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RL 나 홀로 여름 일지
제가 첫 번째로 맞이한 여름은 나 홀로 지내던 등대였습니다.
세상이 커다란 변화를 거치며,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저는 그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금방 곧, 끝나겠지…….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누군가 찾아와주겠지…….
멈춘 것과 다름없는 시간은 그래도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한해가 지나서, 열이 후끈 올라오는 새로운 여름이 다시 시작되고…….
따가운 햇볕을 피해 숨은 그늘 속에서 모호한 세월의 감각이 느껴질 때면, 어디선가 불어온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으며, 비로소 사라져버린 더위를 눈치채길 반복합니다.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린 여름이 아쉬워서였을까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을 허전하게 만드는 쓸쓸함을 메꾸고자,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장, 두 장…… 처음에 늘어가는 일지의 내용은 어쩌면 남은 공백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막힘없이 내려갑니다.
밤하늘에 나 홀로 예쁜 별님을 올려다본 기억.
장난감 상자에서 발견한 곰돌이와 친구가 되었던 날.
우연히 손에 넣은 참치 통조림을 맛보고서,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들.
……하지만 되도록 오랜 시간 기억하고팠던 즐거운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일지는 자연스레 힘들었던 순간도 기록됩니다.
교대를 약속했던 근무자가 오지 않아 펑펑 울었던 일.
유일한 말동무가 대화할 수 없는 인형이었다는 사실.
다시 한번 무한히 떠오르는 마음속에 고독감.
……계절은 반복됩니다.
특히, 여름의 햇살이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를 푸른 보석처럼 빛나게 만들어줄 때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변함없이 흘러가겠구나 하는 심정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번은 바깥으로 펼쳐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여름이 너무나 부럽게만 느껴져 그늘 밖을 향해 뛰쳐나갔던 적도 있었죠.
더위를 견뎌내고서라도, 더이상 숨어있고 싶지 않았거든요.
……다만, 여름은 따사로운 햇볕만이 존재하는 계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강렬한 햇볕이 지면을 뜨겁게 데우면, 누군가 열을 식혀줄 역할도 맡아야 했지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난 모험은 하늘 위로 펼쳐진 구름의 늘어난 그림자가 저를 세상 안으로 숨겨버렸습니다.
빗물에 옷이 쫄딱 젖을 정도로 바깥을 헤매던 저는 금세 마음이 꺾여, 다시금 등대로 돌아가게 만들기에 충분했어요.
……저에게 있어서 여름이란 대부분 그늘 속에 숨어왔던 순간들.
이따금 찾아오는 태풍과 번개에 벌벌 떨며, 두려워해야 했던 계절.
“……하지만 이제 옛날 일이야.”
지금에 와선 그날 미처 적지 못했던 미뤄둔 일지를 작성하기 위해 떠올려본 감상일 뿐.
“올해의 여름은 무엇을 적는 게 좋을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수 있도록, 눈을 감아봅니다.
비록, 여태껏 보내왔던 세월보다는 짧지만, 그 무엇보다 다양하고 선명한 색깔이 나타납니다.
“후후…….”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가에 머무르는 웃음을 발견하고서, 혹시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손으로 표정을 살짝 가렸습니다.
……가끔은 그늘 밑으로 감정을 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남들에게 제가 떠올린 생각을 들켰다가는…… 조금, 쑥스러우니까요.
“곰돌아, 방금 일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해.”
“…….”
조용히 속삭이는 혼잣말로 비밀을 약속하고서, 새하얗게 남겨있는 공백 위로 색다른 여름의 일지를 채워갑니다.
12가지 색깔의 크레파스가 만들어낸 세상은…….
새파랗게 펼쳐진 바다의 파랑.
또 하나의 반짝이는 별 해님의 주황.
해변가에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은 수많은 동료들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고.
햇볕의 일부를 가리는 파라솔과 먹음직스러운 크기로 통통히 익은 줄무늬 수박 한 덩이.
“…그건 정말 맛있었어.”
출렁이는 파도에 떠내려가던 튜브를 따라서.
저의 마음을 표현하던 연한 물색의 하늘은 솜사탕 구름과 함께 저물어가고…….
