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 호의 분위기가 무겁다.
그도 그럴 것이 지휘관 급 바이오로이드가 모두 모인 회의실은 그야말로 장관이어서
사령관이 미리 자리를 피한 게 다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려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중앙에 있던 마리가 아르망을 향해 먼저 손을 뻗었다.
작게 말린 종이를 한가득 손에 움켜쥐고 있던 아르망은 그녀가 가져가기 쉽도록 손의 힘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뒤를 이어 레오나, 메이, 홍련등의 순으로 각 분대의 지휘관들이 하나씩을 가져갔고
곧, 극명한 희비가 갈리기 시작했다.
"이건 조작이야!"
처음부터 믿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한 메이의 외침에 동조하듯이 엘리스가 사나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맞아요! 애초에 이런 구시대적 방법따위···"
"그 구시대적 방법을 제시해주신 것은 다름아닌 폐하십니다."
불만을 잘라내는 듯이 아르망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승복하겠다고 사전에 약속했을텐데요, 모두."
"······흥!"
코웃음을 치며 먼저 밖으로 나가는 엘리스의 뒤를 이어 '꽝'을 뽑은 지휘관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회의실을 벗어났다.
"너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매번 있던 일이니까요."
"적응하지 못하면 피곤해지는 건 당신-이란 말처럼 들리는군?"
아르망은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무적의 용은, 가만히 자신이 뽑은 제비를 바라보았다.
다른 종이와 달리 끝부분이 아주 조금 빨간색으로 칠해진 그것은 '당첨'을 의미했다.
"축하하네. 어찌되었건, 사령관과 단 둘이 보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마리의 축하를 무적의 용은 그저 담담한 얼굴로 받을 뿐 그런 그녀를 마리는 이해했다.
지휘관 개체들의 대다수는 인간의 명령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 이상으로 조직의 머리로서 보내온 긴 시간이 있다.
하물며 그녀는 멸망 전의 인간들이 어땠는지 직접 겪어왔던 존재중의 하나.
"혹, 불편하다면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것도···"
"새치기는 나쁘다구, 마리 언니."
"이런. 꼭 나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었네만."
잠자코 지켜보던 닥터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마리.
닥터는 이내 무적의 용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빠하고 아직 제대로 얘기할 시간도 없었을테니까. 우리가 한 말들이나 이전에 있던 기억같은 건 제껴놓고
가볍게 데이트한다는 마음으로 받아봐줘."
"데이트···인가."
자신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에 무적의 용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사령관실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의 노크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건장한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와. 잠깐이면 되니까, 그쪽에 앉아서 잠시 기다려주겠어?"
용이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곧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작성하는 듯했다.
사령관 실이 낯선건 아니었지만 용의 시선은 줄곧 책상에만 머물러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서류를 정리하곤 곧바로 무적의 용에게 말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데이트를 하지. 사령관."
"······그럼 조금 더 기다려줘야겠는걸."
사령관이라 불린 남자는 웃으며 자신의 옷을 가리켰고, 무적의 용은 굳이 그럴 필요-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다렸던 시간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나고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왔다.
"사령관은··· 확실히 다르군."
"응? 무슨 말이야?"
"내가 아는 지식으로서의 사령관과, 지금 그대의 모습."
"그거··· 너무 와전된 이미지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내게 기대하고 있던 모습이랑도 연관이 있는 거야?"
"후후··· 걱정되오?"
"설마, 그 정도로 오만하진 않아."
남자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도리어 궁금해진 무적의 용이 물었다.
"오만하다니?"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는다는 건 그만한 능력을 입증했을 때지.
다른 지휘관들이라면 모를까, 네게 이렇다 할 대단한 모습도 보여준 적 없는 내가 어떤 기대감에 실망한다는 건 오만한 게 아닐까."
"···겸손이 다소 과하다는 마리의 평가는, 적절한 듯한데."
"마리가 그런 말을 했어?"
겸연쩍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윽고 오르카의 문에 선 남자가 말했다.
"다들 과대평가해주는 것뿐이야. 정작 중요하고 위험한 일들은 모두 그녀들이 해낸 것들이지."
약간의 자조와,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용이 대답하기 전 그의 말이 이어졌다.
"너무 무드가 없었네. 모처럼 데이트인데. 좀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장소는 미리 선정해봤어. 그럼 에스코트 해도 될까?"
"물론, 잘 부탁하···지."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의 손을 마주잡고 싶었지만 익숙해진 말투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꼬리를 흐리는 용의 모습에도 사령관은 개의치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이윽고 오르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여긴···"
"휴양지라고 해야 하나? 철충이 점령하지 못한 작은 섬을 마침 하나 발견했었어.
실은 점령할 정도도 안될 작은 곳이라 아마 놈들의 흔적이 닿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워···."
그녀가 그런 감탄을 무심코 터뜨릴 정도로, 작은 섬은 아마도 인공적으로- 하지만 조화롭게 꾸며져있었다.
꽤나 고생이 들어갔을 경관 속엔 두 사람이 거닐고 쉴 공간이 군데군데 마련되어있었다.
