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밤을 낮으로 바꾸며 태양과 같이 이글거리며,
고통과 죽음을 내리쬐던 불덩어리의 옆으로 월영이 모습을 비췄다.
그러나 그것은 대지의 황혼을 부르는 자에게 있어서는 일말의 관심을 줄 대상이 주지 못 했다. 무감정하고 공허한, 타오르는 눈동자로 지평선만 바라보며 천천히 그 발을 옮겼다. 그 거구의 몸을 옮기기 위해 발을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대지는 신음했고, 그 발바닥이 닿은 곳은 녹아 검은 유리가 되었다가 모래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ㅡ쿠오오오오오....!
주기적으로 하늘을 향해 마치 그 바위로 조각한 뱀을 연상케 하는 목을 들어 올려 하는 긴 포효. 그 포효는 지상의 생물들에 있어서는 끔찍한 재앙을 하늘에서 그란 밀라오스가 불러온다는 신호요, 연흑룡에게 있어선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도구를 부르는 것만 같은 신호였다.
‘쿠구구구구구....!’
그 신호에는 항상 하늘이 지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기라도 한 듯, 거대한 불덩이들의 세례를 쏟아주며 지상을 향해 그 운명이 다 했음을 알려왔다. 처음 대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며 쏟아졌을 때보다 눈에 띄게 커지고 그 속도도 빨라진 신의 망치는 다시금 탄지아 제 1항만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ㅡ하늘의 불덩이에 푸른 월영이 그 속도를 점차 올리며 드리운다.
‘쉬이이이이익!’
“이런 빌어먹을...”
하지만 지금 카를의 귀는 눈치 채기 어려워도 일단 듣게 되면 욕설이 나올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처음 듣는 이에게 있어선 천인룡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하늘을 가르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 하지만 그 소리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카를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불타오르는 화염을 두른 운석.
아마 재앙이 닥치지 않았다면 수많은 이들이 이 무슨 횡재냐고 생각하며 채굴하러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있어선 그것은 자칫하면 최후의 시도마저 할 수 없게끔 만들 수 있는 악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쿠구구구구...!’
-젠장...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격돌의 충격에 그는 이를 악물고 부러진 두 다리로 필사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어떻게든 무심하게 떨어지고 있는 하늘의 재앙에서 벗어나 그란 밀라오스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끌며 재촉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열선의 맹렬한 열이 투구를 벗은 얼굴에 느껴지기 시작하자 힘을 쥐어 짜내며 속도를 올렸다. 그란 밀라오스의 거대한, 용암이 흐르는 것만 같은 거체가 점점 시야 안에 다 못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지며 그 열의 방호벽을 뚫기 위해 손을 뻗치려는 그 순간, 마침내 천운이 그의 희망마저 저버리는 듯 바로 뒤에서 거대한 충돌의 굉음이 울렸다.
-조금만 더 가면...
‘쿠구구구구...!’
ㅡ쿠콰콰콰콰...!
그 굉음이 귀에 닿는 찰나, 손이 숯덩이처럼 변해가던 카를은 그에 대해 뭐라 생각할 틈도 없이 충격에 의해 붕 날아갔다. 충격파로 인해 허무할 정도로 힘없이 붕 날아올랐다. 몸이 날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없이 감정이 결여되어 보이는 연흑룡의 두 눈동자였다.
-
ㅡ월영이 부드럽게, 타오르는 불을 달래듯 가려간다.
‘쿠구구구구...’
“푸훕!”
의식이 끊어진지 얼마나 되었을까.
카를은 대지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눈을 떴지만, 무언가 몸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질감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분명 다리에 붙어있었어야 할 발목은 갈가리 짓이겨진 채 저 먼 곳에 떨어져 있었고, 귀가 거의 멀다시피 하여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고 있었다.
-앞이 안 보여...
그의 눈까지 충격과 열로 인하여 제 기능을 서서히 잃어가며 형체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망가진 것은 물론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푸흡...!”
등과 가슴을 꿰뚫고 나간 수없이 많은 자잘한 파편들로 인해 숨을 쉴 때마다 피가 입에서 줄줄 세어 나오며 지독한 염산가스와 함께 정말로 그의 생명을 너무나 빠른 속도로 갉아 먹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으으윽...”
