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는 뜨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이 뜨였다.
두 눈이 보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어둠. 하지만 이곳은 결코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둠은 어느 샌가 단순히 꺼진 조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실체가 존재하는 장소가 되어 있던 것이다.
'여긴…?'
이데누마 토모에의 육체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무덤의 흙에 파묻히듯 어둠 속에 잠겼을 텐데, 어느 샌가 침대로 바뀌어 있다. 익숙한 담요의 감촉은 분명 여태까지 베고 눕던 그것이 맞으리라.
그 상황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꿈이었다고. 그것도 끔찍한 악몽.
아직 불은 켜지지 않았지만 빠르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주변 사물 정도는 인지할 수가 있었다. 늘 보던 방 안의 풍경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어김없이 보이던 형광등이 있다. 그리고 위로 뻗은 두 손이 보인다.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가 몸이, 옷자락이 만져진다.
옷차림은 분명, 의식 마지막 순간까지 입던 것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가방도 여전히 어깨에 걸쳐진 채 압력을 주고 있었다.
단순히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었을 뿐이라면 지금 자신의 차림새는 명백히 이상하다.
이 차림새로 맞이했던 그 상황이 현실이었다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거기서 쓰러진 자신을 방까지 옮겨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런 친절을 베풀어줄 사람이 자신한테 있었던가.
'이건, 현실? 아님 그냥 꿈?'
그렇게 주변을 인식해나가는 가운데, 낯선 실루엣 하나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바로 자신의 옆에서.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잘 잤니? 좋은 꿈은 꿨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신을 맞이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분명한데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얼핏 파악되는 실루엣은 어른이라기엔 체구가 작아보이는 느낌.
"당신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그 짧은 말을 통해서도 이데누마는 그 말투, 분위기로 누군지를 포착해낸다.
"설마…, 신님? 천사님? 악마님? 정말 당신인가요?"
"글쎄. 사람이야. 일단은."
그녀의 추측을 모두 부정했다. 하지만 벌써 그녀의 머리는 답을 내렸다.
"그 분이 맞군요."
"그럴지도. 다시 보게 되서 다행이야."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희미한 슬픔이 섞인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앞의 사람을 끌어안는다. 생각보다도 가녀린 어깨가 손에 잡힌다. 별다른 반응은 돌아오지 않지만 딱히 내치는 기색도 없이 그녀가 안기게 놔두었다.
"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리퍼 씨 말대로 후회라는 걸 해버렸어요. 모든 게 헛수고였다고, 역시 저한테 살 가치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였다고."
"가치는 본인이 깨닫는 거야."
"그런 거였죠. 죄송해요, 한 순간이라도 의심해서."
품에서 벗어난 이데누마는, 눈물을 닦고서 처음 들었던 의문을 묻는다.
"그런 제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삶의 끝은 언젠가 오게 돼있어. 그 끝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그 전에 스스로 끝을 낼지는 사람마다 자유라고 생각해. 후회를 하는 것도."
이 다정한 말투는 역시 기억 속의 목소리가 맞다고 이데누마는 판단한다.
무기질적일 정도로 변조되어 뜻만을 전할 뿐인 목소리가, 이번에는 제대로 사람의 목소리로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이렇게 품에 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어깨에 작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진다. 옷감 너머로 살짝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그 동안 정체를 의심해왔던 인물은 지금 이렇게 사람의 몸으로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누구인지, 뭘 하던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맞는지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기적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 자체로도 믿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헛수고라고 후회하기는 이른 게 아닐까?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걸지도 모르잖아."
살라고 한다. 그렇기에 지금은 되찾은 목숨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정말 괜찮을까요? 또 방황해버리면 어쩌죠? 당신을 의심하게 되면 어쩌죠? 기적을 허투로 날리면 어쩌죠? 정말로 더 살아가도 된다는 건가요?"
"그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도 돼."
이데누마는 아무 고민 없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한다. 스스로 생각하자고. 스스로 이 자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자고.
성자의 뜻을 세 번 어겼음에도 스스로 믿음을 증명하면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있다.
그 만한 각오를 이번에야말로 가질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해내기로 한다.
"혹시, 리퍼라는 애를 만나지 않았니?"
"네. 그걸 어떻게…, 아시는 분인가요?"
괜한 질문이었음을 이데누마 스스로 깨닫는다. 이 분께서 모르는 것 따위 있을리가 없을 테니.
"응. 내 동포거든."
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알고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데누마의 눈을 휘둥그레지도록 만들었다.
"제가 그런 분과 만났다니, 역시 운명이었네요."
"말은 그렇지만 뜻을 함께하는 건 아냐. 오히려 이해해줄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야."
"왜죠?"
"세상엔 저마다 다른 관념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따로 떨어져있는 동안 서로 다른 만남을 겪고, 다른 깨달음을 얻었어. 그래서 서로 다른 의지를 얻어버린 거야."
"이상하네요. 저 같은 애조차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동포였어야 할 그 분께서 이해의 여지가 없으셨다니."
만났을 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돌아온 리퍼의 말은 철저한 부정 뿐이었음을 떠올린다.
저런 분의 말씀으로조차 설득해내지 못했으니,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리라.
"네, 그럼 다시 한 번 당신의 설득을 도와달라는 거군요?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거겠죠?"
"괜찮겠니? 기껏 생긴 기적인데."
"그러기 위해 있는 거니까요."
확신은 혼란이라는 늪에서 그녀를 끌어오며 밝은 미소를 되찾아주었다. 광명을 되찾은 눈동자가 그 그림자 너머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품에 안기기 위해 육체라는 껍데기와 함께 나타나주신 분을, 한 순간이나마 의심할 뻔했다는 것에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걱정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손을 감싼다. 온기가 거의 없는 차가운 손이라도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지켜보기로 할게."
설령 빈말 뿐인 걱정일지 모른다 해도, 더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가슴 속을 데워주는 듯한 황홀한 기분은, 고립을 경험했던 그녀에게 새 삶의 의미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의미가 없는 삶이라면 되살아날 가치 따위 역시 없다.
"네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수고했다가오!"
"아, 수고하셨습니다."
이틀째 아르바이트 시간이 막 끝나고, 역시 열 몇 판의 듀얼을 거친 그녀의 어깨는 쳐져 있는 상태였다.
탈의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막 환복하려던 유노 곁에 직장 동료 한 명이 찾아온다.
주변에서 마찬가지로 접객 듀얼을 하고 있었던 사자 귀의 메이드. 업무 시간 동안에는 '아사가오'라고 불리는 여성이었다.
그녀 쪽이 유노보다 연상이었지만, 어차피 듀얼 이벤트를 위해 같은 시기에 모집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관계상 선후배라 할 것은 없다.
그러니 그녀는 업무 시간이 아닐 때면 친화적인 태도로 잡담을 걸어주고는 했다.
"왜 그래? 아까까지 그 늑대답던 패기는 어디로 갔나가오?"
"그거야, 그냥 캐릭터라고 해야 될지."
'캐릭터였구나, 그거.'
그녀는 업무 시간 내내 유노의 그 무뚝뚝하던 태도가 부적응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린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 태도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는 알고나 있을까.
"그리고 일하는 시간 끝났는데요 뭐. 굳이 그 말투 안 쓰셔도…."
"그치만 아직 아사 쨩은 사자 모습이니까가오. 짠, 이렇게 마법이 풀려야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그런 그녀의 말투도 사자 귀가 달린 카츄샤를 벗고 나서야 그나마 일반인 답게 돌아온다.
요란한 메이드복까지 한꺼풀 벗고 나니 그냥 밝은 분위기의 예쁘장한 언니로만 보일 뿐이었다. 다른 종업원 여성들이라고 대체로 다를 것 없었지만.
유노는 새삼 깨닫는다. 그녀는 컨셉을 진짜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구나 하고.
담당 분야만 다를 뿐 서빙 담당이던 고양이 귀 메이드하고 동류였던 모양이다.
"짧은 시간동안 고생 많았어. 오늘도 잘 하더라."
"아뇨, 아사 언니야말로. 오늘도 한 번도 안 지셨던 것 같던데."
여전히 상품 카드가 걸려 있는 만큼, 오늘 이벤트에 참여한 듀얼 메이드들은 더더욱 고된 혈전을 치뤄야 했다.
저번 승부 기록이 그 새 소문으로 돌았는지, 어디 있는 누가 무슨 덱을 썼는지 정보를 얻기라도 한 듯 작정하고 찾아온 도전자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이다.
실력의 고저차는 확연히 줄고 저격용 덱의 비중이 늘었다. 이를 예측한 듯 나름 덱을 조정해 온 메이드들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성과는 대부분 그리 좋지 못했던 모양이다.
전날 유노가 세운 연전연승 기록 역시 기어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의미로 피곤해지는 나날이었다.
승패가 딱히 수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승리에 겨워하던 상대의 반응이 어찌 그리도 얄미울 수가 있던지.
한 편 칸노 모토미라는 남자는 오늘 찾아오지 않았다. 단골이라고는 해도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 듯하니, 아직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밖에 없는 단계다.
무엇보다 참가권은 이벤트 동안 딱 한 번 살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그냥, 운이 좀 따라줬달까. 아슬아슬하게 지지만 않았을 뿐이야."
"그거야 어제 저도 그랬는데요."
어찌 됐든 그런 와중에도 아사가오는 무패의 전설을 유지해냈기에 유노는 내심 감탄한다.
자신의 듀얼에 집중하느라 구경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아쉬울 정도다.
"만약에 여기서 이벤트 열면 또 나오실 거에요?"
"글쎄. 확실히 옷은 귀엽고, 듀얼하면서 알바비 챙길 수 있는 것도 좋고. 근데… 뭐랄까, 본격적으로 듀얼하는 일을 하고 싶다 해야 되나."
"프로 듀얼리스트? 언니 정도면 가능하지 않아요?"
"에이, 만만하게 보면 안 되지. 지금 같은 일로 24시간 골머리를 썩혀야 되는 자리인데. 귀여운 옷도 없고."
'그건 알아서 꾸미면 되지 않나.'
설령 랭크가 높은 프로 듀얼리스트라고 해도 연전연승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서로 물어뜯는 난투장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웬만한 덱이 저격당한 상태임이 틀림없음에도 그걸 기어이 다 이겨낸 그녀야말로, 프로 듀얼리스트 자리에 몇 발짝은 더 가깝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만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라 유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너도 프로 자리 노리니?"
"네? 글쎄요…."
한 편 아이바 유노는 듀얼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되짚어 볼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본격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서. 듀얼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그래, 뭐. 일로 하는 건 재미하고는 별개이긴 하지. 특히 프로는 즐기면서 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디젠, 리퍼, 그리고 태스크 포스.
그런 것들과 엮일 일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과연 듀얼이라는 것에 손을 댈 일이 있기는 했을까.
그런 자신에게 듀얼은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목숨을 거는 일. 하물며 자신이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리퍼라는 다른 인격에게 전적으로 맡길 뿐인 일.
그런 일을 지켜보면서 나름 지식이 쌓이기는 했고, 태스크 포스 훈련 과정에서 시행되는 듀얼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거친 참이다.
그러나 보면서 연습하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을 서문유진과의 첫 대전에서 패배를 겪고, 나중에 도펠코프라는 자와 태그 듀얼을 하고나서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이 걸린다는 것부터가 충분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만, 카드라는 무기를 직접 들어야 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결정에 승패가 걸린다는 중압감을 맞이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도저히 즐길 수 있을리가 없다.
"그치만, 관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싶기도 해. 즐기면서 얻은 배움으로 즐기지 못할 일을 해나가는 것. 그건 분명 인생에 도움이 될 거거든."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서 겪는 승부. 패배해도 상관없는 자리에서 겪는 승부. 그것은 확연히 느낌이 다르다.
어느 쪽이든 져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기분은 같지만 후자 쪽은 그런 중압감이 없으니까. 그저, 지고 나서 왠지 분한 기분이 따를 뿐.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그 승부에 임하고 싶다는 오기가 따른다.
만약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표현한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듀얼몬스터즈는 어디까지나 게임이니까.
단지 선을 긋고자 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라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갖지는 말자고.
반대로 이런 자리에서는 즐겨도 되는 것 아닐까.
서문유진이라면 분명 그 기분을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기든 지든 즐길 수 있는 자리야 말로 좋은 시간이 돼준다고 봐."
"그렇군요."
그 말에 유노는 또 한 명을 떠올린다.
'조비스 씨도 그런 마인드였다는 거겠지.'
대기 직전까지만 해도 대회 출전까지 해서 듀얼을 하고 온 직장 동료가 있다.
마치 인생을 듀얼이라는 게임에 바친 사람 같았다.
어차피 같은 듀얼인데, 목숨을 몇 번 걸었다면 평상시에는 딱히 쳐다도 보고싶지 않을 텐데, 뭐가 그리 즐겁다고 또 듀얼을 못 해서 안달이었던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도 그런 즐거움을 이해시켜주려 했던 듯 보였다. 친절은 고맙지만 딱히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도 사실.
그렇게 해서라도 듀얼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단 말인가, 라고만 들었던 막연한 생각을 바꿀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 듀얼조차 그냥 학교 시험 치르듯 임했던 그녀는 잠시 반성해 본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잘 됐네. 여기서 또 일할 생각 있니?"
"글쎄요."
"하하…. 그렇겠지."
그러나 동물 귀 메이드복 만큼은 아직 생각을 더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 조합에 대한 의문이 풀릴 날은 언제쯤이 될 것인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냥."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 귀 메이드 선배의 배웅을 뒤로 하며 가게를 나온다.
