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해 섬의 궤적 2 공략은 커녕, 진행조차 수월하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드리며, 본 글은 섬의 궤적 1에 대한 필자의 감상과 본 게시판에 있는 수 많은 미리니름을 토대로 정보를 얻어 작성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사정을 품고 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中
1. 린 Schwarzer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면, 기존 궤적시리즈에서 다뤄왔던 주인공과 많이 다릅니다. 기존 궤적시리즈 뿐만이 아닙니다. 소설, 만화, 영화, 연극, 게임등 수 많은 서사 컨탠츠중에서 린 슈바르처같은 주인공은 사실 흔하지 않습니다.
보통 서사형 문화컨텐츠가 선호하는 주인공은, 에스델 브라이트나, 로이드 버닝스 처럼 아픈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양광형 인간, 즉,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건 아닙니다. 사실 이런 주인공이 선호 받는 이유는 온갖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노력해서 보답 받기 때문에 독자나 소비자가 쉽게 투영하고 응원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양광형 주인공이 노력해서 보답 받으면, 독자나 소비자 역시 보답 받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독자나 소비자는 이런 대리만족을 위해서 서사형 문화컨텐츠를 소비합니다.
그래서 독자나 소비자는 양광형 주인공에 익숙해지고, 또, 양광형 주인공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모든 서사형 문화컨텐츠의 주인공이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양광형 인간인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빛을 비춰줘야 그 빛을 받아 빛날 수 있는 월광형 인간도, 월광형 주인공도 있습니다.
영웅전설 시리즈의 등장인물 중에서 손을 꼽아보자면, 대표적으로 요슈아 브라이트, 레베, 렌, 아리오스 맥클레인, 그리고 린 슈바르처가 있지요. 영웅전설 외에서 꼽아보자면, 아무로 레이(기동전사 건담), 이카리 신지(신세기 에반게리온), 밧슈 더 스턴피드(트라이건), 사이가 마사루(꼭두각시 서커스), 닥터 덴마(몬스터), 코바야카와 세나(아이실드 21), 네기 스프링필드(마법선생 네기마), 란돌 올랜드(펌프킨 시저스), 토오노 시키(월희), 아나킨 스카이워커(스타워즈), 브루스 웨인(베트맨), 케이건 드라카(눈물을 마시는 새), 엘시 에더리(피를 마시는 새), 안나 카네리나(안나 카네리나), 파우스트 박스(파우스트), 오셀로(오셀로), 맥베스(맥베스), 줄리엣(로미오와 줄리엣) 등등, 제법 많은 월광형 인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늘어놓고보니 제법 많아보이지만, 양광형 주인공은 대충 기억나는대로 이름을 부르면 대부분 양광형 주인공이기 때문에 일일히 나열할 필요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밝혀둡니다.
다시 월광형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월광형 주인공들의 특징은 바로 불우한 사건 사고가 인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양광형 주인공들도 커다란 사건 사고를 통해 인격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양광형 주인공들이 그 사건 사고를 딛고 일어나 떨쳐내 더욱 환하게 타오르는 한편, 월광형 주인공들은 계속 그 사건 사고에 매달리며 집착하고 고뇌합니다.
사실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입장에서 월광형 등장인물은 양날의 검입니다. 서사를 진행시킬 중요한 사건을 월광형 등장인물 혼자서 이끌어 나갈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통 월광형 인물은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고, 월광형 주인공으로 서사를 진행하게 되면, 주인공이 성장하는 그 순간 서사가 완결나거나, 주인공이 타락하는 서사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린 슈바르처(Schwarzer)는 에스델 브라이트(Bright)나 로이드 버닝스(Bannings ※ 동음이의어로 Burnnings로 읽을 수 있습니다.)와는 다른, 월광형 주인공입니다. 성부터 Schwarzer, 검은 색입니다.