뒤틀려 부러진 팔에 달린 손으로 땅을 움켜쥐면서 그는 몸을 전진시켰다. 시각을 거의 잃은 탓에 간신히 그 형태만 보이는 상황 속에서 기어가고 있는 카를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그 불꽃을 거세게 튀기면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이이...!’
“끄으으으윽...! 쿨럭...!”
그리고 이내 온 몸을 짓이겨 발기는 것만 같은 맹렬한 고온이 느껴지자 그는 처음으로 고통으로 인해 신음했다. 신화의 지옥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생명을 앗아가려는 것만 같은 업화, 그 업화를 느끼면 필히 다른 생물들은 도망치거나 고통에 몸부림쳐 죽었으리라.
“제발...”
-여기를 봐 다오...
하지만 그것을 느끼자 카를은 죽음의 손아귀가 죄여오는 그 열의 지옥 속에서 최대한 몸을 당기며 너덜너덜해진 반대 팔을 뻗었다. 입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피거품이 증발하며 입이 바짝 말라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생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뻗은 팔은 손바닥부터, 그리고 팔에 눌어붙었던 해룡의 방어구를 끓어오르게 하며 빠른 속도로 타들어가며 순식간에 얼굴에까지 닿았지만 그 고통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벽이 되지 않았다.
‘툭.’
ㅡ쿠드드드득....!
팔에 잔류한 희미한 감각이 사라지기 직전, 무언가가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어깨를 타고 전해진다. 그와 함께 무언가의 깨달음이 그의 머리 안에 울려 퍼졌다.
‘용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존재로 인해 그 먼 고대와 지금 두 번 일어난 거라고 가정을 할 경우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고작 3주로 지상과 바다의 대부분의 생명을 절멸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이 백만 년간 지속되었으면...’
처음 떠올랐던 것은 저맘이 방에서 보고서를 훑어보며 의문을 품으며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끼워 맞춰졌다.
‘녀석의... 발아래를...’
리엘이 죽어가며 그에게 남겼던 최후의 말, 뒤이어 떠오르는 지옥의 불과도 같은 열선의 아래에서 잠시나마 그 푸름을 보이던 식물들.
그리고 지금, 열선을 뚫고 뜨거운 바위와도 같이 보였지만, 한없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에 닿은 손. 그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끼워 맞춰지자 그는 깨달음을 얻은 듯, 허탈감을 느꼈지만 그와 함께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두 번째구나...”
그 순간, 무언가가 금이 가는 것과 하는 소리와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은 서늘한 밤공기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손이 닿은 것을 느낀 듯 눈 녹듯 녹아사라지는 죽음의 기운을 풍기는 열선이 사라지며 언제 그랬냐는 듯, 산들바람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 하아.... 쿨럭...”
그것을 느끼며 카를은 남은 힘이 다한 듯, 최후까지 버티고 있던 여력이 모두 빠져나갔다. 숯덩이가 되다시피 하여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손. 그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카를은 그대로 하늘을 향해 힘없이 드러누우며 피를 토했다. 하늘을 수놓던 빛의 장막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가쁜 숨을 내쉬며 누워있는 그를 향해 한 쌍의 주황색 눈동자가 향하기 시작했다.
-
ㅡ마침내 푸른 월영이 타오르는 불꽃을 진정시켰으며,
그 푸름은 만방에 드리워졌도다.
‘쿠르르르릉...’
사냥꾼, 아니, 한 인간의 손이 그 몸에 닿자 연흑룡의 거대한 몸을 두른 지옥과도 같은 그 열은 품고 있던 에너지를 잃고 빠르게 식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 같던 열선 역시 지워졌다.
그 현상을 느끼자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불태우며 파괴하던 숙명의 싸움의 이름을 얻은 대지의 화신은 자신의 몸에 닿은 것이 무엇임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리고 발아래에 어떤 존재들이 있었음을 그것을 통해 인지한 듯 천천히 지평선을 향해있던 그 타오르던 두 눈과 함께 그 몸을 돌렸다.
‘쿠르릉...’
“후우... 후우... 푸훕...”
-쿵...
거대한 바위의 산이 움직이며 나는 것만 같은 그 소리와 함께 그 주홍빛 눈동자는 여태껏 열선에 가려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안 후, 여태껏 무감각하게 전진하던 때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겨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야... 봐주는 건가... 쿨럭...”
