 예리한 반사 신경, 이런 능력들은 전혀 쓸 데가 없다는 겁니다. 장기판의 말처럼 병사들을 하나씩 움직인 뒤 턴을 넘기기만 하면 됩니다. 딱히 감각을 집중시켜야 할 구석이 없기에 육체적으로는 힘겨워 할 일이 전무하죠. 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아군의 턴이 끝나고 나면 적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전황이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느냐에 상관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직 시선이 닿지 않은 어둠으로 가득한 전장 위에서 무턱대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것은 더없이 위험하고 무모한 짓입니다. 정찰을 목적으로 둘 셋 정도를 외진 곳으로 이동시켰다가 그 두 배가 넘는 적들과 맞닥뜨리기 십상이죠. 대응에 할애할 행동의 기회를 남겨두지 않은 채 그대로 턴이 끝나버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턴이 돌아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합니다.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적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안간힘을 다하곤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것은 감각적인 반응도 노련한 기술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확률의 몫이죠. 예컨대 명중률이 50% 미만인 위치 및 거리에서라면 쏘는 족족 빗나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가끔은 80%가 넘는데도 빗나가곤 합니다. 적을 맞히기 쉬운 자리란 동시에 총에 맞기 쉬운 자리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다음은 외계인의 턴입니다.
부분대장조 돌격 앞으로. |
이 게임에서 가장 무서운 글귀. |
원작에 비해 상당히 약해졌지만 여전히 짜증 나는 크리살리드. |
총알이 빗나가지 않는 확실한 방법. |
지력을 총동원하여 적을 압박할 때의 쾌감은 한 번 빠져들고 나면 헤어나오기 힘든 종류의 것입니다. 반대로 수세에 몰렸을 때에는 두 손을 묶인 채 칼끝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지켜보는 듯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주인공을 조종하여 다수의 적을 해치우는 평범한 액션 게임이나 상대의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턴제 전투만의 묘미입니다.
이처럼 번갈아 수를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하기를 반복하는 머리싸움의 재미만을 따로 떼어놓은 것이 바로 멀티 플레이 모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스토리와는 관계없는 싸움이니만큼, 인간과 외계인이 뒤섞인 분대를 지휘해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인 무대입니다. 전투에 앞서 플레이어는 제한된 점수를 분배하여 병력을 배치해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뛰어난 병사는 인간이냐 외계인이냐에 관계없이 더욱 많은 포인트를 필요로 하죠. 질과 양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할 것인 결정하고, 각각의 병과 또는 외계인이 지닌 특성을 고려하여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건입니다.
원한다면 포인트에 제한을 두지 않고 최고의 병사와 강력한 외계인들로 지휘해보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한 가지, 싱글 플레이 모드에서의 진도와 관계없이 모든 무기와 장비, 그리고 낯선 외계인과 조우할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리 누설을 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도 문제거니와 잘 알지 못하는 병사를 다루어 익숙지 않은 적과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본의 아니게 불리함을 감수해야만 하니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분대를 만들어 볼 수 있다. |
싸우는 방식은 싱글 플레이 모드에서와 동일. |
결국 멀티 플레이 모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라도 싱글 플레이 모드를 완료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차피 사람과의 대전은 부차적인 여흥, 일종의 덤에 불과한 것일 뿐 어디까지나 홀로 즐기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점을 잊어버리면 곤란합니다. 더구나 엑스컴 EU는 엔딩을 한 번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임이 아닙니다. 하다 못 해 가장 쉬운 난이도로라도 한 번 쯤은 철인 모드에 도전해 본 뒤에야 어디 가서 엑스컴 EU 좀 해 봤다는 말을 당당히 꺼낼 자격이 주어집니다. 꼭 성공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어렵거든요.
철인 모드의 특징은 단순합니다. 세이브 슬롯은 하나뿐이고, 로드는 없습니다. 저장조차도 임의가 아닌 자동입니다. 전투 중이라면 한 턴이 끝날 때마다 진행 상황이 강제로 저장되어버립니다. 돌이킬 수 없는 외길이죠. 여기에 클래식 이상의 난이도가 더해지면 그 때부터는 매 순간이 악몽입니다. 외계인은 훨씬 강하고 영리해지는데 반해 아군의 대원들은 맷집과 정신력이 약해지는데다 실수마저 늘어나죠. 공들여 키워놓은 대령이 이병처럼 죽어나가기 일쑤입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를 놓는 듯한 치밀함, 그리고 몇 수 앞을 미리 내다보는 통찰력이 절실합니다.