"이런 행운을 나만 독식하다니 미안하기까지 하군."
"괜찮아. 꼭 내가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휴가를 보내게 할 생각이니까. 브라우니들에게까지 돌아가려면 조금··· 오래걸릴지도 모르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남자의 시선이 어딘가로 멈추고, 이내 짤막한 한숨이 되어 흐른다.
어깨를 으쓱인 용이 말했다.
"쉬었다 가고 싶소?"
"···그거 일부러 그러는거지?"
쓴웃음을 지으며 어딘가 어설프게 지어진 '쉼터'를 지나치는 두 사람.
하지만 작은 헤프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공 샤워실이라. 혼자 쓰기엔 꽤나 큰 것같군."
"······대체 섬에다 무슨 짓들을 해놓은 거야."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자를 용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령관이 불쾌하다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소."
"아-아냐, 그런 말이 아니라···"
헤메이는 듯, 이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걸 마냥 방관하는 게 맞는건지 가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고. 싫지만은 않아."
"그런가?"
"아까 그 쉼터도, 저 샤워 부스도 결국 조금 비뚤어졌어도 '나'를 생각한 결과들일테니까. 받아들여야겠지."
체념일까. 용은 사령관의 눈에 스쳐지나가는 감정을 오롯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사령관을 만나기 전까지 겪어온 인간은 대부분 김지석과 앙헬을 기준으로 낫거나, 더하거나.
그런 두 부류 정도였으므로.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에게도 한 가지 있었다.
"···그대는,"
무적의 용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 아르망 추기경의 불안을 안정시켰지."
"······?"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의 표정이 의아해진 것도 잠시, 이어지는 무적의 용의 말들은 그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군인이었을 마리 대장이 여자로서의 치장에 신경쓰게 된 것도,
철혈이라 불리던 레오나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한 것도,
제멋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엘리스와 그 블랙 리리스가 그대의 말에는 유독 얌전한 것도,"
"잠깐만···"
"모두 그대의 공이오."
지그시 감았다 뜬 눈으로, 그녀는 가느다란 손을 펴 그의 뺨에 갖다대었다.
빨개진 볼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 그녀의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기에 그녀들은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사령관, 그대를 지키겠지.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겁쟁이가 아니오. 그러니 스스로를 그토록 몰아갈 필요는 없소."
"용···."
"나 또한 그대가 믿는 그녀들중 한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붙잡혀 시선도 돌리지 못한 채,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던 사령관은 이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진 목소리였다.
"···어째 거꾸로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 드는걸?"
"하하."
싱그러운 무적의 용의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다시금 산책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음?"
"지휘관들끼리는 역시, 통하는 그런 게 있는건가? 합류한 지 얼마 안된 용이 벌써 그렇게 파악했다는 게 신기해서."
"아아 그건···"
잠시간의 머뭇거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령관은 짐작할 수 있었다.
"탈론 페더?"
"······."
대답대신 침묵으로 긍정하는 용의 눈동자에 이루 말하기 어려운 표정의 사령관의 얼굴이 담겼다.
"아주···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만이 꼭 능사는 아니네, 사령관."
그러게-라고 말하려던 사령관이 짐짓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음? 이번엔 사령관이야?"
"그게 무슨··· 아···"
그제서야, 용은 자신도 모르게 사령관에 대한 호칭이 여러번 섞였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지만
사령관은 놓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리만큼이나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녀였기에 한 번 보인 틈은 멈출 수 없는 물처럼 흘러나왔다.
"사-사령관!?"
"그대라고 불러줘도 괜찮은데."
"그, 그건 그러니까··· 음···흠!"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 힘쓰는 용에게서, 시선을 거둔 사령관이었지만 그녀를 당긴 허리춤의 손만큼은 풀지 않았다.
용 역시 싫지만은 않은듯 그의 가슴쪽으로 머리를 기대듯이 가져다대었다.
"뭐··· 이런저런 개성들이 많은 곳이라 골치아플 일도, 곤란한 일도 꽤 있을거야."
"그럴 것 같더군."
"그러니 용은, 그쪽말고 내쪽에 서서 내 곤란함을 나눠가져줬으면 좋겠어."
빙긋 웃어보이는 사령관의 얼굴에,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용이 아직은 상기된 목소리로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그건 좀 두고 볼···"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그녀가 시선을 옮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령관의 입술이 용의 입술에 포개어졌기 때문이다.
일순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눈썹은 이내 천천히 감겨 순전히 스킨쉽을 받아들였다.
"방심은 금물이야. 용."
"···유념하도록 하지. 그대."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런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를 머금었다.
여느 때보다도 더욱, 진한 석양빛이 그런 두 사람을 아름답게 비춰주었다.
후일담 비슷하게 마무리 지어볼까 하다가, 그나마 쓴것도 망치지 않을까 염려되서
..근데 쓰고보니 딱히 시원한 여름느낌은 없군여 엉엉.. 참가작이란 걸로 의의를 두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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