그렇게 눈이 향한 곳에는 그 거체에 비하면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하지만 그 작은 몸으로 자신에게 닿았던 작은 생물이 무어라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을 바라보고 하는 것만 같은 소리이자 처음으로 듣는 소리, 하지만 그란 밀라오스는 이내 그 뜻을 이해했다. 소리가 아닌, 그 생물의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파괴의 흔적들. 필히 그것은 지금 자신에게 어떤 소리를 낸 생물과 같은 이들이 살았던 곳이리라.
“이제라도, 쿨럭... 알았으면... 부디 돌아가 다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아래에 있던 생물이 힘없이 다시 내는 또 다른 소리.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전진만 하고 있던 대지의 황혼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그들만의 언어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생명이 대지에 넘실거리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오직 전진만 해왔던 탓에 일어나버린 너무나 거대한 실수. 그 실수가 계속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알리기 위한 생명이 있는 자의 생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어 알린 행동.
그 행동 덕분에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은 것이 파괴되고 나서야 깨달은 스스로를 책망하듯, 그란 밀라오스는 이제 그 여느 때보다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눈을 감았다.
‘쿠구구구구...’
ㅡ쿠오오오오오...!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하늘에 내지르는 포효는 지난 며칠 간 세상에 재앙을, 아니 전 세계에 격변을 불러올 때 내지른 포효와는 너무나 달랐다. 모든 것을 진정시키는 것만 같은 기나긴, 하지만 재앙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울부짖음. 그 포효를 길게 내지른 후 붉은 용암과도 기운이 사라진 그란 밀라오스는 천천히 그 몸을 본디 왔던 방향으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쿵...
‘쿠르르르릉...’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만 같이 해안에 상륙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르게, 오직 거체의 무게로 인해서만 나는 자연스러운 울림. 그 울림과 함께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대지의 황혼은 그렇게 세상을 뒤흔들던 재난을 거두어들이며, 갑작스러웠던 그 출현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갑작스레 하지만 그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형태로써 그 모습을 바다로 감추기 위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
ㅡ푸름은 업화를 삼키며
재앙은 월영에 잠기네.
한 때 탄지아 제 1항만이었던 폐허의 한 가운데.
-쿵...
‘툭...투툭...’
-비다...
카를은 그란 밀라오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서 내는 진동을 느끼며, 자신의 최후가 한없이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움직일 힘조차 완전히 빠진 지금, 하늘을 향해 누운 채로 이제 완전히 시각을 잃은 왼쪽 눈과, 서서히 시야가 흐려져 가는 오른쪽 눈으로 하늘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그 빗방울은 이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만 같았던 재난이 완전히 끝났음을 그에게 실감시켜주고 있었다.
“생명이 있는 자에게...라... 쿨럭...”
스스로의 신념이자 어린 아이의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너무나 간단하지만, 때문에 너무나 알기 어려웠던 해답. 그 해답을 알아내고,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어야 했는가. 그것에 생각이 닿자 그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깊은 슬픔을 느꼈다.
‘넌 살인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어, 빌어먹을 녀석!’
-그러고 보니, 너에게 그 말을 사과하지도 못하고 보냈구나...
깊은 슬픔 속에서 그는 해안에서 여동생에게 분노에 차서 외쳤던 폭언을 떠올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비록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 올 수 있는 실수지만, 살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제는 이름을 불러도 답을 하지 못하는 곳에 가버린 동생에게 퍼부어버렸다. 어쩌면, 그 폭언이 벨라에게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허무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녀의 정신에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해내셨군요.”
ㅡ이 목소리는...
그렇게 후회에 잠겨있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없던 곳에서 들려온 맑은 종이 내는 것과도 같은 목소리. 비록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카를이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하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드는 어린 목소리에 힘들게 뜬 오른 눈을 굴렸다.
“저로써는 그 아이에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그 어린 목소리의 주인이 어렴풋이 시력을 거의 잃은 눈에 들어왔지만, 그 모습은 힘들게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마치 모습이 달라지는 것만 같이 보였다. 한 번 눈을 감으면 긴 귀가 보이는, 갈색 피부에 흰 옷을 입은 듯한 소년의 모습이오, 두 번 눈을 감으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장발의 하얀 피부를 띈 소녀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유일하게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든 두 눈은 마치 루비처럼 붉은 빛을 띤다는 것이었다.
-하하, 설마... 그런 거였나...
