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이것이 시크릿 네트워크다!! -절망편-
시간은 흘러갔다. 장소는 돌고 돌아, 사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의 한쪽 안에는 나이트 앤젤이 이전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당했다. 또 한 번, 꼬인 두 다리와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은 일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준비와 태세를 마치고 앞으로 시작될 전쟁을 기다리는 이처럼.
나이트 앤젤은 그런 기세를 보이며, 메이의 태블릿을 천천히 탐구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수많은 내용을 천천히 눈과 머릿속으로 녹여나갔다.
‘(공지)사령관님한테 술 먹이는 방법 공유하지 마세요!! - 전파력이 부족하당(관리자)’
‘둠 브링어 싸움 났나요? 메이 대장님이 나이트 앤젤 대령님 찾으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계시는데;; 무슨 일인지 아는 자매? (8) - 하얀 애옹이’
‘스틸라인 온라인 튕겼는데, 혹시 서버 터진 건가요? (2) - 말 잘듣는 브라우니’
‘(오르카 미트 파이 프로젝트 24)하치코가 만든 코코넛 미트 파이 레시피 공유해요!! (5) - 하치코 아닌데용’
‘납작 대령님 사건 치신 검까? 아까부터 메이 대장님때매 시끄럽지 말입니다. (4)- zi존 2056’
‘스틸라인 온라인 하면, 친구가 생기나요…? (1) - 고스트’
‘제발, 오르카호 주위에서는 레아 님 한테 아줌마라고 하지 마세요!! (15) - 전파력이 부족하당(관리자)’
‘충격적이거나, 이슈가 될만한 이야기 제보받습니다. (7) - 그런데 말입니다”
‘(24일차) AGS는 사랑입니다. (4) - 통이 돌아가면 통돌이’
‘짱박히기 좋은 곳은… 여기 말고 이프리트 병장한테… (3) - 전.역.기.원.’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계속해서 태블릿의 화면을 쓸어내렸다. 이따금 한, 두 번 두들겨 내용을 읽고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수많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녀를 반기듯 짧은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올라왔다.
누군가는 잡담을, 누군가는 소소한 팁과 정보를. 나이트 앤젤은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정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점과 점이 연결되어, 계획의 일부가 되어갔고, 그녀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불길한 기운을 뿜었다.
“흐음… 이건, 좀 쓸만할지도....”
나이트 앤젤은 지적인 참모는 아니었지만, 모략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가락 아래에는 지금도 수많은 바이오로이드가 자진해서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것들은 익명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백의 플랑크톤을 빨아들이는 고래처럼. 그녀는 그 작은 태블릿을 통해 주위에 널부러진 선물상자를 하나씩 열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달콤한 간식만을 골라내어 음미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간식 시간을 방해하는 존재. 그와 동시에 그녀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존재가 나이트 앤젤의 앞에 나타났다.
“... 어머, 우리 납작이. 여.기.있.었.네.”
“어머, 대장. 드디어 찾으셨네요.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자신의 인사를 대강대강 받아치는 나이트 앤젤을 노려다 보는 메이. 그런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다크서클이 볼과 함께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나이트 앤젤은 그런 그녀에게 힐끗. 한 번의 시선을 주고는 다시 태연하게 태블릿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일단 앉으시죠. 대장한테 할 얘기가 많아서요.”
“나도 할 얘기가 많아. 흥. 어떤 구차한 변명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그녀의 그런 당당한 태도에 약간 불만감이 든 메이였지만, 뒤따라오는 피곤이 그것을 잠시 억눌렀다. 현재, 그녀의 목표는 자신의 태블릿이었기에. 필요 이상의 행동은 줄이고, 가슴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나중으로 미루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하나씩 천천히 옮겨갔다. 기름지고 떡진 붉은 양갈래 머리는 그녀의 가슴속을 대변하듯 이리저리 흔들렸고, 조금의 휴식으로 풀리지 않은 피로는 그녀의 혼잡한 머리를 어지럽게까지 만들었다.
