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7597?
이 글 덧글에서 제안하신 대로, 21번 스쿼드 이야기를 써봅니다. 생각보다 되게, 되게 길어졌네요.
원래는 덧글에서 좌우좌 메탈기어 찍는 얘기랑 이 21번 분대 얘기 두 개 중에서 고민했습니다(리앤 이야기도 고민했는데 이번 이벤트 스토리를 제가 잘 몰라서요...).
좌우자 골판지 상자도 되게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고 사실 분량은 그 쪾이 더 가볍고 짧았을 텐데 괜히 더 길게 써야 할 걸 골라버렸네요.
어쨌든 위 글에서 소재 투척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21번 스쿼드의 호위조와 관련된 이야기는 위 글의 덧글이나,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lastorigin/articles/649257?useCafeId=false
이 링크의 설명을 참조해 주세요
여기 나온 레프리콘은...예전에 쓴 구덩이 이야기(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6416?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5031390)의 레프리콘(이 신참일 때라는 설정으로)을 써먹어 봤습니다.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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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조가 이번 수색에서 뭔가 성과를 거두었으면 좋겠군요”
꽤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블랙 리리스는 투덜대면서 땅바닥에 남은 흔적을 추적했다.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닌 그녀였기에 레프리콘은 이채를 띈 눈빛으로 그 백발 바이오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왜죠?”
“우리가 이렇게 죽을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도 또 보잘 것 없으면, 흥, 글쎄요. 통령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 일들이 다 의미가 있는 행동들인진 모르겠어요”
“......”
레프리콘은 말없이 리리스의 말을 곱씹었다. 한 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없다. 스틸라인의 병사들은 상명하복에 익숙하다. 그러니까 스틸라인의 병사 바이오로이드들은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명령받으면 그저 할 뿐, 그 일의 의미에 대해 깊이 검토하진 않는다. 서서 죽는 자들에게 고뇌나 성찰은 종종 필요없는 법이다.
“....아, 찾았어요. 칙들의 발자국에 많이 가려졌지만...무슨 시설 지하? 반지하? 아무튼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의 아래로 내려간 것 같군요. 거기 뭐가 있길래 그러지? 이상한 양반들이야 진짜”
여전히 투덜대면서, 그러나 어쨌든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에 만족하면서 리리스는 일어났다. 아, 피곤해. 하고 생각하면서. 오늘은 너무 많이 움직였다. 혹 두 개 달고 날뛰느라 옷도 더러워졌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컴패니언 자매들에게로 돌아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자고 싶다. 웬만한 일들은 페로가 전부 처리해 두었으리라.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리리스는 지금 뒤따라오는 저 두 스틸라인 병사가 사실상 자기에게 짐임을 속으로 부정하진 않았다. 그녀 혼자 움직인다면 훨씬 빠르게 정찰조와 합류할 수도 있을 것이고, 훨씬 빠르게 이 지긋지긋한, 대체 뭐 성과가 있긴 한건지 의문인 이 부질없는 짓을 마치고 돌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뭐, 그래도 경고는 해 줘야겠지.
“아무튼, 조심해야 해요. 칙들의 발자국이 계속 콘스탄챠 양네의 흔적을 따라가네요. 놈들이 그녀들을 쫓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어떻게 따라가는 거지? 놈들 추적능력이 그렇게 뛰어난가?”
21번 스쿼드가 만들어진 이후로 리리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노움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도, 그 동안 리리스가 다른 분대원들과 약간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렇게 인간관계에 눈치가 좋은 편이 아닌 노움도 알았다. 그래도 리리스는 일단 다른 분대원들을 대할 때는 늘 예의바르고 싹싹한 태도로 대했고, 또 ‘거리를 둔다’는 것이 꼭 상대방을 ‘싫어한다’ 거나 ‘증오한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기에 노움은 그냥 낯을 가리는 바이오로이드인가보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거리를 둔다 해도 예의바르게 남을 대하는데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이렇게 툴툴거리는 것을 보면 또 그것과는 약간 다른 듯했다. 어쩌면, 체력이 떨어지고 피곤하면 본 성격이 나오는 건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며 노움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이게 이 여자의 솔직한 모습인 건가. 까칠하긴 해도 말이다.
