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무쌍에 등장하는 스테이지들 중 호조 가문과 관련이 있는 스테이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카와고에 야전 : 전국무쌍 4. 관동의 장 / 호조 우지야스 5천 + 호조 쯔나시게 3천 vs 아시카가, 우에스기 연합군 8만
2. 오다와라성 전투 : 전국무쌍 3, 4. 우에스기 켄신의 관동 연합군 10만 vs 호조 우지야스 농성
3. 미마세 전투 : 전국무쌍 4. 관동의 장 /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쿠니 2만 vs 다케다 신겐 2만
4. 오시성 전투 : 전국무쌍 4, 4-2 / 가이 히메(당시 19세) 3천 영민 vs 이시다 미츠나리 2만 3천
5. 오다와라 정벌전 : 전국무쌍 3, 4, 4-2 /
히데요시 (본대 14만)+이에야스(3만)+북군(마에다,우에스기,사나다 3만 5천)+수군(1만) vs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농성
전국무쌍 4-2에 등장하는 스테이지는 "오시성 전투"와 "오다와라 정벌전" 두 개 뿐입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보면 병력의 차이가 눈에 띄게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간에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대군을 움직였다고 하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로는 히데요시가 호조氏를 정벌하는데 굉장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래의 지도를 보면 잘 드러납니다.
오른쪽 가장 큰 원이 관동, 호조氏의 영지입니다....
보시면 그냥 다 평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저기서 1년에 나는 석고는 총 250만 석이었다고 합니다.
가운데 원이 미노, 오와리 지방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미노를 차지하기 위해 10년을 공들인 이유는 [교토]로 가는 교통로 확보는 물론
미노의 70~80만석을 얻을 수 있어, 오와리의 50만 석과 합쳐 120만 석이 넘는 석고를 확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기 직전까지의 석고는 약 600만 석이었다고 합니다.
석고는 곧 군사력입니다.
다케다 가문이 궁핍하게 살다가 갑자기 비약한 것은
신겐의 아버지(노부토라)가 금광을 개발해 석고가 90~100만 석을 이뤘기 때문이고,
우에스기 켄신이 평생 60번을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도 100만 석에 가까운 석고 덕분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호조氏는 그 당시 히데요시 다음으로 석고가 많은 대다이묘였던 셈입니다.
호조氏와 비밀리에 연결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석고가 약 80만 석,
호조氏와 동맹상태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상업지역인 코오리야마를 확보하여 얼마까지 석고가 오를지 모르는 상태였으니,
히데요시로서도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던 셈이지요.
* 코오리야마 : 전국무쌍4, 4-2에 동북의 장, 주종의 장에 등장하는 스테이지.
히데요시의 호조氏 정벌은 지성 공략부터 시작됩니다.
지성 공략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와 같은 문관들이 활약하는데,
이들이 한 일은 호조氏의 영지로 가기 위한 길 안내 및 병량 운송. 전쟁예산 관리, 무기점검 등이었습니다.
즉, 병참 관료들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데요시의 본대가 오사카에서 출병하는데, 서일본의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들을 소집하여 데리고 옵니다.
중도에 미카와의 이에야스도 합류하게 되고,
이와 별개로 카가의 마에다 토시이에가 시나노 방면에서 우에스기 카케카츠, 사나다 마사유키와 합류하여 남하합니다.
호조氏의 영지가 워낙 넓기 때문에 지성 공략은 다소 시간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성의 호조 가신들의 충성심과 결속력이 워낙 높고, 영민들과의 유대 역시 끈끈하여
쉽게 지성 공략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시성 전투]를 보면 성 내 영민들이 똘똘 뭉쳐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주 "나리타 우지나가"가 대부분을 이끌고 오다와라성으로 갔기 때문에, 당시 성 내의 병사는 500기 정도.
나머지는 모두 영민들....즉 농민들이 나서서 싸운 것입니다.
오다와라성 북족에 위치한 [하치오지성]의 경우는 더했습니다.
성주 "호조 우지테루"와 성 내 영민...아이, 부녀자 포함하여 전원 전투에 참여했고, 전원 전사했다고 합니다.
호조 가문의 유대와 영민들과의 결속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물론 호조氏 가신 들 중에서도 변절자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나오에 가네츠구의 책략에 말려 패하고, 항복한 "다이도지 마사시게"...
이 자가 항복 후, 호조氏의 지성 공략에 적극 참여하면서
호조의 지성들이 무너져 버린 것이었지요.
하지만 쉽게 무너지진 않았습니다....끈질기게 버티고 저항하다가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었지요.
참고로 호조 우지야스의 아들들이 그토록 맹렬히 싸웠다고 합니다.
* 중도 미션 중 적장 격파 미션을 보면 대부분 호조氏입니다.
....호조의 장이 "약속의 장"인 이유.
가족/가신과의 유대를 강조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쯤 되었을 때,
히데요시의 22만 대군은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미온적이었다가 대세가 기운 것을 직감하고 열심히 전투에 임합니다.
이 타이밍에서 약삭빠른 "다테 마사무네"도 흰 소복을 입고 항복하러 오고...
기분이 좋아진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에 있는 "챠챠(요도기미)"를 불러 오다와라 성 구경을 시켜줍니다.
오다와라 성은 2대 우지쓰나, 3대 우지야스, 4대 우지마사에 걸쳐 계속 확장공사를 한 거성 중의 거성이었습니다.
성 안에서 농업, 상업, 어업, 공업 등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만능형 성이었던 셈입니다.
* 중도 미션 중 "병량 수송을 저지하라"는 미션이 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거성이.....히데요시가 하룻밤만에 쌓은 성(성을 쌓은 후 주변의 나무를 베어 갑자기 나타난 것 같은 효과를 연출)으로
호조氏를 놀라게 하고,
이어 협상의 달인 "쿠로다 칸베에"가 호조氏에게 항복을 촉구하여....
그만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힝복했음에도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난 탓에 호조氏는 멸문했고,
호조氏의 영지는 고스란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로 넘어갑니다....
미카타가하라 패전 이후 다케다류 군학을 익혀 야전의 달인이 된 이에야스에게 날개가 돋은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만,
이에야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궁벽한 어촌 시골마을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습니다.
그곳이 바로 [에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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