이전, 칸이 앉았던 자리에, 이번에는 메이가 의자를 끌고는 털썩 앉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쓰러지듯 등을 기댄채, 팔짱과 함께 다리를 크게 꼬았다.
엉망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듯, 메이는 평소와 같은 자세를 잡으며 당당함을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히려 그녀의 변화를 더 부각할 뿐이었다. 상대는 그녀의 부하, 그것도 최측근이었다. 그런 그녀가 대장의 변화를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나이트 앤젤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이는 나이트 앤젤을 상대로 자신의 용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브라우니가 나한테 와서 그러더라고, 네가 ‘부탁’한 내용을 전하러 왔다고 말이야.”
“거래를 했죠. 계급도, 성능도 아닌. 사이좋은 오르카의 자매들끼리의 정당한 거래. 그래서 대장한테 제 위치를 전한 거고요.”
“그래, 말을 전하고는 할 일이 있다고 사색이 돼서 뛰어간 것만 빼면 말이야. 내 말에는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뛰어가기 바쁘더라고.”
“예, 뭐. 브라우니랑 거래한 게 그거 하나만은 아니었으니깐요.”
“... 보나 마나, 또 이상한 걸 빌미로 협박이나 했겠지. 안 그래?”
나이트 앤젤은 침묵을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손과 눈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메이에게는 그런 행동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훔쳐 간 물건과 함께, 자신을 면전에 두고도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에 억눌리던 감정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일그러진 표정이 보이지 않게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 일단, 가져간 거부터 돌려주실까. 사유는 나중에 듣도록 할 테니까 말이야.”
“아, 이건 조금 이따가 돌려드릴게요. 그것 말고 다른 건요? 제가 조금 바빠서요.”
“그래, 하지만 이걸로 용서해줄... 엥?”
나이트 앤젤의 대답이 주먹이 날아오듯 메이를 타격했다. 메이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몇 초간 지었지만, 당혹감을 떨쳐내고는 나이트 앤젤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야! 그거 내 방에서 가져간 거잖아!! 빨리 돌려달라고!!”
“예, 예. 돌려드릴 거에요. 단지 지금이 아닐 뿐이죠.”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찢어지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휴게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메이의 그 짧은 팔이 테이블 위를 지나 나이트 앤젤의 앞까지 날아왔다.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흔드는 그 손을. 나이트 앤젤은 그저 상체만을 움직이며 요리조리 피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태블릿의 화면을 쳐다봤다. 아이의 사탕을 뺏어 든 악당처럼. 한 사람은 계속해서 의미 없는 허우적을 보였고, 다른 이는 여유롭게 피하며 무시할 뿐이었다.
“이게! 상관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더니!! 명령 불복종 까지!! 이건 군법회의 감이야!! 평생 전쟁 전 전투식량만 먹게 해주겠어!!”
“... 그건 그냥 못 넘어가겠는데요. 뭐, 이 태블릿은 대장 방에서 가져온 건 맞습니다만…”
자신을 향해 또 한 번 소리치는 메이의 목소리를 들은 나이트 앤젤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관을 적당히 상대하던 그 허무한 눈빛은, 눈가에 들어가는 힘과 함께 노려보듯 날카롭게 변하여 태블릿을 응시했다.
“근데, 대장 껀 아니잖아요?”
두 번째 주먹이 날아갔다. 갑자기 변한 나이트 앤젤의 말투와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 메이는 방금까지 활발했던 움직임이 멈췄다. 무엇인가 일이 잘못됬음을 인지한 메이는 잠시 자세를 추스르며 한 번의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 그게 무슨 소리일까나…?”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당당하다고 해야 할까요. 대장도 생각보다 담이 크시네요”
“아,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혹시, 몸이 안 좋으면 내가 닥터한테 데려다줄…”
“쭉쭉빵빵 나앤.”
