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스 리제는 여름이 싫다.
단순히 더워서가 아니다. 물론 치마가 길고 소매가 긴 메이드복을 입고 있으면 덥고 땀이 차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리제에게 있어 그런 더위가 주는 불쾌감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제일 큰 문제는 여름에는 해충이 들끓는다는 점이다.
아, 물론 그녀는해충을 잡으려고 태어난 바이오로이드고, 따라서 일거리가 많다고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리제는 농작물에 꼬이는 해충들, 그러니까 다리가 많은 것, 기어다니는 것, 꿈틀거리는 것, 날아다니는 것, 그리고 요즘은 기계류에 기생해서 난동을 피우는 것 등등을 구제하는 것에는 귀찮을지언정 큰 불만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해충 구제가 원래 그녀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여름만 되면 더더욱, 마치 메뚜기 떼처럼 창궐해서, 주인님에게 불나방처럼 꼬여드는, 그런데 리제가 구제할 수도 없는 해충들이었다.
그게 리제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고, 그게 그녀가 장비 분해실에서 지금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가위를 썩썩 갈아대는 이유다.
“햇츙들....죽일 거야....다아아 죽일거야...햇츙들....”
오늘도 외롭게 장비 분해실에서 혼밥하던 팬텀은 정말로 간만에 나타난 말상대에게 다가가려다 그 서슬 퍼런 독기와 그만큼이나 시퍼런 가윗날에찔끔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제 이곳조차 안식처가 아닌건가...’며 눈물을 흘리며 광학미채를 뒤집어쓰고 물러나는 팬텀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리제는 표독스런 말을 중얼거리며 가위를 시퍼렇게 가는 데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건 조금 전 그녀의 상태에 비하면 그나마 순화된 것이었다. 조금 전에 그녀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나무꾼 년이 정숙이라고는 어디 산골짜기에 처박아두고 온 듯한 차림새의수영복으로 사령관에게 다가가는 걸 보고 눈이 뒤집어질 뻔했다. 그뿐인가? 간신히 나무꾼해충년을 떨쳐냈더니 이번에는 평소에는 사령관에게 예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트윈테일 붉은머리년이, 머뭇머뭇거리면서도, 역시 경악할 수준의 복장을 하고서 사령관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사...사령관, 이제 여름인데 올 여름에는 어디 해변에 정박 안 할거야?”
“음? 해변에는 왜?”
“그...지난번에 했던것처럼...다같이 좋은 시간...보내면...”
“웬일이야? 늘 차갑던 메이가먼저 놀러 가자는 말을 꺼내고? 그렇게 부대원들이 신경 쓰였어?”
그 흉폭한 몸매를 하고서 고작 한다는 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뿐인 한심한 빨간 해충은 얼굴도 빨갛게 물들여서는 뒷말을 흐렸다.
“아,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그....내 옷 어떻냐고...”
“벌써부터 기대하고 그렇게 차려입은 거구나? 음, 콘스탄챠한테말해서 오르카 내에서라도 여름 수영대회라도 해볼까?”
“아니, 그, 내가 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그 때를 떠올리자 리제는 다시 한 번 분이 치밀었다. 가윗날을 가는 그녀의 손길이 더더욱 빨라졌다.
그년들뿐만이 주인님이라는 먹음직스런 꽃에 꼬여드는 해충이 아니었다. 아니, 이번 여름은 그런 수영복 해충들이 어디서 알이라도 까는 건지 더더욱이나 넘쳐났다. 지난 여름에는 고작 한 년 뿐이던 아이언 메이든은 해충이 둘이나 더 생겼고, 지난 해 주인님 앞에서 꼬리친 병사 해충들을 단속해야 할 스틸라인의 행보관은본인부터가 요란하게 붕붕대는 해충이 되어 그 부대 대령이랑 쌍으로 사령관 앞에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인님이 아주 만만해 보이는지 이제는 술에 절어 사는 통신병 년마저 어디서 수영복을 구해 와서는 주인님에게 꼬리를 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전부 들고오기 좋게 가위로 잘게잘게 잘라서....여기 데려와서 분해해 버릴 거야...햇츙들....”
여름은 이래서 문제다. 안 그래도 주인님에게 달려들지 못해 안달인 해충들이 더더욱 대담해져서는, 입에 담지도 못할 노출도의 복장을 수영복이랍시고 입고 와서는 그녀의 소중한 주인님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게 어떤 년이든 간에 도저히 리제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그게 심지어 소중한 동생이래도 말이다. 리제는 지난 여름 늘 얌전하고 사근사근하던 동생의 배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익ㅊ..아니, 다프네?”
