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heathletic.com/1651056/2020/03/04/the-baseball-100-no-23-albert-pujols/
알버트 푸홀스를 기억하기에 너무 어린 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버디 워크 인 더 파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간의 문제다. 푸홀스는 2012년 에인절스로 이적했고 그것도 오래 전 일이다. 그 해는 첫번째 어벤저스 영화가 개봉한 해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10대거나 최근에 야구팬이 된 사람이라면 푸홀스가 에인절스로 오기 전, 방망이가 느려지고 몸이 망가지기 전인 세인트루이스에서 뛰었던 때를 기억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그가 부진하기 전 실투를 놓치지 않고 수많은 공을 펜스로 넘기는 것이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계산을 할 때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 알버트 푸홀스는 얼마나 뛰어났을까?
수치, 업적, 입이 벌어질만한 놀라운 일관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고 싶다면 버디 워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매년 세인트 루이스, 부쉬 스타디움에서는 국립다운증후군협회(National Down Syndrome Society)에서 다운증후군 인식개선을 위해 특별한 날을 갖는다. 그날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들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카디널스 선수와 함께 경기장을 걷는 버디워크 행사를 위해 초대된다. 분명 모두에게 중요한 날이지만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이 있는 푸홀스와 그의 아내인 디드레에게는 더욱 의미있는 날이다. 그들은 다운증후군 환우 가족 당사자이기에 "다운증후군을 가진 가족과 아이들을 위한 인식을 개선하고 희망을 주며 지지하고 기억에 남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바쳤다.
기억에 남는 이벤트를 만드는 그들의 언어에 주목하자. 이것이야말로 푸홀스 가족을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2002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10세 소녀 캐슬린 머츠가 푸홀스에게 시구를 했다. 푸홀스가 아이에게 사인공을 건내주며 포옹을 하기 위해 다가오자 아이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푸홀스 아저씨, 저를 위해 홈런을 쳐주세요."
그는 아이를 보고 웃었다. 이 소원이야말로 최고의 야구소원이다. 그렇지 않나? 아이가 좋아하는 선수에게 홈런을 쳐달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베이브 루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타이밍이 맞는다면 선수는 꿈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2002년 경기 1회에 푸홀스는 휴스턴의 커크 사를로스를 상대로 커다란 홈런포를 쏘아올렸고 캐슬린 머츠는 남은 인생 동안 기억에 남을 기쁨을 느꼈다.
좋은 이야기다. 그렇지 않나? 자, 안전벨트를 꽉 매라.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이다.
1년 후인 2003년 버디워크의 날. 캐슬린 머츠는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그녀는 푸홀스의 동료인 페르난도 비나와 함께 2루로 걸어갔지만 푸홀스를 보며 손을 흔들었고 이에 푸홀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1년 전 친구가 되었다.(그녀는 야구장에 "푸홀스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예요!"라고 쓰인 피켓을 가져왔다.)
"또 홈런을 쳐주세요, 아저씨!" 그녀는 소리쳤고, 푸홀스는 씩 웃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니키 커닝햄이라는 소녀의 시구를 잡으러 갔다. 푸홀스가 아이에게 사인공을 주며 포옹을 해주었을 때 니키는 자신을 위해 홈런을 쳐줄만큼 친절해질 수 있는지 물었다.
경기 중 13회가 되자 댄 미셀리를 상대로 푸홀스는 끝내기 홈런포를 길게 쏘아올렸다.
결국 그는 두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는 아마 모든 야구 선수가 기대하는 일 이상이다. 홈런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희귀한 새다. 투구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스윙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구장, 날씨, 고도, 모든 것이 걸맞아야 한다. 2004년과 2005년에 푸홀스는 버디 워크 데이에 홈런을 치려고 시도했다. 홈런포는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 버디워크 데이에 푸홀스에게 이례적으로 홈런요청이 쇄도했다. 마치 그가 방향을 돌릴 때마다 아이들이 그에게 홈런을 쳐달라 부탁하는 듯 보였다.
"절 위해 홈런쳐주세요!" "절 위해 홈런쳐주세요!" "절 위해 홈런쳐주세요!" 당시 카디널스 감독인 토니 라 루사는 "푸홀스가 웃으며 각각의 그 아이들에게 고개를 끄떡였다."라고 회상했다.
1회 피츠버그의 이안 스넬을 상대로 푸홀스는 좌측 담장 너머 깊숙한 곳으로 홈런을 쏘아올렸다. 그가 해냈다. 세명의 아이를 위한 3호 홈런이다. 이번에는 그가 어떤 특정한 아이에게도 홈런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그저 모두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그들 중 누구를 위해 홈런을 쳤는지 서로 논쟁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푸홀스가 해결했다. 3회에 스넬을 상대로 자신의 두번째 홈런을 거의 정확히 같은 위치로 때려박았다. 크레이머가 폴 오닐에게 병원의 아픈 아이들을 위해 하나도 아닌 두개의 홈런을 쳐달라 부탁했던 고전시트콤 사인펠드의 일화를 기억하는가?
"대체 왜 2개야?" 오닐이 그에게 물었다.
크레이머는 "둘이 하나보다 나아요."
그렇다. 둘이 하나보다 낫다.