“노움 양, 웃을 때가 아니에요. 이대로 생각없이 쫄래쫄래 갔다간 또 아까 전 같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요”
한 번 매복한 놈들이 두 번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래서 셋은 최대한 노출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최대한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동선을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러면 상당히 동선이 꼬이고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뭐, 가보죠. 이대로 가다간 철충이 먼저 콘스탄챠 양네를 만날 것 같지만요”
“음, 둘의 전투능력도 꽤 되지 않습니까?”
리리스는 피식 웃었다. 반쯤 비웃음이었지만 그녀는 어쨌든 남들 앞에서는 예의바른 메이드 바이오로이드이고 그래서 내색하진 않았다.
“특정 상황에서 버틸 순 있겠죠. 예를 들어 좁은 통로에서 칙들을 상대한다든지. 하지만 인간 명령도 없는 메이드 바이오로이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리폰 양이야 날아서 도망가면 된다지만...가만, 지하니까 그분도 도망 못 가는군요. 대체 왜 저기로 내려간 거지?”
‘인간님들의 명령 없이’ 그 철충들과 그 정도까지 싸워댄 블랙 리리스를 생각하자 노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어서 합류해야겠군요. 움직입시다.”
“철충들보다 더 빠를 순 없을 거 같지만요.”
리리스는 조소하듯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말소리를 내서 들킬 위험을 늘려서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일단 동선이 정해지자 셋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바스락 바스락. 셋이 풀과 흙을 밟으며 지나가자 길게 자란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옛 인간들의 도시가 부서져 무너진 잔해 위로 대자연이 생동했다. 깨진 포석들 사이로 풀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새와 동물들이 말없이 걸어가는 그녀들을 엿본다. 가끔 그녀들은 날짐승의 울음소리나 후다닥 튀어나오는 동물들 - 고라니, 삵, 심지어 사슴도 있었다 - 의 기척에 놀라 움찔하기도 했다. 이것이, 인간 없는 세상의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졸졸졸 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철충만 없다면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 인간이 없는 게 지구에게는 더 좋았던 걸까. 그러나 셋에게 지금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저...리리스 씨.”
“뭐죠? 작게 말해요. 혹시 들킬지도 모르니.”
“아까...저희 구해주신 거 감사합니다”
“흥. 딱히 감사받을려고 한 행동은 아니에요”
작게 속삭인 레프리콘에게 리리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도..정말 감사합니다. 전 사실 제조된 지 얼마 안 된 신참이거든요. 스틸라인 전우들과 통성명도 제대로 못 하고 임무에 나왔어요. 노움 병장님만이 유일하게 제 사수로 따라와 주셨습니다. 리리스 씨 아니면 소대원들도 모르고 죽을 뻔했네요.”
리리스에게는 별로 상관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 리리스 씨도 자매기들이 있겠지요. 보고 싶으실 수도 있겠네요”
“당연히 보고 싶죠!”
갑자기 리리스에게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리리스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얘기하자 두 스틸라인 병사는 물론이요 그녀 본인도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얼굴을 붉히고 어물어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녀는, 잠시 후 위험요인이 없음을 깨닫자 다시 손을 뗐다.
“크흠, 흠, 어, 우리 자매도 요번에 새로 애가 생겼어요. 하치코라고, 귀여운 아이에요”
“........”
“정말이지, 자기 딴에는 잘해보겠다고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늘 말썽이에요. 페로가 늘 고생이죠. 제가 없는 동안 그 아이가 좀 더 수고하겠네요. 얼른 돌아가서 내가 봐줘야지 원....”
두 스틸라인 병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했던 일면이로군. 리리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치 말썽꾸러기 동생들을 돌보면서도 기뻐하는 큰언니 같은 미소라니. 노움은 욱씬거리는 다리와 팔의 통증만 아니라면 피식 웃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이 리리스란 바이오로이드는 자기 자매들에겐 또 다정하게 대해주는 언니인 거로군. 그런 리리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어쩐지 싫지 않았다.
“자매들이랑 사이 좋으신가 봅니다?”