“어, 언니? 아니에요...이건....”
호라이즌과 트리아이나가 리오보로스의 유산을 찾아다니고 해변에서 나이트앤젤이 샬럿의 가슴을 피구공으로 후려치던 그 여름, 가장 아끼던 동생이 자신을 제치고 사령관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을 줄 누가알았겠는가. 그것도 자신은 갖지 못한, 언니인 자신이 봐도 매혹적인 붉은 수영복을 입고서 말이다.
“다프네...그거...주인님....무슨...?”
원래부터 언어구사력이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리제는 턱이 덜덜 떨려 더더욱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런 언니를 앞에 두고 다프네는 열심히 변명했다.
“주, 주인님이 열사병으로쓰러져서 간호해드리고 있던 것 뿐이에요 더구나 주인님 무릎베개를 두고 나이트 앤젤 님과 메이 님이 싸우셔서... ”
“다프네 너마저....”
“언니, 이러지 말아요. 저는 주인님께 사심이....”
그러나 하필이면 여기서 거짓말을 못할 정도로 심성이 고운 다프네가 그만 뒤끝을 흐리고 말았다.
“없.....다고는 못하지만....”
그것이 결정타였다. 리제는 믿었던 동생의 배신에 분노조차 아닌 묘한 감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해변에서 간만의 여유와 행복감을 만끽하며 즐거이 웃고 떠들던 그날 밤, 리제는 홀로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눈믈을 흘려야만 했다. 평소에 주변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지지해 주던 자매들도 없이 홀로 어두운 오르카한 구석에 앉아서 말이다. 아니, 이제는 앞으로도자매들은 그녀의 주변에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하던 여동생도, 언제나 듬직하던 언니도 그녀를 버려둔 채 리제만의 주인님에게 달려가 버렸으니까.
“해앳츙들...다 주길 거야....”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 그런 해충년들이 야한 수영복 입고 와서 사령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불-편하다면, 리제 너도 수영복을 입고 와서 그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론이다. 지당하신 말씀. 사실 지난 여름에 리제도 수영복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충분히 주인님에게 어필할 만한 것으로 말이다. 오르카의 의상 관리인 오드리는 리제와 다프네가 자매인 만큼 수영복도 같이 만들어줬었다. 그러니까 오르카 주방의 그 돼지 냄새 풍기는 해충만 아니었으면 주인님께 무릎베개를해줄 수 있었던 건 리제였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맞아...그 중국매미 같은 년부터...죽여야 해...”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얼굴에 윤기가 돌고 묘하게 자신을 보고 실실 웃는 것이 기분 나빴다. 얼마 전부터 자신을 대하던 그 요사스러운 독기도 다 가시고 심지어 지나가다 뜬금없이 힘내라고 응원까지 해주는 싹싹해진 소완을 보면, 본인 스스로도 영리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리제조차도 더더욱 께름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여름에 그녀가 리제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그 밀가루 뒤집어 쓴 것 같이 머리 하얀 중국매미년의 음모 덕분에 리제는 오드리가 만들어 준 수영복에 가위질을했고 그게 그녀의 모든 지난 여름을 전부 다 깡그리 망쳐 버렸으니까. 물론 리제가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건 이미 오드리의 수영복 건으로 리리스와 한바탕 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지만,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그게 리제가 소완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건아니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직도 수영복이 없으니깐.
“........”
그러고보니 마침 백발 애기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오르카 내의 그 많고 많은 해충 중에 리제 최강의 숙적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컴패니언의백발년이다. 짐승 냄새 풀풀 풍기는 자매들을 끌고 다니는 정신 나간 얀데레년. 여름이니 컴패니언 숙소는 짐승 냄새 더 풀풀 풍길 테지. 오르카 내에 그년보다 더 제정신 아닌 바이오로이드는 역시 똑같이 정신 나간 백발년인소완 정도를 제외하면 없을 거라고 리제는 확신했다. 물론 리제 자신은 지극히 정상 - 그저 순정이 좀더 순수하고 지고지순할 뿐 - 이니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고.