붉은 눈을 띠고 있는, 너무나 맑아서 종이 울리는 것만 같은 목소리와 하얀 소년과 소녀의 모습의 교차.
“하, 하하아... 쿨럭...”
“말을 계속하시면 더 고통스러워요, 그대로 누워 계세요.”
그 모습에서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카를은 어이가 없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약하게 웃자마자 곧장 피가 분수처럼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하얀 드레스의 소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최후가 머지않은 지금, 그저 잠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 후우... 이런 걸 마지막에 겪게 되다니... 푸훕... 평생 신을 믿지도 않았는데...”
“그건 무슨...”
이 상황이 어이가 없지만, 그 무언가를 깨달은 것만 같은 말에 하얀 드레스의 소녀는 잠시 주춤했다. 그 모습을 어렴풋한 시선으로 보면서 카를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후, 후우... 부탁이 있는데... 쿨럭,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무슨 부탁이신가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듯, 존댓말을 하는 카를을 보며 당황하는 하얀 소녀였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바꾸고 그 말을 옆에서 조심스레 경청했다.
“아마 깨졌을 걸로 생각되지만... 혹여나 남아있다면... 쿨럭, 주머니에 있는 병을...”
“계속 그렇게 말하시면 더 빨리 힘이 빠져요! 조금이라도 힘을...”
순식간에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가는 카를을 보며 하얀 드레스의 소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점점 의식이 옅어져 가는 카를은 옅은 웃음을 그나마 불에 덜 일그러진 입가에 살짝 띄우며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쿨럭,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사냥꾼 씨, 사냥꾼 씨...?”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숨소리가 멎어 들어가며 카를은 흐릿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의식이 심연에 잠겨가며 그의 입에선 마지막 말이 흘러 나왔다.
“아이샤...”
마치 미련이 남아있는 것만 같은 그리움이 담겨있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 그것이 대지의 황혼을 모든 힘을 다하여 막아낸 사냥꾼, 카를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ㅡ나타나라, 태초의 존재여.
하얀 드레스의 소녀는 모든 것을 바치며 세상의 종말을 막아낸 사냥꾼의 곁에서 그 임종을 지킨 후, 조심스레 몸을 아래로 굽혔다. 고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몸에 마치 한 몸과도 같이 늘러 붙어있는 해룡의 소재를 엮어 만든 방어구. 그 사이로 마치 여전히 새것인 듯, 흠집조차 안 보이는 하얀 용을 조각한 목걸이를 보며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알아채셨군요...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셨으면서...”
그것을 어루만져 본 후에 채 감기지 못한 반대쪽 눈을 감겨준 하얀 소녀는 사냥꾼의 앞에서 이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당신이 목숨을, 모든 것을 바쳐 막아낸 오늘의 일은 모든 생명이 있는 자들은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툭, 투두둑...’
그 슬픈 목소리에 답하듯 빗방울이 조금씩 그 수가 늘어나면서 재난에 물든 상처를 씻으려는 듯, 대지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하얀 소녀가 서있는 곳과 숨을 거둔 카를의 몸 위로는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기이한 현상 속에서 소녀는 고요히 눈을 감으며 그를 위한 추도사를 읊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대지의 황혼에 전한 메시지를, 다른 이들은 모를지언정 저는 영원히 기억할 게요. 첫 번째 시련을 이겨냈던 당신의, 당신들의 조상들처럼...”
그 말을 하며 다시 천천히 뜨는 하얀 드레스의 소녀의 눈은 은은하게, 하지만 부드러운 루비 색을 띠며 빛을 발했다. 기이하다 못해 이제는 마치 신(神)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하얀 소녀는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숨을 거둔 카를의 이마를 짚으며 고요히,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의 바람대로 살아남은 이들은 희망을 가지고 재건을 할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ㅡ미래를 그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눈을 감으세요, 영웅이시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작은 산들바람과 대지의 모든 것을 감싸는 것만 같은 거대한,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부드럽게 날개를 펼친 용의 그림자가 탄지아 제 1항만에 드리웠다. 그리고 잠시 드리웠던 용의 그림자가 사라짐과 함께, 숨을 거둔 카를과 하얀 드레스의 소녀는 마치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 시각.