아사가오였던 여성은 만일을 대비해 동행하는 일 없이 먼저 보내두었다. 그러니 그녀의 대화는 입밖으로 나오는 일 없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이루어질 뿐.
'무엇을 즐겁다고 여길지는 마음먹기 달린 것이다. 그런 말이겠지.'
'응.'
'일을 즐기지 않아도, 즐겁게 얻은 깨달음을 적용시킬 수는 있다. 진심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래보는 것도 좋겠지. 깊이 파고든 자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어.'
리퍼가 무엇에 공감을 표하는지, 유노는 곁에서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여느 인간과 다를 것 없이, 그 깨달음이 앞으로 그의 행동 지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래도 위험하군. 언젠가 그 일 자체를 즐겁다고 여겨버릴 가능성이 있을 텐데.'
'자칫하면 선을 넘어버리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 선을 넘어버린 사람들을 자신들은 사냥해 왔고, 앞으로도 사냥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불발탄이나 다름없는 것. 그것은 유노도, 그에 공생하는 리퍼도 다를 것은 없으리라 보았다.
'넘지 않는 것도 사람 마음에 달린 거지만.'
서문유진도 마찬가지. 특히 그 애는 그 선 위에 올라서있는 입장이다.
재버워키의 농간으로 선을 넘으라는 유혹에 시달리는 그 애를, 더 늦기 전에 구해줄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한 상태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귀찮은 것이 싫다면 그런 쪽이 더 효율적일 테니까. 그 애가 가진 디젠이 재버워키가 손수 전해준 물건이라는 것을 전해들은 이상 더더욱 구실을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 것을 묵살하고 자신만의 판단으로 계속 지켜보기를 택하는 것이다. 제 스스로 피로를 자처하는구나, 하고 유노는 자조한다.
물론 어떤 설득을 해도 어떻게 행동할지는 서문유진 본인의 마음에 달린 것. 만약 언제든 선을 넘어버리는 선택을 한다면 그에 맞는 처우를 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뚜벅뚜벅, 피곤한 발에 무게가 실린 탓인지 발소리는 유난히 더 크게 들려오는 듯 했다.
'그래도 잊지 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코 즐길 것이 아냐.'
'잘 알아. 리퍼도 잊지 마.'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리퍼가 머릿속에서 보내는 조언을 신호 삼은 듯 유노는 발을 우뚝 멈춰선다.
미세하게 발소리가 늘어지는 듯한 소리. 단지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칠 뿐인 것으로도 들리는 소리.
그것이 몇 번이 넘도록 들려오면서 유노는 감을 잡아버린 것이다.
곧이어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가는 방향을 바꾸었다.
질 나쁜 사람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라면 최악의 선택이었겠지만, 그녀는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간부로 '업무' 시간이 될지도 모르니까.
유노는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했다.
하필이면 모조 디젠을 빼놓고 나온 날에 바로 일거리가 찾아오다니. 리퍼로서 나설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코트를 갈아입을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이 보일 즈음에야 유노는 멈춰섰다.
보는 사람은 없다. 감시 카메라가 있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어차피 도미노 시티에 인접한 이 거리 대다수의 보안은 카이바 코퍼레이션이 관여하고 있을 테니, 분명 어떻게든 은폐를 해줄 것이리라 믿었다.
"누구야? 당장 나와."
예상대로 조심스런 발걸음이 들려온다.
"죄송해요. 집까지 따라가 드리고 싶었는데."
유노는 뚜렷해지는 그 모습을 살폈다.
양옆으로 땋은 검은 머리와 흰 피부, 그리고 장례식장이라도 찾아온 듯 검게 통일한 드레스 코드. 그런 가련하다 못해 어딘지 병약해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나이는 유노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을까.
적어도 칸노 모토미라는 남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런 그녀가 상냥한 미소로 인사한다.
"아이바 유노 씨, 맞으시죠?"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이런 식으로 인사할리는 딱히 없으리라.
그런 낯선 인물이 뭣하러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유노에게 불길한 예감밖에 떠오르지 않던 순간, 그 부드럽고 여린 목소리가 기억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한다.
ABC 대회 중에 그녀의 모습을 마주한 기억이 있었다. 차림새는 다르지만 그 때도 지금처럼 여전히 양옆으로 땋고 있는 헤어 스타일이었다.
'이데누마…, 그 사람이 어떻게…?'
전에 봤을 때보다도 강렬한 기척이다. 이 정도를 발산한다면 분명 멀리서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겠지. 어쩌면, 여태까지 느낀 수상한 기척은 저 사람이 가게를 기웃거렸던 탓일까.
유노는 자신의 의혹을 다시 다듬어 보았다.
그런 뜻하지 않은 재회에 유노의 얼굴이 굳은 것을 이데누마는 확인한다.
별로 반가워하는 반응이 아니었기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잠시, 이데누마는 소개를 마치고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았다.
"표정이 너무 안 좋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귀여우셨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이전까지 일하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일 터.
"나한테는 무슨 볼일인데?"
"리퍼 씨께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직접 뵙고 싶었거든요."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기적이란 누구나 주어질 수 있답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만남도, 저같은 사람의 귀환도."
터무니없는 일을 계속 맛보고 있는 가운데 더욱 터무늬 없는 일을 목격한 유노는, 이 상황의 전말을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어둠에 먹힌 사람을…, 되살릴 수가 있다고?'
그러나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당혹스러운 결론이 주어질 뿐.
그녀가 진짜 되살아난 이데누마가 맞다면. 이 생환이 기적이 아니라 자신이 예측한 그 자에게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이라면.
이런 자를 배제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자신들의 노력을 부정하다 못해 조롱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아직 판단할 요소가 남아 있었기에 유노는 일단 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실은, 리퍼 씨께 섭섭해하시는 분이 계세요. 겨우 만난 동포 분을 설득하고 싶으시다네요. 저 같은 애를 다시 찾으실 만큼 절박하신 모양이에요."
확실하다. 그 후보가 맞는 모양이다. 유노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재버워키가 보낸 거겠지?"
"재버워키?"
의외의 이름이었는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데누마는 몇 초 뒤에야 떠올린다.
"아, 그 대회의 개최자 분 말인가요. 그 분 이름이 왜?"
"리퍼에게 동포라고 헛소리 하던 녀석은 그것말고 없으니까."
"…그런 거였구나, 그러니까 그만한 수준의 놀이가 가능한 거였군요. 왜 저한테는 말씀을 안 해주셨을까."
정말로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다.
이쯤에서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구체적으로 부를 수 있는 먼저 이름을 알려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야기가 더 빨라졌잖아요."
"왜지?"
"저는 결심했어요. 아무런 의심도 망설임도 갖지 않기로. 이 일 하나만을 위해서 저를 되돌려놓으신 거라 해도 저는 거스를 생각 따위 없어요. 그것만을 위해 살라고 한다면, 저는 기꺼이 따를 거니까."
그녀는 가방에서 웬 신문지 뭉치를 꺼내든다.
뭉쳐진 신문지를 조심스레 풀어내니,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희미한 조명의 빛을 받아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챙겨온 모양이다.
그 날붙이를 양손으로 쥐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놓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더이상 그분의 근심을 늘리는 일은 자제해주세요."
그 모습에 유노는 식은 땀을 흘린 채 굳는다.
경찰을 기다릴 처지가 아니다. 더구나 상대가 날붙이 따위로 위협을 해온다면, 어설픈 호신술로 대처해봤자 명줄만 짧아지는 수가 있다.
그렇게 당황한 정신으로 침착하려 애쓰던 순간이었다.
'교대를', 이라며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노는 다시 정신을 다잡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즉시 자신의 육체를 움직일 권리를 그 목소리에게 양도했다.
빠르게 손목에 끼운 팔찌가 일시적으로 빛에 감싸인다. 그제서야 유노의 다물어진 입이 다시 열린다.
"…듀얼리스트의 무기는 덱이면 충분할 텐데. 그 정도로 이길 자신이 없는 거냐."
곧바로 태도가 돌변한 것을 확인한 이데누마는 오히려 더욱 화색을 띄운다.
"리퍼 님? 다시 나타나 주셨군요, 반가워요!"
"방금까지 꺼낸 얘기대로면, 더이상 구제의 여지는 없겠지. 아니, 그 때부터 이미 없었나."
"아무리 거절하시더라도, 저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해 같은 소리. 지금 널 움직이는 건 맹신이야. 믿고 따른다는 편리함에 취해서 생각을 포기한 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매몰찬 반응에 이데누마는 다소 서운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건, 좀 너무한 발언이 아닐까요?"
"뭐가 말이지?"
"아이바 유노 씨도 방금 당신을 맹신하고 몸을 맡기셨잖아요. 주제넘는 소리지만 파트너 분을 욕보이는 말씀이 아닐까 싶은데."
"……."
순간적으로 리퍼는 반박할 거리를 떠올리지 못했다. 비슷한 반박을 이미 들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이를 완전 부정할 근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은 무심코 그렇지 않다 생각할 만큼, 서로 굳게 믿고 계시는 거군요. 그렇게까지 일심동체할 수가 있다니, 궁극의 이해 관계란 거네요."
이데누마는 자신이 내린 결론에 황홀한 반응까지 지어보이며 동요한 모양이다. 이를 토대로 뒤이을 자신의 발언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런 당신도, 유노 씨도 생각없는 껍데기 따위가 아니잖아요. 서로 마찬가지에요. 믿고 따르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 구도자인 셈이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고 챙겨온 나이프라지만, 정작 이것이 정말로 누구를 다치게 하는 결과는 없기를 바랐다.
싸우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화합이야말로 이상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리퍼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적대적인 태도만을 보일 뿐이다.
여전히 어떻게든 자신을, 그녀를 보낸 은인마저도 부정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전부터 생각했어요. 어째서 같은 믿음을 갖고도, 사소한 의견 차이로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는데. 사람 목숨을 장난으로 여기는 녀석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지."
방금 발언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기에 이데누마는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장난?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분은 이해해 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인걸요."
"너같이 구원을 찾던 사람을 내다버린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이해를 바란다고?"
"…그럴리가."
얼핏 평온해보이던 이데누마의 표정에 드디어 당혹이 서리기 시작한다.
그는 이해를 비추는 척은 커녕 의심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게임이 끝났을 때 스스로 증명했지. 남의 목숨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우월감에 취한 녀석일 뿐이라는 걸. 자기 쾌락을 채우는 것만이 목적이란 걸."
"아니에요."
"그 게임에 불려온 너도, 다른 참가자들 모두 그 쾌락을 위해 게임에 불려온 장기말에 불과했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어둠에서 끄집어내준 은인이란 녀석의 말을 따르고 있지. 이상하다는 생각도 포기한 채. 지금의 넌 생각없는 꼭두각시야. 계속 믿고 따라봤자 다시 어둠에 버려지는 결말 뿐이겠지."
"그럴리 없다고!"
이데누마가 언성을 높이면서까지 부정한다.
동시에 순간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 뻔한 사실에 스스로 당황했다.
"…죄송해요. 왜 그런 말씀을…"
그런 부정에도 잠시간의 침묵이 있을 뿐, 리퍼는 아직 비난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
"…그 때 네가 말했지. 더이상 두려움은 없다고. 어둠이 네 무덤이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진짜 그 결말을 맞이해 본 기분이 어땠지?"
"……."
"분명히 난 확인했어. 패배를 앞두고서 두려워했다는 걸. 네 녀석도 다를 것 없었다는 얘기지."
"아니, 아니라구요."
"넌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냐. 외면할 뿐이지. 어둠에 적응했다고 착각하면서 도망칠 곳이나 찾는 겁쟁이일 뿐이야."
"아냐!"
다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이데누마가 그대로 손에 쥔 것을 앞세우며 뛰어들려는 순간, 리퍼는 아직 차지 않은 D-패드를 던져서 반격한다.
날아오는 물체에 맞은 충격으로 나이프를 놓친 직후, 리퍼는 바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뒤틀어서 제압해버렸다.
가벼운 금속음과 함께 나이프가 바닥을 굴렀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위한 무기마저 놓쳐버린 이데누마에게, 리퍼는 또다시 비난을 가할 뿐.
"어둠을 즐긴다는 뜻에 따른 순간부터, 네 녀석은 멈출 기회를 진작에 내다버렸지. 그런 녀석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든, 우리한테 무슨 말을 꺼내든, 곱게 돌려보낼 생각 따위 없어."
"…역시, 남의 이해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팔이 꺾이는 듯한 고통을 견디며, 이데누마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런 흉기로 원치 않는 위협을 가해도 이 자들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정말 저런 것으로 해를 가했다간 이들의 이해를 구할 가능성은 영영 멀어져버릴 것이다.
불필요한 준비를 해버렸다는 것에 반성하기로 한다.
"알겠어요. 당신이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걸, 이 자리에서 치루면 되는 거겠죠."
리퍼의 말대로였다. 듀얼리스트의 무기는 덱이면 충분한 것이니까.
지금 남아 있는 소통의 수단이 그런 것 뿐이라면, 마다할 여지는 없다.
"대신 상대하는 건 내 쪽이야."
"…네?"
결론이 난 것이라 생각한 일에 다시 변수가 닥치자 이데누마는 가볍게 당황을 드러낸다.
팔이 풀리고서 그 모습을 다시 확인해보니, 어느 샌가 그 눈매는 몸뚱아리의 원래 주인이 보이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어째서?"