심지어,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인격형성이 이루어지고, 장래까지 결정해 토르즈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이 과거에 얽매여 자신을 온건히 드러내지 못하는 바람에 사건사고가 일어납니다. 물론 이를 간신히 극복하고 스스로 변해보려 시도하는 이야기가 바로 린 슈바르처의 영웅전설, 섬의 궤적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린이 월광형 주인공이고, 에스델 브라이트나 로이드 버닝스 같은 양광형 주인공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2. 궁합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궤적시리즈의 서사 구조에 대한 이야기지요. 조금 알기쉽게 표현하자면 장르적 특색이라고 할 수 도 있지만, 서사 구조를 구성하는 방법과 완성된 작품의 장르적 특색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굳이 서사 구조에 대한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영웅전설 궤적시리즈의 서사 구조는 무협지에 가깝습니다. JRPG고 스팀펑크 풍 중세판타지인데 뜬금없이 왠 무협지냐고요? 대여점에서 빌려볼수 있는 양산형 판타무협지와 궤적시리즈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요?
물론 영웅전설 궤적시리즈는 JRPG이고, 스팀펑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중세판타지입니다. 이런 영웅전설 궤적시리즈를 대여점에서 빌려볼수 있는 양산형 판타무협지와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한다면 제가 먼저 화를 내겠습니다.
하지만 영웅전설 궤적시리즈의 서사구조는 무협지에 가깝습니다. 대여점에서 빌려볼수 있는 양산형 판타무협지가 아니라,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로 대표되는 황금기 시절의 정통파 무협지에 말입니다.
그 황금기 시절의 정통파 무협지적 서사 구조의 특징은 크게 '기연에 의존하는 진행방식'과 '대의를 위한 협력과 승리'라는 두 가지를 들수 있습니다. 특히, '대의를 위한 협력과 승리'에 주제의식을 집중시켜, '기연에 의존하는 진행방식'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 대표적으로 사건의 개연성이 허술해 지는 점을 덮어버리고, 주제의식을 잘 보여줌으로서 좋은 평가를 유도하는 구성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 아닌가요?
네, 필자 같은 극성 궤적 팬덤이 궤적시리즈에 대한 악평에 변호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필자 같은 극성 궤적 팬 역시, 알고 있습니다. 천공의 궤적, 영의 궤적, 벽의 궤적, 섬의 궤적, 섬의 궤적 2 모두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제가 해본) 천공의 궤적, 영의 궤적, 벽의 궤적은 사건의 개연성이 허술질 수 밖에 없는, '기연에 의존하는 진행방식'의 부작용을 '대의를 위한 협력과 승리'를 통해 보여주는 주제의식으로 잘 덮어왔습니다. (※ 미리니름만으로 판단해도 괜찮을지 조심스럽지만, 이글 -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detail/ps/read?bbsId=G001&articleId=7344030&itemId=81648 - 을 보면 섬의 궤적2 역시, 이럴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적시리즈가 신작이 발표될때마다 스토리에 많은 논란이 일어납니다. 이 논란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2-1. 일본은 사실 무협지적 서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구문명 개화가 아시아권 중에서 가장 빨랐던 일본은 추리소설과 전기소설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왕성하고 활발했으며,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문학발전에 따라 가장 먼저 퇴보한 것은 바로 대륙과 한반도에서 전해져오던 무협지적 서사입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바로 사건간의 개연성이 허술한 서사구조의 특징 때문이고, 이를 후반부에 감동으로 덮는 방식은, 서구적 서사구조 작성법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금기시 되어왔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이 서구문명 개화가 이루어진 이후 이루어진 서사구조 작법 개편에 의해 일본 전국시대를 그린 소설들 조차 개연성을 위주로 재정립 되고, 삼국지 연의조차 개연성에 따라 재정립해,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서사 중에 무협지의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은 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두 손에 꼽을 수 있는 서사중에 영웅전설 궤적시리즈가 다 들어갑니다(…). (※ 과장을 해서 두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전설 궤적시리즈가 전체 일본 작 무협지적 서사 작품 전체 50%를 넘습니다.)
