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약’이라는 단어를 긍정할 수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생각했다. 그저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가치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다시금 함께. 살아있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달리던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차츰차츰 느려지다 이내 그친 걸음을 뒤따르던 발자국은, 속절없이 내리는 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수가 쏟아져도 이토록 아프진 않았을 거다. 빗줄기가 아프다고 하면 보통 과장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결코.
시체의 상태는 온전했다. 붕괴액의 영향을 직접 받고도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저 오랜 도피행에 지쳐 잠들어 있던 것뿐이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석비에 기댄 그 모습은 조금 창백하고, 조금 수척해 보였을 뿐이니까.
눈알만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가 내리는 꼴이 꼭 자욱한 안개 같았다.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다. 질척이는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숨을 들이쉬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허공에 질식하는 것처럼.
나흘 전, 겨우 듣게 된 소식에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설령 가본다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열차에 올랐고, 국경을 넘었으며, 맹목적인 충동을 따라온 끝에-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어깨를 때리는 비는 매서웠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란 최초의 ‘신’이라고 한다.
“…마스터.”
힘겹게 내뱉은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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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나날이었다. 특히 지난 나흘은 그러했다. 눈코 뜰 새 없는 사건과 격전의 연속, 장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끝났다. 본국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객석에 편히 기댄 그녀는 겨우 무언가를 끝냈단 기분을 느끼며 오랜만에 쉴 수 있었다. 비록 도시는 멸망했지만, 시민들은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철혈공조 또한 물러갔고, 그 하얀 세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깐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그대로 잠들기 전 그녀가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알려진 그리폰&크루거에 대한 IOP 제조회사의 지원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열차가 본국에 도착하는 데엔 이틀이 걸렸고, 도착한 그녀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 것은 역에 걸린 스크린에 드리운 한 뉴스였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이 일순간 멈췄다. 에상치 못한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기습적이었고, 예상을 너무 벗어난 방식으로 찾아와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론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5개월 전부터 누명이 씌워진 혐의들–불법 인형 개조 및 화기 유통, 군 측을 향한 테러 혐의–을 비롯한 이미 아는 소식들이 나왔고, IOP와 그리폰 간의 커넥션에 주목하는 추측도 나왔다. 유출된 내부 문건과 녹음 파일을 비롯한 모르는 소식 또한 나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 알리듯,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손목만 움직여 꺼낸 그것을, 눈알만 굴려 액정을 확인했다.
안전국의 연락이 왔다.
[이 일은 자네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떨어졌다. 지나칠 정도로 간결해서, 그 정도의 단호함을 품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되물을 것 같았다. 장시안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주였다. 3주의 공백을 깨고 전달된 말은 ‘알아서 하라’였다. 새로운 지령도, 정보도 없이.
호출에 응한 장시안은 서둘러 IOP 제조회사 사옥 S11 지부로 향했다. 5개월 전, 정규군 특수작전 사령부를 피해 모든 그리폰 병력의 도주 포인트로 설정되었던 그곳은 현재 IOP의 지원 하에 새로운 기지가 마련되어 사실상 그리폰의 사령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하통로로 곧바로 사옥으로 이동한 그녀는 엘리베이터 유리를 통해 사옥 밖에 벌써 몰린 기자들의 인파를 볼 수 있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압박에 뛰어들다시피, 약속 장소로 잡힌 회의실로 들어온 장시안을 맞이했던 건 회의실 화면 너머의 젤린스키와 힘없이 앉아있던 하벨이었다. 늦었다는 핀잔과 더불어 처리를 떠넘기는 선언 또한.
굳어버린 그녀를 대신해, 하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젤린스키 양반, 알잖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 IOP 측은 더 이상….”
[그리폰을 지원하는 건 불가능할 테지.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
현기증이 돌았다. 이제 두 번째 듣는 말인데도, 장시안은 자신의 눈앞이 모조리 무너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지원 중단. 중단이라.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지를 누가 제공했지? 인형들이 주둔하고 있는 숙소는? 정비는? 보급은? 저 짧은 두 단어의 조합은 너무나 날카로웠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모든 것을 잘라내는 단도처럼.
[따라서 앞으로의 활동에 필요한 기지와 설비는, 이 좌표에 있는 것을 쓰도록. 베오그라드에서의 활약에 따른 보상은 이것으로 제하도록 하지.]
곧바로 전송된 좌표에 대한 정보가 통신 화면 옆에 띄워졌다. 하벨의 미간이 급속도로 찌푸려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냔 식으로 되물었다.
“젤린스키 양반… 이것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겐가? 그들이 가진 모든 교통수단을 파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한낱 창고 따위에 몸을 뉘이란 말인가? 이게 자네가 ‘인재’라는 것을 사용하는 방식인가?”