"내가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저… 아까 그 말 때문인가요? 오해하셨다면 죄송한데, 전 당신더러 리퍼 님만 믿고 도망치는 비겁자라 비난할 생각 따윈 없어요. 믿는 분께 뒤를 맡긴다는 선택은 신뢰의 증거인걸요."
"그래. 그러니까 리퍼가 나한테 맡긴 거야."
"……."
기껏 되찾은 미소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녀는 서운함을 가득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까지, 저한테 이해를 구하지 않으려는 거군요."
"맞아, 당신 이해할 생각 따위 없어. 우리 둘 다."
변함없이 독기 어린 대답에 이데누마가 잠시 입술을 깨문다.
"역시 저같은 사람한테는 그 분밖에 없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분에 따른다는 선택이야말로 정답이었던 거에요."
"그런 극단적인 심리에 빠지니까 그 꼴이 되는 거잖아."
"…."
"혹시나 동정을 바라는 거면 꿈도 꾸지 마. 리퍼가 질리도록 말했겠지만 당신 구제불능이니까."
이쯤 되면 또 성질을 내보라고 도발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큰 실례를 끼쳐버린 이상, 여전히 온전한 소통을 원하는 입장에서 감정 싸움이나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반성하면서 더더욱 이성의 끈을 붙잡는 수밖에 없다.
"당신도 동정이 필요하신 것 아닌가요?"
"천만에. 주변을 다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어도 지금 내 생각을 포기할 일 없어."
"그랬군요. 마침 저도 그런데."
"……."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어느 샌가 이데누마는 또다시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제 선택을 정하는 건 결국 저니까. 당신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저 역시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그 분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그리고 당신들께 다가가기를."
유노는 던졌던 D-패드를 다시 주워든다. 다행히도 고장나거나 액정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
"결과는 똑같을걸."
"운명을 감히 예상하는 건 소용없다고, 당신들 덕분에 깨달은걸요. 그러니까 모르는 거에요. 시작도 안 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잔말말고 덤벼."
여전히 압박을 가하는 유노의 말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각자 D-패드를 장착한다. 듀얼 디스크가 세팅되면서 두 사람의 결투 준비는 끝나 있었다.
리퍼 대신에 듀얼에 나서기로 했으니 그가 사용하는 덱을 꺼내기는 곤란하다.
리퍼 전용 듀얼 디스크가 아닌 지금 이 D-패드에도 만일을 대비해 그의 덱 데이터가 내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이는 리퍼가 육체에 현현하는 순간에만 뇌파에 반응하여 해금되는 극비 카드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리퍼로서의 뇌파가 외장 하드디스크마냥 D-패드에 데이터를 불러올 수 있도록 되어 있기에, 외부와의 접속이 원천차단된 영역 내에서도 그 덱으로 듀얼을 치룰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그 덱이야말로 리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혹시 생각이 바뀐 거면…'
'아니, 괜찮아.'
대신 유노는 아르바이트 때 사용했던 덱 중 가장 사용 빈도가 적었던 것을 고른다. 어차피 어떤 덱이든 틈틈히 정비를 해두었거니와, 그녀가 가게에서 자신을 지켜보기라도 했다면 되도록 전략이 덜 노출되어 있는 편이 나을 테니.
이럴 경우를 대비해 실물 카드가 들어 있는 덱 케이스도 지참해둔 참이다. 걸리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어도 그것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리라 보았다.
'"듀얼.""
[데누망: LP 8000, 패 5장]
[아이바 유노: LP 8000, 패 5장]
"저부터 시작이네요. 마법 카드 '트레이드 인'. 레벨 8의 '대천사 크리스티아'를 묘지로 보내고 2장 드로우. 그 다음 '어둠의 유혹'. 이번에도 2장 드로우하고 패에 있는 어둠 속성의 '비극의 데스피아안'을 제외할게요."
시작부터 활발하게 패를 교환하는 가운데, 유노는 방금 귀에 들어온 테마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
굳이 '데스피아'라는 테마를 골라온 것은, 역시 재버워키의 손길이 닿은 영향이었을까.
"계속해서 '비극의 데스피아안'의 ①의 효과로, 덱에서 '데스피아' 카드인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를 가져오죠."
[데누망: 패 6장]
"그럼 '알베르'를 소환. 효과로 '데스피아' 마법 카드인 '낙인극의 성 데스피아'를 가져오고 발동. 패에 있는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타락천사 스펠비어'를 묘지로 보내고, 레벨 '8의 '혁작룡 마스카레이드'를 융합 소환하겠어요. 융합 소재가 된 '드라마트루기아'는 필드로 특수 소환."
[데스피아의 도화 알베르: 천사족 / 어둠 / 레벨 4 / ATK 1800 / DEF 0]
[데스피아의 드라마트루기아: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3000 / DEF 1500]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데누망: 패 3장]
익숙하고도 기괴한 성 아래, 재버워키와의 대결에서 유진이 상대해야 했던 적수들이 지금은 자신을 맞이하고 있다.
"이어서 마법 카드 '타락천사의 계단'. 묘지에 있는 '타락천사'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가 있어요. 이걸로 되살린 '타락천사 스펠비어'는, 특수 소환시 묘지의 천사족을 또 되살리는 효과가 있죠."
[타락천사 스펠비어: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900 / DEF 2400]
[대천사 크리스티아: 천사족 / 빛 / 레벨 8 / ATK 2800 / DEF 2300]
[데누망: 패 2장]
'데스피아' 테마가 재버워키가 쓴 카드들임을 그녀가 알고는 있을까. 어쩌면 그 본인이 직접 전해준 카드일지도 모른다.
"'대천사 크리스티아'가 있으면 특수 소환을 못하니까,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카드 1장을 세트하고 턴을 넘겨드리죠."
"'종언의 카운트 다운'은? 그건 안 쓰는 거야?"
"네. 막연히 끝을 기다려서야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덕분에 절실히 깨달았으니까요."
"그래. 그럼 내 턴."
[아이바 유노: 패 6장]
[데누망: 패 1장]
유노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은 결과, 데누망은 첫 턴부터 몬스터 존을 가득 채워놓았다.
무슨 효과를 쓰려 해도 '마스카레이드'에 의해 LP가 차츰 깎여나갈 것이고, 엑스트라 덱에서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면 1번은 '드라마트루기아'에 의해 무효가 되어버린다.
애초에 '크리스티아'가 있는 이상 특수 소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세트 카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더 불리해질 수도 있다.
익숙한 압박감이긴 하지만, 바꾼 덱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저 포진을 대처하지 못하고 허투루 턴을 넘긴다면 그대로 끝장이리라.
"메인 페이즈 개시시, 마법 카드 '욕망과 졸부의 항아리'를 발동. 엑스트라 덱의 카드 6장을 무작위로 제외하고 2장을 드로우."
[아이바 유노: LP 8000 → 7400]
[데누망: 패 7장]
뒷면으로 제외된 카드들을 빠르게 확인해보니 당장의 전개에 필요한 카드들이 갈려나가는 일은 없는 것을 알고 안심한다.
더욱이 대책이 될 카드가 패에 잡혀준 덕분에 그녀의 기세가 꺾이는 일은 없었다.
"'명왕결계파'. 이걸로 당신 필드의 몬스터 효과는 이 턴동안 무효야."
[아이바 유노: LP 7400 → 6800]
유노에 필드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데포르메된 듯한 사람 얼굴이 달려 있는 머리 크기만한 혼령. 그런가 싶더니 손에 쥐어짜이듯 갑작스런 압력에 의해 쥐어짜인다.
이를 신호삼아 찌그러지는 그 얼굴의 주둥이로부터 거센 빛줄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빛줄기가 데누망의 필드를 차지한 몬스터에 골고루 내리쬐이면서 그들은 기력을 빼앗긴듯 경직한다. 이걸로 몬스터 효과는 대처 완료.
"그걸 쓰시다니. 역시 좋은 카드죠?"
"그러네. 다음은 마법 카드 '천공의 성수'. 이걸로 덱에서 필드 마법 '천공의 성역'을 발동한다."
[아이바 유노: 패 5장]
유노의 주위 풍경을 차지한 불길한 어둠이 걷히고, 탁 트인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그리고 솜털처럼 새하얀 구름 사이에 세워진 오래되어 보이는 신전이 한 채. 서로 다른 분위기의 하늘과 건물이 마주보며 자리잡고 있었다.
유노가 불러낸 신전의 돌바닥을 건너 입구 밖으로 굽어내린 계단 끝에는, 발이 닿을리 없는 구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하늘 아래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그곳이 천사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라는 듯이.
"그 쪽도 천사를 부르실 거군요. 역시 통하는 게 있었어."
"패에 있는 '생명의 대행자 넵튠'의 ①의 효과. 자신을 버리고, 패에서 '대행자' 몬스터 하나를 특수 소환한다. '창조의 대행자 비너스'."
[창조의 대행자 비너스: 천사족 / 빛 / 레벨 3 / ATK 1600 / DEF 0]
[아이바 유노: 패 3장]
"'비너스'의 효과. LP를 500 지불할 때마다 '신성한 구체(홀리샤인 볼)'를 특수 소환한다. 3마리를 특수 소환."
[아이바 유노: LP 6800 → 5300]
[신성한 구체: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500 / DEF 500]
[신성한 구체: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500 / DEF 500]
[신성한 구체: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500 / DEF 500]
정숙한 인상의 여신이 감던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필드에 만들어진 빛 덩어리는 세 구.
이걸로도 소재는 충분하지만, 아직 남은 패로 더 끌어모을 수가 있었다.
"'구체' 2마리를 소재로,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대행자의 근위 문'을 링크 소환."
[대행자의 근위 문: 천사족 / 빛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문'의 ①의 효과로, '천공의 성역'과 관련된 카드 1장을 묘지로 보낼 수 있어. '마제스티 히페리온'을 묘지로. 그 다음 ②의 효과로 천사족 몬스터인 나머지 '구체' 하나를 릴리스. 상대 필드에 있는 카드를 1장 파괴한다."
아이의 모습을 한 천사가 손바닥 위에 띄우고 있던 거울이 빛을 띄기 시작한다. 빛은 이윽고 광선으로서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대상으로 지목된 '드라마트루기아'에게 발사되었다. 맞은 몬스터의 모습이 그대로 분쇄되며 사라진다.
"'문'과 '비너스'를 소재로, 링크 3 '셀레스티얼나이트 로드파샤스'를 링크 소환!"
[셀레스티얼나이트 로드파샤스: 천사족 / 빛 / LINK-3 / ATK 2400 / 링크 마커 ↙↓↘]
선봉에 먼저 선 것은 푸른 갑옷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몸을 둘러싼 천공 기사.
또다시 저번 듀얼과 겹치는 카드가 보이자 반응을 드러내려던 데누망은, 어차피 또다시 무시당할 것이 뻔하기에 자제하기로 한다. 아직 때가 아니기도 하니까.
"그 다음 '신비의 대행자 어스'를 소환."
[신비의 대행자 어스: 천사족 / 빛 / 레벨 1 / ATK 0 / DEF 600]
"'어스'의 ①의 효과. '천공의 성역'이 있는 상태에서 소환되면, 덱에 있는 이 카드를 가져올 수 있어. 그럼 묘지에서 '대행자' 몬스터인 '넵튠'을 제외하고 이 카드를 특수 소환한다. 별을 이끄는 힘을 가진 태양신, '마스터 히페리온'!"
[마스터 히페리온: 천사족 / 빛 / 레벨 8 / ATK 2700 / DEF 2100]
찬란한 황금 장식의 갑주로 무장한 거인이 하늘로부터 군림한다. 그 갑주의 뒷편에는 불꽃처럼 붉게 타오르는 날개가 창공을 휘적이고 있었다.
다가갔다가는 재조차 남지 않을 법한 열기와 빛을 동반하는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의 화신을 자칭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제외된 '넵튠'의 ②의 효과로, 덱에서 2장째 '천공의 성역'을 패에 추가."
[아이바 유노: 패 3장]
"'대행자'라. 태양계의 행성에서 따온 천사족 테마라는 건 잘 알죠. 저도 좋아한답니다."
"천사라서겠지."
"그럼요! 혹시 저를 위해 골라오셨어요?"
"글쎄."
"지금이라도 저를 구도하고 싶어지셨나요? 수용해주고 싶으신가요? 전에 제가 당신들께 그랬던 것처럼. 그런 거라면 굳이 이기려고 애쓰실 필요 없을 텐데."
"착각하지 마. 그 때하고 똑같아."
매몰찬 대답이 돌아와도, 그녀에게 미소를 거둬들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저한테 기다리는 건 그 때처럼 매정한 어둠이란 말이죠. 그러면서 빛나는 천사를 다루시다니, 이런 게 블랙 코미디란 걸까요?"
"코미디로도 못 쓸 소리네."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서 이데누마는 자기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좋아한다는 건, 그만큼 가까워지기 위해 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는걸."
"그래서?"
"그 카드가 '대행자' 시리즈의 에이스라는 걸 제가 모를리가 없죠. 그럼 여기서, 세트한 함정 카드 '배덕의 타락천사'를 발동할게요. 제 필드의 '타락천사 스펠비어'를 묘지로 보내고 '마스터 히페리온'을 파괴!"
수비로 버티고 있던 '스펠비어'가 갑자기 뛰어오르며 날아든다.
'히페리온'이 쓰려던 효과는 발동을 선언해야 하는 기동 효과이기에 이 타이밍에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즉,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충돌하며 공멸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기다렸답니다. 당신께서 전력을 다하시는걸."