“.....아냐, 아냐, 똑같이 백발이래도 그 짱ㅁㅁ보다는 나아”
잠시 생각하던 리제는 고개를 흔들며 조금 전의 평가를 수정했다. 물론 여전히 리제의 소중한 주인님을 시도 때도 없이 노리는 그녀 최강의 숙적인 것도 맞고, 그것도 경호대장이라는 핑계로 더더욱 주인인님에게 밀착해서 꼬리를 쳐대는 ㅁㅁ인것도 맞지만, 최근에 해군부두에서의 일로 리제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모듈 속의 해충 리스트에서 리리스에 대한 평가가 조금 바뀌었다. 결국 주인님을 놓고 싸우는 숙명의 연적임은 변하지 않았지만,
“걔는...해충까지는 아냐...그 수영복 꼬락서니는 못봐주겠지만....”
그렇다. 분하긴 했지만숙적은 음탕하기 짝이 없었지만 수영복을 갖고 있었다. 그건 주인님도 혹하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음란한 것이었다. 그걸 입고서도 주인님과 못했다니 빨간 해충이랑 다를 바가 없다. 참 걔도 물건은 물건이다....리제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그러나 어쨌든 그 집착녀는 올 여름에도 주인님에게 도전해볼 만한 무기를 가진 셈이다. 리제에게는 아직 없는.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가위는 이제 더 갈다간 더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얇아져서 부러질 정도로 번쩍하니 날이 섰다. 이 이상 날을 가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리제는 날을 가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므로.
“햇츙들....죽이고....싶은데...주인님은....왜.....”
그렇다. 강철의 해충들마저죽일 수 있는 그녀였지만 주인님 주변에 꼬여드는 해충들은 죽이지 못한다.
그녀들을 죽일 능력 여부는 둘째치고 그녀들을 참살하면 그 누구보다도 리제가 가장 사랑하는 주인님이 가장 분노하고 슬퍼할 거란 것은, 그다지 머리 좋지 않은 그녀 자신도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주인님은 리제를 안아주기는커녕 한 발짝도 자기 앞에 다가오지못하게 하리라. 그러니 리제로서는속만 썩이며 가위만 부득부득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그런 해충들을좋아하시는 거야...리제가 있는데...”
이미 얼마 전부터 자기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을 쫒아내는 리제를 사령관이 눈에 띄게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건 눈치 없는 편인 그녀 자신도알았다. 그런다고 물러설 그녀는 물론 아니었지만, 만약 사령관에게 미움받고 가까이 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리제는 바이오로이드고 인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그리고 리제에게, 사령관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령관에게 절대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차라리 제 가위로 목을 그어 자살하는 게 나을 만큼.
“왜....나는, 리제는 돌아봐주시지 않는 거야....”
그렇다. 리제가 오르카에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리제는 끊임없이 사령관에게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리제는 사령관을 여자 해충부터 강철 해충까지, 모든 사악한 버러지들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리제는 사령관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리제는 사령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대로 그녀의 방식대로 사령관에게 구애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사령관 옆에서 해충들을 쫒아내면 낼수록, 주인님에게 그녀의 사랑을 구애하면 할수록, 리제가 주인님께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사령관은 오히려 그녀를 부담스러워 하며 외면하는 것 같았다. 리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진정한 사랑은 결국 통하는 법 아니던가. 그렇다면 리제가 주인님께 행하는 그 모든 애정과 순애는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
설마.
문득 리제는 자신의 마음속에 솟구쳐오르는 분노가 주인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사실은 그저 저열한 질투와 비참한 무력감의 결과가 아닌가는, 말도 안 되는 불안감에 몸서리쳤다.
“......”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비록 숙적조차도, 여동생조차도, 하다못해 이름조차잊혀진 잠수부도 가진 수영복을 그녀 혼자만 못 가지긴 했지만. 그것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받는 만큼 보답받지 못하는 것이, 겨우 그것이 지금 리제가 여기 이 자리에서 홀로 하릴없이 분노하는 이유란 말인가? 그게 이렇게 오르카 한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가위날을 갈며 질투하는 이유란 말인가?
....질투라고? 방금 질투라고인정했는가?
“.....”
아니야.
“.........”
아니라고.
“............”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 아얏! ”
리제는 마음 속의 불길한 속삭임에 항변하다가 그만 실수로 갈던 가위에 손을 베었다. 입김을 후 불기만 해도 머리카락을 두 동강낼 만큼 예리하게 날선 가위는 보기 좋게 그녀의 손가락을 붉게물들였다.
“아흑, 아파, 아파, 주인님, 주인님.....”
아무리 방 한구석에서 홀로 주인님을 찾아도 사령관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리는 없다. 어디서 나타나서 상처입은 그녀를 꼭 안아 줄 리 만무하다. 손가락의 싸한 아픔보다도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후려쳤고, 또한 손가락의 상처보다 더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도는 불길한 속삭임이었다.
