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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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이요?”
“그래. 너랑, 나랑, 둘이서 가는 작전이다.”
“다른 대원들은요?”
“다른 호드까지는 필요없는 임무다.”
짧게 브리핑한 칸의 대답에 케시크는 입을 다물었다. 칸 대장과 단둘이 출격하는 임무는 그 때 그 일 이후로 처음이다. 임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칸이 더 설명해줄 용의가 없어보였기에 그녀는 그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안 그래도 자신감이 하락 중인데,무슨 작전인진 몰라도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조금 있다가 오르카 출격 포드로 와라.”
“네, 넵”
케시크가 살짝 혀가 꼬이자 칸이 돌아보았다. 부대 지휘관과 단둘이 출격한다는 것에 살짝 얼어 있는 그녀를.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어려운 임무는 아닐 거다. 오히려...”
“?”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운 그녀를 향해 칸이 슬쩍 미소로 답했다.
“꽤 재밌을 거다”
...
사람들은 으레 사막하면 사구와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모래사막을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지구상에는 자갈 사막이 더 많다. 드넓게 펼쳐진 메마른 황야에 황량한 바람만이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었다.
“여긴 어디죠?”
“중동.”
너무 범위가 넓은 답변이다. 짧게 대답한 칸의 대답에, 케시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그저 이 광막한 풍경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굴러다니는 자갈과 돌멩이, 그리고 끝도 없는 지평선 위로 파아랗게 날개를 편 너른 하늘 위에 점점이 흩어진 구름 외에는,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탁 트인, 그래서 정말 멀리까지 시야가 펼쳐진 사막 위를 내달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올 뿐. 철충은커녕 생물체도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서 할 임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케시크가 그 광대하고 정적(靜的)인 풍광에 압도된 채 간신히 그 생각을 끌어올렸을 때 칸은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둘러라. 목적지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인간이 없는 세상이지만, 혹은 인간이 없는 세상이기에 더더욱 외로운 이 사막에 볼 일이란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케시크는 칸이 메고 온 가방을 보았다. 어깨에 빗겨맬 수 있는 꽤 큰 더플백이었지만 그 안에 두툼히 들어찬 게 무엇일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보급품인가?
“저어 대장님, 이거 혹시 보급 임무인가요?”
“보급이라, 아주 틀리진 않군.”
“하지만 그럼 어디의 누구에게....”
“말할 시간이 없군. 이동하자.”
보급이라면야 보급병인 케시크가 따라오는 게 맞겠지만, 여긴 사람이 사라진 이후로 더더욱 발길이 끊긴 곳이다. 풍광은 아름답지만, 철충도 올 일이 없는 이곳에서 누구에게 보급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칸은 케시크의 말을 끊고 이미 저만치 가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포니테일 뒤꽁무니를 헐레벌떡 따라가려는 케시크를, 그녀는 돌아보았다. 미미한 미소가 슬쩍, 그녀의 입가에 어렸다.
“말했지, 목적지까지 거리가 꽤 된다고.”
“네, 넵!”
“그러니까 이제부터 좀 달릴 거다.”
“네?”
“따라올 수 있겠나?”
‘그럴 리가요’ 라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칸의 견고한 외골격이, 자갈 사막의 돌투성이 대지를 박찼다.
“자, 잠깐만요 대장님!”
케시크의 외침은 소용없었다. 그녀의 외침보다 칸의 휘날리는 갈색 포니테일이 더 빨랐으니까. 순식간에 멀어진 그녀의 등을 보며 케시크는 이를 악물고 자기 외골격의 시동을 올렸다.
“같이 가요오오----!”
목적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그녀를 놓쳐버리면, 이 광활한 사막에서 영영 미아가 되고 말 테니까.
...
‘이 정도면 되었겠군. 따라올 시간도 줘야지.’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쏘아진 화살처럼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선두에 선 칸이 몇 번 발을 구르면서 천천히 감속했다. 타탁, 탁, 하면서 땅에 그녀의 발자국이 패이며, 마치 비행하는 새매마냥 질주하턴 칸의 몸이 멈춰섰다. 질주를 멈춘 그녀를,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버린 케시크가 따라잡기까지는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하니까.
“헥, 헥, 헤엑...”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가빠하는 케시크가 겨우겨우 칸이 기다리는 데까지 도달했다. 그런 그녀를, 별 힘도 들지 않았다는 태도로 느긋하게 바라보던 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역시 못 따라오는군”
“그..그거야 당연...”