차츰 빗방울에 그 파괴의 흔적이 덮여가는 탄지아 제 1항만의 중심. 카를이 눈을 감은 곳 근처에는 그가 목숨 같이 여긴, 해룡의 소재를 엮어 만든 대검이 꽂혀있었고, 그 위에는 겨우 형상을 유지할 정도로 일그러진 투구와 하얀 용을 조각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화염으로 휘어지고 녹아서 손상된 그 날 앞에는 돌돌 말아둔 쪽지가 들어있는 새것과도 같은 병이 밀랍으로 밀봉되어있는 채로 바닥에 살짝 박혀 있었다.
먼 바다에서 밀려오던 화쇄류로 인해 회색빛에 잠겨있던 수평선이 점차 새벽녘의 빛으로 채워졌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영원히 세계에 남을 변화를 일으킨 대격변을 불러온 대지의 황혼은 그렇게 고요하게 막을 내렸다.
-
“후우... 여기도 참 오랜만이구나...”
“아이샤,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을 빨리 챙겨라, 얀바! 그래야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갈 수 있다, 얀바!”
“거기 둘이나 얼른 전에 못 가져갔다는 가면을 찾도록 해요, 전 좀 천천히 봐야 하니까...”
“알겠다, 챠! 카얀바, 얼른 와라, 챠!”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음에 몰아넣으며 전 세계를 영원히 바꿔버린 대지의 황혼이 그 막을 내린 지 4개월이 흘렀다.
한 때 모가 마을이 자리했던, 이제는 해일과 화산재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곳. 그 곳에 아이샤는 챠챠와 카얀바와 함께 재난이 시작되기 직전에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작년까지라면 결코 입지 않았을 두툼한, 무파의 털로 만든 코트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조금씩 느껴지는 추위와 흩날리는 눈에 그녀는 세상이 결코 이전 같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를 꼽자면 지열의 변동과 전 세계로 뻗어나간 화산재 때문에 전 세계의 평균 기온이 7도 이상 떨어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농사는 심각한 흉작이 되어 굶주리는 이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이었고, 탄지아와 록락 등 큰 피해를 입은 곳 외의 다른 지방의 사냥꾼 길드와 학술원에서는 그로 인한 몬스터들의 서식지 변동이 얼마나 크게 일어날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큰 변화는 다른 것에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이 집에 오는 것도...”
아이샤는 한 때 그녀와 카를이 함께 지내던 집이었던 곳에 들어오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재앙이 물러가자, 화산재 폭풍이 독가스와 함께 사라졌고 끓어오르던 바다 역시 빠르게 식었다. 바닷물 역시 빠르게 빠져나가서 그 재난 중에 사망한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우선시 된 것은, 연흑룡 방위 작전을 입안하고 참가했던 4인에 대한 수색이었다. 그리고 그 수색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가 결코 생각하기 싫었던 형태로, 거의 뼛조각만 남은 채로 벨라가 탄지아 제 1항만의 중앙에서 수습되었다. 뒤이어 연흑룡이 상륙했던 당시, 재앙의 바다로 칭해졌던 한때는 자갈들과 하얀 백사장이었던 해안에서 역시 아이샤가 알고 지내던 두 사냥꾼인 리엘과 저맘의 유해가 수습되었던 것이다.
“이 침대랑 카펫은 더 이상 못 쓰겠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 한때 쓰던 침대에 걸터앉아 쓰다듬으며 하는 그녀의 말에는 마치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만 같은 마음이 배여 들어 있었다.
연이어 세 사람의, 가까이했던 이들의 유해가 차례대로 수습되었다는 소식에 아이샤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카를의 유해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뒤이어 해일로 엉망이 된 제 3항만에서도 배의 갑판에 쓸려나가지 않은 곳에서 생존자들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의해 일말의 희망을 지닌 채로 실종자 목록을 갱신해둔 제 5항만에서 두 달간 매일 같이 나가서 현황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당연히 확인되었어야 할 카를의 생환 여부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최후의 희망을 꺼트린 것은 주인을 잃은 채 모여서 사람들의 유해와 유품을 찾아주던 동반자 아이루들이 발견해서 가져다준 물건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여태껏 사람들이 기이하다 여겼지만 단순한 사투의 끝에 부러져서 바닥에 박힌 걸로만 생각하여 조사하는 것을 미뤘던 묘비와도 같이 세워져 있던, 일그러지고 부서진 대검에서 발견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부스럭’
“설마 마지막까지 이걸...”