"이렇게 말하죠." 푸홀스의 팀 동료 아담 웨인라이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푸홀스는 아이들을 위해 홈런 두개를 친다 약속하고 그것을 해내기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남자라는 말이죠"
근사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5회, 푸홀스가 이안 스넬을 다시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홈런만 치지 않았다. 그는 센터필드 쪽으로 위대하고 터무니없고 놀라운 타격을 한 나머지 경기 후 스넬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게이트웨이 아치에 부딪힐 정도의 타구였어요. 푸홀스와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을정도로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푸홀스는 2007년 버디 워크 데이에 팔꿈치 부상으로 자리를 지켰다. 2008년 푸홀스는 또 다시 통증을 느꼈지만 플레이하기엔 무리가 없었고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야구장으로 온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경기 전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홈런을 쳐달라 부탁했고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1회, 그는 플로리나의 조쉬 존슨을 상대로 큰 홈런을 터뜨렸다.
"푸홀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웨인라이트가 말했다. "불가능이 없는 남자예요,"
내 생각에 야구사상 그 어떤 유망하지 않은 선수도 푸홀스만큼 빨리 슈퍼스타가 된 적은 없다. 푸홀스는 카디널스에서 13라운드에 선발되었다. 13라운드 픽은 거의 성공하지 못한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드래프트 첫 해부터 전체 13라운드 중 13%만이 빅리그에 진출했고 8% 미만이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를 1 이상 기록했다.
실제로 13라운드에 선발된 일부 선수들은 사인을 안하고 다음 드래프트에 도전했기 때문에 숫자는 그보다 더 적다. 소수의 13라운드 픽이 -짐 톰, 잭 클락, 맷 카펜더 등- 성공했지만 모두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푸홀스에게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캔자스 시티에 있는 메이플 우즈 커뮤니티 칼리지를 나왔다. 그는 수비적인 포지션이 아니었다. 달릴 수도 없었다. 스카우터들은 그의 체형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그와 그의 아버지가 14세 때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미주리 인디펜던스로 온 이후로 그를 줄곧 의심받았던, 19살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상대팀들은 그가 좋은 타자일 뿐만 아니라 성인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를 사구로 걸렀다.
그리고, 카디널스는 어쩌면 아마도...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를 13라운드에 지명했다.
드래프트 2년 후, 푸홀스는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 중 하나였다.
어떻게? 뭐라고? 자, 한번 보자. 분명 스카우터들은 푸홀스라는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타격 재능을 놓쳤다. 그는 거기 있었다. 푸홀스는 메이플 우즈에서 괴물같은 타자였다. 댠 한번도 삼진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4할 6푼 1리의 타율로 22개의 홈런을 쳤다.
"제겐 아픈 지명이었죠." 푸홀스는 말했다. "전 괴물 같은 타자였어요." 말할 필요도 없이 푸홀스는 그의 재능을 놓친 스카우터들을 그리 대단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상이었다. 변화도 있었다.
2001년, 푸홀스가 스프링 캠프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그가 실제로 로스터에 합류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타율 0.324과 0.565 장타율을 기록하며 3주간 하이A를 기량을 폭격하는 등 마이너리그 1년간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그는 심지어 버드 스미스에 이어 카디널스 팜내 유망주 순위 2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싱글 A급 선수였다.
"어리지만 배테랑과 같은 모습이다." 카디널스가 아직도 그의 수비가 불안하다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쏟아냈다. "그는 더블 A 뉴헤이븐으로 승격될 것이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리 되었다. 토니 라 루사가 실제로 그의 경기를 보았다. 라루사는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다스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가 카보나이트 냉동실에서 포스점프로 빠져나오는 장면을 보고 '인상적이군'이라 말한 것 같이 라 루사는 '인상적'이라 말했다.
그는 이날 기자들에게 "푸홀스는 빅리그에 가기 이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87년 맥과이어 또한 1군에 들어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는 신인왕이 됐습니다."
훌륭한 이야기다. 1987년 맥과이어의 상황은 꽤 달랐다. 푸홀스는 20세의 하위픽이었고 1년간 싱글 A 선수란 평가를 받았다. 맥과이어는 1984년 드래프트 전체 10번픽이었고, 1987년까지의 드래프티 중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였으며 심지어 1986년 시즌 말 빅리그에서 경기를 뛰었다.
캠프에 온지 며칠만에 라 루사가 푸홀스를 맥과이어와 비교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를 알려준다.
일주일 후 푸홀스의 무엇이 그리 인상적이었는지 묻자 "스윙, 타격 시작시의 테이크, 타격의 방식입니다."라며 놀라워했다.
스프링캠프 첫 청백전에서 푸홀스는 홈런과 3루타를 쳤다.
라루사는 푸홀스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라루사는 감정적으로 푸홀스를 빅리그로 승격시킬까봐 걱정한 나머지 푸홀스의 플레이가 두려워졌다. 세인트 루이스 디스페치는 "라루사는 푸홀스와 너무 빨리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라 루사는 사랑에 빠졌다. 카디널스 GM 월트 조커티가 오히려 더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들은 푸홀스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원칙에 어긋나는 선수가 있다. 카디널스는 우왕좌왕했고 푸홀스가 보기 좋은만큼 잠시 동안 마이너리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푸홀스란 음식에 조미료를 조금만 더 넣자.
그러나 바비 보닐라가 왼쪽 햄스트링을 다치자 카디널스는 개막전에 푸홀스를 콜로라도로 데려왔고 푸홀스는 마이크 햄튼을 상대로 단타를 쳤다. 나흘 후 애리조나에서 그는 2루타, 홈런을 비롯해 5타수 3안타를 쳤다. 그 달말 21 경기에 출장해 0.370의 타율, 807의 장타율과 8개의 2루타과 3루타 1개, 그리고 8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그는 47개의 2루타, 37개의 홈런 112 득점,. 130 타점 타율 .329 출루율 403. 장타율 610을 기록했다.
야구사상 가장 위대한 루키 시즌 중 하나다.
심지어 그의 다음 9시즌 중 8시즌은 이보다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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