나이트 앤젤의 세 번째 주먹이 메이의 가슴 한가운데를 타격했다. 이번에는 상당히 깊게 파고든 듯 했다. 그리고 짧은 그 두 마디에 메이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메이를 나이트 앤젤은 들고 있던 태블릿 너머로 슬쩍 엿보았다. 그때부터였다. 나이트 앤젤의 눈가에서 날카로움은 빠졌지만, 메이는 자신을 향하는 그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무언가 약점을 잡힌 듯. 조금 전까지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방 속을 휘감고 있던 뜨거운 분위기는 그 열기를 잃어갔다. 휴게실은 두 사람의 취조실이 되었고, 상대를 심문할 공격권은 나이트 앤젤에게 있었다.
“... 말씀해보시죠. 대장이 한 행동들에 대해서 변명할 시간 정도는 드릴게요.”
“나,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야. 나이트 앤젤도 참. 설마, 그런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추궁하는 이와 얼버무리는 이. 나이트 앤젤은 자신이 준 한 번의 기회에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메이를 향해 계속해서 공격에 나섰다.
“... 커다란 가슴은 스텔스를 방해할 뿐이다. 사령관은 메이 대장을 좋아한다. 단지 쑥스러워서 표현을 잘 못 하는 것뿐이다. 만약, 사령관과 손잡은 거 다음으로 진도가 안 나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타 등등. 더 불러드릴까요?”
“으읔… 아, 아냐… 아니라고...”
커다란 화살표가 메이의 가슴을 찔러댔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나이트 앤젤은 잠시 동태를 지켜보았지만, 변함없는 메이의 행동에 마지막 한 방을 준비했다.
“추측해볼까요? 첫 번째로, 스틸라인 온라인과 시크릿 네트워크를 이용해야겠지만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메이는 몸을 한번 가볍게 움찔거렸다. 나이트 앤젤은 그것이 정곡을 찔러서 나타나는 신호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메이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 아직 부족한가요? 그럼, 두 번째. 만약에 있을 분실 시에 책임을 저한테 넘기고 싶었다.”
“노코멘트야…”
“계속 그렇게 나오시면 좋을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아, 제가 알아낸 사실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생각이 바뀌실까요. 시크릿 네트워크에 쓴 글들 말인데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익명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마치 제가 쓴 글 같이 보이려 한 점들… 몇 부분을 빼면 그럴싸하더라고요.”
“나, 난, 내가 썼다고 안 했는데 말이야… 혼자 착각하는 것도 정도껏 하지 그, 그래?”
자세는 태연한 듯 애썼으나, 메이의 표정과 말은 그러지 못했다. 더듬거리는 입술, 붉어진 얼굴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땀. 그것들을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 그렇다면, 사령관님한테 보고해야겠네요. 어쩌면, 철충이나 정체불명의 AGS가 저희 네트워크에 잠입해 있는 걸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잠깐만!! 거, 거기서 갑자기 사령관은 왜 나오는데!?”
“누가 봐도 수상하니깐요? 대장 방에서 나온 기기에 등록된 계정이 작성한 글과 검색기록이 있는데도 그걸 쓴 사람이 없다? 대장은 이상하게 생각 안 하나요?”
“하, 하지만 그건…”
몇 마디면 된다. 나이트 앤젤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벼랑 끝에 내몰린 메이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나이트 앤젤은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을 메이 앞에서 가볍게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읔…”
“대답만 잘하면, 정상 참작으로 처리해 드릴게요.”
“... 꺼야.”
메이는 약간의 눈물을 찔끔거리며, 끅끅거렸다. 그러면서도 당장 터져 나올 듯 한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잘 안 들리는데요? 확실하게 말해주시겠어요?”
“... 아, 정말!! 그래! 내꺼다!! 그 태블릿도 내꺼고, 그 계정도 내가 만든 거야!!”
“후후… 드디어 인정하셨네요.”
“그래!! 너 잘났다!! 이제 빨리 돌려줘!!”
“아뇨, 이건 증거물이라서요. 일단 대장은 계속해서 조사를 받아야죠.”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넋이 나갈 것 같은 허망한 표정을 짓는 메이를 앞에 두고, 나이트 앤젤은 태블릿을 한 번 두드렸다. 그러자, 휴게실의 문이 열리며 의외의 인물이 들어섰다.