“하지만 내가 케시크였던 시절보다는 빨라.”
“....”
뭐라 하소연하려던 케시크는 입을 다물었다. 칸 대장이,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는 건 처음이다. 자신 케시크, 그러니까 그녀와 같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자신이 곧 그녀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었지”
그랬다. 칸이 멈춰 선 곳도, 처음에 그녀들이 출발한 곳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보였다. 똑같이 사방이 탁 트여 있는 드넓은 황무지. 솔직히 말하자면, 가도 가도 끝없는 황야뿐이라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지경이다. 조금 전의 그 죽도록 달린 것만 아니었으면, 여기가 방금 그녀들이 처음 도착한 그 자리였다고 말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칸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을 안다. 남들 눈에는 이 사막의 이곳과 저곳이 다 똑같아 보이는 장소일지 몰라도, 그녀에겐 아니었다. 이곳, 말라붙은 와디(wadi, 사막을 흐르는, 평소에는 말라붙어 있는 강)와 그 옆에 보이는, 지금은 무너진, 폴른 크기만한 버섯바위, 그리고 그 아래에 널브러져 제멋대로 나뒹구는, 부서지고 먼지끼고 녹슨 금속 잔해들. 흔하디 흔한 풍경이고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한 것이었지만, 칸은 지나치지 않았다. 아니까. 알고 있으니까. 이곳을.
“여긴 내가 가장 처음에 배치되었던 곳이다”
“.....”
“제 1차 연합 전쟁. 내 첫 번째 적은 인간이었다.”
총성, 폭발음, 고통스러운 비명, 증오에 찬 고함, 화약 냄새, 피 냄새. 백 년도 더 넘은 옛날 일이지만 칸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때의 소리를 듣는다. 그 때의 냄새를 맡는다. 그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첫경험이란, 그게 무엇이든 쉽게 잊기 어려운 인상을 뇌리에 남기는 법이다. 불행히도 칸의 경우는 그게 그다지 행복한 것이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그러하지만, 칸은 미미하게나마 웃었다. 담담하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녀만 바라보는 후배가 있으므로.
“많이 얼탔지. 첫 번째 전투는 야습(夜襲)이었다.”
“.....”
“그 때 너무 당황해서 대원들에게 긴급히 분배해야 할 탄약 구경을 헷갈렸다. 그 때 상관이 엄청나게 화를 냈었지. 내 뺨을 때릴 만큼.”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케시크도 알 수 있었다. 결코, 신나는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혼란, 공포, 아우성. 죽어가는 전우들.
비록 재생산 개체지만 케시크도 1차 연합전쟁 자체는 안다. 기록된 기억이 이어져 내려오니까. 정부군과 기업이 맞붙은 전쟁. AGS를 앞세운 정부군과 바이오로이드 생산 기업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싸웠다. 무수히 많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건 역사책을 펼쳐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자, 바로 그 현장을 경험한 자의 느낌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어디보자...그래, 저기쯤이군. 저기서 상관이 내 뺨을 두 번째 후려쳤을 때 조명탄이 터졌고, 처음으로 참호로 돌격하는 인간을 봤다.”
말라붙은 와디의 한구석을 가리킨 칸이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쩐지 쓸쓸한 빛마저 엿보였다.
“인상적이었지.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상상할 수 있겠나?”
아니, 안 간다. 케시크가 아는 인간이래봤자 사령관 뿐이고, 그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으니까. 인간은 바이오로이드와 다르다.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다. 아우로라는 요리를 위해, 익스프레스는 배달을 위해, 브라우니나 케시크 자신 같은 군용 바이오로이드는 살상과 파괴를 위해.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증오하기 위해 태어나지도, 파괴를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전쟁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전쟁을 한다면, 그걸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음 속에 혐오와 적대를 가득 담고 살생을 위해 달려드는 인간을 마주하는 건, 그리고 그 목표물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칸은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확 밝아지는 조명탄 아래 핏발선 눈, 수축된 동공, 딱딱 부딪히는 이빨, 숨이 차서 토해내는 습한 숨결. 죄다 원시적이고 미개한 본능들이다. 쓸데없는 데 신체의 에너지를 낭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위해 최적화된 군용 바이오로이드는 그렇게 짐승 같은, 불필요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그 때의 그녀는 무서웠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그저 묻어두고서, 그녀, 칸은 그저 담담하게. 남 일처럼 말을 이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난 정말로 멍청한 얼간이였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케시크. 너는 대원들에게 탄약 분배할 때 구경을 헷갈리는가?”