- 그만 인정해라. 나는 주인님에게 다가가는 해충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 나의 주인님에 대한 ‘사랑’은 그저 착각일 뿐, 사실은 추악한 질투와 무력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주르륵 - 리제는 자신의볼을 타고 뭔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짭짤하다. 갑자기 코가시큰해지고 눈앞이 흐려져서 그녀는 가위 날 세우는 일을 잠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더없이 피곤해졌다. 그녀는 잠시 분해실 벽에 기대어 쉬기로 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멈추진 않았지만 외톨이인 그녀가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아무도 보지 않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서 장비분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리제는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다.
“여기 있었네, 스토커. 계속 찾고 있었다고. 불 좀 켜라”
“해ㅊ...곤충?”
리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제가 아무도 없이 홀로 분해실에 쭈그려 앉아 우는 것을 비웃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혹시라도 누군가가 따라와 이 광경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 오르카에는 충분히 남의 뒤 캐는 걸 좋아할 만한 위인들이 몇 있다 -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따라온 이도 탈론페더의 감시카메라도 없이 이곳에 오직 단둘뿐임을 확인한 리리스는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는 듯, 약간 우물쭈물거리다가입을 열었다.
“의외로 지금은 주인님을 안 따라다니네?”
역시 둘 사이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시작하는 법이 없다.
“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 있지. 난 주인님을경호하는 경호원 바이오로이드야. 그리고 주인님을 따라다니는 스토커는 내가 감시해야 할 이유가 있어”
“이익....”
평소대로라면 리리스가 논리정연하게 따지든 말든 리제는 바락바락 대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너도 주인님 따라다니는 변태 스토커인 건 매한가지 아니냐고. 그저 경호라는 명분만 있을 뿐인 또다른 집착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리제는 어쩐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을 비웃는 듯한 숙적의 태도에 마땅히 맹렬하게 받아쳐줘야 함에도 그저 피곤하고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주인님께 가진 감정이 고작해야 더러운 질투일 뿐이라면...
“,,,,,,”
리제가 잠잠하자 오히려 리리스가 당황한 듯 보였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치 못한 게 분명하다.
“스토커 너 뭐야. 왜 그래.”
밝은 복도를 걸어왔던 리리스의 눈이 이제야 어두운 방에 적응했다. 그제야 리리스는 어두운 방 안에서 리제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쩌면 리제가 왜 우는지도.
“하, 웃기네.”
갑자기 리리스가 허탈한 웃음을 짓자 지친 리제가 다시 눈을 험악하게 치떴다. 하기야 숙적이 지금의 비참한 자길 보러 온 이유가 조롱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뭐야? 날 비웃으러온 거야? 그럼 꺼ㅈ...”
“너 말야”
리리스는 리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자기도 자기가 따지고 보면 연적인 너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에 손을 갔다 댔다.
“혼자 그렇게 찌질하게 구석에 박혀서 질질 짠다고 주인님이 널 돌아봐 주진 않아”
정론이다. 그러나 리제가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숙적이 하는 말에 동의하고 싶진 않았다.
“이익...니가 뭘 알어!”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너랑 옥신각신해 온 만큼은 널 알아”
“..........”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너는 주인님께 달려드는 년들을 가만 두고 볼 년은 아니야. 적어도 네 가 그러는 건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나가서 주인님에게 추잡하게 추파 던지는 더러운 년들을 자르겠다고 날뛰어야 너답지 않아?”
“,,,싫어”
리리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 내가 잘못 들었나? 해충 구제사가 해충구제를 포기한다고?”
리제는 어늘하게, 그리고 논리정연하진 못하지만 더듬거리며 투박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기 싫어.”
“무슨 헛소리지, 스토커? 갑자기 해충들이좋아지기라도 했어?”
그 말에 리제는 다시 한 번 욱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숙적에게 다짜고짜 가위를 휘두르는 대신 - 평소의 리제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 그냥 힘없이 쪼그려 앉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해충들은 싫어...미워...원망스러워...하지만...못 해...”
리제를 도발하려던 리리스는 리제의 이 힘빠진 태도가 어쩐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 그렇게 그년들이 미우면 진짜로 가위 들고 나가서 덤벼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거야말로 리제가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조금 전에 그녀가 수십번도 넘게 더 재확인했듯이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하지만...하지만 주인님은그 해충들을 좋아하신단 말야...리제가 그년들을 진짜로 자르면 주인님은 슬퍼하실 거야...나를, 리제를 미워하실거야...”
그리고 리제는 조그맣게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내 언니와 동생도거기 있고....”