“정말, 기다리다 쓰러지는 줄 알았다고요. 델리케이트한 저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래 보여도, 생각보다 빨리 처리한 거에요. 대장 성격 생각하면 이정도로 끝난 것도 감지덕지죠.”
“흐흠, 뭐 그렇긴 하겠죠. 아, 봉쥬르-. 날씨가 좋은 날이에요. 그렇죠? 메이 대장.”
“오, 오드리…?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메이를 향해 웃음을 보이며 들어선 이는 오드리라 불리는 바이오로이드였다. 하얀 단발과 초록빛이 도는 그 눈동자는 마치, 재밌는 사건의 냄새를 맡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 보였다.
“아, 저는 오늘 하루 데일리 시티가드랍니다. 나쁜 크리미널이 있다기에, 연행하러 왔죠. 그것도 우리 프레셔스한 모델의 부탁을 받아서요.”
“... 그런 거에요. 그냥 순순히 끌려가는 게 좋을걸요. 섭외한다고 공 꽤나 썼거든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
오드리를 향한 메이의 시선이 나이트 앤젤에게로 돌아갔다. 메이의 그 두 눈동자는 현재 자신을 둘러싸며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하나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이트 앤젤은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 또한 계획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 글쎄요. 나중에 보면 다 알아차릴 거예요. 아, 그리고 아까 한 말은 녹음해 놨어요. 괜한 짓은 하지 마시고요.”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밌게 나눴길래, 메이 대장의 동글동글하고 큐트한 얼굴이 저렇게 와인 같은 레드빛이 도는 걸까요? 저도, 조금은 궁금한데요?”
“그건 계약 범위 밖이에요. 오드리 씨는 부탁드린 것만 해주세요.”
“뭐, 노코멘트 하겠다면 어쩔 수 없죠. 저로서는 나이트 앤젤 양이 스스로 나선 준 것만으로도 큰 퍼포먼스이니 그거 하나로 만족하죠, 뭐. 그럼, 메이 대장. 어서 출발할까요?”
말을 끝낸 오드리는 메이를 가볍게 의자에 들어내었다. 갑자기 일어나는 상황의 변화에 메이는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 보이던 날카로운 판단력은 무용지물이 되어 계속해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어, 어? 뭐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서로 가서 남은 잘못을 진술하셔야죠. 그럼, 천사 양. 저희는 이만.”
“오드리, 잠깐만. 아직 나는…!!”
남은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메이는 오드리에게 이끌려 휴게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이트 앤젤은 잠시 기지개를 켜며, 팔다리를 쭉 뻗었다.
천장을 잠시 올려다본 그녀는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시간을 맞춰야 했다. 해가 지기까지. 시간은 아직 여유가 남아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서둘러야 했다.
chapter 5. 드래곤 슬레이어지만, 수영이 하고싶어.
바닷바람과 따가운 햇볕, 야자수 잎들이 스치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마치 눈이 내린 듯 햇빛을 받아 빛나는 백사장. 원래라면 자신이 지금쯤 만끽하고 있어야 할 것들. 하지만 나중으로 밀어둔 그런 것들.
나이트 앤젤은 오르카호를 벗어나 조금을 걸었다. 당장 저 수많고 찬란한 자연과 하나 되고 싶은 욕망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계획이 우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한 번 훑어 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자, 또다시 주위 풍경을 즐기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세 명의 바이오로이드와 한 마리의 동물을 만났다.
“지, 짐은 더는 못, 못 버티는니라!!”
“얌마! 네가 수영하고 싶다며!!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 수영 하나를 못 하냐?”
“짐의 숙명은 여행자들을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느니라!!”
“자자, 두 사람 다 진정하고. LRL, 다시 천천히 해보자.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평상시 복장이 아닌, 전투 슈트를 입고 있는 세 명의 바이오로이드. 그리고 그중 한 명. 작은 키의 안대를 쓴 바이오로이드는 LRL이라 불리며 퍼블릭 서번트 소속이었음에도, 스틸라인의 전투 슈트를 입고 흠뻑 젖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널브러진 바이오로이드를 핥고있던 개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이를 알아차리고는 컹컹 짖어댔다.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의 이목이 개가 짖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어머, 들켜버렸네요.”
