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이리 귀가 가렵냐.
너댓 번 후빈 귀가 또 가려워서 슥슥 긁었다. 누가 내 욕하나?
“후엣취!”
“주인님?”
“킁! 리리스, 휴지 좀 주라.”
“네, 주인님.”
귀 가려운 거에 재채기까지. 아주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리리스가 건넨 고급진 손수건에 코를 대충 훔친 뒤…아니, 리리스야 제발…….
“주, 주인님의 콧물…하아, 주인님…….”
“…….”
세상에 그걸 보물처럼 품에 품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이, 인간 님?”
한바탕 소동 아닌 소동에 내가 미간을 누르고 있자 앞서 가던 아리아드네가 불안한 듯 나를 불렀다. 괜히 미안해졌다. 아리아드네는 아까 몸수색을 당한 여파 때문에 그런지 리리스의 행동 하나하나에 독수리 앞의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니, 그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 여기 구조를 엄청 잘 아나봐? 아까부터 척척 잘 걸어가네.”
“벼, 별 말씀을요! 저, 저 같은 걸 칭찬해주시고……. 역시 마지막 인간 님께서는 뭔가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세요…….”
“…….”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건데…….
“아니 뭐 내가 그렇게까지……. 여기서 얼마나 있었던 거야?”
“에헤헤, 최근까지 세 봤을 땐 100년 정도네요.”
“100년?! 그 시간을 혼자서?”
“전부 혼자였던 건 아니었지만요.”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쓸쓸해보였다. 마침 그녀가 말했던 식당에 도착해서 나는 더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의자에 걸터앉았고 리리스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얼마 안 있어 용과 아르망이 패널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아자즈까지 데리고 들어오자 마침내 우리는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시장하시죠, 주인님? 제가 아리아드네 양과 먹을 것 좀 가지고 올게요. 아무래도 눈이 안 보이는 분께 다 시키기엔 좀 그러니까요. 그렇죠?”
“넷, 네……. 감사합니다, 리리스 님…….”
이런 걸 답정너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리리스는 아리아드네를 아예 전담 마크할 생각인지 식료품실까지 쫓아 들어갔다.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폐하.”
“으, 응?”
“리리스 님은 지금 폐하의 경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랍니다. 여기서 폐하의 안전에 가장 무관심한 분은 폐하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
예지라 읽고 독심술이라 해석하는 아르망의 능력 앞에서 내 소소한 불만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찌그러져야 했다.
일단 결과적으로 보면, 리리스가 아리아드네와 같이 간 건 잘 한 일이었다. 무슨 문제가 터진 건 아니고, 생각보다 상태가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기쁜 건 그걸 계기로 용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00년 된 거 치곤 아주 상태가 좋은데?”
“식재료 보존 기술은 소관이 제조되기 전부터 이미 정점에 다다라 있었다고 들었소. 조건만 맞는다면 채소 같은 것도 반영구적인 보관이 가능했지.”
용은 방울토마토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용은 방울토마토를 유난히도 좋아했지. 내 몫까지 용 앞으로 살살 밀어놓으며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용과 다시 대화할 수만 있다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의외로 자세히 아네…….”
“주군, 해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급이오.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식수와 식량 문제는 늘 지휘관들의 고민거리였지. 게다가 항해 생활에서 식사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오.”
말은 훈계조였지만 용의 표정은 즐거워보였다. 아무래도 옛 기억 중 재미난 거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네레이드 같은 애들은 채소 먹기 싫다고 반찬투정 했을 거 같아.”
“훗, 반찬투정은 네레이드보다 운디네 쪽에서 더 많이 나왔소. 채소 때문은 아니었지만 말이지.”
그러면서 용은 쓸쓸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함 내 모든 병력에게 신선한 채소를, 그것도 매일 공급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력이 갖춰져 있었음에도 그런 건 모두 인간 장교들의 특권이었소. 정작 그런 보급이 절실한 바이오로이드 병사들은 늘 똑같은 보존식밖에 못 먹었고 말이오. 한번은 그걸 먹어봤는데…정말 빈말로라도 먹을 만한 맛이나 식감은 아니더군.”
“맛이 뭐 어땠길래?”
“굳다 만 젤리 같은 식감에 역겨운 전분 냄새가 코를 찔렀소. 그러면서도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지.”
“…그렇게 맛없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네. 다시 입에도 대기 싫었겠다.”
“반대요. 그 뒤로 그것만 먹었지. 한 군의 지휘관으로서 어찌 병사들의 고충을 모른 체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도 고락을 함께하며 배급 문제를 개선하려 애썼지.”