'문'의 효과로 세트 카드나 '스펠비어'를 지정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음을 유노는 뒤늦게 깨닫는다. '로드파샤스'를 꺼낸 시점까지도 발동하지 않았기에 '히페리온'으로도 대처할 수 있으리라며 간과했던 것이다.
"………."
리퍼는 이 실수를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일부러 지적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다시 교대하겠나?'
방금 그 생각을, 머릿속에 자리잡은 리퍼는 읽어들인 모양이었다.
순간 유노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시 의존하려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안, 모처럼 기회를 줬는데. 정신 차릴게.'
잡념을 털어내려는 듯이 유노는 잠시 고개를 흔든다.
이래서는 리퍼가 기회를 내준 의미가 없어진다.
더구나 아직 전력을 꺼낼 기회는 남아 있다.
"패를 1장 버리고 '로드파샤스'의 ②의 효과. '천공의 성역'이 있으면, 덱에서 천사족 몬스터 하나를 가져올 수 있어. '수호천령 로가에스'를 서치. 그리고 천사족 몬스터의 효과가 발동했으니까, 패에 있는 '로가에스'를 특수 소환할 수 있어."
[수호천령 로가에스: 천사족 / 빛 / 레벨 7 / ATK 2400 / DEF 2100]
[아이바 유노: 패 2장]
"'로가에스'의 ②의 효과. 상대의 앞면 표시 카드 1장을 제외하고, 자신의 공격 표시 몬스터 1장을 수비 표시로 한다. '크리스티아'를 제외, 그리고 '로가에스' 자신을 수비 표시로 변경."
기껏 내보내는 전력들의 능력치가 상대 몬스터의 것에 미치지 못해도 상관없다. '명왕결계파'에 의해 데미지를 주지 못하는 지금은 전투 파괴나 효과로 인한 제거나 다를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 효과 제거가 가능한 몬스터를 연속해서 꺼내주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 대비를 유노는 진즉에 해놓은 상태였다.
"그 다음 묘지의 '문'을 제외하고, 묘지에서 '마제스티 히페리온'을 특수 소환!"
[마제스티 히페리온: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100 / DEF 2700]
파괴되었을 '히페리온'의 모습이 다시 필드로 나타난다.
다만 그 분위기는 어딘가가 다르다. 갑주를 수놓던 찬란한 금장식은, 은색으로 바뀐채 달빛과도 같은 은은한 광택을 띄고 있었다.
등 뒤로 뻗은 불꽃 날개 역시 뜨거운 붉은 색이라기보다는 불길한 자줏빛을 띄고 있다.
그 등장만으로 푸른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존재 자체가 햇빛을 가리는 그림자라는 듯이.
어둠 속에서 날갯짓하는 자줏빛 불꽃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양쪽이 서있는 하늘은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이것도 아름답네요. 종말이 왔다는 느낌이 최고에요."
"감상은 자유지만 아직 안 끝났어. '마제스틱 히페리온'의 ③의 효과. 묘지의 천사족 몬스터를 1장 제외하고, 상대 묘지의 카드를 제외할 수 있어. '천공의 성역'이 있으면 2번까지 발동할 수 있지. '신성한 구체' 2장을 제외하고, '타락천사 스펠비어', '배덕의 타락천사'를 제외."
'히페리온'이 양손을 앞으로 뻗는 순간, 그 사이로 태양계의 궤도를 형상화한 듯 원을 여럿 겹친 문양이 떠오른다. 그 선을 빛나는 구슬 2개가 나타나 빙빙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 직후 데누망의 듀얼 디스크에 있는 묘지 슬롯에서 카드 2장이 빠져나간다.
"그 다음, 레벨 8의 '마제스티 히페리온'에 레벨 2의 '어스'를 튜닝. 싱크로 소환. 빛과 어둠을 아우르는 한 쌍의 날개, '카오스 앙헬-혼돈의 쌍익-'!"
[카오스 앙헬-혼돈의 쌍익-: 악마족 / 어둠 / 레벨 10 / ATK 3500 / DEF 2800]
'마제스티 히페리온'이 '어스'가 만들어낸 빛의 기둥과 함께 사라지면서 하늘이 다시 걷힌다.
그리고 기둥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천사의 날개와 악마의 날개를 나눠서 달고 있는 기이하고도 웅장한 모습의 마인.
"이것도 아름답네요. '천사(Angel)'라는 이름의 악마라니."
"특수 소환된 '카오스 앙헬'의 효과. 필드의 카드 1장을 제외한다. 이걸로 '낙인극의 성 데스피아'를 제외."
'카오스 앙헬'이라는 이름의 마인이 양손에 모은 흉흉한 에너지를 전방을 향해 발사한다. 직격한 것은 다른 느낌으로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던 성 '데스피아'.
그것은 물리적인 붕괴를 일으키지 않은 채 깔끔하게 시야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그럼 배틀. '카오스 앙헬'로 '마스커레이드', '로드파샤스'로 '알베르'를 공격."
유노가 불러낸 몬스터들의 총공격으로 데누망의 필드는 전멸.
역전의 수가 마련되어가고 있는데도, 그녀의 입가는 오히려 황홀하기만 한 듯 미소를 한 가득 띄고 있었다.
"카드를 2장 세트. 턴 엔드야."
"그 전에, 당신 필드에 링크 몬스터와 싱크로 몬스터가 있으니까 묘지에 있는 '마스카레이드'의 ②의 효과를 사용하죠. 다시 제 필드로 특수 소환. 그럼 제 턴이네요."
[혁작룡 마스카레이드: 악마족 / 어둠 / 레벨 8 / ATK 2500 / DEF 2000]
[데누망: 패 2장]
[아이바 유노: 패 0장]
자신이 공들인 빌드를 치워버리고 든든한 빌드를 세워놓는다.
그 정도의 실력을 유노는 증명해보였다. 역시 리퍼라는 존재와 운명을 함께할 자로서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리퍼를 직접 설득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 역시 따라왔을 테지만, 상황이 반대가 되어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이것을 시련이라 받아들이고서 그녀는 또 한 걸음 나아가보기로 했다.
"마법 카드 '타락천사의 추방'. 이걸로 덱에서 다른 '타락천사' 카드를 가져올 수 있어요."
"카운터 함정 '신벌'. '천공의 성역'이 있을 때, 마법의 발동을 무효로 하고 파괴한다."
성역 안에서 변절자가 기어나올 수는 없다는 듯이, 갑자기 내려치는 벼락이 데누망이 발동한 마법 카드를 지져서 없애버린다.
이걸로 남은 패는 1장. 자칫하면 정말로 벼랑 끝이다.
"그럼 다른 마법 카드 '어드밴스 드로우'. 이걸로 레벨 8의 '마스카레이드'를 릴리스하고 2장을 드로우하죠. 그 다음 '선고자의 무녀(디클레어러 디바이너)'를 소환."
[디클레어러 디바이너: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500 / DEF 300]
[데누망: 패 1장]
새로 보충한 패에서 꺼내드는 것은, 하얀 후드를 뒤집어 쓴 신비한 분위기의 소녀. 그녀는 '무녀'임을 증명하듯이 신에게 올리려는 듯 기도하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리퍼가 이전에 치뤘던 데누망과의 듀얼에서도 유노는 그녀를 본 기억이 있었다.
"이런…!"
"네, 반갑지 않나요? 그럼 '디바이너'의 효과로 덱에 있는 '토리아스 히에라루키아'를 묘지로 보내고, 이번 턴동안 그 레벨만큼 자신의 레벨을 올리죠."
[디클레어러 디바이너: 레벨 2 → 11]
레벨을 올리는 것은 이 상황에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천사족 몬스터를 묘지로 보내는 것이야말로 목적일 테니까.
"계속해서 '디바이너'를 릴리스하고, 묘지에 있는 '토리아스 히에라루키아'의 ①의 효과를 사용. 제 필드에 특수 소환할게요."
[토리아스 히에라루키아: 천사족 / 빛 / 레벨 9 / ATK 1900 / DEF 2900]
'토리아스 히에라루키아'에게는 릴리스한 몬스터 수에 따라 추가 효과를 발휘할 수가 있었지만, 1장만 릴리스하고 꺼냈다면 돌아오는 것은 없다.
역시, 그녀에겐 '디바이너'를 릴리스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릴리스한 '디바이너'의 ②의 효과. 덱에서 레벨 2 이하의 다른 천사족 몬스터 1장을 특수 소환하죠. '이바'를 불러낼게요."
[이바: 천사족 / 빛 / 레벨 1 / ATK 500 / DEF 200]
"계속해서 천사족 몬스터인 '히에라루키아', '이바' 2장을 소재로, 링크 2 '실락의 타락천사'를 엑스트라 몬스터 존에 링크 소환."
[실락의 타락천사: 천사족 / 어둠 / LINK-2 / ATK 1500 / 링크 마커 ↙↘]
"묘지로 간 '이바'의 효과. 묘지에 있는 빛 속성 천사족 몬스터를 2장까지 제외하고, 레벨 2 이하의 빛 속성 / 천사족 몬스터를 패에 추가할 수가 있어요. '디바이너' 1장을 제외, 그리고 레벨 1의 '엔젤 01'를 가져오죠."
[데누망: 패 2장]
"이어서 '실락'의 ②의 효과. 패를 1장 버리고, 덱에 있는 '타락천사' 몬스터 1장을 패로 가져올 수 있답니다. 모셔올 분은 '타락천사 루시펠'. 그리고 레벨 7 이상인 '루시펠' 님을 다시 공개하고, 패에 있는 '엔젤 01'을 특수 소환."
[엔젤 01: 천사족 / 빛 / 레벨 1 / ATK 200 / DEF 300]
"'엔젤 01'의 ②의 효과로, 저는 레벨 7 이상의 몬스터를 추가로 어드밴스 소환할 수 있죠. 그리고 '실락'의 ①의 효과 덕분에, 천사족 몬스터의 어드밴스 소환에 필요한 릴리스를 묘지에 있는 몬스터 2장을 제외해서 대체할 수가 있답니다. 그럼 묘지에서 '알베르', '이바'를 제외."
데누망은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듯 심호흡한다.
"그리고 어드밴스 소환. 끝없는 하늘을 거스르는 세 쌍의 날개. 어둠과 함께 하며, 새벽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을 되찾기를! 그 이름은, '타락천사 루시펠'!"
[타락천사 루시펠: 천사족 / 어둠 / 레벨 11 / ATK 3000 / DEF 3000]
[데누망: 패 0장]
그녀가 불러내는 것은 검게 물든 3쌍의 날개를 펼치는 대천사. 그 날개와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와 색이 빠진 듯 탁한 백금발의 용모, 그리고 단정한 이목구비는, 분명 천사라는 존재를 연상시킬 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러나 표정이라고는 없는 얼굴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붉은 눈동자는 적의로도, 살의로도 보이는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어드밴스 소환에 성공한 '루시펠'님의 ①의 효과를 발동할게요. 상대 필드의 효과 몬스터 수까지, 패나 덱에서 '타락천사' 몬스터를 특수 소환할 수가 있죠. 당신 필드에는 세 분. 마침 남아있는 제 몬스터 존도 세 곳이네요."
[타락천사 이슈탐: 천사족 / 어둠 / 레벨 10 / ATK 2500 / DEF 2900]
[타락천사 네르갈: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800 / DEF 2500]
[타락천사 유코백: 천사족 / 어둠 / 레벨 3 / ATK 700 / DEF 1000]
'루시펠'이 진군의 신호를 보내듯 들고 있던 대검을 들어올리자, 그 동작에 발맞춰 제각기 다른 모습의 천사들이 어두운 날개를 펼치며 뒤를 따르듯 나타난다.
"특수 소환된 '유코백'의 효과로, 덱에 있는 '타락천사' 카드를 1장 묘지로 보내죠. 2장째 '타락천사 스펠비어'를 묘지로. 그리고 '루시펠' 님의 ③의 효과. 필드의 '타락천사' 몬스터 수만큼 덱에서 카드를 묘지로 보내고, 여기서 묘지로 간 '타락천사' 하나당 500 LP를 회복할 수가 있죠. 제 필드의 '타락천사'는 다섯. 따라서 5장을 묘지로 보내도록 할게요."
[데누망: LP 8000 → 10500]
묘지로 떨어진 카드 5장은 전부 '타락천사' 카드, 즉 2500 LP가 게이지에서 올라간다.
'이건 기적…. 그렇지만 그 카드는 없군요. 아직이라는 거겠죠.'
내심 아쉬움을 느끼는 데누망이었으나, 유노에게는 지금 상황만으로도 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소해버렸을 데누망의 필드가 빠르게 다시 복구되어버린 것도 모자라, 깎아내리지 못한 LP가 더 오르고 말았으니까.
그에 대비해야 할 자신의 필드 상황을 유노는 다시 살펴보았다.
어둠 속성 몬스터를 소재로 나온 '카오스 앙헬'이 있는 이상 유노의 몬스터들은 전투 파괴 내성을 얻는다. 더구나 '로가에스'에 '천공의 성수'까지, 전투 파괴에 대한 대책이 따로 존재한다.
여기에 '천공의 성역'이 있는 이상 천사족 몬스터에 의한 전투 데미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것은 상대에게 더이상 꺼낼 카드가 없을 때의 이야기.
"제가 불러낼 몬스터의 소환 조건은 효과 몬스터 4장 이상. 저는 '실락의 타락천사', '타락천사 유코백', '엔젤 07', 그리고 당신의 '카오스 앙헬'을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마커를 전개하는 도중에 갑작스레 자신의 몬스터가 소재로 지목된 것을 보고서 당황하는 유노.