어쨌든 페어리 자매들이 소중한 존재이고, 늘 자신을 신경써 준다는 걸 리제도 안다. 그리고 자기가 자매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기에는 조금 불안정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자매들이 주인님께 구애하면 그녀들은 해충인가 아닌가? 리제는 이 지독한 모순 속에서 다시 한 번 몸부림쳤다.
그리고 주인님께 외면당하는 것은 더더욱 크나큰 고통이다. 리제는 그동안 자신이 주인님께 보여드린 사랑이 - ‘해충 방제’도 포함해서 - 그저 순수할 뿐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주인님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주인님이 리제의 사랑을 거부하신다면, 주인님이 리제를 싫어하신다면...
주인님에게도 자매들에게도 미움받으면, 버림받으면, 그녀가 있을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난제 앞에서 리제는 숙적 앞인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눈물이 다시 말 거 같이 코가 다시 시큰했다. 싫다.
“야, 스토커”
리리스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숙적이긴 해도, 주인님에 대해 늘 지고한 일편단심의 태도 - 물론 리리스 기준에서 - 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래도 리리스는 리제와 자신이 공통점이 완전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멸망전 인류는 이걸 얀데레라고 불렀다지만, 재생산 개체인 리리스에게 그런 과거사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눈 앞에서 라이벌이 자기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황급히 눈을 닦고 다시 고개를들어 자신을 노려보는 현재다.
“너, 정말 주인님좋아하는 거 맞아?”
조금 전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던 그 질문이 그대로 숙적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와 기간테스의 주먹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후려쳤다. 아프다. 이런 치명적인 기습이라니 치사하잖아. 리제는 자기도 모르게 가위를 움켜쥐었다. 가위날에 피가 뚝뚝 흐르는 걸 보고 리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혀를 쯧, 하고 찼다. 리제는 쟤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분명 자신의 착각이라고 치부했지만, 놀랍게도 다음에 튀어나온 숙적의 표정과 말투에는 묘하게도 걱정이 어려 있었다.
“스토커 너! 손 괜찮아?”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리제는 공연히 리리스에게 날카롭게 굴었다. 다른 해충년이면 몰라도, 아니 리리스는 조금 전 해충은 아니라고 인정하긴 했지만, 아무튼 얘한테 얕보이는 건 죽어도 사양이다. 죽어도 리리스에게는 나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느니 손목 긋고 말지. 그러나 리리스에겐 그게 의연한 태도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짐승이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리제는 리리스가 품에서 손수건을 던져 주자 당황해야 했다.
“일단 피부터 닦아. 하, 이게 무슨 꼴이야. 한심하고 처량해서 비웃지도 못하겠군”
도대체 이 집착녀가 오늘 왜 이러는지 리제는 알 수가 없었다. 오르카 한구석에 숨어 있는 자길 구태여 찾아오질 않나, 예전이라면 리제의 손에 피가 흐르든 말든, 아니 아예 리제의 한 쪽 팔이 날아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아니 오히려 귀찮게 하던 년 부서졌다고 좋아할 바이오로이드가 비웃기는커녕 걱정을 해주질 않나.
그래서 리제는 억지와 강짜를 부려서라도 리리스를 쫒아내기로 했다. 숙적 앞에 약한 모습 보이는 것도 사양이고, 지쳤다. 혼자 있고 싶다.
“아까 전부터 왜 자꾸 내 일에 참견이야? 뭘 원하는 거야?”
리제가 눈을 사납게 치뜨고 노려보자 리리스도 지지 않고 반격했다.
“손수건 줬으면 먼저 고맙다고 말이라도 하지?”
죽어도 그러긴 싫다. 특히나 숙적에게는 더더욱.
“고...고...고...고양이 같이 음험한 년이! 무슨 속셈이야!”
“고양이는 내가 아니라 페로고, 걔는 음험하지 않아. 그리고 적어도 걔는 지금의 너처럼 찌질하게 굴지도 않지.”
“내가 가위를 갈건, 해충을 베건 네가 무슨 참견이야!”
“너라는 년은 고작 조금 힘들다고 포기하는 년이었어? 원래부터 몇 수는 뒤처진 년인 건 알았지만, 이젠 다른 해충년들만도 못하군”
“아까부터 뭔 얘기 하고 싶은 거야.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리리스를 쫒아내려던 리제의 의도와 달리, 그녀가 불이 붙자 리리스는 오히려 이제야 좀 대화가 된다고 느꼈다. 그래. 이게 너와 나의 대화지.