용은 다시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찍어 들더니 한참이나 그걸 노려봤다. 마치 그 속에 과거의 기억이 모두 담겨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뒤에 나온 한마디에는 나조차도 낯설 정도의 깊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겨우 개선했나 했더니만……. 철충들의 침공으로 멸망 전쟁이 터져버렸고……. 결국 휘하 부하들에게 이런 거 하나도 먹일 수가 없었소.”
“…….”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는 밥. 그마저도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한 채 철충과의 전쟁 속에서 스러져야 했던 수많은 부하들. 용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오, 주군. 식사 자리에서 꺼낼 만한 얘기는 아니었군.”
“괜찮아. 용의 과거 얘기라면 언제라도 환영이거든. 나중에 또 얘기해 줄 거지?”
“그, 그런……. 험, 소관의 과거 따윌 들어봤자 시간만 낭비할 거요.”
“그럼 낭비할 시간도 기대해볼게.”
“그대는…하아, 정말이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짧게나마 용과 얘기한 게 너무 기뻐서, 입에 집어넣는 샌드위치가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식료품 창고에서 가져 온 재료들로 만든 샌드위치, 냉동 보관되고 있던 과일, 거기다 내친 김에 우리가 가져 온 소완 특제 도시락까지 꺼내서 죽 늘어놓으니 거의 뷔페 같은 차림상이 됐다.
“와, 와아……. 저 이런 맛있는 음식 처음 먹어봐요! 음, 음……! 아, 이거 설마 튀김인가요?”
“아 그거? 가라아……뭐라던데. 어쨌든 닭고기 튀김이야. 우리 주방장이 만들어 준 건데 맛있지?”
“네! 튀김은 지금껏 딱 한 번밖에 못 먹어봤는데, 이렇게 맛있는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너무 맛있어요, 너무…….”
아리아드네는 겨우 튀김 하나 가지고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그 모습이 방금 용이 말해줬던 예전의 부하들 모습이 생각이 나 마음 한 쪽이 아려왔다.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리아드네의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낡아 해진 원피스에 생채기 잔뜩 난 손과 발, 말라붙은 입술…….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을 이런 폐허에서 보내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 절망의 깊이를 난 가늠할 수 없었다.
“…더 먹어. 많이 있거든.”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내 도시락 통에 든 닭튀김이라도 전부 아리아드네 앞에 밀어주는 게 전부였다. 겨우 그건데, 아리아드네는 그것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그게 더 안쓰러웠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인간 님의 음식을…….”
“난 샌드위치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여기 차도 있어. 어서 먹어.”
“네, 네…! 감사합니다, 인간 님!”
“…….”
아리아드네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웃을 때마다 살짝 보이는 눈동자는 안타까운 회색빛으로 바래 있어서, 솔직히 편하게 따라 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잠깐이나마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정말 맛있었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인간 님.”
아리아드네는 마지막 닭튀김까지 정성스레 음미한 뒤에야 귀중한 의식이라도 치룬 듯 식기를 내려놓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내가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그런지 다들 이미 식사는 끝나 있었다.
…다시 현실의 문제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이제 좀 얘기해줄 수 있겠어? 100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이유가 뭔지.”
“계속해서 노래했어요. 제 매니저 님을 위해. 조금이나마, 그분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매니저?”
“네, 제 소중한 분이셨어요.”
그렇게 말하고선 아리아드네는 발치에 손을 뻗어 작은 해바라기 한 송이를 땄다. 해바라기들은 벽이고 바닥이고 할 것도 없이 마치 잡초처럼 자라 있어서, 어디든 손만 뻗으면 그곳에 해바라기가 있을 지경이었다.
“…이 꽃은, 그분께 바치는 헌화랍니다. 그분은 해바라기를 좋아하셨거든요.”
“여기만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건 전부 이 해바라기 때문이라 들었어. 그럼 넌 이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꽃을 심었던 게 아니었던 거야?”
“전 그런 거 전혀 몰랐어요. 꽃들이 이렇게 많이 자랄 줄도 몰랐고요. 전 그저, 제가 죽기 전에 그분의 무덤에 가장 좋아하셨던 꽃을 헌화로 바치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해바라기를 소중히 감싸 안으며 그녀는 그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선 그 잿빛의 눈을 똑바로 떠서 나를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어요.”
“괜찮을 거야. 음…아르망?”
“…30분 정도라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아르망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거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지금 아리아드네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내게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름이었어요. 매니저 님을 처음 뵀던 건.”
깊게, 추억이라는 물속에 잠기듯 서서히.
“그리고 매니저 님과 이별하게 됐던 때도 마찬가지로 여름이었어요.”
잿빛으로 바랜 그녀의 눈동자엔 여름의 푸른 하늘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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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과거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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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희미한 옛 사랑의 노래-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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