"그건 설마…."
"아신다면 더 얘기할 필요 없겠네요. 네, 맞아요."
빛 속성 몬스터를 소재로 불러낸 '카오스 앙헬'은 몬스터 효과를 받지 않지만, 방금 데누망이 선언한 것은 소재 지정을 언급할 뿐인 '효과 외 텍스트'. 그렇다면 효과 내성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내용이 유노의 기억에 분명히 있었다.
"고립된 어둠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닿지 못할 태양과도 같은 기적. 그 현계를 이 자리에 뵙겠습니다. 링크 소환. '닫힌 세계의 명신(사로스=에레스 쿠르누기아스)'!"
[사로스=에레스 쿠르누기아스: 악마족 / 빛 / LINK-5 / ATK 3000 / 링크 마커 ↑↗→↓↘]
금빛 장식으로 꾸며진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신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엑스트라 몬스터 존으로 출현한다.
도도한 붉은 눈동자로 그 명계의 여신은 상대의 모습을 주시해왔다.
"'에레스'의 효과로, 상대 필드의 몬스터 효과는 전부 무효로 할게요."
유진이 재버워키와의 결전을 두고 준비했던 비장의 카드를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된 유노는, 어떻게든 침착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분명 나올 카드는 아직도 남았을 테니까. 벌써부터 움츠러들어서는 곤란하다.
"그 다음 LP를 1000 지불하고 '네르갈'의 ②의 효과를 사용. 묘지에 있는 '타락천사' 마법 카드 하나의 효과를 쓸 수가 있죠. 그럼 '타락천사의 계단'의 효과를 적용해서, 묘지에 있는 '스펠비어'를 특수 소환."
[타락천사 스펠비어: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900 / DEF 2400]
[데누망: LP 10500 → 9500]
"그 다음 레벨 8의 '네르갈'과 '스펠비어'로 오버레이. 그 강고한 창으로 새로운 결의를 드러내기 위해! 랭크 8 '소성의 기신(시오르페골) 딩기르수'를 엑시즈 소환!"
[시오르페골 딩기르수: 기계족 / 어둠 / 랭크 8 / ATK 2600 / DEF 2100 / ORU 2]
명계의 여신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기병의 모습을 한 거대한 기신.
"'특수 소환된 '딩기르수'의 효과. 상대 필드의 카드 1장을 묘지로 보내죠. 대상은 '로드파샤스'."
그 등장 직후, 천공기사의 육신이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흩어지며 사라진다. 이로써 남은 적은 하나.
'타락천사'들의 행렬이 무사히 이뤄진 덕분에 새로운 진영을 세울 수 있었던 데누망은, 가슴 벅찬 기분에 잠시 도취되었다.
"당신이 극복한 것처럼, 저도 극복이라는 걸 할 수가 있네요. 이건 기적일까요? 아니면 감히 제 스스로의 노력 덕분이라 해도 되는 걸까요?"
유노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되짚어본다. '천공의 성역'이 있다면 아무 조건 없이 무효화가 가능했던 '신벌'을, 너무 섣불리 써버린 탓이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타락천사' 카드의 증원을 차단한다면 남은 패는 1장, 만약 남은 카드가 '타락천사' 카드라 해도 당장 판도를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판단으로, 새로운 패를 마련해올 가능성을 간과한 채 내지른 결과가 이것이다.
"그럼 배틀, '이슈탐' 님으로 '로가에스'를 공격."
"지속 함정 '기적의 광림'. 제외된 천사족 몬스터를 특수 소환한다."
[대행자의 근위 문: 천사족 / 빛 / LINK-2 / ATK 1800 / 링크 마커 →↘]
묘지가 아닌 제외된 몬스터를 되살려 오는 것이기에 '쿠르누기아스'의 효과가 걸리는 일은 없다. 덕분에 벽 몬스터를 무사히 마련할 수가 있었다.
"그럼 다시 공격할게요. '이슈탐' 님의 공격 대상을 '문'으로 변경."
"…묘지에서 '천공의 성수'의 ②의 효과를 사용. 자신을 제외하고, '천공의 성역'과 관련된 몬스터의 전투 파괴를 무효로 한다."
"네, 그래야겠죠. 그 다음은 '딩기르수'로 다시 '문'을 공격."
성역의 가호로 여신의 공격을 한 번 막아낸 '대행자의 근위'였으나, 그 다음으로 '딩기르수'가 돌격하며 내지르는 커다란 랜스에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쿠르누기아스' 님으로 '로가에스'를 공격."
그 다음은 명신의 차례. 그녀의 지팡이 끝이 내뿜는 어둠이 '로가에스'를 집어삼키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당신 차례에요. '루시펠' 님의 다이렉트 어택!"
마지막 공격을 지시, 아니 간청받은 '루시펠'이 지켜줄 몬스터가 남지 않은 유노에게 날아들어 대검을 휘두른다.
[아이바 유노: LP 5300 → 2300]
아찔한 참격의 고통이 급습해오면서 유노는 잠시 주저앉았다.
두 동강이 나버릴 것만 같은 충격임에도 다행히 몸에 자상은 없다. 아직 듀얼은 끝나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서라도 일어설 수 있도록, 어둠은 시스템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카드 1장이라도 모자랐다면 분명 또 한 번의 공격을 받고 진짜로 끝이었으리라. 그랬다면 조금 전의 참격은 정말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들었을지 모르는 일.
더 큰 문제는 다음이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휑한 하늘의 신전 뿐. 다른 카드를 증원해올 수 있는 카드, 하다못해 벽이 될 몬스터조차 뽑지 못한다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 사실이 더욱 동요를 일으켰다.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 질문 역시 기억에 있었다.
분명 괜찮다, 라고 대답했다. 그렇기에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 선택을 자신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멈춰서 주저앉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역시 당신도 만만찮은 분이세요. 턴을 넘겨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럼 내 턴이야."
[아이바 유노: 패 1장]
[데누망: 패 0장]
"LP를 1000 지불하고, 마법 카드 '천공의 노랫소리'를 발동. 묘지의 천사족 몬스터 1장을 패로 가져온다. 나는 '마스터 히페리온'을 회수."
[아이바 유노: LP 2300 → 1300]
깎인 LP가 또다시 빠져나간다. 이렇게 서로간의 LP 차이가 더 벌어져버렸다.
묘지를 건드리기는 해도 특수 소환 효과가 아니기에, 이번에도 효과 자체는 '쿠르누기아스'의 감시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추가로 내 필드나 묘지에 '천공의 성역'이 있으면, 제외된 '천공의 성역' 관련 카드를 1장 더 패에 추가할 수 있어. '천공의 성수'를 회수. 그리고 묘지의 '문'을 제외하고, '마스터 히페리온'을 다시 특수 소환."
[마스터 히페리온: 천사족 / 빛 / 레벨 8 / ATK 2700 / DEF 2100]
"'마스터 히페리온'의 효과. 묘지에서 '로가에스'를 제외하고, '쿠르누기아스'를 파괴한다."
'쿠르누기아스'가 막을 수 있는 효과는 어디까지나 대상을 지정하지 않는 효과. 따라서 대상을 지정하는 파괴 효과에는 막을 방도가 없다.
그것을 데누망이 놔둘리는 없었다.
"그럼 1000 LP를 지불하고 '이슈탐' 님의 효과를 발동. 묘지에서 함정 카드 '신무리의 타락천사'를 제외하고 효과를 적용하죠. 이걸로 '히페리온'의 효과는 무효에요."
[데누망: LP 9500 → 8500]
파괴의 권능을 행사하기 위해 '히페리온'이 양손을 뻗으려던 순간, 그를 마주보던 '이슈탐'이 날개를 펼치더니 자애로운 여신처럼 빛의 세례를 쏟아낸다. 그에 감화되기라도 한 듯 '히페리온'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세례를 마치자, 결국 그 양손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일 없이 파괴 공작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효로 한 몬스터의 공격력만큼 제 LP를 회복할 수가 있죠."
[데누망: LP 8500 → 11200]
이걸로 격차는 더더욱 벌어진다. 하지만 유노는 차라리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순간에라도 견제책을 빼놓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 다음 회수한 '천공의 성수'를 발동. 이번엔 덱에서 '천공의 성역'과 관련된 카드 1장을 패로 가져온다. 2장째 '어스'를 서치. 그리고 필드에 '천공의 성역'이 있으면, 내 필드의 '히페리온' 한 마리 당 500 LP를 회복할 수 있어."
[아이바 유노: LP 1300 → 1800]
"'어스'를 소환. 효과로 덱에서 '파괴의 대행자 비너스'를 서치. 그리고 패에 있는 '파괴의 대행자'의 ①의 효과. 묘지에서 '창조의 대행자 비너스'를 제외하고 자신을 특수 소환."
[신비의 대행자 어스: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0 / DEF 600]
[파괴의 대행자 비너스: 천사족 / 어둠 / 레벨 3 / ATK 0 / DEF 1600]
필드에 튜너는 둘. 이걸로 선택지도 두 가지다. 어느 쪽을 소재로 이용해야 좋을까.
LP 차이가 이렇게나 벌어진 시점에서, 답은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레벨 8의 '히페리온'에, 레벨 3의 '비너스'를 튜닝. 종언의 때는 지금! 그 죄를 바로잡아 대적자에게 징벌의 철퇴를! 레벨 11 '사이코 엔드 퍼니셔'를 싱크로 소환!"
[사이코 엔드 퍼니셔: 사이킥족 / 빛 / 레벨 11 / ATK 3500 / DEF 3500]
천공을 누비며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마인. 금속질의 외골격에 구석구석 보이는 부품들로 둘러싸인 몸체는 그것이 인공적인 존재임을 암시했다.
'카오스 앙헬'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알려진 천사로서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뿔과 날개, 기다란 꼬리, 그리고 발톱은 아무리 봐도 악마의 것이라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것이 '징벌자'의 이름을 달고서 강림한 것이다.
"사이코 엔드 퍼니셔'의 ②의 효과. LP를 1000 지불하고, 내 필드의 몬스터와 상대 필드의 카드를 1장씩 제외한다. 대상은 '어스', 그리고 '이슈탐'을 선택."
[아이바 유노: LP 1800 → 800]
'퍼니셔'의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이슈탐'은 말 그대로 천벌을 받듯이, '어스'와 함께 벼락을 맞으며 산화되었다.
숭고히 여기던 타락천사가 사라지자 데누망이 흠칫하기를 잠시,
"배틀, '퍼니셔'로 '쿠르누기아스'를 공격! 그리고 배틀 개시시 '퍼니셔'의 ③의 효과. 서로의 LP 차이만큼 이 카드의 공격력을 올린다! 현재 차는 9900!"
"!?"
경이로운 숫자를 들은 데누망은 뚜렷한 당황의 기색을 내비친다.
그런 그녀에게 자비 따위는 내리지 않겠다는 듯이 '사이코 엔드 퍼니셔'는 온몸에 전격을 모아 에너지를 충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녹색 번개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다.
[사이코 엔드 퍼니셔: ATK 3500 → 13400]
"'스태그레이션 엔드'!"
마인은 응축된 번개를 적에게 내리친다.
명계의 여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그 힘에 저항할 여력은 없었기에, '쿠르누기아스'는 천지를 태워 없앨 기세인 낙뢰 속에서 단숨에 산화되어 버린다.
[데누망: LP 11200 → 800]
'천공의 성역'이 관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사족 몬스터의 전투 뿐. 공격하는 쪽도, 공격 받는 쪽도 모두 천사족이 아니기에 전투 데미지는 발생했다.
그 격렬한 여파에 이데누마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함께 휘말려 날아간다.
"윽, 끄흑……."
바닥을 구르면서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낀 이데누마는 잠시 격통에 신음한다.
기적으로 다시 태어난 몸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는, 몸에 부딪히는 아픔 하나 하나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거나 사방에서 발길질을 당하는 것도 이 정도 고통은 아니었을 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벌레 하나 죽이는 것도 겁내던 자신이 왜 이런 싸움을 택했을까. 다행히도 그 답을 잊는 일은 없었다.
그 분이 알려주신 길에 듀얼몬스터즈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해빠진 자신의 몸뚱아리가 아닌, 카드가 대신 소통의 장애물들과 부딪혀주니까.
왜 하필이면 카드게임일까. 감히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시련을 넘어선다는 과정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 분의 안배일 것이라 여기며 감사를 품은 그녀였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그 분의 뜻을 끝끝내 이해해주지 않았다. 갈 때까지 간 광인으로 몰아세우는 인간도 있었기에 힘든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자신과 같은 전언을 들었을 텐데도, 이렇게 전심전력으로 서로의 뜻을 나눈다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을 텐데도, 왜 아직까지 믿음을 부정하는지. 왜 싸워서 더 고통을 받는 길을 택하는지.
턴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공포로 경직되거나 일그러져갔다. 이데누마가 이해하기로는, 그들은 어둠을 영접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어둠을 마주하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은 자신 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품기에 이른다.
그리고, 진짜 어둠을 다루는 자를 만나면서 모든것이 부정당했다.
바닥을 구른 아픔이 그 순간을 또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 때'는 이런 순간이 정말로 끝이었음을. 얌전히 누운 채 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이에요."
잠깐동안 비틀거리는 다리를 어떻게는 바닥에 세우고, 살짝 휘청거린 끝에 그녀는 다시 선 자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처벌을 한 몸에 받아버린 지금도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다.