두터운 코트의 안 주머니에서 갈색 종이에 싸여있는 물건을 꺼낸 후 아이샤는 그 작은 꾸러미를 펼쳐본 후 말을 잊지 못했다. 분명 자신이 건네줬음이 분명한 하얀 용이 조각되어 있는 목걸이. 분명 그 줄은 열로 인해 손상되어 이리저리 꼬여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조각 자체는 전혀 손상이 가지 않은 채로 새것과 같은 상태인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ㅡ끝까지 풀지 않았구나...
처음 아이루가 냄새를 맡고 그것을 투구와 함께 가져왔을 때에는 차마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같이 건네받은 너무나 익숙한 형태의 해룡의 소재를 엮은 그 투구는 그녀 스스로가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려는 듯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려고 했던 탓이 클 것이었다.
‘달그락’
아이샤는 목걸이를 보면서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이내 품속에 넣어뒀던 작은 종이가 돌돌말린 채 들어가 있는 밀봉되어있는 병을 꺼냈다.
아이루들이 그녀를 그 목걸이를 발견한 대검 앞으로 직접 인도해주었다. 일그러진 대검의 날 아래에는 거의 손상되지 않은 작은 유리병이 있었다. 그걸 본 그녀는 절망이 희망을 삼키고 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휘감는 걸 느꼈다. 언제나 의뢰를 받아서 수렵에 나설 때 길드의 규정이라고 그녀가 항상 목 높여 말했음에도 결코 남길 말을 적고 가지 않았던 카를이었기에, 그 병을 발견하고 꺼냈을 때 설마 하는 마음으로 꺼냈었다.
그러나 그 병을 막고 있는 왁스에 찍혀있던, 아이샤의 눈에 너무나 익숙한 인장을 보자마자 그 설마 하던 마음조차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차마 열어볼 엄두조차 증발하여 지금껏 열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ㅡ이걸 쓸 정도였다면... 당신은 얼마나 큰 공포와 절망을 마주 했어야 했던 걸까요...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새로이 정착하기 위해 지어진 새 모가 마을에서 나와서 옛터에서 꺼내보기 위해 병의 인장을 다시 보자 그녀는 마음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다시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길드 아가씨인 그녀로썬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일말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대지의 화신. 그 대지의 화신을 마주하러 가기 직전 그 공포에 짓눌려 가며 편지를 썼을 카를을 상상하자 아이샤는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의 슬픔을 느꼈다.
“....”
그 짓눌릴 정도의 슬픔 속에서 발견한지 두 달 만에 아이샤는 조심스럽게 코르크 위에 발라져 있던 왁스를 걷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고이 들어가 있던, 돌돌 말린 채 실로 묶여져 있던 종이를 빼냈다.
그리고 말려있는 편지의 실을 풀고 열기 직전,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춰 섰다. 읽는 순간 지금도 피부로 느껴지고 있는 그의 부재가 영혼에도 깊게 각인 될 것이기에, 그 두려움이 말려있는 편지를 펼치려는 아이샤의 손을 잠시 멈추게 했다.
ㅡ눈을 돌려선 안 돼...
다시금 스스로가 현실에서 도피를 하려는 것처럼 멈춰선 스스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레 그녀가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의 마지막 말이 담겨있을 편지를 펼쳤다. 공포와 절망을 마주했던 카를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이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한 두려움을 향해 드디어 마주섰다.
-
“챠, 카얀바! 왜 내 가면을 뺏으려는 거냐, 챠!”
“그 가면은 벨라가 내게 줬던 거였다, 얀바!”
“그렇게 따지면 카얀바가 지금 쓰고 있는 가면도 카를이 내게 준 거 였다, 챠!”
옛 모가 마을 터.
그 휑한, 눈이 쌓여가고 있는 폐허 가운데에서 두 챠챠브는 옥신가신하며 한때 자신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사냥꾼 남매가 줬던 가면을 두고 평소처럼 옥신가신하고 있었다. 만약 남매가 있었다면 대번에 벨라가 둘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서로 좀 그만 싸우라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평상시의 다툼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이제 두 사냥꾼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간 것을 챠챠와 카얀바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두 챠챠브 나름대로 기억할 수 있을, 최고의 가면과 고대의 가면이라는 그들이 여정을 떠나기 위해 모았던 보물이 아닌 남매가 처음으로 줬던 가면을 두고 다투고 있던 것이었다.