“아...아니요”
물론 그 이후 그녀 모델이 개선되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런 건 이젠 갓 태어난 케시크도 안 할 실수다. 칸이 씩 웃었다.
“그것 봐라. 그 때의 나보단 낫지 않은가.”
“그 때에는 대장님도 분명 당황하셨어서...”
“맞다. 고작 1개 소대 규모의 기습이었는데도 죽도록 당황했지.”
그것 역시 상상이 안 간다. 칸 대장이 얼타는 모습이라니, 차라리 인간과 사랑에 빠진 철충을 상상하는 게 더 현실감 있겠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가도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달리기 선수도 처음에는 걸음마를 하는 것에도 힘겨워했을 것이다.
“봐라. 하지만 다 옛날 일이다.”
그 모든 것은 시간의 모래 아래 묻히고 스러졌다. 지금은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바이오로이드를 증오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칸이, 얼타고 실수하고 또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그 시대가 아니다. 이전 시대의 격전지는 이제 그저 이름 없는, 칸 외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흔하고 평범한 장소로 남았다. 마치 그 때의 전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때 피흘려 죽어간 이들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진실로, 과거는 낯선 세계요, 지금은 다른 시대다. 시간의 모래를 뚫고 살아 온 칸의 기억만이 남았을 뿐.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막만이, 그 자리에 남았을 뿐.
케시크가 뭐라 감상을 말해야 하나, 고 느낄 찰나, 바위에 몸을 기댔던 칸이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읏차. 얘기는 여기까지다. 원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다.”
“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아는 장소가 있어 잠시 들렀을 뿐이다.”
“....”
“당연하지 않은가. 이 아무도 없는 공터에 볼 일이 뭐가 있다고.”
초연한 태도는 그대로지만, 어쩐지 오늘의 칸은 이상하다. 평소의 칸, 특히 임무 수행중인 칸이라면 이런 사사로운 감상에 휘둘리지 않고 곧바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동선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칸은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되려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말했잖나. 꽤 재밌을 거라고. 설마 여기서 옛날 얘기나 하려고 널 데려왔겠나. 그게 재밌을 리가.”
“그, 그건 그렇긴 한...아, 아니,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요...”
어쩐지 칸의 과거사가 지루하다고 폄하하는 꼴이 된 것 같아 케시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칸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고개만 갸웃하다가, 얼굴에 미심쩍은 장난기를 드리웠다. 칸의 것이라기보다는 워울프가 더 자주 띄우는 그 장난기를. 그러니까. 이것 역시 평소의 칸답지 않다니깐.
“좋아. 그럼, 한 번 재밌게는 해줘야겠군.”
“예?”
“조금 전에 여기까지 이동할 때, 내가 좀 빠르긴 했을 거다.”
“그건 당연하지요.”
칸은 호드에서 가장 빠르니까. 땅에 두 다리 붙이고 달리는 것들 중 그녀보다 빠른 건 정말 얼마 없을 것이다. 솔직히, 정말 부러운 속도기는 했다. 그녀도 그렇게 빨랐다면,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다면, 더 많은 동료들을 더 신속하게 도울 수 있을 텐데. 케시크의 그 심정을 눈치챘는지 칸이 한마디했다.
“따라오느라 수고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정말 빠르세요. 감탄할 정도로.”
“그렇단 말이지?”
가끔은 뒤도 안 보고 내달리시는 것 같단 말이지. 혹은 보고 싶지 않으신 걸까. 그러나 케시크가 거기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는 자신의 속도의 비결, 즉 자신의 다리에 장작된 강화 외골격을 가리켰다. 어쩐지, 이상한 능글맞음과 함께.
“그럼 한번 써 보겠나?”
“네?”
케시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칸은 자신의 외골격을 탈착했다. 푸쉭, 하고 압축가스가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외골격이 갈라졌다. 분리된 외골격에서 다리를 꺼낸 그녀가, 아직도 자기 말뜻을 이해 못해 버벅대는 케시크를 돌아보았다.
“입어 봐라.”
“예? 대장님?”