분명 이번에도 어둠이 기회를 마련준 덕분일 것이라 데누망은 믿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LP를 꾸준히 올린 덕에 아직 무사할 수가 있었으니까. '타락천사' 분들 덕분이죠."
[아이바 유노: LP 800]
[데누망: LP 800]
유노 역시 이번 일격이 끝이 될 수 없다는 계산은 있었다. '루시펠'의 효과로 '타락천사' 카드를 딱 1장만 덜 묻었더라도, 남은 LP는 바로 '딩기르수'를 공격해서 끝장을 낼 수가 있었을 터.
그러나 5장 전부가 '타락천사' 카드였다는 기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LP는 유노의 예상보다도 더 올라버렸다. '루시펠'을 공격해봤자 '천공의 성역'으로 인해 전투 데미지는 무효, '딩기르수'는 엑시즈 소재를 제거해서 전투 파괴를 피해갈 수가 있었기에, 남은 성가신 타깃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서로의 LP는 동등해졌지만, 데누망에게 남은 필드의 몬스터 2마리로는 '퍼니셔'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저릿해오는 고통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데누망의 입술은 또다시 웃음기를 띄운다.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같은 눈높이에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이라 본 것이다.
"아쉬우신가 봐요."
방금 전의 선택이 최선이었던 것이라며 스스로 타협해보는 유노에게 데누망은 다시 말을 걸어본다.
"글쎄."
"방금 전에는 기뻐하시던 것 같던데."
"그럴리가."
"제 말은, 곧 있으면 끝이라는 성취감 같은 게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듯이 유노는 이번에도 입을 다문다.
"그렇군요. 제 뜻을 전할 수만 있다면 이기는 쪽이 누가 되든 상관없답니다. 저를 밟고 지나가셔도 딱히 상관 없어요."
리퍼가 살폈던 것처럼, 유노 역시 그녀에게서 엿볼 수가 있었다. 끝을 맞이하는 것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남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에 재미들린 주제에, 끝까지 스스로의 모순을 외면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들을 가치가 없는 헛소리 따위 끝까지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다. 아르바이트 시간동안 대면하면서 들은 온갖 이상하고 짜증나는 발언들을 대충 흘려넘겼듯이.
더이상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쩐지 입을 다물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당신이 얼마나 어둠에 심취했는지는 잘 알겠어."
"네, 알아주셔서 고맙네요."
"당신 같은 사람 수도 없이 봤으니까. 지긋지긋하고 남 눈치나 봐야 되는 그런 인생을, 전부 어둠이 해결해줄 거라 믿고 있더라고. 전에 봤던 당신도 다를 것 없어보였고."
"그랬던가요?"
"세상이 끝나는 걸 보고 싶었다느니 뭐니 했잖아."
얼마 지나지 않았을 그 순간이 이데누마에게는 벌써 아련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세계 종말이라는, 두렵고도 한편으로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순간에 대한 동경.
비록 끝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었지만,
"그런 말도 했었지, 당신. 어둠은 누구나 갖고 있는 거라고. 디젠 같은 물건이 없어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걸 다 없앨 수는 없는 거라고."
실언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자신의 말들을 다 기억해준 것이, 이데누마에게는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네."
유노는 잠시 차고 있는 팔찌를 어루만진다.
"나도 딱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 없어."
"이해해주시는 건가요?"
"이해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애매한 대답이, 감격에 겨우려 했던 이데누마에게는 살짝 불편하게 다가온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시죠?"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겹치는 걸지도 몰라. 당신이나 나나 인간이니까. 그런 게 이해라면 이해란 거겠지."
"그렇군요. 그럼 서로 이해의 여지란 건…."
"그래, 정정할게. 있을지도 몰라. 따지고 보면, 하는 짓도 그렇게 다르게는 안 보이겠지. 누군가한테는."
계속해서 부정적인 대답만을 들어온 데누망은, 의외의 대답에 환한 눈빛이 다시 돌아온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대답해주셔서 다행이네요! 그럼 굳이…"
"아니, 듀얼은 속행이야."
"어째서요?"
"말했을 텐데. 당신이 포기할 생각 없는 것처럼, 나도 내 뜻을 바꿀 생각 없다고."
얼굴에 드러난 일말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르지 않다면서…. 그럼 왜 굳이 그런 말씀을…."
"당신이 받아들이고 가까워지려 드는 건 우리한테 적이니까. 그 녀석이 전하는 뜻인지 뭔지를 우린 절대 받아들일 생각 없어. 몇 번을 물어도 똑같아. 근데 그러고도 당신은 포기할 생각이 없겠지."
유노의 뜻은 이미 확고했다.
납득하지 못할 상황에 고통받고도 버틴 끝에 어둠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있다. 서문유진은 자신을 믿어주고서 그 길을 관철해주었다.
그러니, 어둠은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라는 믿음이 가능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기에 이겨낼 생각을 포기하고 받아들인 채 사도를 걷는 이는 용서할 가치 따윈 없다.
그런 생각으로 유노는, 리퍼에게 몸을 내줌으로서 이 자를 한 번 배제해버렸다. 그런 일을 한 번 더 하는 것일 뿐이다.
"그건 그렇지만, 싸울 이유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잖아요. 분명 온전한 대화가 있으면…"
"온전한 대화? 그러면서 칼 같은 걸 챙겨 와?"
"………."
데누망의 대답은 유노의 지적에 의해 끊어진다.
"애초에, 대화를 하는 데에 이런 딱지 싸움이 필요해?"
상식에 기반한다면 그 지적을 반박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당신, 자기가 하는 짓이 이해받지 못할 짓이라는 거, 사실은 알고 있던 거지?"
"그야 그 동안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될리가 없잖아.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도 외면하는 상대의 말을 어떻게 들으란 건데?"
"잘못됐다니, 지금 제가 어때서 그렇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것만 같은 중압감을 마주한다.
거기에는 살을 넘어 심장까지 꿰뚫어버릴 듯한 가시밭길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 앞에는 한 번 발을 들였다간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정해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져나와서 이렇게 서 있기에, 분명 자신에게도 반박할 가치는 있는 것이리라 믿고 싶었다.
"목숨 건 듀얼을 해대면서 이해를 운운한다는 게 잘못 된 게 아니면 뭔데?"
거 봐, 역시 있잖아.
데누망은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낀다.
"당신들은요? 목숨 건 듀얼을 해대는 건 피차일반일 텐데. 적을 찾아다닌 건 당신들도 다를 게 없으면서, 당신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각은 없는 건가요?"
무의식적으로 각오해야 될 것만 같았던 질문이 다가온다.
그러나 유노는 어렵지 않게 받아칠 수 있었다.
"엇나간 것들한테 이해를 바란 적 없으니까."
"엇나간 것… 이요."
"당신도 자각은 없겠지."
아, 어쩜 저리 오만에 찬 대답이 있단 말인가.
역시 이 자에게 동정의 시선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럼요. 저는 엇나갈 뻔한 거지, 엇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 분'의 뜻이라는 걸, 그렇게나 믿고 따르는 거구나. 이해니 대화니 하는 것도 '그 분'이라는 녀석이 시킨 거야?"
"말씀은 꺼내셨지만, 직접 찾아온 건 온전히 제 뜻이거든요."
"흉기까지 챙기면서 말이지. 그럼, 그 녀석 뜻대로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당신한테도 있었다는 거네."
데누망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이번에는 음해라니. 자신만의 잘못을 가지고 같이 끌어내리려 하는 건 용납하기 힘들다.
"그럴리가, 제가 그 분 뜻을 의심할리는…."
"나한테 이것밖에 없다, 당신이 아까 그런 소릴 했잖아. 그런 건 진짜 이해가 아냐. 체념하고 받아들인 거지."
"그러니까…"
"생각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니. 그게 당신 진심이라면 어쩔 수 없어. 꼭두각시한테 더 볼 일 없으니까."
이데누마는 잠시 눈을 질끈 감는다. 또다시 입술을 깨물고 손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다시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에요? 구해줄 생각도 이해할 생각도 없으면 뭐하러 이런 얘기를 꺼내요? 무슨 설교를 하시겠다고요? 저보고 어쩌라는 건데요? 네?!"
"당신 같은 인간이 뭔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야겠다 싶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게 이해란 거잖아."
"지금 장난하시는 거…."
"나야말로 따지고 싶은데. 제대로 이해하고 이해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어떻게 대화 같은 소릴 꺼낼 수가 있지?"
또다시 대답이 가로막힌 채 끊겼다. 잠시 뒤에야 반문의 대답이 힘겹게 이어진다.
"그, 그럼… 당신은…."
"난 대화하려는 게 아냐. 당신 말대로 '심판'이라는 걸 할 거야. 그리고 그건 아직 안 끝났어."
방금 전까지 실컷 이야기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일까.
왜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하는 것일까. 세상은 왜 다 이런 식일까.
자신에게 갑자기 닥치기 시작한 냉대가 무엇 때문인지, 여전히 이데누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범하게 친하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돌변할 수가 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일까. 어딘가 쓸데없이 돌출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들에게 만만하게 깔아뭉갤 사람이 필요했을까.
무엇을 생각하든, 그렇게까지 바뀌어야 될 이유라고 생각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서운한 감정이 북받치다 못해 눈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런 경험이 여태껏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참든 참지 않든 결과는 다를 것 없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우는 모습은 꼴사납다는 소리나 들을 뿐이고, 울음을 참으면 참는대로 모진 취급이 이어진다.
뭐가 됐든 자신은 눈밖에 나버린 인간일 뿐이니까.
하지만 데누망은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그런 점을 떠보고 페이스를 무너뜨리려는 심산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맞받아쳐줘야 한다.
"알았다. 당신이나 저나 다를 것 없는 걸 인정하신 거죠? 그런데 자기는 적어도 선은 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날 없애는 건 정당한 일이다, 그런 말씀이 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거겠죠?"
"맞아. 앞으로도 이런 일 즐기지도 않을 거야. 당신을 없애버릴 거고, 당신한테 생길 일말의 미련도 다 떨쳐버릴 거야. 전부 맞는 말이네."
"………."
눈에 서리는 핏발과 함께 서러움은 분노로 변해간다.
그대로 목 너머까지 차오르려던 말을 내뱉기 직전이던 이데누마는, 이성의 제재 덕분에 빠르게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저를 거부하시겠다니, 잘 알겠어요."
그래, 이것은 함정이다. 감정에 선택을 맡겼다간 앞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데누망은 눈앞의 상대에게 분노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이해해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신이 겪어온 고통도 알아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생각을 바꿀 여지가 있다.
"당신도 이해하고 거리가 먼 삶을 보내오셨겠죠."
"……."
"사랑도 이해도 받지 못하니까, 그렇게 거리를 두는 것밖에 모르시는 거겠네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오셨을까요."
"이해해주는 사람은 있었다고 보는데."
"그 태스크 포스란 분들 말씀이시죠. 네, 그나마 다행이네요. 제가 그 분께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같은 뜻을 나눌 사람을 만나서 구원받은 셈이니까.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기회가 있다고 믿으셨을 테니까."
부럽다는 감정이 사뭇 피어오르지만, 그에 얽매이지는 않기로 한다.
자칫하면 설득의 기회를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같은 뜻을 나눌 수 있는 분이 함께 하고 계시죠. 그 분께 운명을 맡긴 덕에 당신은 계속해서 그 믿음을 보답받을 수 있었어요."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말들이 이어진다. 직접 만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텐데도, 전해 듣고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꿰어볼 수 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다르게 보자면, 그 믿음은 승리를 벗어나는 순간 깨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러네."
"그러니까 당신은 패배하고 어둠에 떨어진다는 결말을 맞이해본 적이 없어요, 맞나요?"
"그렇다면?"
"그 결말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불안하신 거겠네요. 어둠의 듀얼을 하시는 다른 분들도 그렇듯이."
"……."
슬슬 부아가 치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유노는 부정할 수 없다.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을 비웃으려는 게 아니에요. 언제 믿음을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같은 건, 저도 공감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 분을 접한 뒤로는 과거의 이야기지만요."
"몇 번을 말해도 똑같다고 했을 텐데?"
"네. 승리라는 모래성 위에서 위태롭게 지탱되는 그 믿음 때문이겠죠. 각오라고 해야 될까요?"
그와는 반대로 데누망은 다시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자비를 숨길 생각이 없다며, 미소지어 보일 수가 있었다.
"저를 보세요. 보다시피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그 분은 기적을 보여주셨어요. 한 번 진다고 모든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더 살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셨다고요."
환한 미소와 함께 양팔을 뻗는다. 언제든 품에 안아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그 분께서 저를 품어주셨듯이, 저도 당신을 포용해드릴 수 있으니까. 단 한 번의 패배를 두려워해야 되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드릴게요. 그 분께서 '동포'라고 부르신 분과 함께 하는 당신이라면, 분명 기회가 있을 거에요."
유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역시, 당신은 답없는 꼭두각시야."
"…네, 여전히 이해의 골은 깊은 거군요. 어둠에 떨어지지 않은 당신은, 아직 그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번에도 가시돋힌 대답에 데누망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필드로 시선을 돌린다.
누구보다도 빛나던 천사는 자유의지를 품었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신을 거역한 죄로 어둠에 떨어졌다고 한다.
실재하는 육체라는 것이 없는 천사들에게 타락은 곧 죽음과 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기에 새 삶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회개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분'이 어둠을 펼치는 것은 그러한 의미이리라 믿었다. 어둠을 마주했기에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되찾았다.
진짜 어둠과 맞닿아버린 순간에 망설이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믿음이 진심인지에 대한 시험이었으리라.