노움이 슬쩍 떠 보자, 평소라면 그걸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을 리리스의 얼굴에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
“제 동생들 말이죠? 이 블랙 리리스의 옆에 설 자격이 있는 최고의 아이들이죠. 그 어떤 바이오로이드를 데려와도 견줄 수 있는 애들이에요. 가끔 동물 유전자가 말썽이긴 하지만, 제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동생들이죠.”
그 블랙 리리스가 -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거만함을 가진 -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동생들인 모양이다. 위험도 잊고 페로가 우유를 흘리니 어쨌니를 주절주절 떠드는 걸 보면 더더욱 그래 보였다. 비틀거리던 노움이 바작, 하고 나뭇가지를 랍자 그제야 리리스는 자기가 너무 떠들어 댔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 크흠, 너무 떠들었군요. 계속 나아갑....?”
리리스의 예민한 귀에 뭔가가 들렸다.
“이런, 씨ㅂ...아, 아니. 물러서요. 은폐하세요!”
셋은 망가진 고철더미 뒤로 돌아가 웅크렸다.
“뭐...뭡니까?”
“총소리요. 기총 소리도 들리는군요. 우리보다 약간 아래 지점에서”
“그럼....”
“예, 역시 놈들이 우리보다 빨랐나 보네요.”
리리스의 머리가 회전했다. 잠입과 암살에 특화된 그녀의 공간지각력은 은은히 들려오는 총소리, 아마도 철충의 것일 육중한 발소리, 그리고 그녀들이 지금 서 있는 시설물의 위치를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우리는 이 시설의 서쪽 통로로 들어왔죠. 그쪽이 제일 은엄폐하면서 움직이기 쉬웠으니까. 그런데 이 시설은 동쪽 통로도 하나 있어요. 거기서 소리가 들려와요. 이 아래에서.”
“도와야 합니다!”
“가만 있어 봐요. 부상까지 입어놓고선 뭘 어쩌려고요?”
“하지만.....”
“쉿”
리리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스틸라인은 다들 이런 식인가? 언제나 몸보다 생각이 앞서서는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자1살이나 다름없는 일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그 대장에 그 부하들이라더니. 리리스는 자기가 직접 멸망 전 선배들처럼 마리들을 암살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코어의 기록으로 대충 그들의 행동을 학습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록 속에서 리리스와 맞선 마리들은, 언제나 앞장서서 스스로를 희생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부하들을 개죽음으로 내모는 건 명예롭지 못하다나. 멍청이들. 바보들.
쿵쿵쿵, 하고 땅이 울렸다. 리리스가 입에 손가락을 대었다. 숨죽인 그녀들의 옆으로, 자기들 딴에는 급한지 그녀들이 숨어 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나이트 칙들이 내달려 내려갔다.
“문제는, 봐요, 이 놈들 지금 사방에서 들어오고 있어요. 콘스탄챠 양네 지금 포위되었다고요”
상대적으로 위층에 있는 입장이 되자 노움과 레프리콘의 눈에도 이제 철충들이 몰려드는 모습, 정확히는 부서진 건물들의 그늘 속에서 놈들의 안광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패턴이 보였다. 놈들은, 이 시설물의 모든 통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레프리콘과 노움과 리리스가 서 있는 아래를 향해, 아마도 콘스탄챠 일행이 있을 곳으로.
“지금 콘스탄챠 양네는 동쪽 통로를 뚫고 나가려는 모양이네요. 음.....”
솔직히 리리스의 상황판단 상으로, 지금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는, 그냥 콘스탄챠네를 버려두고 도주하는 것이었다. 저 아래층에서 콘스탄챠와 그리폰은 좁은 통로에서 - 아마, 동쪽으로 이어진 통로 - 칙들을 상대하고 있을 터다. 좁은 통로에서 싸우티 버티기야 하겠지만, 포위된 상태에서 그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러게 대체 왜 저기 들어가서 스스로 고립된 거지? 자1살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어쩐지, 콘스탄챠 특유의 그 구닥다리 총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동쪽 통로 출구 쪽으로 나아가는 걸 보면 생각보다 정말 잘 싸우는 모양이긴 한데...