“안녕하세요. 나이트 앤젤 씨. 산책 중이셨나요?”
평소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음에도, 여전히 포근한 인상과 말꼬리 같은 기다란 갈색 머리칼을 드리운 바이로오로이드. 콘스탄챠가 나이트 앤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녀의 인사를 나이트 앤젤은 가볍게 받아들였다.
“아뇨, 사령관님을 찾고 있었는데 말이죠… 세 사람은 수영 훈련 중이었나요? 수영 대회도 취소됐는데 말인가요?”
“저기 있는 땅꼬마가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써서 말이야. 정작 본인은 벌써 질려 하는 거 같네. 정말, 근성 없는 꼬맹이라니까.”
옆에서 노란빛의 단발을 보이며 그리폰이라 불리는 또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걸어와 대화에 참여했다. 키 작은 바이오로이드를 꾸중하는 그녀를 향해, 그 작은 존재가 화를 냈다.
“무, 무슨!! 짐은 영겁의 시간을 버텨낸 용사이니라!! 지금은 단지,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아, 예. 예. 그럼 충분히 쉬었네. 보리, 쟤 빨리 다시 물에다 집어넣어.”
그리폰을 말을 들은 개가 또 한 번 짖었다. 그리고는 LRL을 향해 해맑게 뛰어갔다. 하지만 자신을 향하는 그 짐승의 모습을 본 LRL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폰! 보리한테 그런 식의 명령은 내리지 말라고 했지!”
“뭐 어때. 어차피 보리 아니었음, 내가 들어서 내다 던져버렸을 텐데.”
나이트 앤젤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속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장난도 함께, 화도 함께. 노는 것도 함께였다. 귀찮은 듯이 굴어도, 그들은 서로를 보듬었다. 나이트 앤젤은 내심 그들이 부러웠다.
“아, 죄송해요. 사령관님을 찾으신다고 하셨죠? 아마, 지금이라면 쉼터에 있으실 거예요.”
“쉼터…?”
“뭐야. 나이트 앤젤은 몰랐나 보네. 이번에 사령관이 구한 마을 사람들이 고맙다고 만들어준 건데. 커다란 나무 밑에 수영장이 있대. 거기서 쉬고 있을 거야. 아마,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하고 말이야.”
“... 수영장이라… 근데, LRL한테 수영 훈련을 시킬 거면 바다보다는 수영장이 안전하지 않나?”
“저 바보, 사령관한테 못난 모습은 보이기 싫어서 극구 반대하더라고. 나야 어디서 하든 상관없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말이야.”
“... 푸헠!! 살려주거라!! 짐의 다리를 옳아매는 마비의 주문이!!”
“저, 바보! 얕은 데서 하라니깐, 그 깊은데 까지는 왜 또 간거야!?”
그들의 조금 멀리서, 바닷물을 이리저리 흩날리며 퍼덕이는 LRL를 본 다른 이들은 순간 놀랐다. 그리고 보리라는 개와 그리폰은 빠르게 물속으로 달려들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LRL을 구하기 위해 힘껏 물을 박차며 나아갔다.
“뭐, 저 정도면 응급요원으로는 충분하겠네요.”
“아하하… 저래 보여도, 그리폰은 LRL을 잘 챙겨준답니다. 아, 혹시 쉼터로 가실 생각이라면 간략하게 위치를 설명해 드릴까요?”
“부탁드릴게요.”
콘스탄챠의 설명을 들은 나이트 앤젤. 대략적인 위치를 이해한 그녀는 반쯤 기절한 LRL를 데리고 올라오는 그리폰과 일행에게 손짓으로 인사하고는 야자수가 보이는 수풀 사이로 들어섰다.
“... 저 세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둘까.”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며, 나이트 앤젤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chapter 6. 하극상.