[이곳에 ‘있는’ 물자를 사용하란 것이 무엇이 문제지? 애당초 우리는 그들을 책임질 의무가 없다. 함부로 유출해선 안 될 국가 기밀을 끌어안고 있는 한, 그리폰은 때에 따라 언제든 숙청할 수 있는 대상일 뿐. 더구나 현 시국에서 그들을 방조하는 것이야말로 편리한 일임에도, 안전국은 나름대로 공훈에 대한 포상을 치렀다. 불만인가? 테러리스트의 조력자.]
제법 매서운 질책에도 젤린스키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장시안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의 의견은 고려할 요소가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철저히 그녀를 배제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방에 그녀가 들어온 다음부터 줄곧. 간간이 하벨이 어떻게든 발언권을 넘겨주려 해도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가는 그의 태도는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지.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조사와 처리는 그리폰 측에 일임하며, 안전국은 현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사용할 설비를 넘기는 것 외에 어떠한 지원도 제공할 수 없다. 언론사의 조사가 들이닥치기 전에 신속히 이전 작업을 수행하도록. 이상이다.]
말이 떨어지는 즉시 통신이 종료되었다. 장시안은 그동안 단 한마디의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공기가 가라앉은 듯한 침묵이 내려왔다.
어색한 침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벨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렇게 됐네. 유감스럽게 됐구만, 그리폰의 지휘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의도하신 바가 아니니까요.”
장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서 있었다. 이 방에 남겨진 두 명 모두 자신의 역량을 넘은 문제에 부딪쳤고, 이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책임을 서로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 원인은….
하벨은 노구에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 봤다.
“이렇게… 진정으로 한 배를 타게 되었군. 부탁함세. 이제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언론의 추궁이 자네들까지 다다르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뿐인 것 같으니. 물론 지나 프로토콜을 비롯한 소프트웨어적인 지원은 여전히 해줄 수 있을 것일세. 안전국 또한 그 정도는 되어야 자네들이 조직으로서 최소한 존재는 할 수 있으리란 걸 알 테니.”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스스로의 말이 그저 낙관적인 추측에 불과하단 사실은 방금 젤린스키가 보여준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그 언동에서 현 상황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직감할 수 있었다.
IOP 제조회사, 인형 사업을 독점함에 따라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자신의 기업이다. 정부는 분명 이번 사건을 기회로 그 세를 눌러놓을 테지. 국가 전복을 꾀했단 말을 붙인다면 상황은 국영화까지 치달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도 정계를 오래 봐온 하벨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운명이,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의 이 지휘관에게 달려 있단 사실을.
“…하지만 젤린스키 양반이 말했듯, 앞으로 IOP는 그리폰&크루거 앞으로 어떠한 물자적 지원을 해줄 수가 없네. 기껏 제공한 기지 또한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야. 언론의 추적은 집요할 걸세. 훗날 그 추적을 떨쳐내어 자네들을 다시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그들이 꼬투리를 잡을 건덕지를 최대한 없애야만 하니까 말일세.”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권력이란 무형의 힘, 그것이 마비된 이상 하벨은 그저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럼, 슬슬 일어나겠네. 이제 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 늦기 전에 대응을 해줘야지 조금이나마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걸세. …부디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주게.”
그는 천천히 자리에 일어나 방을 나섰다. 절뚝이며, 금속 지팡이가 바닥을 음울하게 울리는 소리를 흘리면서. ‘IOP와 그리폰의 미래를 부탁하네’라는 말을 자신의 자리에 대신 앉혀놓은 채.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힘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애쓴다고 한들 자신의 역량을 넘는 거대한 일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휩쓸려오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해져야만 하는 걸까. 그만 좀 강해지고 싶은데. 지휘부로 돌아온 장시안은 힘없이 자리에 엎드렸다.
M4A1도 카리나도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서두르고 있었다. 각각 AR팀을 불러모으려고, 설비 이전 준비에 힘쓰느라. 그리고 그녀 또한 곧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큰 무게추에 매달려 짓눌리는 것 같아서.
도대체 뭘 부탁하는 거고, 무슨 진상을 파헤치란 걸까. 그동안 맞닥뜨린 사건은 최소한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 건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누구에게 총알을 소비해야 하는 건지 정돈 알 수 있었다. 이번엔 꼭 안개와 맞서는 것 같았다. 어디다 총을 쏴야 하는 건지, 애당초 총알이 통하기는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문득,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장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도로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것의 제목이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안젤리아. 짧은 이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메시지를 열람했다. 본래라면 베오그라드에서 만났어야 할 사람, 그 이름이 이것에 적혀있다면 혹시, 이 일 또한 그 사람과 연관이 되어있는 걸까?
메시지엔 내용이라곤 하나 없이, 첨부파일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저장과 함께 열람하자 이내 모니터에는 글자판이 꽉 채워졌다.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장시안은 이내 그것이 누군가의 ‘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른다. 무의식적인 현실 도피였던 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녀는 모니터가, 그 안의 글자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소년이 최초의 ‘신’을 마주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