허물어진 모래성을 뒤로 한 채로, 아쉬움이 머무는 노을은 여름의 끝을 알리며 마무리됩니다.
……아, 잊고 있었네요.
예쁜 불꽃놀이의 추억을 빠트려선 안 되죠.
팔랑~ 일지는 다음 장을 향해 넘어갑니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새하얀 여백을 메우는 어두운 밤바다를 색칠하고서, 그 위로 하나, 둘씩 피어난 반짝이는 꽃들을 그려 넣습니다.
……마음속을 환하게 비춰주는 불빛은 언제나 매력적이에요.
살랑이며 불어오는 기억 속의 바람이 머리칼을 가볍게 흔듭니다.
무의식중에 살짝 벌어진 입으로 짭짤한 소금기의 맛이 떠오릅니다.
저는 아름다웠던 불꽃놀이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그림을 완성 시켰습니다.
……살며시 일지를 덮고서, 알록달록한 크레파스의 색감이 묻어난 손을 바라봅니다.
이것으로 올해의 여름은 끝이 났어요.
하지만 아직도 쓸쓸히 떠도는 화약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네요.
세월을 물들였던 고독은 또 다른 흐름에 휩쓸려, 어느샌가 점점 흔적 없이 옅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저에게 있어서, 그건 분명 더 바랄 게 없는 기쁜 일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
혹시, 지금 제가 보내고 있는 현실이 한여름에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무서워졌어요.
……동요하는 감정을 쓰다듬고서,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방을 둘러봅니다.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군요.
불안한 마음에 곰돌이를 품속으로 꼬옥 껴안습니다.
마치 뜨거운 열기에 아른거렸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요.
슬그머니 다가오는 초조함을 애써 감추며, 복도에 머리를 빼꼼 내밀고 살펴봅니다.
“너무 조용해…….”
평소와 다르게 누구 하나 지나가지 않은 채, 텅 비어있네요.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고요함인지.
소리 없는 정적이 낯선 동시에 익숙합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떠들썩한 소리가 머물렀었는데, 지금은 작은 인기척 하나 없으니 이상해요.
설마, 제가 잠시 한눈을 팔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 버린 건 아니겠죠?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 커다란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이 무서운 기세에 놀라서, 저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곰돌이를 데리고 구석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오들오들 몸이 떨려옵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풍부한 상상이 원망스러웠어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고, 오래전부터 마주쳐 왔던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 노력하던 중.
……때마침, 복도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로부터 이어지던 정적이 지워졌습니다.
“…….”
아무래도 제가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버린 게 틀림없나 보네요.
그대로 지나가 주세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제가 바라던 마음과 달리, 복도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이대로 모두와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걸까요?
그건 싫은데…….
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끝으로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너…… 조금 전부터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꺅?! …………그리폰?”
어라? 철충이 아니었군요.
……어쩐지 부끄럽네요.
저 자신을 위한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누군가 흘린 오르카 호에 철충이 돌아다닌다는 괴담 때문이에요.
……확실히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당연히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지, 짐이 봉인되어있던 장소를 찾다니, 제법이로구나! 특별히 그대를 칭찬해주겠다!”
빨갛게 물든 얼굴을 한 채, 대충 적당한 말로 지금의 상황을 얼버무려봅니다.
“……하긴, 네가 그런 적이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니었지. 괜히, 걱정해서 손해 봤네.”
효과가 있군요. 다행이에요.
“그보다 자, 받아.”
“어? ……응. ……그런데 이건 뭐야?”
“아이스크림. 조금 전 방송에서 아우로라가 만든 걸 나눠주고 있다고 했었는데 못 들었어?”
……전혀 못 들었어요.
일지는 쓰는 일에 상당히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왠지, 네 모습이 안 보인다 싶더라니……. 어쨌든 녹기 전에 먹어.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리폰은 제가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훌쩍 자리를 떠났습니다.
“…….”
나중에서야 눈치챘지만, 일부러 저를 위해 챙겨준 건가 봐요.
냠 하고 한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을 베어 뭅니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입에 퍼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흐르고…….
저는 일지에 올해 여름,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픈 순간의 그림을 한 줄의 문장과 함께 추가하였습니다.
[언제나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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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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