철인 모드를 배제하더라도 세이브와 로드를 이용하여 같은 임무에 거듭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질 뿐 게임 자체가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계인과의 싸움은 여전히 두통을 유발하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함으로써 더욱 큰 즐거움을 얻게끔 유도하는 것은 흔한 공식이지만, 그 과정에서 과중한 스트레스가 쌓여버린다면 본말전도입니다. 분노와 짜증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란 게임으로서의 성공과 실패를 구분 짓는 알기 쉬운 기준 가운데 하나죠. 원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전자에 속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리메이크된 엑스컴 EU는 과연 어떨까요.
어서 와. |
철인 모드는 처음이지? |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어집니다. |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려서, 엑스컴 EU는 당대에 이미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 바 있는 명작을 부활시킨다는 취지만으로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활'입니다. 20년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라면, 예전과 똑같은 존재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까지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2012년의 엑스컴 EU는 언뜻 원작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임이지만,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가면 가급적 빠르고 간결한 것을 추구하는 요즘의 추세에 걸맞게 과감한 수정을 거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아니, 꽤 많은 편이죠.
그 중 마우스와 키보드가 아닌 게임 패드만을 이용하더라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작 체계를 일신해 두었다는 점은 원작을 접해 본 게이머들과 더불어 콘솔 시장 및 라이트 유저까지를 한꺼번에 공략하기 위해 감행한 변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선에 대해서는 망설일 것 없이 흔쾌히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하지만 그 밖에 달라진 점들에 대해서는 딱 잘라 좋고 나쁨을 논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죠.
엉뚱한 지점을 선택할 일이 적다는 점에선 패드가 더 나을지도. |
예컨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개수가 대폭 줄어들어버린 전장은 원작의 팬들로부터 탐탁잖은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요인입니다. 매번 무작위로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기에 전투에 돌입할 때마다 막막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원작과는 달리 외계인의 위치가 달라질 뿐 같은 맵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맵의 형태가 고정되어버린 이유란 과거에 비해 그래픽의 수준이 너무 발달해버렸기 때문이라 여기고 넘어가더라도, 정 그렇다면 가짓수라도 많았어야 할 것 아니냐는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금세 외워버릴 수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아울러 전투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은,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오래 전의 그 작품과 비슷한 모양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되 본질적으로는 사뭇 다른 작품이라는 인상을 증폭시키는 촉매와도 같은 것입니다. 로켓이나 수류탄을 쓰지 않고서는 자동차 등을 일부러 쏴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주변의 사물을 폭발시켜 적에게 피해를 준다는 전법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별안간 날아온 총탄에 병사들을 잃을까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어졌지요. 경험 부족한 신병들이라도 이제 웬만해선 공황 상태로 빠져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미지와의 조우라는 소재를 통해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시련과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를 선사하던 원작의 정취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말을 움직여 지략을 겨루는데 초점을 맞춘, 전통적인 보드 게임의 연장선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입니다. 고전의 완벽한 재현을 기대한 팬들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이 후계자는 놓치기 어려운 장점, 수많은 변화와 상실을 초월하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을 중독시킨다는 겁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적만을 조준할 수 있다. |
빗맞은 총알에 자동차 등이 폭발하긴 해도 일부러 맞추는 것은 불가능. |
먼저 서로를 인식한 뒤에야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된다. |
엑스컴 EU는 무서운 게임입니다. 미처 눈치챌 틈을 주지 않고 시간을 지워버리죠. 랜덤 맵의 부재를 비롯하여 게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데 기여하는 모든 요소들이란, 어쩌면 과도한 몰입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거나 게임에 대한 소비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드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력한 중독성을 자랑하고 있으니까요.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엔딩을 보고 나면, 철인 모드를 가동시킨 채로 다시금 게임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달리 누군가를 납득시킬 만한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됩니다. 은근히 단출한 구성 덕분에 마침내 싫증을 느껴 손을 뗄 즈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러가고 난 뒤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맵이나 복장 같은 것을 추가해 줄 DLC가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앞둔 대학생, 일찌감치 다음 수능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재수생, 승진이 걸린 중요한 업무를 진행 중인 회사원 등등은 결코 이 게임에 손을 대지 말 것을 권장하는 바입니다. 엑스컴의 목적은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개인의 선택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를 책임지는 것은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을 살해하는 것은 외계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당신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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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리고 신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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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라 사들고 오긴 했는데... 전략이네..; 일단 맛만 볼까.. [5시간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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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아너드, 어크 3, 히트맨 앱솔루션, 블옵2까지 신작게임들 다 플레이해봤지만 엑스컴만큼 몰입잘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게임이 없었음... 적어도 내 마음속에선 엑스컴이 GO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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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죽이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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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은 죄악이란걸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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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고전명작을 못해봤지만 이번작은 GOTY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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