그 시험을 자신은 극복해냈다. 다시 자기 자신의 뜻을 펼쳐도 좋다고 허락받았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가 분명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자신더러 꼭두각시라니, 모함도 유분수다.
"역시 제가 더 힘내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 딱히 빛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빛이 있기에 어둠을 증명해보일 수 있으니까. 그러니 아득한 빛에 대한 동경은 지금도 유효하다.
"턴 엔드야."
"네, 제 턴이네요."
[데누망: 패 1장]
"'루시펠' 님의 ③의 효과. 이번엔 '루시펠' 님 1분 뿐이니까, 덱은 1장만 묘지로 가겠네요."
'타락천사' 카드는 나와주지 않았다.
아직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딩기르수'와 '루시펠' 님을 수비 표시로 변경. 그리고 카드를 1장 세트. 턴을 마칠게요."
"내 턴."
[아이바 유노: 패 1장]
데누망이 덮어놓은 카드는 공격 반응형 함정일까. 아니면 단순한 블러핑일까.
"역시 아쉬우신 거죠?"
"뭐가?"
"이번 턴에 이길 수 있었잖아요."
"…………."
그제서야 유노는 적의 가르침에 뒤늦게 깨닫는다. 이런 망설임 따위, 전 턴에 선택만 잘 했더라면 분명 필요없었다는 것을.
천사족이라 '천공의 성역'으로 전투 데미지를 무시해버리는 '루시펠'을 먼저 공격했다면 데누망의 LP는 그대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그만큼 '퍼니셔'의 공격력을 다음 턴에 또 끌어올릴 만한 격차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그 상태에서 이번 턴에 링크 몬스터라 수비 표시로 바꿀 수도 없는 '쿠르누기아스'를 공격했더라면, 그대로 끝장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승리가 한 번 물건너가버린 지금이라도 신중을 기해야 할까.
만약 저 세트 카드가 어떤 식으로든 격발하면서 자신들을 끝장내버린다면, 그 때야말로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파멸이 찾아오는 셈이다.
"혹시, 리퍼 님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계시나요? 정말 유노 님 본인만의 힘으로 싸우시는 거에요?"
"…닥쳐."
"아뇨, 대단한 거잖아요.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 분을 위해 싸우시겠다니."
빙그레 띄운 미소는 한 대 쳐보라는 도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도발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대놓고 함정이라 여기고 발을 빼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 순간에도 리퍼는 잠자코 자신의 선택에 운명을 맡겼다. 평소에 자신이 리퍼에게 운명을 맡겼듯이.
그는 묵묵히 듀얼을 받아들였고, 승리해 왔다. 반대 입장이라면 어떨까.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항상 옳은 판단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실수에 얽매였다간 다음에 또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의 자신이 그렇듯이.
과연 감정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유노.'
'…알아. 지나간 일인걸.'
리퍼의 한 마디가 끼어들면서 유노는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데누망은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기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굳이 지적해준 것이겠지.
그렇다면 스스로를 다그칠 때가 아니다. 무거워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야 한다.
다음에 무슨 카드가 있을지를 모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또다시 스스로를 타협시켰다.
지금은 늦게라도 성가신 적을 없애나가야 할 때니까.
"배틀. '사이코 엔드 퍼니셔'로 '루시펠'을 공격."
"……!!"
'쿠르누기아스'를 지져서 없앤 낙뢰가 이번에는 '루시펠'을 산화시킨다.
그 순간 유노는 데누망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한 순간이라지만 뚜렷한 좌절의 반응을 보인 것도 같았다.
세트 카드가 발동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공격 반응형은 아니다.
이번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턴 엔드야."
"…네."
[데누망: 패 1장]
"당신 턴이에요."
[아이바 유노: 패 2장]
"배틀, '사이코 엔드 퍼니셔'로 '딩기르수'를 공격."
"오버레이 유닛 1개를 사용헤서, '딩기르수'의 파괴를 무효로 하죠."
[시오르페골 딩기르수: ORU 2 → 1]
엑시즈 몬스터가 전투를 실행한다면 그 다음 타자로 '네가로기어 아제우스'가 등장해버릴 우려는 있다.
어지간히 입수가 어려운 레어 카드라고는 하지만, 한낯 불량 패거리로만 보이던 ABC의 참가자가 사용한 것을 직면했던 유노는 여기서도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서로의 LP는 동일. '사이코 엔드 퍼니셔'는 여전히 상대의 효과를 받지 않는다.
그러니 설령 '아제우스'의 강림이 현실이 된다고 해도 그 효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턴 엔드."
"네, 이번에도."
[데누망: 패 2장]
결국 턴 종료를 선언하는 순간까지 '아제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카드 역시 내보내는 일 없이 데누망은 빠르게 턴을 양보한다.
"당신 턴이에요."
[아이바 유노: 패 2장]
"배틀. 이번에도 공격."
"네, 이번에도 파괴는 무효에요."
[시오르페골 딩기르수: ORU 1 → 0]
"턴 엔드."
"제 턴이죠."
[데누망: 패 2장]
[아이바 유노: 패 2장]
"패에 있는 2장째 '이슈탐' 님의 효과. 자신과 다른 '타락천사' 카드를 버리고 2장 드로우할게요."
새로 뽑아든 패를 확인하는 데누망의 표정이 미세하게나마 더 밝아진다.
유노는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마법 카드 '끝의 시작'. 묘지에 어둠 속성 몬스터가 7장 이상 있으면, 5장을 제외하고 3장 드로우가 가능해요. 그리고 '대욕의 항아리'를 발동해서, 제외된 카드 3장을 되돌리고 1장을 드로우하죠."
[데누망: 패 4장]
"'열락의 타락천사'를 소환. 효과로 덱에서 레벨이 다른 '타락천사' 몬스터를 2장 고르고, 1장을 상대 필드에 수비 표시로 특수 소환할게요."
[열락의 타락천사: 천사족 / 어둠 / 레벨 4 / ATK 1600 / DEF 0]
[타락천사 네르갈: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700 / DEF 2500]
"나머지 1장은 패로. 그리고 세트한 함정 카드 '타락천사강림'을 발동. LP를 절반 지불하고, 상대 필드의 몬스터와 레벨이 같은 천사족 몬스터를 2장까지 특수 소환할 수 있어요. 당신 필드의 '네르갈'은 레벨 8. 그럼…"
[데누망: LP 800 → 400]
[타락천사 네르갈: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700 / DEF 2500]
[타락천사 스펠비어: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900 / DEF 2400]
"'스펠비어'를 되살렸으니까, 효과로 다른 '타락천사'를 한 분 더 되살릴게요."
[타락천사 이슈탐: 천사족 / 어둠 / 레벨 10 / ATK 2500 / DEF 2900]
패를 불린 뒤로 또다시 몬스터 존을 꽉 채워버렸다.
"카드 2장을 세트. 자, 당신 턴이랍니다?"
'LP를 줄였다는 건, 설마…!'
이제 '사이코 엔드 퍼니셔'의 내성은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저렇게까지 필드에 카드를 모아놓았다는 것은, 분명 이번에 찾아올 자신의 턴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내 턴."
[아이바 유노: 패 3장]
[데누망: 패 2장]
"필드에 '천공의 성역'이 있으면, 패에 있는 '죽음의 대행자 우라누스'를 특수 소환할 수 있어.
[죽음의 대행자 우라누스: 천사족 / 어둠 / 레벨 5 / ATK 2200 / DEF 1200]
"'우라누스'의 효과. 덱에서 '대행자' 몬스터를 묘지로 보내고, 자신의 레벨을 묘지로 보낸 몬스터와 같게 할 수 있지. 레벨 2의 3장째 '어스'를 묘지로, 그리고 '우라누스'의 레벨을 2로 변경."
[죽음의 대행자 우라누스: LP 5 → 2]
"'우라누스'는 튜너 몬스터였죠?"
"맞아. 당신이 고맙게도 몬스터를 넘겨준 덕분에 싱크로 소재가 모였거든."
"고맙긴요. 공격할 필요가 없었을 뿐인데."
천만에 말씀, 이라 대답하듯 데누망이 싱긋 미소짓는다.
"'열락의 타락천사' 님을 묘지로 보내고, 함정 카드 '반역의 타락천사'를 발동. 이건 '타락천사'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전용 융합 카드죠. 그럼 패에 있는 '타락천사 루시펠', 그리고 필드의 '이슈탐'과 '네르갈'을 융합!"
'타락천사' 덱을 사용한다는 정보를 확인한 시점에서 유노 역시 예견하고 있던 카드였다.
몇 턴의 유예가 주어지는 동안 그녀는 끝내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떴나…!'
데누망이 지명한 '타락천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면서,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처럼 눈부신 빛이 떠오른다.
그들이 새로운 존재로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유노는 잠자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희미한 빛은 끝없는 어둠과 함께. 부디 그 날개가 꺾이는 일 없이 하늘까지 닿기를! 빛과 어둠의 경계조차 사라질 그 날을 기도하며. 융합 소환, '여명의 타락천사 루시펠'!"
[여명의 타락천사 루시펠: 천사족 / 어둠 / 레벨 12 / ATK 4000 / DEF 4000]
빛 속에서 다시 재림한 '루시펠'은 4쌍의 검은 날개를 펼치고, 더욱 정련된 무구를 갖추고서 전장에 임한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 사이로 여전히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패전을 겪고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
"다음에는 묘지로 보낸 몬스터의 공격력만큼 제 LP를 회복할 수 있지만, 그냥 넘기죠.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기껏 내린 LP를 또 올리면 안 되겠지."
"네, '루시펠' 님을 소재로 '여명의 타락천사 루시펠' 님이 융합 소환됐을 경우, 상대 필드의 카드를 전부 파괴할 수 있거든요!"
'루시펠'은 한 손에 든 대검을 쳐들어 올린다. 불길한 어둠이 안개처럼 모이더니, 이를 양식으로 삼은 검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변화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는 빛이 가득 깃든 검을 적에게 내질렀다.
"'만물에 공평한 안식을. 여명의 진혼가(던 레퀴엠)'!"
빛은 폭풍처럼 유노의 필드를 휩쓴다.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은 '우라누스'는 물론, 무적으로만 보였던 '사이코 엔드 퍼니셔'마저 휘말려들었다.
필드 전체라는 사정권에 있던 유노의 몬스터들은 그렇게 파괴의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천공의 성역'마저도 사라지면서, 필드에는 다시 공허의 어둠이 찾아온다.
하지만 아직 패가 남았기에 유노는 침착하게 다음 카드를 꺼내든다.
"'죽은 자의 소생'. 이걸로…"
"안 돼요. '신의 심판'!"
[데누망: LP 400 → 200]
[아이바 유노: 패 1장]
그 카드마저 막히면서 유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정말로 마지막 순간임을 확신하듯이.
"그래. 일부러였단 말이지. 조금만 잘 하면 이긴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남은 희망까지 철저히 뺏어갈 셈이었네."
"승패에 연연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요. 그럴 필요가 없으실 텐데."
시선을 똑바로 향한다. 앞으로 있을 일을 두고서 꺼내야 할 것만 같은 말이 남았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어둠을 부정할 의미도,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받아들여라,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겠지. 그 작자다운 뜻이네."
"이해해주셨네요…! 리퍼 님의 길을 먼저 잡아주셨던 분께, 감히 제 의견을 전할 수가 있다니."
데누망의 눈빛이 다시 환하게 풀린다. 감격에 벅찬 표정을 보면 그 반응은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잘 됐네요. 때가 됐으니까. 걱정 마세요. 더이상의 고통도 공포도 없을 거에요."
"과연 그럴까?"
"…네?"
"당신부터가 그 뜻을 못 지키는 모양이던데."
"그게 무슨?"
"끝이니 어둠이니 동경하고 있다면서, 정작 거기에 자기가 빠지기는 싫잖아. 싫으니까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잖아."
"그야, 조금이라도 승부가 안 되면 뜻을 전하는 것도 제대로…."
"몇 번을 말해야 되겠어? 그런 대화를 왜 굳이 이런 싸움으로 하는 거냐고."
"……."
"당신은 어둠을 이해하는 게 아니랬지. 외면하고 제 좋을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야."
이미 들었던 힐난이 다시 시작되려 하자 이데누마의 표정이 다시 실망하는 반응으로 돌아온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알아주시질 않는 거죠?"
"알리가 없지. 아무것도 없는 게 어둠이니까. 빛도, 존재도, 미래도, 희망도. 당신이나 나나, 거기서 알 수 있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어."
"그럴리가 없다니까요. 가르침을 주실 존재를, 저는 직접 뵈었어요."
'직접 봤다'라. 유노와 리퍼 모두 흘려들을 수 없는 증언이었다.
"어디서?"
"제 방에서요. 깨지 못할 잠에서 깬 제 앞에 그 분이 몸소 나타나주셨다고요. 저같은 애한테도 다시 기회가 있다면서, 그 몸으로 안아주시면서까지 격려해주셨어요."
재버워키가 꿈이 아닌 현실에서 타인의 앞에 나타난다. 거기다 접촉까지. 그것은 환각이 아닌 실체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유진에게서 전해들은 위저드의 증언과 ABC의 끝에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이라면, 그 육체가 정말로 '재버워키'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특히나 숨어서 남 가지고 놀기를 즐기는 그가 정말 제 몸뚱이로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있을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제 그만 깨닫지? 당신은 어둠에서 벗어났으니까 여기 있는 거라고. 쓸모가 생겼으니까 다시 끄집어낸 것 뿐이야. 아니, 어쩌면 기억만 복사해서 붙여둔 꼭두각시 같은 걸지도 모르겠네."