“죽음이 코앞에 다다르면 바이오로이드도 미치나 보군요. 철충 상대로 저렇게 적극적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방금 서쪽 통로로 들어간 나이트 칙들은 그대로 쭉 가면 그리폰과 콘스탄챠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된다. 앞과 뒤 양 쪽에서 공격받으면 어찌 될지는 동서고금의 전쟁사에서도 익히 드러난 바, 그녀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리리스는 개죽음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읏차, 하고 그녀는 일어났다.
“자, 어쩌실거에요? 솔직히 말할까요? 저라면 그냥 못 본 척 하고 돌아가겠어요. 저기 가면, 죽어요.”
“하지만...하지만...”
“레프리콘 양 아직 부대원들 얼굴도 다 못 봤다며요. 여기서 그냥 죽게요?”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은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노움이 입을 열자 두 바이오로이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노움은 잔잔하게 웃고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가 아니죠.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
“리리스 씨, 본부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레프리콘, 리리스 씨를 따라가세요. 본부에서 중대원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병장님은요?”
노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뭔가 하늘에서 유성이라도 떨어졌는지 구멍이 뻥 뚫린 건물의 천장으로부터 보이는 하늘을.
“어차피 난 부상자라서 못 뜁니다. 여기서 도망가도 금방 따라잡힐 겁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시간을 벌 수 있...”
“그리고.”
노움은 리리스의 말을 잘랐다.
“아까 우릴 지나간 칙들 보셨죠? 그대로 가다간 콘스탄챠 씨네의 후방을 공격할 겁니다. 누군가는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발포 수류탄을 들어 보였다.
“이거면 그녀들에게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동쪽 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을 때까지요.”
리리스는 팔짱을 끼고 크게 관심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은 죽어요, 그럼.”
“원래 우린 그러라고 만들어졌습니다”
“안 말릴 거에요. 노움 양이 제 자매도 아니고. 자1살한다는 걸 굳이 막을 이유는 없습니다”
노움은 웃었다.
“네. 지난 시간 동안 즐거웠습니다. 21번 분대에서 지내기가 편하지는 않으셨죠.”
당연하다. 야외에서의 취침,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철충, 벌레들,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보급품....즐거울 리가 없다. 그 지긋지긋한 생활이 여기서 끝나려 한다, 리리스의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별 도움은 안 되었던 이 멍청한 바이오로이들과도 이제 안녕을 고하려 한다. 그런데...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가.
“네, 안 편했어요. 솔직히 지옥같았지. 그리고 안 말릴 거라고요”
“미안합니다. 저희가 좀 더 유능한 바이오로이드였으면 좋았을 텐데.”
“진짜로 안 말려요.”
“그럼, 더 늦어지기 전에 저는 가보겠습니다.”
노움은 다리의 부상 때문에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앵무새처럼, 어쩐지 안 말린다는 말만 반복하던 리리스는 그 모습에 그만 욱하고 말았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돌아서면 됨에도 불구하고.
“진짜 그 한심한 상태로 간다고요? 저 정말로 상관 안 해요?”
노움은 어쩐지 계속, 그녀답지 않게 떽떽거리는 리리스에게 한번 웃어주곤, 말없이 눈을 그렁거리는 레프리콘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레프리콘, 이거나 가져가줘요”
“뭐..뭡니까 병장님”
“내 군번줄요”
그건, 그걸 건네주는 의미를 아는 레프리콘의 울음을 정말로 터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병장의 다리에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오열했다.
“병장님, 병장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흑, 저 떄문에...”
“누구나 처음엔 실수해요. 213번은 그게 좀 격했을 뿐이고.”
레프리콘은 노움을 꽉 껴안았다.
“가지 마십쇼, 병장님, 부사수 냅두고 사수가 어딜 갑니까, 저, 저, 전 아직, 신참이란 말입니다!”
“원래 사수는 부사수가 가면 안 될 자리에 가는 겁니다.”
노움은 레프리콘의 팔을 가만히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저 마실 다녀온다는 듯 손을 쓱 들고 말했다.