“치수 걱정은 하지 마라. 외골격이 다리에 맞춰서 알아서 조여 줄 테니까.”
“이걸 제가 어떻게 입어요...”
뭐가 문제지 하던 칸이 아, 하고 자신의 늘씬하게 노출된 종아리를 쓱쓱 쓸어 보았다. 그리고 그 손바닥을 코에 가져가 킁킁댔다. 그, 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워울프에 가까운 동작 - 누가 같은 호드 아니랠까봐 - 케시크는 입을 떡 벌렸다.
“흠...냄새는 안 나는데”
“아니...”
“쉰내 걱정은 마라. 땀 많이 안 흘렸다.”
“대장님!”
“난 무좀도 없다.”
“그게 아니라요!”
“그럼 뭐가 문제지?”
“으으으...”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칸의 요청에 못 이겨 케시크는 슬금슬금 그녀의 다리 외골격으로 다가갔다. 지휘관기의 명령은 명령이니까. 그러나 아직도 망설이는 그녀에게 칸이 뒷말을 이었다.
“너는 내 리볼버 캐논을 사용해 본 적 있지”
하이에나와 샐러맨더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다른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지휘관기 전용 병기를 허가 없이 사용한 건 사실이기에 케시크가 버벅댔다. 그 때 같이 달릴 때는 철충을 사냥하느라 바빠 넘어갔던 걸, 이제 추궁하시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단둘이서만...?
“그..그건...!”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주 뛰어난 전술적 판단이었다. 100년도 더 전에 이 자리에 서 있던 나는 그런 판단은 못 했을 거다.”
칸의 얼굴은 질책이나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찬사에 가까웠다.
“확실히 너는 내 옛 모델이지. 그래서 신체스펙도 크게 차이가 안 나는 건지, 꽤 잘 사용하더군. 워울프는 그걸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는 걸 아나?”
지난 겨울에 멋대로 저격수가 되어보겠답시고 설치다가 말이다. 자기 리볼버 캐논을 빌려달라고 떼쓰던 워울프는 정작 칸이 그걸 빌려주자 조준은 커녕 들어올리는 것도 벅차했다. 하지만 케시크는 그걸 들고 달렸다. 그 때 그녀가 너무 절박하고 필사적이어서 그랬던 건진 몰라도.
“그러니, 이것도 한 번 입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시험삼아 말이다.”
“제가 그걸 입을 수 있을 리가..”
“내 무기도 사용했지 않나. 해 봐서 나쁠 건 없지. 유사시를 대비해서라도.”
케시크가 칸의 기동장비를 입어야 할 정도의 ‘유사시’가 오기나 할진 모르겠지만. 명령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입어만 보겠습니다.”
케시크는 조심스럽게 칸의 외골격에 자신의 다리를 넣어 보았다. 의외로 착용감은 상당히 좋았다. 철커덕, 끼릭, 하고 분리된 외골격이 다시 자가조립되며 케시크의 다리를 감싸고 조였다.
“어떤가?”
“새...생각보다는 안 불편하네요.”
“그래. 정말로 나랑 닮은 구석이 있으니 그런 걸지도.”
“그...그런...제가 대장님과 비슷할 리가....”
“당연히 안 닮았지. 닮은 구석이 있을 뿐.”
칸이 딱 잘라 대꾸하자, 너무나 당연한 말임에도 케시크는 웬지 풀이 죽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더 풀이 죽기도 전에 칸이 재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그럼....입었으니 써 보는 게 당연한 수순이겠지”
“네?”
“달려 봐라.”
“그..그런...!”
“해 봐라.”
그러고서 칸은 케시크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기 외골격의 시동 버튼을 눌렀다. 외골격이 크게 덜컹했다....그걸 입고 선 케시크도 함께.
“꺄악!”
“자아, 그럼, 가 봐라”
시동이 걸려 으르렁대는 외골격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없는 케시크의 등을, 칸이 장난스럽게 슬쩍 떠밀었다. 케시크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자 칸의 외골격은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뛰쳐나가는 맹수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 도플러 효과.”