“여기 계셨네요.”
“... 응?”
오르카호의 유일한 남자는, 파라솔 밑에 누워 햇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의 연붉은 눈과 마주쳤다.
“나이트 앤젤… 이네. 날 찾았어?”
“그렇다면, 그런 거죠.”
남자는 누워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파란색의 하와이안 셔츠와 하얀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까지.
인류 명말 이전이었다면, 누구나 평범한 휴식을 즐기는 일반인으로 보았을 그 모습은. 지금은 유일한 남자가 휴식을 취하는 유일한 모습이 되었다.
남자는 머리맡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접어 셔츠의 가슴팍 안에 안경다리를 걸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찾아온 이에게 용건을 물었다.
“웬일로 나이트 앤젤이 먼저 나한테 왔을까? 데이트 신청인가?”
“아뇨, 협박하러 왔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나이트 앤젤의 대답은 남자를 놀라게 했다.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협박이라는 단어는 그도 처음 듣는 표현법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그녀는 그런 말을 시시한 농담으로 하는 분류는 아니었다.
“... 내가 잘못 들었나?”
“아뇨, 잘 들으셨을 거에요. 저는 사령관님을 협박하러 왔어요.”
남자는 자신을 협박한다는 그 말에,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자 옆에 있던 작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음료가 담긴 유리컵을 들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붉은 머리의 바이오로이드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달각거리는 얼음 소리. 연푸른빛이 도는 시원한 음료에 꽂혀있는 빨대를 남자는 가볍게 물어 빨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돌았다. 그들의 사이에 울려 퍼지는 것은 푸르고 둥근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웃음소리와 물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남자가 음료를 마시는 소리뿐이었다.
“... 그러니깐, 날 협박하겠다고?”
남자는 한 모금 정도의 음료를 마시고 남은 유리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수영장 향했다.
“예,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될까요?”
“... 아니, 잠시만 기다려줘. 일단 자리를 옮길까.”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서로의 안부를 손짓으로 확인한 뒤, 남자는 일어나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나이트 앤젤이 따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쉼터의 수영장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한 집 이었다. 남자가 앞서서 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나이트 앤젤이 들어오자, 남자는 문을 닫고, 문에 달려있던 커텐을 쳤다.
그리고 남자는 뒤돌았다. 나이트 앤젤과 사령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래서, 무슨 내용일까…? 최고 명령권자를 협박할 정도면 꽤나 위험한 내용이겠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죠. 제 카드 패를 보일까요? 요즘 함 내에서 유행하는 ‘스틸라인 온라인’과 연관된 거예요.”
“나도 알지. 나도 하고. 같이 하자고 부탁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예, 저는 안 하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이용할 수는 있을 것 같아서요… 일단 제 카드는 이게 다가 아니에요. ‘시크릿 네트워크’도 있죠.”
“... 스틸라인 온라인 게시판에 붙어있는 비밀 게시판 말하는 거지…?”
“그렇죠. 그리고 그곳에 쓰여진 수많은 글 중에, 유독 비범하지 않은 내용의 글을 쓰는 유저가 하나 있더라고요.”
“... 듣고 있어. 계속 말해봐.”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서로 여름의 화답을 나누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때론 친절하고,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병사 같지만, 또 누군가가 보기에는 간부 같은. 저는 그 유저를 특정 인물로 유추했어요. 오르카호에서 대장 개체들이 보면 속 꽤나 썩일 만 한 글을 겁 없이 쓸 수 있고, 또 그 정도 행동력을 가진 존재.”
“브라우니?”
“... 지금 놀리시는 건가요?”
순간, 사령관의 농담에 나이트 앤젤의 진지하던 인상은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하하, 아냐 아냐. 그냥 장난이었어. 그래서, 나이트 앤젤은 그 유저가 나라고 추측하는 거야?”
“거의 확신이죠. 그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시크릿 네트워크는 익명게시판이잖아? 어떻게 그게 나라고 밝혀내려고?”
“저는 안 해요. 대장들이 알아서 하겠죠.”
“그 말의 뜻은…?”