“그러지. 난 주인님을제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년 따위랑 엮이고 싶지 않아, 말해. 정말 너는 주인님을사랑해?”
뚝. 리제의 강짜가멈췄다. 다시 한 번, 리제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며칠 전이었다면 당연한 소릴 왜 꺼내냐고, 또 뭔 속셈이냐고 방방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시저스 리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리제가 움츠러들자 리리스의 감정선은 정말, 정말로 일그러졌다. 그건 주인님에게 꼬이는 귀찮은 년 하나가 사라져서 느끼는 유쾌한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리제를 찾아온 의미가 없다.
“내가 아는 넌 적어도 주인님 좋아하는 건 진짜인 애였어.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꼴이지?”
“.......”
“실망이야,..일부러 널 찾아온내가 다 한심하네. 모든 면이 멍청하고덜떨어진 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높이 쳐줄만한 공통점이 하나는 있다고 생각했건만.”
“너...계속 보자보자하니까...”
“네가 언제는 주인님 주변에 꼬이는 년들이 누구고 뭐하는 년인지 신경 썼어? 언제는 주인님 의사 신경 쓰면서 그년들 쫒아냈어? 그 앞뒤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리던 여자는 어디 갔지? 페어리 시리즈는 다들 그렇게 나약해?”
“이익...자매들은 끌어들이지마!”
“자매 욕은 네년이 먼저 했잖아, 스토커. 나중에 페로에게사과해”
“......”
“주인님이 돌아봐주지 않는다고 포기해? 자매가 먼저 앞서나간다고 포기해? 그게 사랑이야? 그게...”
여기서 리리스는 뜸을 들였다. 결코 이 골빈 미치광이년이랑 동급 취급받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하나만큼은 동질감을 느끼니...
“....‘우리들’ 방식이야?”
마지막 말은 리리스 본인도 - 자기와 리제가 똑같은 점이 있다고 당사자 앞에서 인정하는 꼴이니까 -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왔고 그래서 그녀는 리제가 마지막 말을 들었는지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지쳐버린 마음에 가해진 리리스의 맹공에 마침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스스로 무너진 것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리제가 숙적 앞에서 결국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콧물도 함께.
“윽, 더러워. 손수건으로 얼굴 닦어, 스토커. 이젠 여자로서의 존엄도 버렸어?”
“그럼...나보고...나보고 어떡하란 말야....”
리제는 흐느꼈다. 그동안 외로워서,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심정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집착녀 숙적에게 쏟아져 나왔다.
“다들 주인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다들 주인님과 즐거워하고 있어, 나만, 리제만 남겨두고...”
“....너도 그러면 되잖아”
리리스는 자기가 제 입으로 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마 리제도 제정신이었다면 리리스가 이 말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컴패니언 자매들은 리리스의 가죽을 뒤집어 쓴 철충이 아닐까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제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격해진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지느라 그걸 주워담느라 바쁠 뿐.
“내가...어떻게 그래..주인님은 날 외면하시고...난 다른 해충들처럼 매력있지도 않아...”
“그걸 왜 니가 판단해, 멍청한 스토커 년아. 주인님 의사는 생각 안 해?”
“난...흑, 다른 해충들이, 가진, 으흑, 주인님을 기쁘게해드릴 예쁜 옷도 없어. 난 주인님을 즐겁게 해드리지도 못하고...주인님을 돌아보게 하지도 못 해...”
리리스는 입을 다물고 리제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집착녀, 어떡해? 난, 리제는 주인님이 좋아.”
숙적이라는 자기 앞에서, 리제가 자신의 자매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 볼 꼴 못 볼 꼴 다 보여주자 리리스는 어쩐지 감정이 묘해졌다.
“리제는, 흑, 주인님이, 정말 좋은데, 다가가면 주인님도 힘들어하고 나도 상처받아. 그래서 다가갈 수가 없어. 주인님과 해충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왜 못 다가가, 이 ㅂㅅ아. 진짜 한심하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잖아.”
“주인님이...리제를 싫어할거야...”
“그러니까 그걸 왜 니 맘대로 생각햬? 그럼 포기하게? 그럼 나야 고맙긴 한데”
“싫어, 리제는 포기하기싫어. 해충들 두고 주인님 떠나기 싫어!”
“그럼 뭔가 해봐야 하는 것 아냐? 그냥 이대로 찌질하게 처박혀있을 거야?”
“하지만...내가 여기서뭘 할 수 있단 말이야?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리제는 무력해...”
“내 말은...아오-! 진짜 답답하네!”