“으윽, 그래도 도토리 가면은 양보할 수 없다, 얀바!”
“정말 싸우자는 거냐, 챠!”
결국 재가 덕지덕지 묻고 여기저기 상처가 있는 가면을 두고 정말 오랜만에 두 챠챠브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처음 마을에서 출발하여 졸지에 리오레우스가 사냥한 아프토노스에 끼인 최고의 가면을 쫓다가 머나먼 록락 대륙의 고도까지 와놓고도 좀처럼 배운 점이 없는 듯, 두 챠챠브의 다툼은 격해져갔다.
“이런, 이런. 꼬마들 또 싸우고 있었나요.”
“이건 싸우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카얀바가 뺏으려는 거다, 챠!”
“거짓말 하지 마라, 챠챠! 그건 원래 내 것이었다, 얀바!”
어느 새 그 소란 때문에 나온 건지 옛 집에 들어갔을 때보다 눈에 띄게 표정이 좋아진 아이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두 챠챠브의 다툼을 지켜봤다. 서로가 그 낡은 가면을 가지겠다고 방방 뛰며 싸우는 것을 보던 모가 길드 아가씨는 이내 슬쩍 손을 내밀어서 가면을 홱 치켜들었다.
“에잇, 너무 싸우면 안 되니 일단 이건 압수하도록 할게요.”
“아앗, 내 가면인데, 왜 뺐냐! 챠!”
“내 가면을 돌려 달라, 아이샤! 얀바!”
대지의 황혼이 닥쳐오기 전, 일상과도 같았던 두 챠챠브의 다툼을 오랜만에 중재하자 더 밝아진 아이샤는 가면을 가져왔던 꾸러미 안에 넣은 후 입을 열었다.
“꼬마들, 이제 더 있으면 핫드링크 없이는 꽤 추워져서 슬슬 돌아갈 건데 찾아야 하는 건 다 찾았죠?”
“다 부서지고 남은 것이 그거 하나뿐이었다, 챠...”
“카를과 벨라가 줬던 가면들 중에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그거 밖에 안 남아있었다, 얀바...”
순식간에 풀이 죽은 챠챠와 카얀바를 보며 아이샤는 쓴 웃음을 지은 후 몸을 숙여서 두 챠챠브의 등을 떠밀었다.
“자, 자. 풀 죽지 말고 얼른 모가로 돌아가자고요.”
“아이샤, 어째 여기에 올 때보다 밝아진 거 같은데 뭐 남은 게 많이 있던 거냐, 챠?”
옛 터에 왔을 때만해도 얼굴에 어둠이 가득 내리깔려 있던 아이샤를 기억하는지 어리둥절하며 묻는 챠챠의 말. 그 말에 아이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장난이 어려 있는 말로 답했다.
“그걸 말하면 재미없겠죠? 자자, 얼른 더 추워지기 전에 돌아가자고요.”
“으,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다, 얀바! 좀 알려 달라, 얀바!”
“레이디의 비밀이랍니다.”
싱긋 웃으며 말한 후, 옛 터에 올 때 타고 온 챠챠와 카얀바가 노를 저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정확히 한 사람만 더 탈수 있는 쪽배로 향하면서 아이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카를이 남겼던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내가 비록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세상에, 네 옆에 없더라도 그 절망과 두려움에 굴하지 말고 그 앞날에 희망이 있기를 바랄게.’
ㅡ그래요, 카를 씨. 당신은 늘 그런 사람이었죠...
항상 약속을 지키며 그 약속과 자신의 신념을, 그리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살아왔던 사냥꾼. 그 사냥꾼이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을 체감하고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늘 존재하던 그가 겪었을 공포에 대한 슬픔을 덜어주었다.
그는 결코 공포와 두려움에 파묻히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바치며 그의 신념과 그가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 그가 추구한 길은 옳았으며, 그것이 이루어진 끝에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녀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그가 남긴 마지막 구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ㅡ비록 당신은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 했지만, 당신의 마지막 바람대로 저는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보도록 할게요.
점차 어두워지는 옛 모가의 하늘 위로 구름 사이에 떠있는 달을 보며 아이샤는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한 후, 다시금 두 챠챠브의 등을 떠밀며 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편지를 담은 병을 가슴속에 품은 채로, 챠챠와 카얀바를 떠밀고 있는 아이샤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나발데우스의 뿔로 만들어진 반지는 은은하게 구름 사이에서 내리쬐고 있는 달의 빛을 받아 빛났다.