자신의 말에 의아해하는 사령관을 향해, 나이트 앤젤은 협박의 내용을 덧붙였다.
“간단해요. 지휘관 개체들도 시크릿 네트워크에 대한 건 알고있어요. 단지 나서서 말은 안 할 뿐이지. 하지만 거기서 기강을 크게 흐리는 악질적인 사용자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간다면 말이 달라지겠죠.”
“... 메이나 용은 그렇다 쳐도… 다른 셋은 다르겠군.”
“예. 신고내용의 진위를 떠나, 아무리 익명 게시판이라도 글을 올린 기기의 정보 정돈 조회가 가능할 테니까요. 그리고 자진해서 밝히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을 내용이라도. 상위계급, 그것도 지휘관급 개체들의 명령이라면, 유미 씨나 그렘린 씨도 어쩔 수 없겠죠.”
“... 벌써부터 두 사람이 우는 모습이 그려지네… 그리고 너무 위험해. 가능은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난다면 오르카호는 잊을 수 없는 흔적이 남을 텐데?”
“...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면 사령관님을 협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으니까요.”
“밝혀져도 문제, 내가 나서서 막아도 문제. 이건 완전하게 난항이군.”
남자는 고민했다. 나이트 앤젤의 협박 내용은 그럴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소문은 또다시 시크릿 네트워크를 타고 퍼지겠죠. 그 크기를 부풀리고, 없었던 일도 사실이 되고. 자매들끼리, 혼란과 음모가 생겨날 수도 있죠.”
“하지만. 내가 만약, 지금 여기서 너의 발설을 금하는 ‘명령’을 내린다면?”
“...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죠. 거기서부터는 제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령관님은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요.”
“내가 아는 나이트 앤젤도 그 정도로 오르카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사익을 챙길 바이오로이드는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뇨. 할거에요. 할 수 있어요.”
나이트 앤젤의 눈빛을 지켜본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담담하지만, 의지가 굳어 보이는 그 눈빛. 이미 각오를 한 듯한. 물론 좋은 의미의 각오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협박 내용은 그렇다는 거네. 조건은? 승낙하기 전에 조건 먼저 들어도 될까?”
“... 예, 간단해요. 오늘 밤, 사령관님의 시간을 조금만 나눠주세요.”
협박은 새로웠지만, 조건은 생각보다 흔한 것이었다. 오르카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꿈꾸는 그런 흔한 것. 사령관과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평범하지만, 한정돼있는 것.
“오늘은 비번이지만, 침실 순서는 예약이 밀려있는데…”
“거기까지는 안 바래요. 해가 지고, 달이 무르익었을 때.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해요.”
“... 그 정도로 데이트가 하고 싶었나? 나이트 앤젤이 그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정도로 말이야.”
“... 노코멘트 할게요. 승낙하시겠어요?”
남자는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그것이 필수가 아닌 한, 자신은 강제성을 띄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이는 오히려 반겼다.
협박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저 다른 방식의 부탁이었을 뿐. 속셈은 몰랐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왔는가. 그는 그것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협박이라는 말이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상관인 대장을 통해 그녀가 겪고 있을 걱정거리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생각해 더 이상의 문제는 제기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네. 좋아, 어울려줄게. 어차피 한동안은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깐.”
“협조 감사합니다. 시간은 나중에 태블릿으로 보내드릴께요.”
“... 그래, 혹시라도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장 쓰고. 오르카 안에선 수영복이 귀하잖아? 그냥 썩히기에는 나이트 앤젤도 아깝고 말이야.”
“... 지금은 됐어요… 하지만, 수영장은 맘에 드네요. 꽤나요.”
말을 마친 나이트 앤젤은 남자의 옆을 지나쳐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남자는 가슴팍에 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는 건물을 나섰다.
“미소 짓는 거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맘에 들었나 보네.”
나이트 앤젤의 계획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하늘에 보이는 태양을 품은 하늘은, 서서히 노을빛의 주황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3편이 마지막 이야기 입니다.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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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의 책략가 나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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