그리고 리리스는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재차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하도 주변을 경계하느라 그녀의 백발 머리카락이 세차게 나부꼈다. 흐느끼던 리제조차도 저 ㅁㅊㄴ이 왜 저러지? 살충제 먹었나? 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그녀가 리리스에게 너 도대체 왜 그러냐, 뭐 모듈이라도 잘못 꼈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리리스는 누가 볼세라 다짜고짜 그녀에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리제의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은 싹 사라졌다.
“너....그건....!”
“그래. 네가 지난 여름에잘라놓고 처박아 놓은 수영복이지.”
“그걸 어떻게.....”
“너네 셋째가 줬어.”
리제는 눈물 젖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다프네가? 이걸 내 숙적에게? 다시 한 번, 그녀의 동생이 그녀를 배신한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리리스는 리제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알고 있다는 듯이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네 성격에 오해할 게 분명하니까 말하는데 착각하지 마. 걘 네가 걱정되어서 우리에게 부탁하러 온 거란 말이야”
“뭐?”
“요새 너네 자매들 사이에서 겉돌고 있다며. 스토커 네 성격에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큰언니와 셋째가 리제를 제치고 주인님께 다가간 이후로 그녀는 자매들조차 믿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리제가 침묵으로 긍정하자 리리스는 이젠 숙적이 아니라 한심한 방구석 백수 딸내미를보는 엄마 같은 표정 - 오히려 그 표정이 리제로서는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려웠다 - 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너랑 제일 많이 부대껴 온 나한테 다프네가 찾아온 거야. 너 지금 너네 자매들이랑 우리 자매들이랑 사이 험악한 거 알고는 있어?”
모른다. 맨날 이 숙적이랑투닥거리느랴 카카오 버터 찾느랴 다른 페어리 자매들과 숙적네 자매들이 서로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걘 그런데도 불구하고 염치 무릅쓰고 나한테 찾아온 거란 말야.”
“......”
“더구나, 이 멍청아, 넌 지금....으....”
이번엔 리제가 아니라 리리스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이런 거 정말, 정말, 정말로 말하기싫다는 듯 뜸을 들였다.
“주인님이 지금 너 신경쓰고 있는 거 알어?”
리리스의 충혈된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주인님이? 나를? 리제의 동공이 심한 지진을 일으켰다.
“항상 주변에서 날파리처럼 붕붕 날아다니던 애가 안 보이니 주인님께서도 걱정되는 거겠지. 너무 맘씨가 고우셔서 탈이야. 그 점도 매력이지만.”
리리스는 흠흠, 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런데 내가 가만 두고 있을 수 있어? 너따위가 뭐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주인님은 오르카 분위기에 신경 쓰신단 말야. 난 주인님이 겨우 이따위 일에, 특히 너따위 년에게 마음 쏟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래, 그것뿐이야.”
그러나 이런 내막을 리리스가 리제에게 이렇게나 미주알고주알 설명해 줄 이유는 없다. 리제는 바보지만 적어도 숙적인 리리스의 성격만큼은 안다.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 고개를 약간 갸웃했지만, 리리스는 어쩌면,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했던 건지도 몰랐다.
리리스가 다짜고짜 내민, 리제의 조각조각났던 수영복은 보기에 꽤 멋들어지게 복원되어 있었던 것이다...리제가 자른 부분은 그대로였지만. 리제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리리스에게 보내었지만, 리리스는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적어도 볼 만할정도로는 수선했어. 그리고 구멍난 데에는....”
그리고 리리스는 다시 한 번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아...아오...내가 자매도 아닌, 그것도 무려 이 년에게 이런 것까지 알려주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정말 미쳤다고.”
“?”
“....씁. 화이트 초콜릿을 발라봐.”
“???”
“아우로라 말로는...지난 번에 초코여왕의 성에서...주인님이...그걸 특히 좋아하셨다하더라고.”
“??? ????”
“그런 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지 마, 정들거 같으니까.”
리제는 도대체 그걸 왜 자기에게 알려주냐는 동그란 눈으로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리리스는 일부러 비웃는 투로 대답했다.
“왜? 주인님께 ㅅㅅ어필 할 거라고 그 부분들 잘랐던 거 아니었어? 네 그 멍청한 지능과 같잖은 몸매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굳이 저능아 짓을 하고 싶다면 이왕 할 거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리제는 지금 이게 리리스 맞나, 맞다면 이 우주가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게 아닌가고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이러는 거지?