참 안타까운 사실은, 일본 내에서는 이런 무협지적 서사를 신선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인터넷에 평가가 안좋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가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평이 안좋고 재미가 없다면 일본에서는 바로 중고로 풀려 업체에서 매입조차 하지않는 지경에 이릅니다. 앞으로 어찌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글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섬의 궤적은 아직 중고가가 안정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유는 정말 단순하게도, 1960년대 이후 서사 컨텐츠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무협지적 서사 구조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무협지적 서사 구조 자체는 중국과 한국이 일본보다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독자적인 틀을 완성시켜놓았다 할지라도, 그런 소설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고, 그 지극히 드문 경우중 무협지적 서사 구조가 일본의 텃세를 이겨냈다는 소식은, 필자가 식견이 짧아 그런진 몰라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2-2. 장인정신과 시대의 변화
그래도 섬의 궤적 2는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섬의 궤적도 그랬고, 벽의 궤적도 그랬고, 영의 궤적도 그랬고, 천공의 궤적도 그랬으며, 심지어 바다의 함가 조차도 욕을 먹었습니다. (※ 물론 바다의 함가는 벨런스를 붕괴시키는 공명시스템이 주로 비판받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작품들이 신작이 발표될때마다 재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문화, 신작, 신제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우선 비판점이 가장 빠르게 화자되고, 그 다음에 장점이 발견되어 사회에 받아들여지며, 그렇기 때문에 비판점이 화자되는 과정은 새로운 문화, 신작, 신제품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말을 로버트 커트너, 셰릴 올슨 공저 <게임의 귀환>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TV가 그랬고, 영화가 그랬고, 록 음악이 그랬으며, 심지어 소설이 작을 小를 사용하는 이유 조차,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구전과 음악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허황된 이야기'라고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그 아이폰 조차 1세대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조악한 장난감'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요.
그리고 지금 현재 게임을 즐기는, 하다못해 섬의 궤적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 궤적시리즈가 차용하고 있는 무협지적 서사 구조에 익숙한 사람은 몇분이나 될까요?
앞서 저는 한국에서도 무협지적 서사구조가 독자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이루었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 게시판에 찾아오시는 분들 중,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 그러니까 신조협려나, 사조영웅전이나, 의천도룡기를 읽어보신 분은 몇분이나 될까요? 그나마 친숙할만한 열혈강호는 정통파 무협서사라고 보기에는 살짝 애매하지만 그나마 친숙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소설가 이원호의 강안남자 시리즈를 보신분은?
필자만해도 10대 때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중,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호강호정도만 간신히 보고 열혈강호를 사서모으는 정도입니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궤적시리즈가 이런 무협지적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겠지요.
그리고 사실, 이런 무협지적 서사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단지, 팔콤은 게임을 만들 때 주제의식을 담고 싶어하며, 무협지적 서사구조는 분명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기법일 뿐입니다.
다만, 시대가 흐르면서 이런 무협지적 서사구조를 담은 컨텐츠 자체가 보기 드물어졌다는 것, 그것뿐이지요. 문학에 사상, 주의, 주장, 사회적 참여를 담아선 안된다는 순수문학이 득세한 한국에서는 특히나 말입니다.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는 즐거움을 찾아 컨텐츠를 소비합니다. 돈을 내고 시간을 들여 제작자들이 공을 들여 담아난 주제의식을 배우고 싶어하는 취향 역시 분명 존재하지만, 이런 취향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에게 적합했더라면,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쉬운 무협지적 서사가 좀 더 사랑 받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무협지적 서사를 한국식으로 완성시킨 이원호씨 조차도 무협지적 서사를 쓰면서 주제의식을 담아내지 않으려는 시장입니다. 이런 트랜드는 할리우드에서 조차 찾아볼 수 있지요.
단지, 그뿐입니다.
2-3. 익숙하지 않기에 일어난 실수
사실 천공의 궤적에서도, 영의 궤적에서도, 벽의 궤적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구장창 비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필 섬의 궤적에서 도드라졌습니다.
바로 익숙하지 않기에 일어난 실수입니다.
영웅전설 궤적시리즈가 이제는 우리에게 조차 생소해진 무협지적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앞서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바로 이 무협지적 서사구조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설명드렸습니다.
익숙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일이지만, 게임은 문화이면서 산업이기도 합니다.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이윤을 창출할 수 있지요.
그리고 팔콤은 이런 문화산업의 생산자로서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무협지적 서사구조의 특징으로 인해 그 실수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저 같은 극성 팬덤이 형성돼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시도임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성공이라고 평할 수도 있지만, 천공의 궤적 이후 바로 다음시리즈로 준비해 두었던 섬의 궤적을 10년이나 지나서 분할발매 해야만 했고, 그 사이를 이어주기 위한 영의 궤적과 벽의 궤적에서는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사용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서사를 무난하게 만들어줘야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영웅전설 궤적시리즈의 세계관과 팔콤의 장인정신으로 인해, 팔콤과 소비자 모두에게 후속작에 대한 높은 난이도로 작용했습니다. 팔콤의 경우는 원활한 서사진행이 어려워졌고, 소비자에게는 기존작 이해라는 진입장벽적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팔콤은 에스델 브라이트(Bright)나 로이드 버닝스(Bannings ※ 동음이의어로 Burnnings로 읽을 수 있습니다.)와는 전혀 다른, 린 슈바르처(Schwarzer)의 이야기를 시작해버렸습니다.