비명을 길게 뽑으며 저만치 달려가는 케시크의 목소리가 작아지나 싶더니, 또 측면으로 비스듬히 돌아오며 커졌다. 방향조차 제대로 제어 못하는 그녀는 이쪽저쪽으로 좌충우돌...아니, 부딪힐 게 없는 사막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아무튼 사방 팔방으로 미친 듯이 우왕좌왕했다. 여기를 가나 싶더니 저기로 쌩 달려가고, 귀를 후비고 있는 칸의 우측을 홱 지나가나 싶더니만 바로 다음 순간 칸을 쳐버릴 듯이 좌측으로 쌩 지나친다! 케시크도 그러고 싶진 않지만...너무 빠르잖아!!
“으아아아아아아-----!!!”
그녀는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거밖에 할 수 있는 게 달리 없어서. 칸의 외골격은 마치 제 의지가 있는 생물인 것 마냥 미친 듯이 이리 달리고 저리 뛰고 점프하고 튀어다녔다. 거기 매달리다시피 한 케시크와 함께. 외골격을 단 게 아니라 자기가 외골격에 달린 꼴이 되어서 휘청휘청 춤추듯 널부럭거리는. 그러나 칸은, 치일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서 이 온 사방 천지를 질주하는 케시크를 느긋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살려주세요오오오오----!!”
“흐음, 역시 서투르군. 아주 서툴러.”
“당연하죠오오오오오------”
“그래도 곧바로 넘어지진 않는걸. 속도감각이 아주 없진 않아”
“넘어지면 죽으니까요오오오오----!!!”
그 미친 속도 아래에서 넘어지거나 땅바닥에 처박하면 어디 몸 한두군데는 부러질 것 같으니까. 케시크의 공포 어린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칸은 허허 웃으며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쏘다니는 - 물론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 외골격을 조종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외골격에 끌려다니는 케시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장난끼 가득하게 웃는 것도 케시크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다.
“재밌어 보이는군”
“대장니이이이이이이이이임-----!!!”
엄마도 없는 바이오로이드 주제에 케시크가 엄마 찾듯이 운다. 칸이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소리쳐라. 속 시원하게. 있는 대로 외쳐라. 가슴 속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마라.”
자신은 이제 그렇게 못하니까.
고요하던 사막에 때아닌 비명이 멀리 머얼리 울려퍼졌다. 거칠기 그지없이 튀어오르는 돌조각들과 함께.
그래도,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토해내니 뭔가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혹은, 뜨겁게.
해묵은 응어리가 풀리는 것처럼.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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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조금 호불호 갈리는 비주류 분야인 건 알지만, 뉴에이지 음악은 어떠신가요? 삽입된 곡은 "Afro celt sound system"의 "Eireann"(1999)입니다.
라스트오리진을 하실 정도로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어?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은데?" 할지도 모르는데, 2007년에 대한항공의 TV CF송으로 쓰인 적이 있습니다.
1. 본편에 대한 이야기
- 이 이야기는 의뢰를 받아 쓰고 있읍니다. 지난 번 설문대로(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4698 ), 조금 지루하고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 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지적 바랍니다.
- 워울프가 칸의 리볼버 캐논을 들어보려고 했던 것은 "세인트 오르카의 비밀작전" 이벤트를 의미합니다(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0581 ).
- 설정상 오류로 1차 연합 전쟁으로 수정했는데, 당시에 칸(이었던 케시크)의 최초 근무지가 중동이었는진 모르겠습니다(원랜 아나톨리아 전쟁이었는데 설정 문제로 수정해서 그렇습니다). 일단 사막형 모델이니 사하라에서 고비에 이르는 구대륙의 사막 지대 어딘가가 케시크의 첫 데뷔 무대 중 하나였겠지만... ... 중동이 최초라는 근거는 찾질 못해서, 이건 아무래도 제 임의의 설정이 되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ㅠㅠㅠ 사실 그래도 플롯이나 흐름에 큰 차이가 생기진 않습니다만...
- 케시크가 칸의 외골격 입고 날아다니는 이야기는 이 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015 / https://twitter.com/Petitdry/status/1542861949377003521)
제가 요즘에 딴 걸 하고 있어서 글이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고마운 응원이 되어요.
....그래도 그림은 그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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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너무 부담 안가지셔두 됩니다. 천천히... | 22.07.08 23: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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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의 조합이 꽤 잠재력이 있더군요. 고전적인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구도도 가능하고. 저는 그냥 가볍게 쓰고 넘어가지만, 상당한 서사가 가능한 조합 같습니다. | 22.07.08 23: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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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부지와 아들의 로드무비 떠오르기도 해요 ㅎㅎ | 22.07.11 12:3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