-
모가 만.
‘쏴아아...’
어느 덧 세월이 흐르며 대지의 황혼에 의해 쑥대밭이 된 폐허의 흔적이 서서히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해안. 한때 대해룡 나발데우스가 그 뿔로 인한 고통으로 넘나들었던 그 바다를 향해 거무스름하지만 그에 맞지 않게 불길한 푸른빛의 돌기를 지닌 거대한 해룡의 형체가 천천히 향하고 있었다.
‘푸드득, 푸드득!’
-꾸루룩..!
해수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지나가고 있는 검은 존재가 있는 줄 꿈에도 생각도 못한 채 하늘에는 다시금 갈매기와 매들이 날갯짓하고 있었다. 그 날개 소리를 가르며 근래에 유입된 야조 호로로호루루가 물고기를 낚기 위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수면 아래를 찍듯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단을 일으키고 말았다.
‘부글, 부글부글...’
-꾸루룩?
예리한 눈으로 다랑어를 순조롭게 낚은 직후, 수렴진화를 한 올뺴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시력을 지니고 있는 야조였기에 처음 눈에 들어온 그 격렬한 수면의 거품을 봤을 때 그곳을 벗어나면 참상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호로로호루루는 올빼미가 지닌 깊은 호기심마저 본떠서 진화한 종이었기에, 그것이 그 운 없는 야조의 운명을 가르고 말았다.
수면 아래에 헤엄치던 검은 형체는 일순간 모습을 감추며 호기심 많은 야조의 눈에서 벗어났다. 저때라도 날아올랐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만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꺾으며 고도를 수면 바로 위까지 낮춘 그 순간, 사건이 일어났다.
-그오오오옷...!
-꾸루룩..! 꾸룩...!
‘쏴아아아아...!’
깊은 곳까지 순식간에 잠수한 후, 수없이 많은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를 크게 벌리면서 검은 빛을 두른 라기아크루스는 그 입 안에 치명적인 전류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 직후 곧바로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며 호로로호루루를 향해 치솟아 올랐다. 대포보다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오른 그 습격에 의해 불운한 야조는 뒤늦게 깃털과 그 특유의 노란 인분을 흩날리며 도망치려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푸드득, 푸드득!’
-꾸루룩...! 꾸룩...!
모가의 만에서 그 어떤 포식자보다 노련하고, 단련되어있으며 치명적인 대해의 지배자의 이빨에 붙들리자 그 놀라움과 고통에 의해 호로로호루루는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인분을 흩뿌렸다. 혹여나 그 착란효과로 인하여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최후의 희망이었지만 그 행동이 의미 없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은 뒤이은 행동에 야조는 그 운이 다해버렸다.
‘우그적....! 꾸드득...!’
-꾹...!
인분으로 인해 착란이 오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 전격을 두른 그 이빨이 박힌 채로 엄청난 턱의 악력이 결코 어디 가지 않는 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처럼 정확히 두 번을 씹고 흔들자 야조는 단말마와 같은 소리를 내고 그대로 세상과 이별을 했다.
‘우적, 꾸드득...’
-쿠오오오오....
-끼익, 끼이이익...!
한쪽 뿔이 크게 부러진 채 온 몸에 흉터가 가득하던 거대한 라기아크루스는 만족스러운 듯 호로로호루루를 질겅질겅 씹어 먹으면서 낮은 소리를 바다 속에 울렸다. 진정한 대해의 지배자가 돌아왔다는 것을 선언한 것만 같은 그 낮은 소리에 근방에 있던 에피오스와 루드로스들은 몸을 떨면서 서둘러 그 왕이 있을 곳을 우회하여 돌아갔다.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야조의 머리까지 마저 씹어 삼킨 후 명해의 지배자는 다시 조용히 본래 갈 길을 가려는 듯 그 몸을 수면 아래로 숨기고 속도를 올렸다.
대해룡이 찾아오기 전 본디 대해의 왕이 지배하였던 모가 만의 해저유적. 그 길로 향하는 작은 해저수로를 향하여 갓 사냥하여 배를 불렸다고 해도 유달리 배가 크게 불러있는 명해의 왕이 향했다. 심연의 삭망이 점차 고도의 바다에 드리워졌다.