얽매이고, 고뇌하며, 노력하는 린 슈바르처는 인간적일 뻔 했습니다. 인간적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린 슈바르처는 도망친 곳에서 얽매일 시간도 없이 어른의 사정에 의해 이용당하고, 고뇌할 시간도 없이 구원받아버립니다.
그리고 숱한 미리니름을 접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타락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린 슈바르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차기작 주인공이 린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천공궤부터 영벽궤까지 해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고 계실껍니다. 진정으로 천공궤가 끝나는 시점은 바로 영궤 엔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미숙함에서 빚어진 실수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섬의 궤적 1을 무척 재미있게 한 저 조차도 이 실수는 섬의 궤적 1에서 부터 이미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팔콤 게임의 특성 속에 필요한 정보를 적당히 녹여낸 점은 분명히 언급해야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치밀하게 준비해서 모든 걸 보여줘도 욕을 먹기 쉽상인 월광형 주인공을 내세운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제작사 특성에 의존하고 마는 안일한 태도는 분명, 다양한 시도를 통해 꾸준한 발전을 이뤄왔던 팔콤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다른 주인공답게 다른 구성으로 이야기를 보여줬더라면, 하다못해 무협지적 서사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월광형 주인공을 사용하고 싶었다면, 월광형 주인공 처럼 조금 더 매달리고, 조금 더 고뇌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조금 더 즐겁게, 조금 더 알기 쉽게 린 슈바르처의 타락을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저 한결같이 앞으로
문화는 다양성을 추구해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화의 특징은 자본주의의 특성과는 정반대이며, 이로 인해 앞서 소개해 드린 <게임의 귀환>에서 언급한 대로, 새롭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때문에 공격당하고, 그렇게 공격당해서 사회에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에서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일부 컨텐츠 생산자들은 다양성을 포기하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아슬아슬한 자가복제에만 몰두하기도 합니다. 노력, 우정, 승리로 대표할 수 있는 일본 점프 소년만화 방정식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생존을 위한 노력이며, 이런 방정식이 있어도 결국 문화 컨텐츠는 미세한 차이나마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팔콤은 다릅니다.
자가복제 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그 시대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연구해서 바로바로 작품속에 녹여내는 모습은 물론, 실수를 해서 욕을 먹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서사구조를 올바르게 사용하며, 이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보완하다보니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은 팔콤이 얼마나 다양한 시도를 위해 노력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팔콤의 게임은 한결같습니다.
플레이어에게 생각할 거리를 한결같이 제공하고, 플레이어에게 읽을 거리를 한결같이 제공하며, 플레이어에게 NPC조차 각자의 인생을 살고있다고 한결같이 말하는 데다가, 플레이어에게 더 큰 기대감과 호기심(이라고 쓰고 떡밥이라고 읽습니다)을 한결같이 던져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팔콤의 게임이 한결같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는 앞서 말씀 드렸던 <게임의 귀환>의 한 구절을 다시한번 떠올리며 긴 글을 마무리 합니다.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주관적인 감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문화는 항상 공격받아 왔다. 록이 그랬고, TV가 그랬고, 영화가 그래왔듯, 지금은 게임이 공격받는다. 하지만 그 공격이 정당한 범주를 넘어섰을 때, 사회에서는 그 문화를 보호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화는 사회로 받아들여지며, 새로운 문화가 받아온 공격은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뱀발 : 양광형, 월광형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고 싶었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학산문화사 출판 '그남자 그여자' 15(구판)에 나온 설명을 차용했습니다. 개념상으로는 적확하고 정확하기에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미묘한 출처 양해 부탁드립니다.
곰발 : <게임의 귀환>에서 차용한 마지막 구절은 원문을 뉘앙스에 맞춰 의역·차용한 것입니다. 서적을 가지고 계시거나 읽어보신 분께서 원문을 남겨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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