쌔한 감각이 이데누마의 머릿속을 스친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간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흐리게 될 것만 같다.
"당신이, 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러게. 남 지적하는 건 잘하면서 자기 상태가 어떤지는 생각을 못하나 보네, 당신이나 나나."
"…………."
"근데,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사람에게 남는 건 없다고. 죽으면 끝이니까. 그런데서 의미를 찾는다니, 재버워키의 농간에 보기좋게 놀아나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여."
겨우 넘어선 고개 끝에 더 높은 고개가 있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데누망의 표정이 허탈하게 바뀌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승산이 있는 입장으로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 더이상 조롱과 험담에 굴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것도 제 뜻이고, 제 선택인걸요."
유노는 잠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뱉을 숨이 다 떨어지고서야, 그녀는 다시 시선을 바로잡으며 말을 꺼냈다.
"이미지도 덱도 바꿔왔으면서, 정작 당신이 바뀐 게 없구나. 자기가 듣고 싶은 말 빼고 들을 생각부터가 없잖아. 그러니까 구제가 안 되지."
"그건 당신이라고 다를 게 없을 텐데…. 동포라고 불리던 그 분도…."
"그러게, 나도 구제불능이겠지."
용서나 자비를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저, 끊임없는 헛소리를 무시하고 못들은 척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을 뿐. 자기가 생각하고 떠들어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가 조금이라도 알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데누마라는 여자 역시 마찬가지겠지. 자신이라는 존재는 리퍼를 향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 계몽을 위한 소통을 거부하는 고집불통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서로간의 대화는 얼마나 하든 평행선을 달릴 테니까. 이제까지 나눈 대화는 대부분 무의미했다. 또 있을지 모르는 싸움에 필요할 기력을 더 소비하기만 할 뿐이다.
역시 잠자코 해야될 일이나 했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루시펠'의 몬스터 효과가 발동했으니까, '삼전의 재'를 발동. 첫번째 효과로 2장 드로우."
[아이바 유노: 패 2장]
기회가 잡히는 대로 새롭게 뽑힌 패를 확인한다.
이제 곧 끝이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디클레어러 디바이너'를 소환."
[디클레어러 디바이너: 천사족 / 빛 / 레벨 2 / ATK 500 / DEF 300]
"그건…"
"천사족이니까. 좋은 카드이기도 하고. 내가 못 쓸 건 없지."
"…그건 그렇네요."
"효과는 안 쓸 거야."
"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묘지의 '파괴의 대행자 비너스'를 제외하고, 묘지에서 '마제스티 히페리온'을 특수 소환."
[마제스티 히페리온: 천사족 / 어둠 / 레벨 8 / ATK 2100 / DEF 2700]
"'히페리온'은 레벨 8, 그럼…"
"맞아, '디바이너'도 튜너였지?"
"………!!"
"섣불리 비장의 카드를 쓰면 큰일 난다는 걸, 아까 나 보고 깨달았어야 됐는데."
사색으로 변해가는 얼굴을 앞두고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유노는 서둘러 꺼낼 카드를 꺼내기로 한다.
"레벨 8의 '히페리온'에 레벨 2의 '디바이너'를 튜닝. 한 줌의 그늘마저 뒤덮을 태양이 지금 여기에! 싱크로 소환, '마스터플레어 히페리온'!"
[마스터플레어 히페리온: 천사족 / 빛 / 레벨 10 / ATK 3200 / DEF 2700]
어둠의 '히페리온'을 소재로 새로운 '히페리온'이 강림한다. 마치 폭발 끝에 폭풍과 함께 퍼져나가는 불길을 보는 것 같다.
코앞에 접근해 오는 태양을 보기라도 하는 듯이 경직된 반응 앞에 유노는 물음을 던졌다.
금과 은장식을 한 데에 갖추고 있는 갑주 뒤에는 한 층 더 밝게 빛나는 불꽃의 날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기 선택이 목을 조이는 기분은 어때?"
"………."
정말로 목이 졸리기라도 한 듯이, 입만 벌린 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타락천사'들의 효과로 묘지의 '타락천사' 마법 / 함정의 효과를 쓰고 싶어도 남은 LP가 없다.
패에 잡힌 '타락천사 테스카틀리포카'를 버린다면 전투 파괴를 막을 수는 있지만, 이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됐어. 배틀. '마스터플레어 히페리온'으로, '스펠비어'를 공격!"
'히페리온'이 '루시펠'의 존재를 무시하듯, 필드에 있던 다른 '타락천사'를 겨눈다. 그 양팔 사이로 쨍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점차 붉게 타오르는 구체 하나가 만들어졌다.
작은 태양으로도 보이는 그것을 '히페리온'은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태양이 떨어진다.
저번과는 달리 반격할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스펠비어'는 그 마지막 일격에 깔끔하게 휩쓸려나갔다.
충격과 함께 발생하는 폭풍에 뒤에 서 있던 데누망 역시 떠밀린다.
[데누망: LP 200 → 0]
'사이코 엔드 퍼니셔'에 비하면 낮은 충격이었기에, 다시 바닥을 가리는 어둠 위에 눕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느 쪽이든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시는 일어설 필요 없으니까.
자기 연민에 눈물을 지어야 할지, 꼴사나운 자신을 비웃어줘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런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는 벌칙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유노는 그녀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건네보았다.
"돌아왔으면 얌전히 지내는 게 나았을 텐데."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역시, 지금 이 행위를 망설일 이유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노는 집행을 앞둔 그녀에게 다가선다.
리퍼로서 행사하던 벌칙을 대신 행사하기 위해, 주문처럼 읊었다.
"벌칙. 『인 이나니스(In inanis)』."
짧은 주문 같은 한 마디를 외움으로서, 유노는 지체없이 리퍼로서 내리던 벌칙을 수행한다.
그 때와 같은 어둠의 늪이 이데누마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되네요."
천천히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내려다보며 이데누마는 중얼거린다.
과연 다음에도 그 분은 자신을 다시 꺼내주실까.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왜 이제서야 떠올리고 있을까.
침착을 되찾고 평온을 유지하려는 그 얼굴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다.
"죄송했어요. 저같은 애가 끼어들어서. 함부로 이해 같은 소리를 해서."
"굳이 사과할 필요 없어."
"그렇겠죠."
뒤늦은 참회일 뿐이다. 들어줄 가치마저 없을지 모른다.
애초에 저쪽도 용서를 바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니까.
"무슨 기적이 있던 다 헛수고였네요. 제가 하는 일이 다 그렇죠."
"…그러게."
유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 정도 뿐이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잠시 잡아든다.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이뤄진, 악수라 하기에도 한참 애매한 접촉이 몇 초만에 끝나고, 유노는 그저 그녀의 손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잠기고 있는 그녀를 끌어올릴 생각은 그녀에게 딱히 없다. 댓가를 치르고 사라져주는 것이 그녀로서는 도리니까. 그러니 이건 아무 의미없는 접촉일 뿐이다.
배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려는 이데누마의 눈가는 이미 촉촉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뺨을 타고 흘러내릴 듯한 물기가 애써 눈망울에 머물러 있다.
곧 허리가 잠기는 것과 동시에 두 손 역시 사라져간다. 그 다음은 팔, 다음은 어깨.
그렇게 그녀를 마주보고 있던 유노가 바닥을 향해 내려다보기 시작한 가운데, 더 늦기 전에 털어놓으려 했던 말을, 그제서야 이데누마의 입이 내뱉었다.
"…고마웠어요."
말을 마친 입도 조용히 잠긴다. 곧 머리까지 잠긴 끝에 역할을 마친 어둠은 이번에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녀가 바닥에 남긴 디젠 역시 천사의 조형을 딴 엠블럼이었다. 이전의 펜던트처럼 제법 섬세하게 조공되어 있지만,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접수되는 에너지는 미약하다.
이건 타인의 어둠을 갈취할 수단이라기 보다, 그저 믿음을 유지할 부적에 가까웠으리라.
그녀가 맹목적으로 믿은 것이 신이나 천사일리는 없다. 재버워키의 존재를 직접 접하지 않았어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면 그런 결론을 낼 수가 있을 텐데.
여전히 그녀를 동정하지 않는다. 끝까지 어리석은 자였다는 감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봤다면 빠르게 손을 내밀었겠지만, 이 자는 만난 시점부터 어쨌든 선을 넘었으니까.
꼭두각시가 되길 택했다면 본체와 함께 묻어버릴 뿐이다.
그러니, 이런 자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을 원흉을 용서할 일 따윈 없다.
'꼭두각시라.'
머릿속에 평소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노는 흠칫해버린다.
'…미안. 너한테 한 소리는 아니었어.'
'아니, 도구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전에 말했으니까.'
도구.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그러한 취급을 유노는 용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이렇게 같이 대화하는 입장으로서 마음이 편치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 몸을 내주는 너야말로 꼭두각시 신세일지도 몰라.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응, 나야말로.'
그러니 대신 감사하기로 한다.
지금 이렇게 이어지는 인생은, 그가 함께 있기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니까.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평탄한 인생을 택했더라면 결코 지나갈 수 없는 길이다.
기쁨도 즐거움도 없지만, 이를 거친다는 보람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재버워키의 말에 넘어가는 사람,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
'넘어갔다면 어쩔 수 없지. 이쪽 말을 들을 생각이 없으면 평소대로 할 뿐이다.'
또다른 사고의 역할로서 리퍼가 머릿속에서 대답해온다.
맞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의견이자, 평소 그녀의 관념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마주할 것인가.
재버워키에 이끌려 온 다른 사례들을 생각하던 유노는 저절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유진이는 앞으로도 괜찮을까? 마음이 바뀌는 일이 진짜로 없을까?'
'바뀌면 그 때 행동하면 되겠지. 바뀌기 전에 행동할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군.'
유노는 살짝 고개를 젓는다.
'그치만, 그 때 재버워키를 적대하는 건 진심 같았어.'
'우리가 여태껏 배제해 온 인물들 중에서도 재버워키를 적대하는 자는 있었을 텐데.'
'힘을 내놓으라던 인간이 있긴 있었지.'
'그래. 어떤 목적이든 재버워키를 노리려면 힘이 필요하겠지. 그런 힘을 모으기 위해 다른 녀석의 힘을 빼앗는 걸 택한다.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곧 재버워키가 의도한 '즐거움'을 이해하는 결과가 되는 거고. 그런 자 역시 우리의 표적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
유노는 분명히 확인했다. 유진에게는 재버워키의 손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카드)이 주어져 있다는 걸. 분명 어둠의 영역에 간섭할 수 있는 전력마저 되어줄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유진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의 앞길을 지켜주고자 그런 힘을 남겨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힘이라도 남용하다가 '힘에 도취된다'는 결과에 이른다면, 사람의 마음은 언제 바뀌어버릴지 모르는 일. 또다른 적으로 변질될 가능성마저 있다.
그 전에 배제해버린다는 판단을 완전히 무를 수조차 없는 것이 사실. 그러니 지켜본다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했다.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될 수 있는대로 서문유진이라는 아이를 도울 것이다.
어둠에 대항하겠다는 마음까지 품어줄 필요도 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갈구한다면 족하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유진이 딱히 연락을 보내 오지 않았다. 그 애는 오늘 하룻동안 집에 얌전히 쉬어주고 있을 것인가.
'물론 제일 큰 표적은, 지금으로선 재버워키다.'
'응. 그 놈을 없애는 게 될지도, 된다고 해도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사태를 조장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서둘러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러다 우리도 마음 바뀌는 일 같은 건 없겠… 지?'
'없어야지. 그러니 절대로 녀석의 뜻에 넘어가지 마라.'
'……응.'
이데누마, 그리고 도펠코프처럼 태스크 포스로서의 행동을 비웃으며 자신들과 동류로 끌어내리려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행동의 결과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은 분명 타인을 어둠에 매장시키는 짓을 두 자릿수는 저지른 것이 사실이니까.
그것으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정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틀림없다.
유노는 잊지 않는다. 그걸 알고도 받아들인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 일이 틀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쓸데없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부적으로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는 마당에 마음까지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러니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자신과 타인의 속내를. 그 외부적으로 일을 틀어버릴 수도 있는 인물을.
그리고 지금 상황도.
'진짜 문제는, 이걸 누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매번 주의하고 있음에도 방심하고 말았다.
리퍼가 아닌 유노 자신으로서 어둠의 듀얼을 펼쳐버렸으니, 평소와는 달리 모습을 가리는 조치를 취할 틈새가 없었던 것이다.
'내 실책이다. 내가 아니라도 리퍼로서 행동하라고 주의하지 못했어. 미안하군.'
'아니, 이러기로 한 건 나니까.'
주변을 살펴보니 인기척은 없다. 이데누마의 일행으로 보이는 인물은 커녕 사람 모습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홀몸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자신들 외에는 여전히 정적 뿐인 풍경만이 있을 뿐.
물론 고작 이 정도로 안심할 것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숙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번에도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골목을 걸어나왔다.
====
이번 듀얼 자체는 저번 것보다 더 전에 짜놨던 것이라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가 됐습니다
고칠까 고칠까 고민하다 그냥 내놓기로 했네요
다른 팬픽에서는 루시펠 님의 멋드러진 삽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본 글에서는 그런 거 없다는 게 유감... 이군요
다른 듀얼도 비축분이 있었으면 참 좋을 텐데...
(IP보기클릭)121.173.***.***
(IP보기클릭)58.143.***.***
| 24.05.21 20: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