“21번 분대는 이걸로 해체로군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또 하나의 분대가 허망하게 사라진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라고 노움은 재차 확인했다. 수많은, 결말이 좋지 못했던 다른 분대들과 똑같이, 21번 분대도 그저 오늘 오지게 운이 안 좋을 뿐이고, 또한 그러한 다른 분대들과 똑같이, 언젠가 맞이할 결말이 그저 오늘 찾아왔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그저 운이 좀 나쁠 뿐인 평범한 하루다.
“통령님이랑 마리 대장님에게 잘 좀 보고해주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움은 칙들이 들어간 통로를 따라 사라져갔다.
...
노움이 사라진 저편을 레프리콘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손에서 짤랑, 하는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노움이 건네 준 군번줄이 자기 손에 들려 있었다. 그걸 보니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진짜 바보 멍청이들.”
옆에서 리리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아예 그동안, 그 긴 시간동안 다른 분대원들과 지내면서 지켜 온 그 예의바른 포커페이스를 지킬 생각일랑 깡그리 잊어버린 듯했다.
“아오! 진짜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 몰라! 레프리콘 양, 가죠!”
“병장님은 못 따라갑니다”
“네?”
“다리 다치셨잖습니까. 그 걸음으론 칙들 못 앞지릅니다.”
“....그러네요. 그런데 내려갔어? 진짜 바보 아냐?”
“제가 가야 합니다”
“네, 누군가가 그 여자 부축해줘야.....네? 아니 당신까지 왜 이래요? 진짜 다들 미쳤어요?”
“제가, 제가 먼저 가서 칙의 시선을 끌어줘야 합니다. 그러면 병장님이 우회해서 수류탄으로 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리리스는 정말로, 진심으로 빡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스틸라인은 뭐 개죽음에 취미 있어요? 인간 명령 없이 우린 철충 상대 못 해요!”
그 강력한 블랙 리리스조차도 인간의 명령 없이는 인간의 뇌파를 뿜는 철충을 공격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핀다. 그걸 알면서도 내려간다니. 그러나 레프리콘은 일어났다.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만난 부대원이 없다는 건, 아직 아쉬울 정도로 친한 전우가 없다는 의미도 되잖습니까.”
“......”
“하지만 병장님은 다르죠.”
“......”
“살려낸 다음에, 중대장님께 보고할 겁니다. 부사수 버려두고 혼자만 가버렸다고. 중징계 먹일 겁니다”
“아아 몰라! 이만큼 말렸으면 난 할 만큼 했어요! 그렇게 뒈지고 싶으면 뒈지라지, 씨1발!”
안 말린다고 수없이 말한 주제에 리리스는 발을 동동 구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짜증을 부렸다. 남 앞에서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패악한 거친 말까지 내뱉으면서.
그녀가 다른 21번 분대원들에게 딱히 유대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했다.
참 짜증나는 분대원들이었다. 콘스탄챠 양이 해주는 음식은, 야지에서 해먹는 밥이 맛없다는 걸 감안해도 솔직히 정말 맛없었다. 방금 자기 사수를 따라 저편으로 달려나간 저 신참 레프리콘은 늘상 얼타서 실수하는 게 일상이었고, 그리폰은 키도 작은 게 언제나 틱틱거리고 까칠했다. 그나마 노움이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이라 콘스탄챠와 함께 분대가 유지될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녀도 딱히 유능하다고는(리리스의 기준에서)말하긴 힘들었다. 그래, 이 여자들이랑 함께, 그 오랜 시간 동안, 라비아타가 내린 그 뜬구름 잡는 명령 하나 때문에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말로 지겨웠다. 그동안 같이 구른 게 뭐가 재밌었다고. 그동안 같이 버려진 인간들의 건물들을 뒤지던 게 뭐가 즐거웠다고. 그동안 같이 철충들과 숨바꼭질 하던 게 뭐가 신났다고. 그놈의, 그놈의 인간이 뭐라고, 만나 본 적도 없는 인간이란 게 대체 뭐라고.
“아아아 진짜!!!!”
사라져 간 레프리콘의 뒤에서, 혼자 남겨진 리리스는 늘 침착한 그녀답지 않게 짜증을 내며 고철더미를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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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죠 | 20.10.31 11: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