수없이 부딪히고 싸워대는 동안 그녀가 알게 된 리리스라는 바이오로이드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티격태격해 오면서, 주인님에 대한 그 정신나간 - 리제가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 집착만 빼면 얘도 자기 자매들을 사랑하고, 나름대로 믿을 만하고 좋은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왜 나한테...이렇게까지...
리제가 이 납득 안 되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걸 위축되고 움츠러든 것으로 여겼는지 리리스는 도발적인 태도로 리제를 가리켰다.
“너, 내가 굳이 고생해서우리 자매들이랑 이거 고친 거 후회하게 만들지 마. 알았어?”
“왜...이런 걸.....”
“왜냐고? 주인님이 걱정안 했으면 신경도 안 썼을 거야. 그리고...아으...”
리리스는 다시 말 꺼내기 싫다는 듯 아오, 아오, 아오오! 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한참 헝클어뜨렸다. 전혀 리리스답지 않은 행동이라 - 리리스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 - 리제는 다시 한 번 이게 리리스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동시에, 다른 컴패니언 자매가 맏언니의 이런 이상행동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리제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리리스는 간신히 떨어지지않는 입을 열었다.
“.....내 숙적이라는 년이 겨우 이 정도면 내 격도 떨어지잖아, 스토, 아니, 시저스 리제”
늘 자신을 스토커라 부르던 숙적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에 리제는 더더욱 당황했다.
그러나 리리스는 리제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이왕 말 나온 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시저스 리제. 블랙 리리스의라이벌이면, 라이벌답게 굴어. 주인님의 총애를 두고 이 나와 맞서고 싶어? 그럼 그러라고, 여기서 질질 짜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서.”
그리고 리리스는 자긴 너 따위 년에게 볼 일 다 봤다는 오만한 태도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그러면서 부끄러운 듯, 마지막 뒷말을 조그맣게 쥐어짰다.
“나도...찌질하게 구석에서쳐우는 애랑 비교당하는 건 사양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내뱉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떠나려는 그녀의 발걸음을 해충 구제사의 어눌하고 유창하지 못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아, 으, 어, 리, 리릿, 리리스.....”
리제가 더듬거리면서, 그래도 꽤 정확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자 리리스는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리제 앞에서 보이는 그 차갑고 냉혹한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정도로. 그러나 그 다음에 리제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혹은 부끄럽다는 듯,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소리보다 작게 속삭인 소리는 리리스가 리제에게 들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고, 고,...고......마워.....”
리리스는 자긴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나락에 떨어진 숙적에 대한 경멸과 무시의 표현인지, 아니면 리제가 약간 붉어진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황급히 시선을 돌린 것인지는 리리스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녀는 짐짓 경멸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흥, 어차피 승자는내가 될 거니까, 이 정도 핸디캡은줘도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리리스는 빠른 걸음으로 분해실을 나섰다. 아무도 이 오르카의 아무도 믿지 않을 일을 보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혹은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리제가 보길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덕분에 리리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리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리제의 생각은 틀렸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자존심도 굽힐 만큼 그녀를 걱정해 주는 자매들도 있고, 굉장히 짜증나고 싸가지 없긴 하지만 적어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해충 이상 친구 미만인 바이오로이드도있다. 그녀는 아직 최소한 자신을 싫어하지는 않고, 또 자신을 생각은 해 주는 동료와 자매들을 갖고 있다.
주인님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주인님이 리제의 사랑을 좀 부담스러워할지는 몰라도, 주인님이 그녀를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없다는 걸 신경쓰고 걱정했겠는가.
주인님을 향한 리제의 감정은 질투가 아니다.
물론 조금 뒤틀려 있을지는 모른다(리제는 평생 처음으로 아주 약간이나마 이러할 가능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해충 이상 친구 미만인 숙적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적어도 리제가 주인님 주변을 날아다니는 해충들을 쫒아내는 게 단순한 질투라거나, 그저 살충 모듈에 내장된 알고리즘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려주었다.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반짝, 하고 흘러내렸다. 아무도 보는 곳 없는 어두운 방안에서, 리제는 수영복을 들고 눈물 젖은, 그러나 어슴푸레한 미소를 지었다.
시저스 리제는 이번 여름은 살짝 좋아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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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상으로는 초코여왕 이벤트 끝난 직후, 리제 수영복 스킨 출시 직전이라는 설정으로 써봤습니다.
썸네일로 쓰려고 햇츙쟝 수영복 사서 직접 스샷 찍은게 자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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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습니다. 리제스킨업글 타이밍이라 흥미롭게 읽었네요. 그나저나 우리 아머든메이든은 언제나 아이언메이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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